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에서 쫓겨난 아이아코카는 당시(當時)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
의 회장(會長) 존 리카르도(John Riccardo)를 통해 크라이슬러로 스카웃되어 폐업(廢業) 위기(危機)의 회사(會社)를 재건(再建)하기 위한 시도(試圖)를 시작(始作)했다.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를 재건(再建)하기 위해 먼저 35명(名)에 달(達)하는 부사장급(副社長級) 임원(任員) 중(中) 33명(名)을 경질(更迭)하고, 그가 일했던
포드
출신(出身)을 포함(包含)해 새로운 임원진(任員陣)을 구성(構成)하였다. 더불어 노동조합(勞動組合)을 이사회(理事會)의 구성원(構成員)으로 받아들여 의사결정(意思決定)의 주체(主體) 중(中) 하나로 참여시키고 "1달러 연봉(年俸) 선언(宣言)"
[6]
을 하는 등(等)으로 크라이슬러의
노동조합(勞動組合)
을 설득(說得)하여 2번(番)이나 임금(賃金) 삭감(削減)과 동결(凍結)을 이끌어 냈으며 1980년(年) 한 해만 1만(萬) 5천(千) 명(名)의 정규직원(正規職員)을
해고(解雇)
한 뒤 유럽, 호주(濠洲), 남아프리카(南아메리카) 지사(知事)도 매각(賣却)하고 각종(各種) 공장(工場)을 폐쇄(閉鎖)하는
구조조정(構造調整)
을 단행(斷行)하여 5억(億) 달러에 달(達)하는 비용(費用) 절감(節減)을 이루었다. 그리고
워싱턴 D.C.
에 가서 상원(上院), 하원(下院) 청문회(聽聞會)에 불려 다니며 노력(努力)한 결과(結果), 연방(聯邦) 정부(政府)로부터 15억(億) 달러 규모(規模)의 융자금(融資金) 보증(保證)을 얻어 냈다.
#
그렇게 융자(融資) 보증(保證)을 받아낸 아이아코카는
가스터빈
엔진
[7]
을 비롯한 비현실적(非現實的)인 계획(計劃)들을 중단(中斷)시켰고, 급(急)한 자금(資金)을 확보(確保)하기 위해 유럽 지사(支社)인
생(生)카
와
루츠 그룹
이 공동개발(共同開發)한
소형차(小型車)
를 활용(活用)해 당시(當時) 첨단기술(尖端技術)로 떠오르던 가로배치(配置) 전륜구동(前輪驅動) 소형차(小型車) 기술(技術)을 가지고 새 차(車)를 개발(開發)했으며,
포드
에서 구상(構想)했다가 받아들여지지 못한
미니밴
라인업
이나 가로배치(配置) 전륜구동(前輪驅動) 플랫폼인
크라이슬러 K 플랫폼
을 개발(開發)했다. K 플랫폼의 참고(參考)모델이 된 소형차(小型車)인
생(生)카 호라이즌
역시(亦是) 아이아코카가 취임(就任)한 해에
플리머스
와
닷지
의 소형차(小型車)로 출시(出市)하고 융자금(融資金) 보증(保證)이 필요(必要)한 이유(理由) 중(中) 하나로도 제시(提示)했다.
1980년(年) 말에는 중형차(中型車) 라인으로서 크라이슬러 K 플랫폼으로 만든 첫 신차인(新車人)
플리머스 릴라이언트와 닷지 아리스
를 출시(出市)했으며 1982년(年)에는 K 플랫폼 기반(基盤)의 컨버터블 라인업과 레 바론의 세대교체(世代交替) 모델, 1983년(年) 말에는 같은 플랫폼을 토대(土臺)로 만든 미니밴 라인인
플리머스 보이저
,
닷지 캐러밴
도 출시(出市)해 수익(收益)을 거두었다. 특히(特히) 1980년대(年代) 초(初) 미국(美國)에서는 불황기(不況期)가 시작(始作)되어 소형차(小型車)의 수요(需要)가 높아졌고, 아리스/릴라이언트는 가로배치(配置) 전륜구동(前輪驅動)의 이점(利點)을 살린 넓은 실내공간(室內空間)과 1열(列) 벤치시트 사양(斜陽)으로 거둔 6인승(人乘) 레이아웃 때문에 중형차(中型車)였다 뿐이지 시장(市場)에서 전임(前任) 모델인 닷지 아스펜/플리머스 볼레어(語)를 따라 준중형차(準中型車)로 분류(分類)할 정도(程度)로 상당히(相當히) 작고 연비(聯臂)가 좋아 잘 팔렸다. 미니밴 역시(亦是) K 플랫폼에 기반(基盤)한 덕분(德分)에 작으면서도 공간(空間)을 다양하게 사용(使用)할 수 있는 범용성(汎用性)을 갖춰 당시(當時)의 대형(大型) 밴과 스테이션 왜건 사이의 틈새 수요(需要)를 잡아내는 데 성공(成功), 새로운 세그먼트와 시장(市場)을 개척(開拓)하며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꾸준한 돈줄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반면(反面) 아이아코카 휘하(麾下)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은 실패(失敗)도 거뒀는데, 회사(會社)의 기함(旗艦)이자 기함급(旗艦級) 브랜드로 1981년(年)에 부활(復活)시킨
임페리얼
이 실패사례(失敗事例)였다. 1981년형(年型) 임페리얼은
크라이슬러 코르도바
를 토대(土臺)로 완전(完全) 전자식(電子式) 연료분사장치(燃料噴射裝置)나 완전(完全) 디지털 대시보드같은 당대(當代) 신기술(新技術)들을 대거(大擧) 적용(適用)한
퍼스널 럭셔리 카
였는데,
프랭크 시나트라
에게 첫 차(車)를 주고 콜라보레이션 특별판(特別板)까지 출시(出市)하는 등(等)의 시도(試圖)로 흥행(興行)을 끌어 보려고 했으나 품질(品質) 문제(問題)로 얼마 안 가 단종되었다. 닷지 아리스의 고급형(高級型) 파생차(派生次)인
닷지 400
과 레 바론보다 윗급(級)의 중형차(中型車)였던
크라이슬러 E클래스
도 실적(實績)이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아이아코카 휘하(麾下)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은 상업적(商業的)인 흥행(興行)을 이어나갔는데, 신차(新車) 라인업마다 모두 적용(適用)시킨 크라이슬러 K 플랫폼 자체(自體)가 수익성(收益性)이 높은 구성(構成)인데다가 시대(時代)에 맞는 제품군(製品群)을 만들면서도 새로운 세그먼트도(度) 같이 개척(開拓)하는 것과 더불어 마케팅에도 심혈(心血)을 기울인 것이 유효(有效)했다. 특히(特히) 아이아코카 본인(本人)이 토크쇼, 광고(廣告), 발표회(發表會)같은 각종(各種) 미디어에 자주 참여(參與)해 자사(自社) 제품(製品)과 개발과정(開發過程)을 소개(紹介)하는 캠페인 등(等)을 통해 대중(大衆)과 소통(疏通)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미국(美國) 국민(國民)들의 신뢰(信賴)를 얻었고
[10]
회사(會社) 직원(職員)들에게 자부심(自負心)을 안기기 위해 상품성(商品性)을 강조(强調)하는 "자부심(自負心)이 돌아왔다(Pride is Back)", "더 나은 차(茶)를 찾았다면 그걸 사라"같은 공격적(攻擊的)인 모토를 활용(活用)한 캠페인도 주도(主導)했다.
[11]
이런 노력(努力) 끝에
1982년(年)
여름, 크라이슬러의 회장(會長)으로 된 지 만(滿) 7년(年)이 되기 전(前)에 아이아코카는 고질적(痼疾的)인 부채(負債) 15억(億) 달러를 일시(一時)에 갚고 7억(億) 달러의 순이익(純利益)을 남기는
신화(神話)
를 이루어냈다. 5% 삭감(削減)했던
노동자(勞動者)
연봉(年俸)도 원래(元來) 수준(水準)으로 올려 놓았고 해임(解任)했던 직원(職員)들의 상당수(相當數)도 다시 불러들였다. 이렇게 회사(會社)가 커지다보니 아이아코카는
밥 루츠
를 포함(包含)해
포드
에서 일했던 회사(會社) 동료(同僚)들을 크라이슬러로 데려왔으며, 크라이슬러 K 플랫폼을 대거(大擧) 활용(活用)해 다양한 세그먼트를 아우르는 수많은 신차(新車)들을 개발(開發)하게 하는 건 물론(勿論) 평소(平素) 관심(關心)을 두어 왔던
AMC
/
지프
,
람보르기니
등(等)을 1987년(年)에 인수(引受)했다. 그렇게 인수(引受)한 지프를 통해 크라이슬러의 돈줄로 삼은 건 물론(勿論),
지프 랭글러
나
체로키
,
그랜드 체로키
등(等)의 히트작(作)들을 개발(開發)해냈던
AMC
내(內)의 인재(人材)들을 자사(自社)의 차량(車輛) 개발(開發) 프로젝트에 투입(投入)하고 창의적(創意的)인 제품개발(製品開發) 과정(過程)을 도입(導入)하기까지 했다.
[12]
[13]
그런데 이 과정(過程)에서 무리(無理)한
인수합병(引受合倂)
으로 회사(會社)가 다시 재정난(財政難)에 처(處)한 건 물론(勿論) 회사(會社) 라인업의 정리(整理)가 시급(時急)해졌고,
람보르기니
의 운영(運營)
[14]
이나
마세라티
와 합작(合作) 개발(開發)한
크라이슬러 TC 바이 마세라티
,
새턴
의 대항마(對抗馬)로 기획(企劃)한
리버티
(Liberty) 브랜드와
이글
브랜드
[15]
같은 무리수(無理數)들이 실패(失敗)한 건 물론(勿論) 아이아코카가 K-바디 플랫폼의 활용(活用)과 보수적(保守的)인 디자인을 고집(固執)하는 점(點),
[16]
[17]
공장별(工場別) 생산대수(生産臺數) 유지(維持)와 매출(賣出) 극대화(極大化)를 위한 적극적(積極的)인 뱃지 엔지니어링,
[18]
주가(株價)에 대(對)한 집착(執着)도 걸림돌이 되기 시작(始作)했다. 게다가 "1달러 연봉(年俸) 선언(宣言)"의 진정성(眞情性)까지 논란(論難)에 휘말림에 따라, 아이아코카는 1992년(年) 말(末) 후계자(後繼者)로
로버트 이튼
(Robert Eaton)을 지명(指名)하고 회장(會長) 자리에서 사임(辭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