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의 자녀(子女) 및 손자(孫子)/녀(女)
[12]
에게는 대학(大學) 등록금(登錄金) 면제(免除) 혜택(惠澤)이 주어진다고 하지만, 사실(事實)
후손(後孫)들에 대(對)한 대우(待遇)는 썩 좋지 못하다.
[13]
[14]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면 3대(臺)가 못산다
는 말이 유명(有名)할 정도(程度).
[15]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가 35년간(年間)이나 이어졌으므로 광복(光復) 후(後) 행정(行政)이나 관리(管理), 법(法), 국방(國防), 치안(治安) 등(等) 정부(政府) 관련(關聯) 업무(業務)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사실상(事實上) 대부분(大部分) 친일파(親日派)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관련(關聯) 일자리에 많이 들어갔으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은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위해 집도 고향(故鄕)도 다 버리고 외국(外國)(특히(特히)
국부군(國府軍)
, 드물게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
)에 나가 투쟁(鬪爭)하는 경우(境遇)가 다반사(茶飯事)라 관련(關聯) 경험(經驗)이 있는 사람도 적고 호적(戶籍)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境遇)도 상당(相當)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건국(建國) 초(初)부터 북한(北韓)과 대치(代置)해야 했고
6.25 전쟁(戰爭)
까지 일어나서 나라가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다. 이렇게 건국(建國) 당시(當時)부터 이념(理念) 대립(對立)이 심(甚)하고 반공(反共) 기조(基調)가 극심(極甚)하여 오히려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했어도 좌익(左翼) 쪽에서 했으면 목이 성한 것을 다행(多幸)으로 여겨야 했다.
[16]
거기에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후손(後孫)에게 주던 공무원(公務員) 시험(試驗) 가산점(加算點) 10%가 위헌(違憲) 판결(判決)을 받아 반(半)으로 줄어든(5%) 일도 있다.
현재(現在)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의 후손(後孫)은 손자(孫子)/녀(女)까지 일부(一部) 혜택(惠澤)을 받을 수 있지만, 독립(獨立) 운동(運動) 여부(與否)를 증명(證明)하는 것 자체(自體)가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17]
, 독립(獨立) 후(後) 70년(年)이란 세월(歲月)이 지나며 현재(現在) 혜택(惠澤)을 받을 수 있는 후손(後孫)의 수(數)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예(例)를 들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초기(初期)에 활동(活動)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의 경우(境遇) 그 후손(後孫)이 현손자(玄孫子) 혹은(或은) 6대손(代孫)까지 내려온 경우(境遇)도 있다고 한다. 또한, 사회주의(社會主義) 계열(系列)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가 인정받은 것도 비교적(比較的) 최근(最近)의 일이라서 설령(設令)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 힘들게 인정(認定)받았어도 그 후손(後孫)이 조상(祖上)의 행적(行跡)에 대(對)한 보상(報償)을 받은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에 대(對)해 유족(遺族)의 범위(範圍)를 증손(曾孫)까지 확대(擴大)하고, 유공자(有功者)로 지정(指定)될 당시(當時) 손자(孫子)/녀도(女徒) 생존(生存)해 있지 않다면 그 후손(後孫)에게 혜택(惠澤)이 돌아가도록 하는 개정안(改正案)이
국회(國會)
에서 발의되었으나 재정적(財政的) 문제(問題)와 다른 국가유공자(國家有功者)들과의 형평성(衡平性) 문제(問題)
[18]
로 3년(年)이 넘도록 계류(繫留) 중(中)이다.
그래서 당시(當時)에 비교적(比較的) 대우(待遇)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후손(後孫)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면
차라리
친일반민족행위자(親日反民族行爲者)
가 낫다
[19]
고 하거나,
독립(獨立) 운동(運動)을 하면 3대(代)가 망(亡)한다
라고 한다.
[20]
그래도 완전히(完全히) 무시(無視)하고 대우(待遇)를 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대학교(大學校)에서 조금만 관심(關心)을 가지면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전형(銓衡)
[21]
으로 온 친구(親舊)들을 간혹(間或) 볼 수 있으니 먹을 것이라도 잘 사주자.
[22]
실제로(實際로) 2015년(年)
한국일보(韓國日報)
에서
광복회(光復會)
회원(會員) 6,831명(名) 전원(全員)을 대상(對象)으로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전체(全體)의 3/4이 월소득(月所得) 200만(萬) 원 미만(未滿)으로 살아가고 월소득(月所得) 100만(萬) 원 미만(未滿)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전체(全體)의 30%에 달(達)했다고 한다.
#
독립운동(獨立運動)하면 3대(代)가 망(亡)한다는 오명(汚名)도 있지만 의외로(意外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의 후손(後孫)이면서 성공(成功)한 사람들이 꽤 있다. 특히(特히) 민족주의(民族主義) 우파(右派) 계열(系列)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은 정치(政治), 학계(學界)에서 높은 위치(位置)에 오른 경우(境遇)가 많다. 초대(招待)
국무총리(國務總理)
겸(兼)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
인(人)
이범석
장군(將軍),
손정도(孫貞道)
목사(牧師)의 아들이자 초대(初代)
대한민국(大韓民國) 해군참모총장(海軍參謀總長)
, 5대(代)
국방장관(國防長官)
을 지낸
손원일
제독(提督)과 그의 동생,
대한민국(大韓民國) 공군(空軍)
의 아버지이자 초대(初代)
국방차관(國防次官)
, 2대(代)
대한민국(大韓民國) 공군참모총장(空軍參謀總長)
을 지낸
최용덕
장군(將軍), 6대(代)
대한민국(大韓民國) 공군참모총장(空軍參謀總長)
이었던
김신
장군(將軍)을 비롯한
김구(金九)
의 후손(後孫)들
[23]
,
안창호
의 아들
안필립
[24]
,
안중근(安重根)
의사(醫師)의 사촌(四寸)이자 초대(初代)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교장(校長)인
안춘생
장군(將軍), 박정희(朴正熙) 정부(政府)에서 외교관(外交官)을 한 조카
안진생
, 우당(友黨)
이회영
의 손자(孫子)이자 더불어민주당(더불어民主黨)의 원내대표(院內代表)였던
이종걸(李鍾杰)
의원(議員), 조홍희 등(等)이 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醫師)의 손녀(孫女) 국민의힘(國民의힘)
윤주경(尹柱卿)
의원(議員)
[25]
등(等).
유일(唯一)한
가문(家門) 뿐만 아니라
GS
,
동화제약(童話制約)
일가(一家)처럼 기업가(企業家)로서 성공(成功)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가문(家門)도 있고,
장병준
일가(一家)처럼 아예 명문가(名門家)로 자리잡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가문(家門)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성공(成功)한 건
그냥 자기(自己)가 잘 해서 성공(成功)한 것
이라서 국가(國家)의 보훈(報勳) 정책(政策)과는 관계(關係)가 없고, 그마저도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후손(後孫)의 비율(比率) 중(中)에서는 극히(極히) 소수(少數)다.
[26]
또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나 그 가문(家門)들이 친일파(親日派) 집안과 인맥(人脈)으로 연결(連結)된 경우(境遇)도 흔하다. 예(例)를 들면
홍사익
중장(中將)이
지청천
의 일가(一家)의 생계(生計)를 살펴줬다는 이야기, 김구(金九) 또한 해방(解放) 후(後)에
최창학
이라는 친일(親日) 광산(鑛山) 재벌(財閥)의 정치(政治) 지원(支援)을 받았으며,
[27]
그 아들인
김신
장군(將軍)은 5·16 쿠데타에 가담(加擔)하였고,
박정희(朴正熙)
의 지지(支持)를 받았다.
손원일
제독(提督)의 아버지인
손정도(孫貞道)
목사(牧師)는
윤치호
집안과 사돈(査頓)을 맺었다. 사실(事實) 양반(兩班) 출신(出身)
[28]
[29]
들끼리는 그런 게 흔했다. 일제(日帝) 장교(將校)인 이응준은 장인(丈人) 이갑이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였고, 마찬가지로 김석원도(金錫元度)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이종혁(李鍾赫)이 수감(收監)을 마치고 백수(白手)가 되어 망(亡)하고 있을 때 다방면(多方面)으로 도와줬다.
현재(現在)의 대한민국(大韓民國)에는 친일파(親日派) 후손(後孫)들이 다 해 먹고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들은
자수성가(自手成家)
도 못하고 높은 위치(位置)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친일파(親日派)의 후손(後孫)들이 슈퍼 엘리트로서 한국(韓國) 사회(社會)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있냐면 그건 현실(現實)과는 다른데 우선(于先) 뉴스타파(打破)의 조사(調査)에 따르면 친일파(親日派)의 후손(後孫) 중(中)에 엘리트가 많은 건 사실(事實)이나 사회(社會)에 강(强)한 영향력(影響力)을 지닌, 즉(卽)
슈퍼 엘리트급(級)의 존재(存在)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
[30]
뉴스타파(打破)
가
친일인명사전
, 정확히(正確히)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에 등록(登錄)된 1006명(名)
의 자손(子孫) 1177명(名)들을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그들 대부분(大部分)이 엘리트로서 부유(富裕)한 삶을 살고는 있지만
[31]
[32]
'사회(社會) 전체(全體)를 쥐고 흔드는' 파워 엘리트의 비중(比重)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參考資料)
원본(元本) 기사(記事)
또한 현대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는
친일파(親日派)
에 대(對)한 반감(反感)이 강(强)하다. 대놓고 과거(過去) 친일(親日) 행각(行脚)에 대(對)해 미화(美化)하거나 합리화(合理化)가 마냥 쉽지 않다.
[33]
실제(實際) 친일(親日) 행적(行跡)이 드러난 선친(先親)이나 조부(祖父) 때문에 사회적(社會的)인 인지도(認知度)를 날려버린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요컨대(要컨대) 그들은 현재(現在) 시점(時點)에선 그냥 돈 많은 집의 2, 3세(歲)라고 볼 수 있다. 덤으로 악질(惡質)
매국노(賣國奴)
들의 후손(後孫) 대다수(大多數)는 제대로 고위층(高位層)이 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숨어 살고 있다.
[34]
결론(結論)만 이야기하자면 "친일파(親日派)의 후손(後孫)은 잘 살고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들의 후손(後孫)들은 힘들다"라는 통념(通念)이 어느 정도(程度)는 사실(事實)이다. 실제(實際)
논란(論難)이
[35]
된 친일파(親日派)
후손(後孫)들
만(萬) 해도 자기(自己) 조상(祖上)이 애국적(愛國的)이었다느니, 시대(時代)의 비극적(悲劇的)인 희생양(犧牲羊)이었다느니 어림없는 변명(辨明)을 내놓았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 이들도 "우리 가문(家門) 친일파(親日派)다"라고 떠들지 못하고, 변명(辨明)을 한다는 거만 봐도 절대(絶對) 명문(名門) 가문(家門)으로 통하지는 않는다.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들과 그들의 후손(後孫)이 가난하게 된 이유(理由)는 어떻게 보면 현실적(現實的) 문제(問題)도 있다. 예(例)를 들어 1910년(年)에는
초등학교(初等學校)
취학률(就學率)도 4% 가량(假量)에 불과(不過)하였는데, 양반(兩班)도 아니고 하찮은 신분(身分)인 사람들이 대다수(大多數)인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들이 학벌(學閥)부터가 좋을 수가 없으니 독립운동(獨立運動) 후(後)에 돌아와도 성공(成功)하기 힘들었다.
[36]
그 이유(理由)를 정부(政府) 수립(樹立) 초기(初期)의 형편(形便) 없는 대우(大宇)로 꼽고 있으며, 개선(改善)된 이후(以後)에도 자손(子孫)들에게는 부모(父母)의
가난
이
대물림(代물림)
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政府) 수립(樹立) 초기(初期)에는 일부(一部) 권력형(權力型) 친일(親日) 의혹(疑惑)이 있던 사람과 정부(政府) 수립(樹立)에 참여(參與)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 아니면 대부분(大部分) 운(運)이 좋은 사람들이 득세(得勢)했지, 그 외(外)에는 전부(全部) 가난 속에 살았다. 특히(特히) 전쟁(戰爭) 후(後)에는 더더욱.
일제(日帝)의 지원(支援)을 받았더라도 친일파(親日派)에서 친미파(親美派)나 애국자(愛國者)로 포지션을 전환(轉換)함으로써 살아남은 친일파(親日派) 후손(後孫)들도 많았다.
[37]
친일파(親日派)들이 전쟁(戰爭)으로 망(亡)했다는 썰도 있으나 친일파(親日派)와 관련(關聯)있는 사람들을 보면 북한군(北韓軍)이 오기 전(前)에 오히려 이미 대비(對備)가 되어있어서 서민(庶民)들과 다르게 오히려 끄떡도 하지 않았다. 노덕술 같은 경우(境遇)처럼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을 고문(拷問)하고 때려잡았던 악질(惡質) 친일파(親日派)들조차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建國) 후(後) 정부(政府)로부터 훈장(勳章)을 받기도 했다.
[38]
나라가 어느 정도(程度) 안정(安定)되기 시작(始作)한
박정희(朴正熙)
정부(政府) 때 대대적(大大的)으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을 발굴(發掘)해 훈장(勳章)을 수여(授與)하거나 그 후손(後孫)을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 지정(指定)하는 작업(作業)을 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가 보훈(報勳) 대상자(對象者)에 대(對)해서 신경(神經) 쓸 정도(程度)로 경제(經濟) 기반(基盤)을 이루어 낸 것이 1980년대(年代) 말(末)~1990년대(年代)부터였다. 한국(韓國)이 북한(北韓)보다도 빈곤(貧困)한 시절(時節)이었던 1960년대(年代)에는 국가(國家) 유공자(有功者)라는 명패(名牌) 하나 달랑 주고 끝냈다는 서글픈 이야기가 전(傳)해진다만 1960 ~ 70년대(年代)에도 자식(子息)이나 후손(後孫)의 등록금(登錄金) 지원(支援)과 같은 최소한(最小限)의 지원(支援)은 해줬다. 혜택(惠澤)을 받지 못한 정도(程度)는 아니다.
일단(一旦) 그 대우(待遇)가 적절(適切)한 수준(水準)이냐는 것과는 별개(別個)로 유공자(有功者)들에 대(對)한 대우(待遇)는 나아지고는 있긴 하다. 2015년(年) 6월(月)에는 금전적(金錢的)인 지원(支援)도 6배(倍)까지 늘리고,
해외(海外)
에 있는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후손(後孫)이 귀국(歸國)해서 정착(定着)하는데 최대(最大) 7천만(千萬) 원의 지원(支援)을 해주기로 결정(決定)했다. 제대로 증명(證明)만 되면 누구든 혜택(惠澤)을 받는다. 2019년(年)에는
서울
시(市)에서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후손(後孫)에 대(對)한 지원(支援)을 확대(擴大)하기도 했다.
#
그리고 일반(一般) 유공자(有功者)도 마찬가지지만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 인정(認定)을 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검증(檢證)이 되어야 하는 게 현실(現實)이다. 이 때문에
안중근(安重根)
이나
윤봉길(尹奉吉)
급(級)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후손(後孫)들은 별(別) 문제(問題) 없이 혜택(惠澤)을 받지만,
임시정부(臨時政府)
에서 군자금(軍資金) 운송(運送)하고, 연락책(連絡責) 노릇을 했던 사람들의 후손(後孫)들은 제대로 검증(檢證) 받기 힘들다. 독립운동(獨立運動)의 특성상(特性上) 보안(保安)이 남다를 수밖에 없으니. 그나마 잡혀서 처벌(處罰)받고 투옥(投獄)된 기록(記錄)이 있으면 낫지만, 007급(級)의 활약(活躍)으로 깔끔하게 해방(解放)을 맞이한 사람들은 당연히(當然히) 후손(後孫)들 입장(立場)에서도 조상(祖上)님의 업적(業績)을 밝히기 몹시 힘들어진다.
안타깝지만
검증(檢證)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이유(理由)가 '가짜(假짜)'가 혜택(惠澤)을 받아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실제(實際)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라고 서훈(敍勳)을 받았다가 나중에 친일(親日)로 전향(轉向)한 게 밝혀져 서훈(敍勳)이 취소(取消)된 사례(事例)
[39]
도 존재(存在)한다. 또한 친일파(親日派) 후손(後孫)들 만큼이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후손(後孫)들도 조상(祖上)에 대(對)해서 말하는 경우(境遇)가 적다. 실제(實際) 가수(歌手)
송대관
이나
신해철(申海澈)
,
서태지
, 하이트진로(하이트眞露) 사장(社長)인 양인집,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
한민구(韓民求)
, 대법관(大法官)
노태악
등(等)은 본인(本人)들이 자수성가(自手成家)해서 그 사실(事實)이 나중에 알려진 경우(境遇)다.
심지어(甚至於) "조부(祖父)는 그 정도(程度)인데, 너는 왜 그것밖에 못하냐?", "조부(祖父) 만큼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소리를 들어서 압박(壓迫)과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많다. 실제(實際) 김구(金九)의 증손자(曾孫子)인 김용만 씨(氏)는 어릴 때 이 때문에 부담(負擔)이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
뿐만 아니라 혜택(惠澤)을 받아도 "조상(祖上) 덕(德)에 잘나가는 놈"이라고 비아냥 거리(距離)는 부류(部類)들 때문에 피곤(疲困)한 게 현실(現實)이다. 정말(正말) 그런 놈들이 있는지 일반인(一般人)들은 체감(體感)하지 못하겠지만, 실제(實際) 유공자(有功者)들의 후손(後孫)들이 이 문제(問題) 때문에 상당(相當)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입으로는 나라를 위해 애쓴 사람들을 챙겨주자고 하지만, 정작 눈앞에서 조상(祖上) 잘 둬서 혜택(惠澤) 받고 꿀 빠는 사람을 보면 냉소적(冷笑的)인 시선(視線)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이 많기 때문. 물론(勿論) 대놓고 욕(辱)은 안 하지만, 대학(大學) 등록금(登錄金) 면제(免除)나 군복무(軍服務) 몇 달 방위(防衛)/공익(公益) 등(等)으로 간단히(簡單히) 해결(解決) 받는 것
[40]
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당사자(當事者)를
아싸
로 만들거나
뒷담화(뒷談話)
하는 경우(境遇)가 흔하다. 아예 당사자(當事者) 앞에서 '니 할아버지(or 아버지)가 잘난 거지, 니가 잘난 거냐?'며 날 선 소리를 부류(部類)들도 있다.
실제로(實際로)
윤봉길(尹奉吉)
의사(醫師) 장손녀인(長孫女人) 윤주경(尹柱卿) 씨(氏)는
할아버지 팔아먹는 것처럼 보일까 봐 자기(自己) 입으로 자랑한 적은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實際로) 해방(解放)되고 다들 어렵게 지내던 시절(時節)에 윤(尹) 의사(醫師)의 미망인(未亡人)이 쥐꼬리 만큼의 도움을 받은 것조차도 남편(男便) 뼈를 팔아 먹고 산다고 수근거린 인간(人間)들이 있다고. 거기다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후손(後孫)들을 공짜(空짜)나 바라며 사는 사람들 취급(取扱)하는 인간(人間)들도 있다
는 사실(事實)에 충격(衝擊)을 받았다며 토로(吐露)하기도 했다.
#
#
가장 잘 알려진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라 할 수 있는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 후손(後孫)들이 이런 일을 겪었을 정도(程度)니, 후방(後方) 지원(支援)이나 좌파(左派) 계열(系列)같이 여러 가지 이유(理由)로 잘 알려지지 못한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후손(後孫)들은 어땠을지
더 이상(以上)의 자세(仔細)한 설명(說明)은 생략(省略)한다.
[41]
가장 가관(可觀)인 것은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후손(後孫)들의 대우(待遇)를 잘해주자고 하면서도 자신(自身)들과 정치적(政治的) 이해관계(利害關係)나 행보(行步)가 틀리다 싶으면 가차(假借) 없이 좋지 않게 취급(取扱)을 하는 점(點)이다. 김구(金九) 손자(孫子)들처럼 뇌물(賂物)을 받았다가 쇠고랑을 찬 것이라면 모를까.
[42]
위의 일련(一連)의 일로 고통(苦痛)을 받지 않았더라도 조상(祖上) 후광(後光) 안 보고 열심히(熱心히) 사는 게 옳다고 보고 조상(祖上) 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事實) 대다수(大多數)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무언가 대가(代價)를 바라고 활동(活動)한 것이 아닌, 순수(純粹)한 신념(信念)에서 활동(活動)한 것이기 때문.
[43]
이에 후손(後孫)들 역시(亦是) 자수성가(自手成家) 하거나 그냥 말없이 평범(平凡)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보상(補償) 문제(問題)가 언급(言及)되면
"금전(金錢) 따위로 선조(先祖)의 업적(業績)을 평가(評價)하려 들지 마라"
며 불쾌(不快)하게 여기기도 한다. 괜히 윤주경(尹柱卿)이 친일파(親日派) 후손(後孫) 돈 삥뜯어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후손(後孫)들 도와주자는 일각(一角)의 주장(主張)에 회의적(懷疑的)인 것이 아니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事實)을 하나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독립(獨立) 후(後)에도 대다수(大多數)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철저히(徹底히) 무시(無視)받고 식민지(植民地) 부역자(附逆者)들이 경제적(經濟的)/정치적(政治的) 기득권(旣得權)을 잃지 않는 일이 한국(韓國)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식민지배국(植民支配國) 출신(出身) 인사(人士)들이 독립(獨立) 후(後)에도 경제적(經濟的) 기득권(旣得權)을 유지(維持)하거나 요직(要職)을 차지하는 등(等) 한국(韓國)보다 더한 일을 겪은 신흥독립국(新興獨立國)들도 있었다. 더 충격적(衝擊的)인 것은 독립(獨立) 후(後)에도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탄압(彈壓)받는 일 역시(亦是) 한국(韓國)만이 겪은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세(仔細)한 것은
식민주의(植民主義)/영향(影響)
참조(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