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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아이아코카 - 나무위키

리 아이아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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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아이아코카
Lee Iacocca
005-jon-bernthal...
본명(本名)
리(理)도 앤서니 아이아코카
Lido Anthony Iacocca
출생(出生)
사망(死亡)
2019년(年) 7월(月) 2일(日) (향년(享年) 94세(歲))
국적(國籍)
학력(學歷)
리하이 대학교(大學校) (산업공학(産業工學) / 학사(學事))
프린스턴 대학교(大學校) (기계공학(機械工學) / 석사(碩士))
직업(職業)
기업인(企業人) , 전(前) 크라이슬러 의장(議長), 전(前) 포드 부사장(副社長)

1 . 개요(槪要) 2 . 생애(生涯) 및 상세(詳細)
2.1 . 생애(生涯)
2.1.1 . 포드 에서의 활동(活動) 2.1.2 . 크라이슬러 에서의 활동(活動) 2.1.3 . 그 이후(以後)
3 . 여담(餘談)

1. 개요(槪要)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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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do Anthony "Lee" Iacocca
1924년(年) 10월(月) 15일(日)~2019년(年) 7월(月) 2일(日)

리(理)도 앤소니 아이아코카, 줄여서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는 미국(美國) 의 전(前) 기업가(企業家) 다.

2. 생애(生涯) 및 상세(詳細)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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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생애(生涯) [편집(編輯)]

미국(美國) 펜실베이니아 주의(注意) 철강(鐵鋼) 제조업(製造業) 중심(中心) 도시(都市)인 앨런타운(Allentown) 시(市)에서 이탈리아 출신(出身)의 이민자(移民者) 부부(夫婦)인 니콜라 아이아코카(Nicola Iacocca)와 안토니에타 페로타(打)(Antonietta Perrotta)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인 "리(理)도"는 아이아코카 부부(夫婦)가 베니스 의 리(理)도 디 베네치아(Lido di Venezia)로 신혼(新婚) 여행(旅行)을 가 있을때 임신(妊娠) 중(中)이었기에 붙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리 아이아코카는 자서전(自敍傳)을 통해 부친(父親)인 니콜라가 결혼(結婚) 전(前)에 리(理)도 디 베네치아를 여행(旅行)했다는 것을 근거(根據)로 "로맨틱하지만 사실(事實)이 아니다"라고 해명(解明)한 바 있다. [2]

당시(當時) 아버지 니콜라는 미국(美國)에서 핫도그를 판매(販賣)하는 요식업(料食業) [3] 을 하다가 렌터카 사업(事業)을 시작(始作)했으며, 니콜라로부터 그 누구에게라도 빚을 지지 말고 꼭 갚으라는 당부(當付)를 받았다. 자동차(自動車)에 대(對)한 관심(關心)은 아버지의 친구(親舊) 찰리 찰스(Charley Charles)의 아들로서 포드 딜러에서 일하다가 독립(獨立)해 자신(自身)의 딜러를 운영(運營)하고 있었던 에드워드 찰스 를 통해 시작(始作)되었다. #

앨런타운 고등학교(高等學校) [4] 를 1942년(年)에 졸업(卒業)해 베들레헴(Bethlehem) 시(市)의 리하이 대학교(大學校) (Lehigh University)의 산업기술과(産業技術科)를 다녔고, 기술자(技術者) 커뮤니티인 타우 베타 파이(Tau Beta Pi) 명예협회(名譽協會)와 세타 카이 사교(社交)클럽(Theta Chi Fraternity)의 회원(會員)으로 활동(活動)했다. 대학교(大學校) 졸업(卒業) 후(後)에는 월(月)래스 메모리얼 펠로우쉽(Wallace Memorial Fellowship) 상(賞)을 수여(授與)받은 뒤 프린스턴 대학교(大學校) 로 가서 정치학과(政治學科) 플라스틱 공학(工學)을 전공(專攻)했다. 또한 이때부터 포드 의 기술자(技術者)로서 활동(活動)을 시작(始作)하기도 했다.

2.1.1. 포드 에서의 활동(活動) [편집(編輯)]

리 아이아코카는 1946년(年) 8월(月)부터 포드 에서 근무(勤務)하기 시작(始作)했으며, 기술자(技術者)로 활동(活動)하기 시작(始作)한 지 얼마 안되어 판매(販賣) 및 마케팅사업부(事業部)로 옮길 것을 제안받았다. 그는 이 때부터 필라델피아 에서 보조(補助) 판매부장(販賣部長)(assistant sales manager)으로 활동(活動)을 시작(始作)했고, 1956년식(年式) 차량(車輛)을 출시(出市)할 때는 "56 for 56"이라는 이름 하(下)에 1956년식(年式) 포드 차(車)를 20% 할인가(割引價)에 판매(販賣)하고 3년간(年間) 매달(每달) 56달러씩 할부(割賦) 구입(購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마케팅을 펼쳐 이름을 널리 알린 적 있었다. 덕분(德分)에 이 캠페인은 전국(全國)으로 퍼져 나갔으며, 포드 본사(本社)가 있는 디어본으로 옮겨가 성적(成跡)을 꾸준히 올려 왔다. 이러한 경력(經歷) 덕분(德分)에 리도(里圖)는 1960년(年) 11월(月) 10일(日)에 포드 디비전의 부회장(副會長) 겸(兼) 총지배인(總支配人)(general manager)으로 승진(昇進)했고, 더 나아가 1965년(年)에는 포드 부회장(副會長), 1967년(年)에는 승용차(乘用車) 및 트럭 부서(部署) 부회장(副會長), 1970년(年) 12월(月) 10일(日)에는 회사(會社) 부회장(副會長)까지 올라갔다.

그는 자동차(自動車)가 이동수단(移動手段)에서 개개인(個個人)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反映)하는 기호품(嗜好品)으로 성장(成長)하던 미국(美國)의 전성기(全盛期)를 타고 포드 에서 포드 머스탱 , 링컨 컨티넨탈 마크 III , 포드 에스코트 등(等)의 명차(名車)들을 개발(開發)해 왔고, 1960년대(年代) 말(末)에 머큐리 쿠거 마퀴스 (Marquis)를 출시(出市)해 그룹 내(內)의 매스티지 브랜드였던 머큐리 를 회생시키는 데 기여(寄與)했다. 이 시기(時期)에 관여(關與)한 신차(新車) 중(中)에는 중장기적(中長期的)으로 불명예(不名譽)를 안긴 실패작(失敗作)도 있었는데, 일본차(日本車) 및 유럽차(車)에 대응(對應)하기 위한 내수시장용(內需市場龍) 완전(完全) 신형(新型) 소형차(小型車)인 포드 핀토(土) 를 개발(開發)하게 했다. 출시(出市)가 2천(千) 달러 이하(以下)에 총중량(總重量) 2,000파운드(약(藥) 0.9톤)을 목표(目標)로 잡은 이 소형차(小型車)는 포드 측(側)에서 내수용(內需用)으로 직접(直接) 완전(完全) 신차(新車)로 만들고 싶어했기에, 유럽에서 팔던 에스코트 대신(代身) 핀토(土)를 개발(開發)했다. 그렇게 등장(登場)한 핀토(土)는 그럭저럭 잘 나갔지만, 비용절감(費用節減)을 시도(試圖)할 때 사고(事故) 시(市)의 보상금(補償金)까지 계산(計算)해가면서 연료(燃料)탱크 보호(保護) 장치(裝置)를 빼 버리는 등(等)으로 안전(安全)을 희생(犧牲)하는 바람에, 결국(結局) 1970년대(年代) 말(末)에 인기(人氣)를 크게 잃어버린 데다가 거액(巨額)의 보상(補償)을 안기고 포드 에 대(對)한 평판(評判)을 흐리면서 아이아코카가 포드 에서 쫓겨나는 계기(契機) 중(中) 하나가 되었다. 또한 혼다 소형차(小型車)의 엔진을 들여와 소형차(小型車)를 만들자는 제안(提案) [5] 을 하는 등(等), 포드 측(側)에서 반기(反旗)질 않아했던 아이디어들도 구상(構想)하며 당시(當時) 회장(會長)인 헨리 포드 2세(歲) 와 갈등(葛藤)을 계속(繼續) 빚다가 회사(會社)에 수많은 이익(利益)을 남겨 주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1978년(年) 7월(月) 13일(日)에 포드 에서 해고(解雇)되었다.
리 아이아코카의 청문회(聽聞會) 현장(現場)을 녹화(錄畫)한 ABC의 1979년(年) 10월(月) 19일(日) 보도(報道)
포드 에서 쫓겨난 아이아코카는 당시(當時)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 의 회장(會長) 존 리카르도(John Riccardo)를 통해 크라이슬러로 스카웃되어 폐업(廢業) 위기(危機)의 회사(會社)를 재건(再建)하기 위한 시도(試圖)를 시작(始作)했다.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를 재건(再建)하기 위해 먼저 35명(名)에 달(達)하는 부사장급(副社長級) 임원(任員) 중(中) 33명(名)을 경질(更迭)하고, 그가 일했던 포드 출신(出身)을 포함(包含)해 새로운 임원진(任員陣)을 구성(構成)하였다. 더불어 노동조합(勞動組合)을 이사회(理事會)의 구성원(構成員)으로 받아들여 의사결정(意思決定)의 주체(主體) 중(中) 하나로 참여시키고 "1달러 연봉(年俸) 선언(宣言)" [6] 을 하는 등(等)으로 크라이슬러의 노동조합(勞動組合) 을 설득(說得)하여 2번(番)이나 임금(賃金) 삭감(削減)과 동결(凍結)을 이끌어 냈으며 1980년(年) 한 해만 1만(萬) 5천(千) 명(名)의 정규직원(正規職員)을 해고(解雇) 한 뒤 유럽, 호주(濠洲), 남아프리카(南아메리카) 지사(知事)도 매각(賣却)하고 각종(各種) 공장(工場)을 폐쇄(閉鎖)하는 구조조정(構造調整) 을 단행(斷行)하여 5억(億) 달러에 달(達)하는 비용(費用) 절감(節減)을 이루었다. 그리고 워싱턴 D.C. 에 가서 상원(上院), 하원(下院) 청문회(聽聞會)에 불려 다니며 노력(努力)한 결과(結果), 연방(聯邦) 정부(政府)로부터 15억(億) 달러 규모(規模)의 융자금(融資金) 보증(保證)을 얻어 냈다. #

그렇게 융자(融資) 보증(保證)을 받아낸 아이아코카는 가스터빈 엔진 [7] 을 비롯한 비현실적(非現實的)인 계획(計劃)들을 중단(中斷)시켰고, 급(急)한 자금(資金)을 확보(確保)하기 위해 유럽 지사(支社)인 생(生)카 루츠 그룹 이 공동개발(共同開發)한 소형차(小型車) 를 활용(活用)해 당시(當時) 첨단기술(尖端技術)로 떠오르던 가로배치(配置) 전륜구동(前輪驅動) 소형차(小型車) 기술(技術)을 가지고 새 차(車)를 개발(開發)했으며, 포드 에서 구상(構想)했다가 받아들여지지 못한 미니밴 라인업 이나 가로배치(配置) 전륜구동(前輪驅動) 플랫폼인 크라이슬러 K 플랫폼 을 개발(開發)했다. K 플랫폼의 참고(參考)모델이 된 소형차(小型車)인 생(生)카 호라이즌 역시(亦是) 아이아코카가 취임(就任)한 해에 플리머스 닷지 의 소형차(小型車)로 출시(出市)하고 융자금(融資金) 보증(保證)이 필요(必要)한 이유(理由) 중(中) 하나로도 제시(提示)했다.

1980년(年) 말에는 중형차(中型車) 라인으로서 크라이슬러 K 플랫폼으로 만든 첫 신차인(新車人) 플리머스 릴라이언트와 닷지 아리스 를 출시(出市)했으며 1982년(年)에는 K 플랫폼 기반(基盤)의 컨버터블 라인업과 레 바론의 세대교체(世代交替) 모델, 1983년(年) 말에는 같은 플랫폼을 토대(土臺)로 만든 미니밴 라인인 플리머스 보이저 , 닷지 캐러밴 도 출시(出市)해 수익(收益)을 거두었다. 특히(特히) 1980년대(年代) 초(初) 미국(美國)에서는 불황기(不況期)가 시작(始作)되어 소형차(小型車)의 수요(需要)가 높아졌고, 아리스/릴라이언트는 가로배치(配置) 전륜구동(前輪驅動)의 이점(利點)을 살린 넓은 실내공간(室內空間)과 1열(列) 벤치시트 사양(斜陽)으로 거둔 6인승(人乘) 레이아웃 때문에 중형차(中型車)였다 뿐이지 시장(市場)에서 전임(前任) 모델인 닷지 아스펜/플리머스 볼레어(語)를 따라 준중형차(準中型車)로 분류(分類)할 정도(程度)로 상당히(相當히) 작고 연비(聯臂)가 좋아 잘 팔렸다. 미니밴 역시(亦是) K 플랫폼에 기반(基盤)한 덕분(德分)에 작으면서도 공간(空間)을 다양하게 사용(使用)할 수 있는 범용성(汎用性)을 갖춰 당시(當時)의 대형(大型) 밴과 스테이션 왜건 사이의 틈새 수요(需要)를 잡아내는 데 성공(成功), 새로운 세그먼트와 시장(市場)을 개척(開拓)하며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꾸준한 돈줄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반면(反面) 아이아코카 휘하(麾下)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은 실패(失敗)도 거뒀는데, 회사(會社)의 기함(旗艦)이자 기함급(旗艦級) 브랜드로 1981년(年)에 부활(復活)시킨 임페리얼 이 실패사례(失敗事例)였다. 1981년형(年型) 임페리얼은 크라이슬러 코르도바 를 토대(土臺)로 완전(完全) 전자식(電子式) 연료분사장치(燃料噴射裝置)나 완전(完全) 디지털 대시보드같은 당대(當代) 신기술(新技術)들을 대거(大擧) 적용(適用)한 퍼스널 럭셔리 카 였는데, 프랭크 시나트라 에게 첫 차(車)를 주고 콜라보레이션 특별판(特別板)까지 출시(出市)하는 등(等)의 시도(試圖)로 흥행(興行)을 끌어 보려고 했으나 품질(品質) 문제(問題)로 얼마 안 가 단종되었다. 닷지 아리스의 고급형(高級型) 파생차(派生次)인 닷지 400 과 레 바론보다 윗급(級)의 중형차(中型車)였던 크라이슬러 E클래스 도 실적(實績)이 좋지 못했다.
리 아이아코카가 출연(出捐)하는 1982년(年)의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 기업광고(企業廣告) [8]
리 아이아코카가 출연(出捐)하는 1984년(年)의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 기업광고(企業廣告) [9]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아이아코카 휘하(麾下)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은 상업적(商業的)인 흥행(興行)을 이어나갔는데, 신차(新車) 라인업마다 모두 적용(適用)시킨 크라이슬러 K 플랫폼 자체(自體)가 수익성(收益性)이 높은 구성(構成)인데다가 시대(時代)에 맞는 제품군(製品群)을 만들면서도 새로운 세그먼트도(度) 같이 개척(開拓)하는 것과 더불어 마케팅에도 심혈(心血)을 기울인 것이 유효(有效)했다. 특히(特히) 아이아코카 본인(本人)이 토크쇼, 광고(廣告), 발표회(發表會)같은 각종(各種) 미디어에 자주 참여(參與)해 자사(自社) 제품(製品)과 개발과정(開發過程)을 소개(紹介)하는 캠페인 등(等)을 통해 대중(大衆)과 소통(疏通)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미국(美國) 국민(國民)들의 신뢰(信賴)를 얻었고 [10] 회사(會社) 직원(職員)들에게 자부심(自負心)을 안기기 위해 상품성(商品性)을 강조(强調)하는 "자부심(自負心)이 돌아왔다(Pride is Back)", "더 나은 차(茶)를 찾았다면 그걸 사라"같은 공격적(攻擊的)인 모토를 활용(活用)한 캠페인도 주도(主導)했다. [11]

이런 노력(努力) 끝에 1982년(年) 여름, 크라이슬러의 회장(會長)으로 된 지 만(滿) 7년(年)이 되기 전(前)에 아이아코카는 고질적(痼疾的)인 부채(負債) 15억(億) 달러를 일시(一時)에 갚고 7억(億) 달러의 순이익(純利益)을 남기는 신화(神話) 를 이루어냈다. 5% 삭감(削減)했던 노동자(勞動者) 연봉(年俸)도 원래(元來) 수준(水準)으로 올려 놓았고 해임(解任)했던 직원(職員)들의 상당수(相當數)도 다시 불러들였다. 이렇게 회사(會社)가 커지다보니 아이아코카는 밥 루츠 를 포함(包含)해 포드 에서 일했던 회사(會社) 동료(同僚)들을 크라이슬러로 데려왔으며, 크라이슬러 K 플랫폼을 대거(大擧) 활용(活用)해 다양한 세그먼트를 아우르는 수많은 신차(新車)들을 개발(開發)하게 하는 건 물론(勿論) 평소(平素) 관심(關心)을 두어 왔던 AMC / 지프 , 람보르기니 등(等)을 1987년(年)에 인수(引受)했다. 그렇게 인수(引受)한 지프를 통해 크라이슬러의 돈줄로 삼은 건 물론(勿論), 지프 랭글러 체로키 , 그랜드 체로키 등(等)의 히트작(作)들을 개발(開發)해냈던 AMC 내(內)의 인재(人材)들을 자사(自社)의 차량(車輛) 개발(開發) 프로젝트에 투입(投入)하고 창의적(創意的)인 제품개발(製品開發) 과정(過程)을 도입(導入)하기까지 했다. [12] [13]

그런데 이 과정(過程)에서 무리(無理)한 인수합병(引受合倂) 으로 회사(會社)가 다시 재정난(財政難)에 처(處)한 건 물론(勿論) 회사(會社) 라인업의 정리(整理)가 시급(時急)해졌고, 람보르기니 의 운영(運營) [14] 이나 마세라티 와 합작(合作) 개발(開發)한 크라이슬러 TC 바이 마세라티 , 새턴 의 대항마(對抗馬)로 기획(企劃)한 리버티 (Liberty) 브랜드와 이글 브랜드 [15] 같은 무리수(無理數)들이 실패(失敗)한 건 물론(勿論) 아이아코카가 K-바디 플랫폼의 활용(活用)과 보수적(保守的)인 디자인을 고집(固執)하는 점(點), [16] [17] 공장별(工場別) 생산대수(生産臺數) 유지(維持)와 매출(賣出) 극대화(極大化)를 위한 적극적(積極的)인 뱃지 엔지니어링, [18] 주가(株價)에 대(對)한 집착(執着)도 걸림돌이 되기 시작(始作)했다. 게다가 "1달러 연봉(年俸) 선언(宣言)"의 진정성(眞情性)까지 논란(論難)에 휘말림에 따라, 아이아코카는 1992년(年) 말(末) 후계자(後繼者)로 로버트 이튼 (Robert Eaton)을 지명(指名)하고 회장(會長) 자리에서 사임(辭任)했다.

2.1.3. 그 이후(以後) [편집(編輯)]

은퇴(隱退) 후(後) 아이아코카는 고급(高級) 이탈리아 식당(食堂)을 설립(設立)하고 아내와의 사별(死別)을 계기(契機)로 당뇨병(糖尿病) 치료(治療) 재단(財團)을 설립(設立)하는 등(等)의 활동(活動)을 해 왔으며, 영화사(映畫社) MGM 의 이사진(理事陣) 중(中) 한 명(名)으로 참여(參與)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5년(年)에는 자신(自身)의 억만장자(億萬長者) 친구(親舊)였던 커크 커코리언 (Kirk Kerkorian)과 손을 잡고 크라이슬러의 회장(會長)으로 복귀(復歸)하려고 했는데, 커코리언이 크라이슬러의 지분(持分)을 사들였다가 터진 논란(論難)과 갈등(葛藤)으로 인해 1996년(年)에 인수(引受)한 지분(持分)을 도로 매각(賣却)했고, 커코리언과 크라이슬러가 1996년(年)부터 5년간(年間) 아이아코카가 크라이슬러에 대(對)해 대중(大衆) 앞에 언급(言及)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합의(合意)를 보면서 사그라들었다.

미국(美國) 민주당(民主黨) 으로부터 여러차례(次例) 정계(政界) 영입(迎入), 대선(大選) 출마(出馬) 제의(提議)도 받았지만 스스로 거절(拒絶)했다.

그러다가 2005년(年) 7월(月), 다임러크라이슬러 에서 아이아코카를 홍보대사(弘報大使)로 다시 기용(起用)하면서 다시 크라이슬러로 되돌아왔다. 그는 제이슨 알렉산더(Jason Alexander)와 스눕 독(毒) (Snoop Dogg)과 같이 크라이슬러의 직원(職員) 대상(對象) 캠페인을 홍보(弘報)하는 데 참여(參與)했고, 한때 그가 제시(提示)했던 모토였던 "더 나은 차(車)가 있다면 그걸 사라"는 멘트도 다시 사용(使用)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는 아이아코카를 기용(起用)하면서, 2005년(年) 7월(月) 1일(日)부터 12월(月) 31일(日)까지 파는 차량(車輛)에서 대당(臺當) 1대(臺)씩의 수익(收益)을 아이아코카의 당뇨병(糖尿病) 치료(治療) 재단(財團)에 기부(寄附)하기로 합의(合意)를 보았다. 크라이슬러가 파산(破産)한 2009년(年) 4월(月), 아이아코카는 인터뷰를 통해 크라이슬러의 회장(會長)이었던 시절(時節)을 회고(回顧)하면서 아쉬움을 토로(吐露)하는 소감(所感)을 남기기도 했다.

현지(現地) 시간(時間)으로 2019년(年) 7월(月) 2일(日) 오전(午前) 7시(時) 반(半), 캘리포니아 벨 에어의 자택(自宅)에서 작고(作故)했다. 사인(死因)은 파킨슨병(파킨슨病) 합병증(合倂症). 7월(月) 10일(日)에 첫 아내 메리가 묻힌 미시건 주(州) 트로이의 화이트 샤펠 묘지(墓地)(White Chapel Cemetery)로 옮겨져 안장(安葬)되었다. # 안장(安葬)될 때 사용(使用)된 자동차(自動車)는 자신(自身)이 회장(會長)으로 있었던 당시(當時)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 의 주력(主力) 라인업이었던 미니밴의 최신(最新) 세대(世代)였던 퍼시피카 가 활용(活用)되었다.

3. 여담(餘談) [편집(編輯)]

  • 아이아코카는 자동차(自動車) 사업(事業) 외(外)에도 정치(政治), 대중문화(大衆文化), 요식업(料食業) 등(等)의 기타(其他) 분야(分野)에서도 얼굴을 자주 비추었고, 자서전(自敍傳)도 여러 차례(次例) 써서 발간(發刊)해왔다. 가령(假令) 1994년(年)에 뮤지컬인 윌 로저 폴리스(The Will Rogers Follies)의 제작(製作)을 위해 제작자(製作者)인 피에르 코제트(Pierre Cossette)와 손을 잡은 적이 있었고, 브랜슨 힐(Branson Hills)의 주택(住宅) 건축(建築) 사업(事業)에 투자(投資)하거나 1993년(年)에 커크 커코리언의 제안(提案)으로 MGM 그랜드(MGM Grand)의 이사진(理事陣)으로 참여(參與)하기도 했다. 1995년(年)에는 레스토랑 체인인 코코루(Koo Koo Roo)의 이사진(理事陣)으로 들어왔으며, 1998년(年)에 회장(會長)으로 일하면서 가족(家族) 식당(食堂) 업체(業體)들을 합병(合倂)하고 1999년(年)까지 이사진(理事陣)으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온 후(後)에는 EV 글로벌 모터스(EV Global Motors)의 수장(首長)이 되어, 최고시속(最高時速) 15mph(약(藥) 24.1km)에 주행거리(走行距離) 32km를 목표(目標)로 하는 전기(電氣) 바이크를 개발(開發)하는 데 참여(參與)했다.
  • 가족(家族)으로는 1956년(年)에 아내인 메리 맥(脈)클리어리(Mary McCleary)가 있었고, 캐서린과 리아라는 두 딸을 두었다. 1983년(年)에 메리가 당뇨병(糖尿病) 으로 세상(世上)을 떠나자, 아이아코카는 훨씬 나은 당뇨병(糖尿病) 치료제(治療劑)를 위해 투자(投資)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단(財團)을 설립(設立)하기도 했다. 1986년(年)에는 페기 존슨(Peggy Johnson)과 혼인(婚姻)했다가 19달 후(後)인 1987년(年)에 이혼(離婚)했고, 1991년(年)에 다리엔 얼(Darrien Earle)과 결혼(結婚)했다가 3년(年) 만에 이혼(離婚)했다. 이후(以後) 여생(餘生)을 캘리포니아 주(週) 로스앤젤레스 의 벨 에어(Bel Air)에 보냈다.
  • 당시(當時) 그와 같이 일했던 밥 루츠 는 아이아코카에 대(對)해 "자신(自身)과 상당히(相當히) 닮아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동시(同時)에 각종(各種) 언론매체(言論媒體)에도 당당히(堂堂히) 등장(登場)해서 대중(大衆)과의 소통(疏通)에 신경(神經) 쓴, 미국(美國) 최고(最高)의 기업(企業)인 중(中) 하나"로 회고(回顧)했었다. 자신(自身)이 밥 이튼 에게 밀려서 크라이슬러의 부회장(副會長)으로 만족(滿足)해야 했던 것도 상사(上司)인 리 아이아코카와 너무 여러 모로 닮은 탓에 견제(牽制)되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아이아코카가 작고(作故)했을 때도 크라이슬러 시절(時節)에 부자관계(父子關係)같이 지냈었으며, 아이아코카에게 유치(幼稚)하고 애같이 굴었던 면(面)이 있었던 걸 후회(後悔)하며 좀 더 조심(操心)해서 다가섰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추모사(追慕辭)를 올렸다.
  • 그의 자서전(自敍傳) 중(中) " 아이아코카 "와 " 진정(眞正)한 리더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책(冊)이 1985년(年)과 2008년(年)에 한국어(韓國語)로 번역(飜譯)되어 출간(出刊)되었고, "아이멘토 인물(人物)이야기" 위인전(偉人傳) 시리즈 중(中)에 리 아이아코카의 전기(電氣) 가 포함(包含)되어 있다. 특히(特히) 1985년판(年版) 자서전(自敍傳)의 경우(境遇)에는 한국(韓國)에서도 선풍적(旋風的)인 인기(人氣)를 끌어서, 1980년대(年代) 말(末)에서 1990년대(年代) 중반(中盤)까지 직장인(職場人)이나 사업가(事業家)들의 필독서(必讀書)로 자리잡을 정도(程度)였다. 어쨌든 이 자서전(自敍傳)의 선풍적(旋風的)인 인기(人氣)를 통해 대한민국(大韓民國) 에서도 꽤 잘 알려져 있는 인물(人物)이 되었다. [19]
  • 기아그룹 김선홍 회장(會長)은 봉고 로 거둔 성공(成功) 덕분(德分)에 "한국(韓國)의 아이아코카"로 평가(評價)된 적이 있는데, 참고(參考)로 당시(當時) 자동차(自動車) 업계(業界)에서 주목(注目)받는 기업가(企業家)들은 '제(第)2의 아이아코카' 등(等)의 별명(別名)으로 곧잘 불렸다.
  • 허영만 의 만화(漫畫) " 아스팔트 사나이 "에서도 등장(登場)하는데, 그의 본 이미지와는 다르게 상당히(相當히) 무능(無能)한 인물(人物)로 그려져 있으며 주인공(主人公)의 기업인(企業人) 천마(天馬)모터스로 크라이슬러 가 인수(引受)되는 내용(內容)까지 실려 있다.
  • 영화(映畫) " 포드 V 페라리 "에도 젊은 시절(時節)의 리 아이아코카가 나온다. 캐롤 셸비(費)를 직접(直接) 스카우트하고, 뒤에서 지원(支援)해주는 우군(友軍) 역할(役割). 존 번설(煩屑) 이 배역(配役)을 담당(擔當)했다.
  • 자서전(自敍傳)에서 야구(野球)를 하고 싶어했다는 언급(言及)이 있었다. 다만 병치레(病치레) 때문에 야구선수(野球選手)를 하진 못했다고. 여담(餘談)으로 크라이슬러 의 회장직(會長職)을 사임(辭任)하면서 찍은 '캡 포워드 차량(車輛)' 광고(廣告) 의 마지막 부분(部分)에서 '마지막 타석(打席)에 들어섰다면, 그 때가 홈런을 치면 딱 좋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20]
  • 안전벨트(安全벨트) 의무(義務) 착용(着用)을 주장(主張)한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 중(中) 한 명(名)이다.
  • 재벌(財閥)집 막내아들 5화(禍)에서 잠깐 언급(言及)된다. 기아그룹의 김선홍 회장(會長)을 모델로 한 아진(亞陣)그룹 회장(會長) 송현창에게 아이아코카 같다고 비유(比喩)한다.

[1] Allentown [2] 자서전(自敍傳)에서는 결혼(結婚) 전(前)에 자신(自身)의 외삼촌(外三寸)과 함께 갔던 것이라고 설명(說明)했다. [3] 당시(當時) 오르페움 위너 하우스(Orpheum Wiener House)라는 이름이었으며 리도(里圖)의 삼촌(三寸)인 시어도어 아이아코카가 1922년(年)에 설립(設立)했다. 지금(只今)은 아이아코카의 네덜란드식(式) 발음(發音)에서 따 온 상호(相互)인 요(要)코스 (Yocco's)라는 이름으로 5개(個) 체인점(체인店)을 운영(運營)하고 있다. [4] 지금(只今)의 윌리엄 앨런 고등학교(高等學校)(William Allen High School). [5] 포드 피에스타 에 사용(使用)하기 위해서 혼다 CVCC 엔진+변속기(變速機) 세트 30만대(萬臺)를 도입(導入)해오려고 했다. [6] 사실(事實) 무임금(無賃金) 선언(宣言)을 하면 법적(法的) 문제(問題)와 사회적(社會的) 논란(論難)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最小限) 서류상(書類上)으로 남겨놓는 것이다. 실제로(實際로) 다른 주제(主題)이긴 하지만 오늘내일(오늘來日) 하는 회사(會社)를 인수시(引受時) 공짜(空짜)로 한다면 그에따른 행정적(行政的) 문제(問題)가 엄청나지기 때문에 형식상(形式上)으로 1달러에 인수(引受)하는 것이다. 물론(勿論) 그 만큼 리 아이아코카의 강력(强力)한 의지(意志)를 표현(表現)한 것이기도 하지만. [7] 20년(年) 이상(以上)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이 개발(開發)해 왔으며 회사(會社)가 휘청이던 1977년(年)에도 크라이슬러 브랜드의 엔트리 라인업 레 바론 에 기반(基盤)한 콘셉트카 를 출품(出品)하고 1979년(年)에 선보일 계획(計劃)까지 잡는 등(等), 양산(量産)을 심각(深刻)하게 고려(考慮)하고 있었다. [8] 자사(自社) 제품(製品)의 품질(品質)에 대(對)한 자신감(自信感)을 과시(誇示)하며 보증수리(保證修理) 정책(政策)을 소개(紹介)하고, 이와 함께 후반부(後半部)에는 더 나은 차(車)가 있거든 경쟁사(競爭社) 차(車)를 타라는 내용(內容)으로 진행(進行)된다. [9] 광고(廣告) 내용(內容)을 보면 아이아코카가 직접(直接) 미니밴이나 컨버터블같은 자사(自社) 제품(製品)의 실적(實績)과 상품성(商品性)을 과시(誇示)하는가하면, 앞으로 출시(出市)될 신차(新車)들도 간단(簡單)하게 소개(紹介)하고 있다. [10] 리 아이아코카 이전(以前)에도 아메리칸 모터스 코퍼레이션 의 회장(會長)이었던 조지 W. 롬니 가 대중(大衆) 앞에서 적극적(積極的)으로 마케팅을 펼쳐 회사(會社)를 성장(成長)시킨 사례(事例)가 있다. 타임 지(知)의 1959년(年) 4월(月) 6일(日) 기사(記事)는 조지 롬니가 시간(時間)이 허락(許諾)하는 한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직접(直接) 전국(全國)을 돌아다니며 자사(自社)의 소형차(小型車) 라인업을 홍보(弘報)하며 직접(直接) 타볼 것을 권(勸)하고 있다는 내용(內容)을 싣었다. # [11] 여기에 일각(一角)에서는 크라이슬러도 GM, 포드처럼 노골적(露骨的)인 뱃지 엔지니어링을 이용(利用)했음에도 오히려 1977년(年) 폐업위기(廢業危機) 이후(以後)로 각(各) 브랜드가 무의미(無意味)해진 크라이슬러였기에 오히려 개별(個別) 브랜드보다는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이라는 그룹 자체(自體)를 강조(强調)(즉(卽), 크라이슬러 그룹이기에 남들과 다르다)하는 마케팅으로 뱃지 엔지니어링을 역이용(逆利用)해 기업(企業) 이미지 항상(恒常)에 활용(活用)했다는 주장(主張)을 하기도 한다. 당시(當時) 크라이슬러에서 닷지와 플리머스 차량(車輛)을 한 광고(廣告)에 등장시키는 경우(境遇)가 많았고, 이들을 "크라이슬러 미니밴"이나 "K-카"같은 표현(表現)으로 수식(修飾)한 것이 그 근거(根據). # [12] 그 중(中) 아이아코카가 좋아했던 그랜드 체로키는 당시(當時)에 개발(開發)이 거의 다 되어 있었는데, 체로키의 후속(後續)이었던 게 너무 커지자 그 윗급(級) 라인업으로 개조(改造)해 수년(數年) 뒤인 1992년(年)에야 출시(出市)될 수 있었다. 또한 AMC의 제품기획(製品企劃)을 물려받음에 따라 르노 기반(基盤) 준대형차(準大型次)인 이글 프리미어 의 세로배치(配置) 전륜구동(前輪驅動) 플랫폼 구성(構成)을 참조(參照)해 차기(次期) 대형차(大型車) 플랫폼인 크라이슬러 LH 플랫폼 에 반영(反映)하거나, 당시(當時) 개발중(開發中)이던 AMC의 소형차(小型車) 기획(企劃)을 크라이슬러의 자체(自體) 브랜드로 편입시켜 닷지 네온 으로 출시(出市)한 사례(事例)도 있었다. 닷지 네온의 원형(原形) 헤드램프도(度) 리 아이아코카가 제안(提案)하여 밀어붙였다. [13] 당시(當時) 크라이슬러로 영입(迎入)된 인재(人材) 중(中) 하나가 르노/AMC 출신(出身)의 엔지니어인 프랑수아 카스탱 (Francois Castaing)으로 AMC의 연구개발조직(硏究開發組織) 구성(構成)을 모델로 크라이슬러의 플랫폼 팀을 혁신(革新), 각(各) 차량(車輛)의 부위별(部位別), 담당업무별(擔當業務別)로 쪼개져 있던 제품개발(製品開發)팀을 철폐(撤廢)하고 컨셉트부터 양산(梁山)에 이르는 프로젝트 팀을 구축(構築)해 보다 적은 인원(人員)으로도 빠르고 저렴(低廉)하게 신차(新車)를 개발(開發)할 수 있는 제품개발환경(製品開發環境)을 구축(構築)했다. 이렇게 AMC의 창의적(創意的)이고 유연(柔軟)한 인재(人材)들과 제품개발과정(製品開發過程)이 1990년대(年代) 크라이슬러 내부(內部)에 널리 퍼짐에 따라, 1990년대(年代)의 크라이슬러는 오히려 AMC가 크라이슬러를 집어삼킨 거나 다름없었다는 평가(評價)도 나올 정도(程度). [14] 아이아코카의 부하(部下)이자 회사(會社)의 상급(上級) 임원(任員)이었던 밥 루츠 는 자서전(自敍傳)을 통해 "람보르기니를 산 건 수익성(收益性)보다 브랜드 때문이며, 크라이슬러 차(車)를 람보르기니와 적절(適切)히 크로스오버해서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式)으로 크라이슬러 차종(車種)의 람보르기니 에디션을 만들라는 지시(指示)를 아이아코카가 내렸었다는 점(點)을 회고(回顧)했었다. 어떻게 보자면 람보르기니에 대(對)한 아이아코카의 인식(認識)이나 이해(理解)를 엿볼 수 있는 대목.( # # # ) [15] 리버티는 새턴을 따라 매우 진보적(進步的)인 국산(國産) 소형차(小型車)로 수익(收益)을 내겠다고 1985년(年)에 발표(發表), 1990년(年)에 런칭하려고 했으나 비용문제(費用問題)로 아예 개발(開發) 과정(過程)에서 취소(取消)되었다. 이글은 AMC의 승용차(乘用車) 부문(部門)을 개명(改名)한 뒤 과거(過去) AMC의 모회사(母會社)였던 르노 산하(傘下)의 이글 프리미어 , 메달리온 같은 르노 차종(車種) 기반(基盤) 라인업들과 미라쥬, RVR, 갤랑, 이클립스같은 미쓰비시 차종(車種)들을 AMC 계열(系列)의 딜러망(望)이었던 지프-이글 딜러로 몰아넣는 데 그쳤기 때문에 판매(販賣)가 부진(不振)했다. [16] 밥 루츠가 갓 크라이슬러로 넘어온 1980년대(年代) 중반(中盤), 리 아이아코카는 루츠에게 포드 토러스 머큐리 세이블 을 언급(言及)하면서 "어차피(於此彼) 실패(失敗)할 차(車)들인데 이들이 출시(出市)되기 전(前)에 크라이슬러로 잘 넘어왔다"며 환영(歡迎) 하기도 했다. 당시(當時) 크라이슬러에서 토러스 대항마(對抗馬)로 준비(準備)한 차(車)는 크라이슬러 K 플랫폼 기반(基盤)의 중형차(中型車)였던 닷지 다이너스티 크라이슬러 뉴요커 였으며 아이아코카는 디자인에 대(對)한 고객조사(顧客調査) 점수(點數)의 평균(平均)이 포드가 10점(點) 만점(滿點)에 5점(點), 자사(自社)가 7.5점(點)이었다며 자신만만(自信滿滿)해했다. 밥 루츠는 자서전(自敍傳)에서 고객조사(顧客調査)의 허점(虛點)을 이야기하며 평가(評價)가 극(極)과 극(極)이었던 토러스/세이블, 중간(中間) 점수(點數)로만 들이찬 다이너스티/뉴요커의 평점(評點)을 설명(說明)했다. 즉(卽) 토러스와 세이블은 확실히(確實히) 좋아하는 고객(顧客)들 반(半)+확실히(確實히) 싫어하는 고객(顧客)들 반(半)이었다면 뉴요커와 다이너스티는 "생각은 해보겠지만 가장 먼저 살 차(車)는 아니다"같은 그저 그런 평가(評價)로 가득했다고 설명(說明)했다. 이어서 밥 루츠 는 같은 자서전(自敍傳)에서 아이아코카를 "시대(時代)에 대(對)한 감이 떨어지기 시작(始作)했던 1980년대(年代)까지는 무적(無敵)"이라고 코멘트를 해 아이아코카가 1980년대(年代)의 시대변화(時代變化)를 잘못 읽은 부분(部分)이 있었다고 자평(自評)하기도 했다. [17] 물론(勿論), 1990년대(年代) 들어서 당시(當時)에는 상당히(相當히) 혁신적(革新的)이었던 '캡 포워드' 디자인의 LH 플랫폼을 선보이는 등(等) 보수적(保守的)인 디자인을 탈피(脫皮)한 적도 있었다. [18] 밥 루츠의 자서전(自敍傳)에 따르면 지프 그랜드 체로키를 닷지 브랜드로 공급(供給)하는 계획(計劃) 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外)에 플리머스 호라이즌과 닷지 다코타 의 지프 브랜드 버전이 계획(計劃)되는 등(等), 지프로도 기존(旣存) 크라이슬러 차종(車種)들의 뱃지 엔지니어링 라인업을 도입(導入)하려다가 지프 측(側)의 반대(反對)로 무산(霧散)된 적도 있었다고 회고(回顧)했다. [19] 이는 한국(韓國) 출판업계(出版業界)의 역사(歷史)에서도 현대적(現代的) 의미(意味)의 마케팅 성공(成功) 사례(事例) 중(中) 하나로 꼽힌다. 1987년(年) 민주화(民主化) 이후(以後), 군사(軍事) 독재(獨裁) 정권(政權)이 물러가고 언론(言論)에 대(對)한 검열(檢閱)이나 통제(統制)가 점점(漸漸) 철폐(撤廢)되기 시작(始作)하자, 때맞춰 폭발적(暴發的)으로 성장(成長)하기 시작(始作)한 신문(新聞)과 방송(放送) 미디어를 중심(中心)으로 책(冊)과 잡지(雜誌) 등(等)에 대(對)한 공격적(攻擊的)인 광고(廣告)를 비롯한 다양한 출판(出版) 마케팅 사례(事例)들이 쏟아지기 시작(始作)했는데, 마침 80년대(年代) 말(末) 소련(蘇聯) 붕괴(崩壞) 및 90년대(年代) 초반(初盤) 세계화(世界化) 바람까지 타고 이러한 산업계(産業系) 거물(巨物)의 성공(成功) 사례(事例)를 다룬 경영서적(經營書籍)이 급격히(急激히) 주목(注目)을 받던 분위기(雰圍氣) 속에 이 책(冊)이 베스트셀러에 등극(登極)했던 것. 참고(參考)로 이 때 함께 국내(國內) 시장(市場)에서 베스트셀러로 잘 팔렸던 책(冊)이 바로 80년대(年代) 말(末)에 발간(發刊)된 도널드 트럼프 의 자서전(自敍傳)인 '거래(去來)의 기술(技術)'이었다. 어쨌든 당시(當時)에는 그야말로 리 아이아코카의 자서전(自敍傳)이 셀러리맨들의 집집마다 한권(卷)씩 있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程度)로 많이 팔렸다. 참고(參考)로 이러한 아이아코카 자서전(自敍傳)의 성공(成功) 사례(事例)를 국내(國內)에서 적극적(積極的)으로 벤치마킹했던 경우(境遇)가 바로 1989년(年)에 나온 대우(大宇)그룹 김우중(金宇中) 회장(會長)의 자서전(自敍傳)인 '세계(世界)는 넓고 할일은 많다'와 현대(現代)그룹 정주영(鄭周永) 회장(會長)이 1992년(年) 대선(大選) 을 앞두고 자신(自身)의 정치적(政治的) 목적(目的)을 위해 발간(發刊)했던 자서전(自敍傳)인 '시련(試鍊)은 있어도 실패(失敗)는 없다'였다. [20] 원문(原文)은 When it's your last turn at bat, It sure is nice to hit a home 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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