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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빈(1907) - 나무위키

박영빈(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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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개요(槪要) 2 . 생애(生涯) 3 . 여담(餘談) 4 . 참고문헌(參考文獻)

1. 개요(槪要) [편집(編輯)]

북한(北韓) 의 정치인(政治人). 소련공산당(蘇聯共産黨) 의 지시(指示)를 받고 북한(北韓)에 들어온 고려인(高麗人)으로 소군정(蘇軍政) 시기(時期)부터 북한(北韓) 정권(政權) 수립(樹立) 초기(初期)까지 소련파(蘇聯派) 의 주요(主要) 인물(人物) 중(中) 한명(名)이었다. 하지만 이후(以後)에는 김일성에게 충성하면서 소련파(蘇聯派)의 수장(首長)이었던 허가이 를 실각(失脚)시키는데 큰 공헌(貢獻)을 세웠고, 이후(以後) 별(別) 탈(頉) 없이 지내다가 소련(蘇聯) 으로 귀국(歸國)하였다.

2. 생애(生涯) [편집(編輯)]

1907년(年) 7월(月) 31일(日)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에서 중국(中國) 을 거쳐 넘어온 양반(兩班) 가문(家門)의 서자(庶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인민학교(人民學校) 교원(敎員)을 하였으나 교원(敎員) 월급(月給)이 너무 적어 고생(苦生)을 하게 되자 다시 이주(移住)하여 농민(農民)이 되었다. 조선(朝鮮)에 있을때 서자(庶子)로서 괄시당한 것, 그리고 교원(敎員)으로 고생(苦生)한 것 때문에 그는 아들 박영빈에게 한때 공부(工夫)를 금지(禁止)할 정도(程度)라서 박영빈은 14살이 되어서야 인민학교(人民學校)에 입학(入學)했다. 늦게 입학(入學)한 박영빈은 열심히(熱心히) 공부(工夫)하여 5년(年) 과정(過程)을 1년(年) 반(半)만에 최우등(最優等)으로 마쳤고 1924년(年)에 초중(初中)에 입학(入學), 1926년(年)에 졸업(卒業)했다. 그리고 소왕령(小王領)에 있는 러시아 사전(事前)에 있는 한인학부(韓人學部)에 입학(入學)하여 1929년(年)에 우등(優等)으로 졸업(卒業)했다.

사전(事前) 졸업(卒業) 이후(以後) 박영빈은 처음에 소련(蘇聯) 령(令) 북(北)사할린 으로 이주(移住)하여 교원생활(敎員生活)을 하였다가 열성적(熱誠的)인 교육활동(敎育活動)의 공(功)을 인정(認定)받아 1931년(年)에 레닌그라드 국립사범대학교(國立師範大學校) 진학(進學) 자격(資格)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 역사(歷史)-철학부(哲學部)에 진학(進學)하였다가 이후(以後) 수학(數學)-물리학부(物理學部)로 전과(轉科)하였다. 거기서도 성적(成績)이 좋아 학부당위원장(學部黨委員長), 대학(大學) 당위원회(黨委員會) 위원(委員)을 지냈고 청년회(靑年會) 사업(事業), 직맹(職盟) 사업(事業)을 조직지도(組織指導)하였다, 레닌그라드 사범대(師範大) 재직(在職) 중(中) 박영빈은 동양인민회관(東洋人民會館) 산하(傘下)의 고려인(高麗人) 향토협회(鄕土協會)를 방문(訪問)했으나 폐허(廢墟)나 다름없다는걸 알고 레닌그라드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에서 일하던 한명제(限命題)의 허락(許諾)을 받아 자신(自身)이 처음부터 이를 새로 조직(組織)했다.

1936년(年) 레닌그라드 사범대(師範大) 졸업(卒業) 이후(以後) 레닌그라드 사범대(師範大) 연구원(硏究院)에 배치(配置)되었다가 연해주(沿海州) 지역(地域)에 뛰어난 자질(資質)을 가진 교원(敎員)이 부족(不足)하다는 이유(理由)로 인민교육위원(人民敎育委員) 안드레이 부브노프의 지시(指示)에 따라 소왕령(小王領) 한인전문학교(韓人專門學校)의 수학교원(數學敎員)으로 파견(派遣)되었다. 하지만 그가 연해주(沿海州)에 배치(配置)된 직후(直後) 대숙청(大肅淸) 이 시작(始作)되면서 박영빈은 레닌그라드에서 신분(身分)을 숨기고 달아난 반동분자(反動分子)가 아닌가 의심(疑心)을 받아 취조(取調)를 받게 된다. 다행히(多幸히) 올긴구역(區域)에서 협동조합(協同組合) 위원장(委員長)을 맡고 있는 친형(親兄)의 보증(保證)으로 신분(身分)이 밝혀지면서 위기(危機)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1937년(年) 고려인(高麗人) 강제(强制) 이주(移住)에 휘말려 카자흐스탄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범전문학교(師範專門學校)에 배치(配置)되어 1940년(年)까지 교원(敎員)으로 일하게 되었다.

1941년(年)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移住)하였고 2년간(年間) 고중(高中) 수학교원(數學敎員)으로 일했다. 1942년(年), 교육부(敎育部)의 지시(指示)로 타슈켄트주의(注意) 빠빠린 조합(組合)으로 이주(移住), 그곳의 한인(韓人) 고중의 교무주임(敎務主任) 겸(兼) 수학교원(數學敎員)으로 일하다가 1943년(年)에는 교장(校長)으로 승진(昇進)했다.그러다가 1945년(年) 10월(月) 타슈켄트주(週) 군사동원부(軍事動員富)의 명령(命令)을 받고 북한(北韓)에 파견(派遣)되어 소군정(蘇軍丁)에 배치(配置), 북한(北韓)의 토지개혁(土地改革)을 지휘(指揮)하였다. 1946년(年)이 되자 고급지(高級誌)도 간부학교(幹部學校) 조직(組織)을 맡게 되었고 테렌티 시티코프 대장(大將)의 보좌관(補佐官)으로 미소(微笑)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에도 참가(參加)하였다. 이후(以後) 1949년(年)까지 내각(內閣) 간부학교(幹部學校)에서 일하다가 1950년(年) 말(末)에 중앙위원회(中央委員會) 조직부(組織部) 부부장(副部長)으로 승진(昇進)하여 당(黨)의 조직사업(組織事業)을 맡게 됐다. 또한 1950년(年) 12월(月) 11일(日), 교육성(敎育性) 부상(浮上) 남일 이 인민군(人民軍) 총참모장(總參謀長)으로 보임(補任)함에 따라 박영빈이 교육성(敎育性) 부상(負傷)에 임명(任命)되었다. 1951년(年) 허가이 김일성(金日成) 과 충돌(衝突)하였을때 박창옥 , 박정애 , 박금철 과 함께 그를 맹렬히(猛烈히) 비판(批判)하여 실각(失脚)시켰고 이 때문에 김일성을 모시는 4명(名)의 박가(朴哥)라는 뜻의 사박가, 즉(卽) 러시아어(語) 사(社)바카라는 별명(別名)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허가(許可)이가 실각(失脚)한 이후(以後) 그가 가지고 있던 조직지도부장(組織指導部長) 자리를 차지했으며 박헌영 과 남로당 숙청(肅淸)에도 매우 적극적(積極的)으로 관여(關與)하는 등(等) 김일성 권력(權力) 강화(强化)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7월(月)에 허가(許可)이가 의문스러운 자살(自殺)을 한 이후(以後) 1953년(年) 7월(月) 29일(日), 최고인민회의(最高人民會議) 상임위원회(常任委員會) 정령(精靈)에 따라 '미영제국주의(美英帝國主義) 무력침범자(武力侵犯者)들을 반대(反對)하여 자유(自由)와 독립(獨立)을 수호(守護)한 조선인민(朝鮮人民)의 정의(正義)의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의 승리(勝利)를 보장(保障)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獻身性)과 창발적(創發的) 활동(活動)으로써 특출(特出)한 공훈(功勳)을 세운 국가정권기관(國家政權機關) 및 당(黨) 지도(指導)일꾼"으로 선정(選定)되어 국기훈장(國旗勳章) 제(第)1급(級)을 받았다. 1953년(年) 8월(月), 조선로동당 2기(期) 6중전회(中全會)가 개최(開催)되었다. 박영빈은 새로 설치(設置)된 상무위원회(常務委員會) 위원(委員)으로 선출(選出)되었다. 그리고 1953년(年) 12월(月) 전원회의(全員會議)에서 박금철과 함께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충원(充員)되었다. 1954년(年) 11월(月) 전원회의(全員會議)에서 박금철에게 조직지도부장(組織指導部長)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이후(以後) 선전선동부장(宣傳煽動部長)에 임명(任命)되었다.

하지만 잘 나가던 소련파(蘇聯派)는 1954~1955년(年) 대기근(大飢饉) 이후(以後) 김일성의 관계(關係)가 악화(惡化)되면서 대대적(大大的)인 비판(批判)의 대상(對象)이 된다. 박영빈은 박창옥과 함께 김일성의 개인숭배(個人崇拜)가 지나치다고 비판(批判)했으며 김일성(金日成)이 자신(自身)의 최측근(最側近) 최용건을 수상(首相)으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提案)했을때 이를 반대(反對)했다. 이에 김일성은 1955년(年) 11월(月) 전원회의(全員會議)에서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平和共存論)을 언급(言及)한 박영빈을 조국(祖國)의 분열(分裂)을 정당화(正當化)하고 영구화(永久化)하려는 대단히 위험(危險)한 생각을 가졌다고 비판(批判)했다. 이후(以後) 1955년(年) 12월(月) 전원회의(全員會議)에서 박영빈은 흐루쇼프의 평화공존정책(平和共存政策)을 옹호(擁護)하였다는 이유(理由)로 김일성의 혹독(酷毒)한 비판(批判)을 받고 해임(解任)되어 리일경(리日頃) 에게 선전선동부장(宣傳煽動部長) 자리를 내주었다.

1956년(年) 1월(月) 상무위원회(常務委員會) 확대회의(擴大會議)에서 박영빈은 박창옥 등(等)과 함께 문예사업(文藝事業)을 잘못했다고 매우 혹독(酷毒)하게 비판(批判)을 받고 기석복 과 함께 당중앙위원회(黨中央委員會) 위원(委員)에서 제명(除名)되어 상업성(商業性)의 대내외(對內外) 부상(負傷)으로 좌천(左遷)되었다. 박영빈은 이에 대(對)해서 자신(自身)이 최용건 수상(受賞) 임명(任命)에 대(對)해서 반대(反對)했기 때문으로 추정(推定)했다. 어쨌거나 건강(健康)이 심각(深刻)하게 나빴던 그는 종파주의자(宗派主義者) 혐의(嫌疑)를 제외(除外)한 자신(自身)의 잘못을 열거(列擧)한 목록(目錄)을 가져와서 매우 혹독(酷毒)하게 자신(自身)을 자아비판(自我批判)했는데 김일성은 이에 대(對)해서 크게 흡족(洽足)해하면서 그가 자아비판(自我批判)을 잘했다고 칭찬(稱讚)했다. 이후(以後) 4월(月)에 열린 3차(次) 당대회(黨大會)에서도 중앙위원회(中央委員會)에서 탈락하는 등(等) 확실(確實)하게 몰락(沒落)하고 만다. 하지만 김일성은 소련파(蘇聯派) 비판(批判)이 너무 지나치다고 연안계(沿岸界)를 토사구팽(兎死狗烹)하여 숙청(肅淸)하였고 박영빈을 위로(慰勞)했는데 이 때문인지 박영빈은 반(半) 김일성 움직임에 가담(加擔)하지 않았다.

1956년(年) 8월(月) 종파사건(宗派事件) 에서 옛 동지(同志)들 상당수(相當數)가 참가(參加)했다가 숙청(肅淸)됐지만 박영빈은 가담(加擔)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無事)할 수 있었고 1958년(年) 11월(月)에 무역성(貿易省) 부상(負傷)에 임명(任命)되어 묵묵히(默默히) 일을 했다. 1958년(年) 3월(月) 김일성은 '당(黨) 사업(事業)을 개선(改善)할 데 대(對)하여' 라는 연설(演說)을 통해서 박영빈이 조직지도부장(組織指導部長) 직함(職銜)을 가지고 사업(事業)하면서 사람들을 방조(幇助)하지 않고 무슨 양복(洋服) 몇벌 맞췄는지까지 엄히(嚴히) 조사(調査)해서 조지다보니 군중(群衆)과 당(黨)을 분리(分離)시켰다고 비판(批判)했다. 다만 박영빈은 반동(反動) 취급(取扱)은 아니라서 그래도 박영빈 동무라고 연설(演說)에서 나름 좋게 표현(表現)했다. 그러다가 1960년(年)에 이르러 위장병(胃臟病)이 크게 악화(惡化)되면서 북한(北韓) 생활(生活)을 포기(抛棄)하게 되고 귀국(歸國) 청원(請願)을 제출(提出)하게 된다. 소련(蘇聯)과 북한(北韓)이 모두 이를 비준(批准)하면서 박영빈은 1961년(年) 3월(月) 모스크바를 거쳐 친척(親戚)들이 사는 타슈켄트로 돌아갔다. 이후(以後) 6개월(個月) 정도(程度) 요양(療養)을 한 이후(以後) 상업성(商業性) 산하(傘下) 타슈켄트시(視) 식료품(食料品) 관리국(管理局) 식료품(食料品) 관리기업(管理企業)소 책임자(責任者)로 배치(配置)되었다. 1965년(年)까지 일한 후(後) 은퇴(隱退)하여 연금(年金)을 받으며 생활(生活)했다.

북한(北韓)에선 김일성에게 개긴 적이 없는 박영빈은 이쁘게 봐주었는지 1990년(年) 2월(月), 북한(北韓) 대사관(大使館) 1등(等) 서기관(書記官)을 파견(派遣)하여 그를 위문(慰問)한 후(後) 평양(平壤)으로 초청(招請)하였다. 무려(無慮) 30년(年) 만에 북한(北韓)을 방문(訪問)한 박영빈은 청진(淸津)에서 김일성과 재회(再會)했고 김일성은 나는 너희들이 소련(蘇聯)에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후(以後) 북한(北韓)에서 1개월(個月) 간(間) 요양(療養)을 한후 귀국(歸國)했는데, 이후(以後)로도 자주 북한(北韓)의 초청(招請)을 받았으나 김일성이 죽은 이후(以後) 1997년(年)부터는 북한(北韓)에서 잘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以後) 1996년(年)에 아내 박마리야를 잃고 손자(孫子)들을 돌보다가 1998년(年) 5월(月) 17일(日)에 사망(死亡)하였다.

3. 여담(餘談) [편집(編輯)]

그가 주목(注目)을 못받아서 그렇지 북한(北韓)을 떠난 고위(高位) 인물(人物)들 중(中)에서 황장엽 을 뛰어넘고도 남는 역대(歷代) 최고위급(最高位級) 인사(人士)다. 최고(最高) 지도기관(指導機關)인 정치위원회(政治委員會) 위원(委員) [1] 에 조직부장(組織部長) [2] , 선전선동부장(宣傳煽動部長) 등(等) 여러 주요(主要) 요직(要職)을 역임(歷任)했던 역대(歷代) 정치국(政治局) 위원(委員)들 중(中)에서 북한(北韓) 바깥에서 생(生)을 마친 인물(人物)은 지금(只今)까지도 박영빈 외(外)에 아무도 없다. 다른 고위(高位) 인물(人物)들과 달리 말년(末年)에 김일성과 화해(和解)해서 북한(北韓)도 자주 오가고 하는 바람에 남한(南韓) 학자(學者)나 언론인(言論人)들과 별로(別로) 접촉(接觸)을 못한 것이 그에 대(對)해서 알려지지 못한 원인(原因) 중(中) 하나일듯. 한국(韓國)과 러시아의 많은 언론인(言論人)과 학자(學者)들이 박영빈과의 인터뷰를 요청(要請)했으나 일절(一切) 거절(拒絶)하였으며, 다만 1953년(年) 남로당 숙청(肅淸)에 대(對)해선 그들은 죄(罪)가 있어서 숙청(肅淸)되었다고 짤막한 코멘트를 남겼다.

4. 참고문헌(參考文獻) [편집(編輯)]

  • 김규범 (2019). 1956년(年) “8월전원회의(月全員會議) 사건(事件)” 재론(再論) : 김일성의 인사정책(人事政策)과 ‘이이제이(以夷制夷)’식(式) 용인술(用人術). 현대북한연구(北韓硏究), 22(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北朝鮮社會主義體制成立社)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圖書出版先人), 2005).
  • 장학봉 외(外), 북조선(北朝鮮)을 만든 고려인(高麗人) 이야기(서울: 경인문화사(京仁文化史), 2006).
  • 조수룡 (2019). 북한(北韓) 역사상(歷史上) 제(第)1대(代) 사건(事件), 1956년(年) 8월전원회의(月全員會議). 내일(來日)을 여는 역사(歷史), 74.
[1] 현재(現在)는 정치국(政治局) 위원(委員) [2] 현재(現在)는 조직지도부장(組織指導部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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