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한便) 아나톨은 축구(蹴球)에도 관심(關心)을 가졌는데 그는 내내 수비수(守備手)로 활약(活躍)을 했다. 첫 데뷔는 1920년(年)에 고향(故鄕)팀 이룬에 있는 레알 우니온에서 이뤄졌다. 이 당시(當時)에는 공부(工夫)와 운동(運動)을 병행(竝行)했고, 축구(蹴球) 외(外)에도 육상(陸上) 선수(選手)로서 활약(活躍)하기도 했다. 1923년(年)에 잠시(暫時) 레알 소시에다드 힘나스티카에서 활약(活躍)한 아나톨은 다시 돌아와서 1924년(年)의
코파 델 레이
우승(優勝)을 이끌기도 했다.
1925-26시즌 무렵, 아나톨은
빌바오
로 건너가서 공학(工學)을 계속(繼續) 공부(工夫)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레알 우(于)니온에서는 그의 대체자(代替者)를 찾지 못해 이적(移籍)을 허락(許諾)지 않았고 결국(結局) 10월(月)까지 클럽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1926년(年). 결국(結局) 아나톨은
아틀레틱 빌바오
로 이적(移籍)하는데 성공(成功)하였고 이곳에서 두 시즌을 보냈다.
1928년(年), 그는
병역(兵役)
을 해결(解決)하기 위해
프랑스
에 갔고
[2]
, 라싱 드 파리와 프랑스 육군(陸軍) 축구팀에서 뛰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프랑스 대표(代表)팀
에까지 승선(乘船)하였다. 1929-30시즌에는 프랑스에서의 병역(兵役)이 끝나면
스페인
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측(豫測)했다.
빌바오
,
레알 마드리드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레알 오비에도 등(等)과 링크가 떴지만 아나톨은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공학도(工學徒)로서의 경력(經歷)을 끝내기 위해 1932년(年) 결국(結局)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레알 바야돌리드
와 계약(契約) 직전(直前)까지 갔지만 최후(最後)의 선택(選擇)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였다. 공부(工夫)와 가족(家族)의 생활(生活)에 따른 결정(決定)이었다. 하지만 아나톨은 공학(工學) 일 때문에 바빠서인지 시즌 동안 단(單) 7경기(競技) 밖에 출전(出戰)하지 못했고 결국(結局)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몽펠리에 HSC
와 라싱 드 파리에서 한 시즌 씩을 보낸 후(後) 32살의 나이에 선수(選手) 생활(生活)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