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라고 하면 모두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傾向)이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境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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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있기에 유의(留意)할 필요(必要)가 있다. 다음과 같은 예시(例示)들이 대표적(代表的)이다.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의 경우(境遇)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에 일본제국(日本帝國)에 붙어서 출세(出世)를 하고 싶었으나 기회(機會)가 없었다. 이에 적극적(積極的)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까지 하면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의 눈에 들고자 하였으나 실패(失敗)하였다. 그러던 중(中) 일본(日本)이 패전(敗戰)할 것 같은 기미(幾微)가 보이자, 조선(朝鮮)이 독립(獨立)하여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國家)가 될 것으로 예상(豫想)하고 재빠르게 태세(態勢)를 전환(轉換)하여 독립운동단체(獨立運動團體)의 말단(末端)에서 일하다가 일본(日本)에 의(依)해 1년(年) 가량(假量) 투옥(投獄)되었다. 이후(以後)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에서 활동(活動)하며 다시 출세(出世)를 꿈꾸었으나, 예상(豫想)과는 달리 남쪽(南쪽)에는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국가(國家)가 설립(設立)되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다가 투옥(投獄)된 것은 맞고,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서의 직책(職責)도 말단(末端)에 불과(不過)했기 때문에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에 거듭 유공자(有功者) 신청(申請)을 하였고 끝내 유공자(有功者)로 지정(指定)되었다.
시대(時代)를 잘 만난 폭력배(暴力輩)
조직폭력배(組織暴力輩)
로 활동(活動)하면서 일본인(日本人)이든 조선인(朝鮮人)이든 가리지 않고 착복(着服)하던 인물(人物)이었다. 원래(元來)는
일본제국(日本帝國)
에 붙어서 더 많은 혜택(惠澤)을 받고 싶었지만, 총독부(總督府)의 관료(官僚)들은 말로만
내선일체(內鮮一體)
를 주장(主張)할 뿐 조선인(朝鮮人)인 그를 멸시(蔑視)하고 차별(差別)할 뿐이었다. 이에 분노(憤怒)한 그는 평소(平素) 괴롭히던 사람들 중(中) 일본인(日本人)을 더욱 특별히(特別히) 괴롭히기 시작(始作)했다. 이에 독립운동단체(獨立運動團體)의 눈에 들어서 그들이 지목(指目)하는 대상(對象)을 공격(攻擊)하는 활동(活動)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활동자금(活動資金)을 지원(支援)받고도 이를 음주(飮酒)와 매춘(賣春) 등(等)의
유흥비(遊興費)
로 탕진(蕩盡)하거나 아예 잠적(潛跡)해버리기 일쑤였고,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찾아와 누누이(累累이) 달래고 타이르면 못내 한 번(番)씩 활동(活動)하는 수준(水準)이었다. 그러나 아무튼 독립운동단체(獨立運動團體)를 거들어서 무력(武力)을 행사(行使)하는 활동(活動)을 한 것은 사실(事實)이고 공산당(共産黨)과의 접점(接點)도 없었기에, 해방(解放) 후(後) 그 또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인정(認定)받고 출세(出世)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