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年) 7월(月),
독립운동(獨立運動)
자금(資金)의 모금(募金)을 위해 한때 귀국(歸國)해
충청도(忠淸道)
와 전라도(全羅道) 등지(等地)에서 모금(募金)하여 다시
상하이
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한당사령부장(黨司令部長)을 맡게 되었다. 1922년(年) 11월(月) 중순(中旬)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의 이시영,
이동휘
, 조소앙(趙素昻),
김원봉(金元鳳)
등(等)과 의논(議論)해
조선총독(朝鮮總督)
및 주요(主要) 관공서(官公署)에 대(對)한 암살(暗殺) 및 파괴(破壞)를 목적(目的)으로 하는 계획(計劃)을 치밀(緻密)하게 세웠는데 1923년(年) 1월(月)
총독(總督)
사이토 마코토
제독(提督)
이 '일본제국의회(日本帝國議會)'에 참석(參席)하기 위한
도쿄
행(行)을 기회(機會)로 총살(銃殺)하려는 계획(計劃)이었다. 임시정부(臨時政府)에서는
안홍한(韓)
을 수행(遂行)시켜
권총(拳銃)
4정(梃)과 실탄(實彈) 수백(數百) 발(發), 대형(大型) 폭탄(爆彈)은
의열단(義烈團)
에서 맡아
김한
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鴨綠江)
을 건너
경성(京城)
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김상옥은
상하이
를 떠나면서
농부(農夫)
차림으로 변장(變裝)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철교(鴨綠江鐵橋)
를 건너면서
국경(國境) 경찰(警察)
을 사살(射殺)하였고,
신의주(新義州)
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稅關檢問所) 세관원(稅關員)을 권총(拳銃)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等) 격투(格鬪) 끝에 국내(國內) 잠입(潛入)에 성공(成功)하였다. 이후(以後)
서울
에 와서 김한(金韓), 서대순 등(等) 동지(同志)들과 만나 총독(總督)을 암살(暗殺)하기 위한 치밀(緻密)한 거사(擧事) 계획(計劃)을 세웠으나 상하이 주재(駐在)
일본(日本) 경찰(警察)
의 통보(通報)로 일제(日帝)가 경계(警戒)를 강화(强化)하자 총독(總督) 암살(暗殺) 거사(巨事)는 시일(時日)을 끌게 되었다.
1923년(年) 1월(月) 12일(日) 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에 폭탄(爆彈)을 던져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만들었는데 이 폭발(爆發)로 건물(建物)의 일부(一部)가 파손(破損)되고 행인(行人) 남자(男子) 6명(名)과 여자(女子) 1명(名)이 중경상(重輕傷)을 입는 등(等) 큰 소동(騷動)이 났다. 마루야마 경무국장(警務局長)이 수사(搜査)를 진두지휘(陣頭指揮)하고 경성검시국(京城檢時局)의 오하라 검사(檢査)가 나서 수사(搜査)했지만 의거(依據) 당시(當時)만 하더라도 의거(義擧)의 주인공(主人公)이 누구인가에 대(對)해서는
일본(日本) 경찰(警察)
도 정확히(正確히) 모르고 있었다가 1월(月) 17일(日) 일본(日本) 경찰(警察)은 의거(義擧)의 장본인(張本人)을 알아내고 은신처(隱身處)를 추적(追跡)하였는데 1월(月) 17일(日) 새벽 3시(時) 은신처(隱身處)인 매부(妹夫)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수사주임(搜査主任)
미(美)와 와사부로
에게 탐지(探知)되었다.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우메다와 이마세(歲) 두 경부(頸部)의 지휘(指揮) 아래 20여(餘) 명(名)의 무장(武裝) 경찰(警察)에게 은신처(隱身處)가 포위(包圍)되었는데 고봉근의 행랑방(行廊房)에 있던 여자(女子)가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에 있는 친정(親庭)오빠에게 밀고(密告)하여 탄로(綻露)난 것이다.
은신처(隱身處)가 탄로(綻露)나자 김상옥은 단신(單身)으로
두 손에 권총(拳銃)
을 들고 그를 잡으러 온
일본(日本) 경찰(警察)
과 총격전(銃擊戰)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유도(誘導) 사범(事犯)이며 형사부장인(刑事部長人) 다무라를 사살(射殺)한 다음에는 이마세(歲)와 우메다 경부(頸部)를 사살(射殺)하고 다른 일본(日本) 경찰(警察) 여러 명(名)에게 중상(重傷)을 입힌 뒤에 추격(追擊)하는 일본(日本) 경찰(警察)에게 사격(射擊)을 가(加)하면서 가옥(家屋)의
옥상(屋上)
을 뛰어 다니며 도주(逃走)했다. 일본(日本) 경찰(警察)은
육군(陸軍)
병력(兵力)을 지원(支援)받아 산(産)을 포위(包圍)했지만 김상옥은 눈 덮인
남산(南山)
을 거쳐
금호동
에 있는
안장사
에 이르러
스님
에게 승복(僧服)과 짚신을 빌려 변장(變裝)하고 교묘(巧妙)하게 산(山)을 내려왔다.
[8]
1월(月) 18일(日)은 무내미 이모(姨母)집에서 유숙(留宿)하고 1월(月) 19일(日) 새벽 삼엄(森嚴)한 일본(日本) 경찰(警察)의 경계망(警戒網)을 피해(被害)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隱身)하며 동상(凍傷)도
치료(治療)
하는 등(等) 앞으로의 거사(擧事) 계획(計劃)을 구상(構想)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年) 1월(月) 22일(日) 새벽
최후(最後)
의 은신처(隱身處)마저
일본(日本) 경찰(警察)
에 탐지(探知)되고 말았다.
상하이
로부터의 서신(書信)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傳)해 준 전우진이 일본(日本) 경찰(警察)의 수사망(搜査網)에 걸려들어 붙잡혀 고문당한 끝에 실토(實吐)하면서 은신처(隱身處)가 발각(發覺)된 것이다. 1월(月) 22일(日) 5시(時) 반경(半頃) 경기도(京畿道) 경찰부장(警察部長) 우마노가 총지휘관(總指揮官)이 되고 보안과장(保安課長) 후지모토가 부지휘관(副指揮官)이 되어 시내(市內) 4곳의 경찰서(警察署)에 총비상령(總非常令)이 내려졌다. 이때 기마대(騎馬隊)와 무장(武裝) 경관(警官) 400여(餘) 명(名)이나 동원(動員)되어
[9]
은신처(隱身處)를 중심(中心)으로 효제동 일대(一帶)를 겹겹이 포위(包圍)하였으며 왜경(倭警) 결사대(決死隊)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김상옥은 미처 피신(避身)하지 못하자 권총(拳銃)으로 무장(武裝)한 다음 방(房) 안 벽장(壁欌)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는데 구리다 경부(頸部)가 방(房)으로 들어와 벽장(壁欌) 안(案)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자 김상옥은 그를 가장 먼저 총(銃)으로 쏘았다. 그 다음 벽장(壁欌)과 붙어 있던 집 벽(壁)을 뚫고 순식간(瞬息間)에 옆집 74번지(番地)를 지나 76번지(番地)로 피신(避身)하였으나 겁(怯)에 질린 76번지(番地) 집주인(집主人)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抵抗)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番地)로 갔다.
[10]
이후(以後) 담벼락을 지탱(支撐)해 권총(拳銃) 2자루로 무려(無慮) 3시간(時間) 반(半) 동안이나 총격전(銃擊戰)을 벌이다가 총알(銃알)마저 떨어지자 벽(壁)에 기댄 채로 "대(對)한 독립(獨立) 만세(萬歲)"를 외치면서 마지막 1발(發)을 스스로의 머리에 쏘아 자결(自決)해 순국(殉國)하였다. 현장(現場)은 현(現)
대학로(大學路)
36-4번지(番地) 일대(一帶)다.
[11]
김상옥은 순국(殉國)하고 나서까지도 일본군(日本軍)들을 떨게 했는데 두 눈을 뜨고 이를 악문 채 양손(兩손)에는 권총(拳銃)을 꾹 쥔 채로 사망(死亡)하여 그의 시신(屍身)을 본 경관(景觀)들이 두려워했을 정도(程度)였다고 한다. 결국(結局) 그의
어머니
를 불러다 생사(生死)를 확인(確認)하게 하였다. 나중에 김상옥(金相玉)의 가족(家族)들이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했을 때 확인(確認)한 결과(結果) 몸에는 총(銃) 11발(發)의 총상(銃傷)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결(自決)에 사용(使用)한 두부(豆腐)의 1발(發)을 제외(除外)하면 10발(發)의 총알(銃알)을 맞은 것이다.
신념(信念)은 총알(銃알)로 부서지지 않는다
는 것을 몸소 증명(證明)한 셈. 수백여(數百餘) 명(名)의 추격(追擊)을 받으며 3시간(時間) 반(半)이나 총격전(銃擊戰)을 했음에도 피격(被擊)당한 총알(銃알)이 10발밖에 안 된다는 것도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