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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 나무위키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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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公約) 10조(兆)
① 천하(天下)의 정의(正義)의 사(社)(事)를 맹렬히(猛烈히) 실행(實行)하기로 함(函).
② 조선(朝鮮)의 독립(獨立)과 세계(世界)의 평등(平等)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犧牲)하기로 함(函).
③ 충의(忠義)의 기백(氣魄)과 희생(犧牲)의 정신(精神)이 확고(確固)한 자(者)라 함(函).
④ 단(段)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團員)의 의(義)에 급히(急히) 함(函).
⑤ 의백(義伯) 1인(人)을 선출(選出)하여 단체(團體)를 대표함(代表咸).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每月) 1차(次)씩 사정(事情)을 보고(報告)함.
⑦ 하시 하지(夏至)에서나 매 초회(初回)(招會)에 필응(筆應)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單義)에 진(陳)(盡)함(艦).
⑨ 1이 9를 위하여 9가(街) 1을 위하여 헌신(獻身)함.
⑩ 단의(單義)에 배반한 자(者)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破壞)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各) 경찰서(警察署)
⑤ 기타(其他) 왜적(倭敵) 중요기관(重要機關)
7가살
조선총독(朝鮮總督) 이하(以下) 고관(高官)
② 군부(軍部) 수뇌(首腦)
대만총독(臺灣總督)
④ 매국노(賣國奴)
⑤ 친일파(親日派) 거두(巨頭)
적탐(貪)(밀정(密偵))
⑦ 반민족적(反民族的) 토호열신(土豪劣紳)(土豪劣紳)
김상옥 사진
출생(出生)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건덕방(乾德房) 어의동계(界)
(현(現)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종로구(鍾路區) 효제동)
사망(死亡)
1923년(年) 1월(月) 22일(日) (향년(享年) 34세(歲) [1] )
묘소(墓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묘역(墓域)-5호(號)
본관(本館)
학력(學歷)
어의동보통학교(普通學校)
경성영어학교(京城英語學校)
종교(宗敎)
조직(組織)
의거(義擧)
서훈(徐薰)
건국훈장(建國訓長) 대통령장(大統領章) 추서(追敍)
단체(團體)
사단법인(社團法人)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醫師記念事業會)

1 . 개요(槪要) 2 . 생애(生涯)
2.1 . 출생(出生)과 사업가(事業家) 김상옥 2.2 . 독립운동(獨立運動) 투신(投身) 2.3 . 거사(擧事)
3 . 기타 4 . 가족(家族) 5 . 대중매체(大衆媒體)에서

1. 개요(槪要) [편집(編輯)]

김상옥 흑백 사진
나의 생사(生死)가 이번(이番) 거사(擧事)에 달렸소. 만약(萬若) 실패(失敗)하면 내세(來世)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自決)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敵)의 포로(捕虜)가 되지는 않겠소 . [3]

한국(韓國)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 의열단(義烈團) 의 일원(一員)이었으며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폭탄(爆彈) 을 투척(投擲)하고 일본(日本) 경찰(警察) 들을 사살(射殺)하여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의 발판(발板)을 마련하였다는 평가(評價)를 받는다. 김상옥 의사(醫師)가 순국(殉國) 한 후(後) 국내외(國內外)에서 활발(活潑)한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이 전개(展開)되었으며 거사(擧事) 당시(當時) 쌍권총(雙拳銃) 을 사용(使用)하였다는 점(點)도 유명(有名)하다.

2. 생애(生涯) [편집(編輯)]

2.1. 출생(出生)과 사업가(事業家) 김상옥 [편집(編輯)]

1890년(年) 1월(月) 5일(日)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건덕방(乾德房) 어의동계(界) [4] 에서 구한말(舊韓末) 군관(軍官)을 지낸 아버지 김귀현(金貴鉉)과 독립유공자인(獨立有功者人) 어머니 김점순 사이의 차남(次男)으로 태어났으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不遇)한 환경(環境) 속에서 성장(成長)하였다. 한학(漢學)을 수학(修學)하는 동시(同時)에 어의동보통학교(普通學校) [5] 를 다녔다. 14세(歲)부터 낮에는 철 공장(工場) 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夜間) 학교(學校) 에서 공부(工夫)하는 한편(한便) 개신교(改新敎) 신자(信者)가 되었다.

1910년(年) 경성(京城) 영어(英語) 학교(學校)를 다니면서 국제(國際) 정세(情勢)와 서양(西洋) 문화(文化)에 안목(眼目)을 넓혔고 1912년(年) 동대문(東大門) 창신동(昌信洞) 에서 '영덕철물상회(盈德鐵物商會) '를 경영(經營)하였으며 1913년(年) 정진주와 혼인(婚姻) 하였다. 1917년(年)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 과 일화(日貨)(日貨) 배척(排斥) 운동(運動)을 전개(展開)하였는데 이를 위해 말총모자(帽子)를 창안(創案)하고 생산(生産)해 보급(普及)하였으며 당시(當時) 말총모자(帽子) 판매고(販賣高)로 3만(萬)~4만(萬)의 수익(收益)을 올렸다. [6] 사업(事業) 수완(手腕)이 좋았는지 그가 운영(運營)하던 철물점(鐵物店)은 이내(以內) 직원(職員) 50명(名)을 거느린 철공소(鐵工所)로 발전(發展)했고 김상옥(金相玉)의 철공소(鐵工所)는 각종(各種) 독립자금(獨立資金)을 지원(支援)하는 동시(同時)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의 비밀(祕密) 거점(據點)이 되었으며 농기구(農器具), 장갑(掌匣), 양말(洋襪) 등(等)도 생산(生産)해 지방(地方)을 순회(巡廻)하면서 국산(國産) 품을 장려(奬勵)하는 데 앞장섰다.

2.2. 독립운동(獨立運動) 투신(投身) [편집(編輯)]

본격적(本格的)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 에 투신(投身)하게 된 것은 3.1 운동(運動) 이후(以後)부터였다. 3.1 운동(運動) 당시(當時) 태극기(太極旗) 를 대량(大量) 제작(製作)해 배포(配布)했으며 철공소(鐵工所) 직원(職員) 50명(名)과 함께 직접(直接) 시위(示威)에 참가(參加)하기도 했다. 1919년(年) 4월(月) 동대문교회의 영국인(英國人) 피어슨 여사(女史) 집에서 '혁신단(革新團)'이라는 비밀(祕密) 결사(結社)를 조직(組織)하고 『혁신공보(革新公報)』 [7] 를 발간(發刊)해 독립(獨立) 사상(思想)을 계몽(啓蒙)하고 고취(鼓吹)하였다. 1919년(年) 12월(月) 암살단(暗殺團)을 조직(組織)해 일본(日本) 고관(高官) 및 친일민족반역자(親日民族反逆者) 에 대(對)한 응징(膺懲) 및 숙청(肅淸)을 기도(祈禱)하였고 1920년(年) 4월(月) 한훈(韓焄) , 유장렬 등(等)과 함께 전라도(全羅道) 지방(地方)에서 친일민족반역자(親日民族反逆者) 서씨(徐氏) 등(等)을 총살(銃殺)하였으며 조성헌병대분소(造成憲兵隊分所)를 습격(襲擊)해 장총(長銃) 3정(梃)과 군(軍)도 1개(個)를 탈취(奪取)하였다.

1920년(年) 8월(月) 24일(日), 미국(美國) 의원단(議員團)이 동양(東洋) 각국(各國)을 시찰(視察)하는 길에 내한(來韓)한다는 소식(消息)을 접(接)하자 1920년(年) 5월(月)부터 북로(北路)군정서 김동순 , 윤익중 , 신화수, 서대순 등(等)의 동지(同志)를 지휘(指揮)해 환영(歡迎)하기 위해 나오는 조선총독(朝鮮總督) 사이토 마코토 및 일본(日本) 고관(高官)을 암살(暗殺)하는 계획(計劃)을 추진(推進)하였지만 거사(擧事) 계획(計劃)은 실천(實踐)에 옮기기도 전(前)에 일본(日本) 경찰(警察) 에게 탐지(探知)되었고 동지(同志)들이 붙잡혀 단독(單獨)으로 거사(擧事)를 추진(推進)했으나 여의(如意)치 않자 10월(月) 말(末) 중국(中國) 상하이 망명(亡命) 하였다. 11월(月)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김구(金九) , 이시영 , 조소앙(趙素昻) , 신익희 등(等)과 독립운동(獨立運動) 거사(擧事) 계획(計劃)에 참여(參與)하는 동시(同時)에 의열단(義烈團) 에 입단(入團)하였다.

2.3. 거사(擧事) [편집(編輯)]

1921년(年) 7월(月), 독립운동(獨立運動) 자금(資金)의 모금(募金)을 위해 한때 귀국(歸國)해 충청도(忠淸道) 와 전라도(全羅道) 등지(等地)에서 모금(募金)하여 다시 상하이 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한당사령부장(黨司令部長)을 맡게 되었다. 1922년(年) 11월(月) 중순(中旬)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의 이시영, 이동휘 , 조소앙(趙素昻), 김원봉(金元鳳) 등(等)과 의논(議論)해 조선총독(朝鮮總督) 및 주요(主要) 관공서(官公署)에 대(對)한 암살(暗殺) 및 파괴(破壞)를 목적(目的)으로 하는 계획(計劃)을 치밀(緻密)하게 세웠는데 1923년(年) 1월(月) 총독(總督) 사이토 마코토 제독(提督) 이 '일본제국의회(日本帝國議會)'에 참석(參席)하기 위한 도쿄 행(行)을 기회(機會)로 총살(銃殺)하려는 계획(計劃)이었다. 임시정부(臨時政府)에서는 안홍한(韓) 을 수행(遂行)시켜 권총(拳銃) 4정(梃)과 실탄(實彈) 수백(數百) 발(發), 대형(大型) 폭탄(爆彈)은 의열단(義烈團) 에서 맡아 김한 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鴨綠江) 을 건너 경성(京城) 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김상옥은 상하이 를 떠나면서 농부(農夫) 차림으로 변장(變裝)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철교(鴨綠江鐵橋) 를 건너면서 국경(國境) 경찰(警察) 을 사살(射殺)하였고, 신의주(新義州) 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稅關檢問所) 세관원(稅關員)을 권총(拳銃)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等) 격투(格鬪) 끝에 국내(國內) 잠입(潛入)에 성공(成功)하였다. 이후(以後) 서울 에 와서 김한(金韓), 서대순 등(等) 동지(同志)들과 만나 총독(總督)을 암살(暗殺)하기 위한 치밀(緻密)한 거사(擧事) 계획(計劃)을 세웠으나 상하이 주재(駐在) 일본(日本) 경찰(警察) 의 통보(通報)로 일제(日帝)가 경계(警戒)를 강화(强化)하자 총독(總督) 암살(暗殺) 거사(巨事)는 시일(時日)을 끌게 되었다.

1923년(年) 1월(月) 12일(日) 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에 폭탄(爆彈)을 던져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만들었는데 이 폭발(爆發)로 건물(建物)의 일부(一部)가 파손(破損)되고 행인(行人) 남자(男子) 6명(名)과 여자(女子) 1명(名)이 중경상(重輕傷)을 입는 등(等) 큰 소동(騷動)이 났다. 마루야마 경무국장(警務局長)이 수사(搜査)를 진두지휘(陣頭指揮)하고 경성검시국(京城檢時局)의 오하라 검사(檢査)가 나서 수사(搜査)했지만 의거(依據) 당시(當時)만 하더라도 의거(義擧)의 주인공(主人公)이 누구인가에 대(對)해서는 일본(日本) 경찰(警察) 도 정확히(正確히) 모르고 있었다가 1월(月) 17일(日) 일본(日本) 경찰(警察)은 의거(義擧)의 장본인(張本人)을 알아내고 은신처(隱身處)를 추적(追跡)하였는데 1월(月) 17일(日) 새벽 3시(時) 은신처(隱身處)인 매부(妹夫)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수사주임(搜査主任) 미(美)와 와사부로 에게 탐지(探知)되었다.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우메다와 이마세(歲) 두 경부(頸部)의 지휘(指揮) 아래 20여(餘) 명(名)의 무장(武裝) 경찰(警察)에게 은신처(隱身處)가 포위(包圍)되었는데 고봉근의 행랑방(行廊房)에 있던 여자(女子)가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에 있는 친정(親庭)오빠에게 밀고(密告)하여 탄로(綻露)난 것이다.

은신처(隱身處)가 탄로(綻露)나자 김상옥은 단신(單身)으로 두 손에 권총(拳銃) 을 들고 그를 잡으러 온 일본(日本) 경찰(警察) 과 총격전(銃擊戰)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유도(誘導) 사범(事犯)이며 형사부장인(刑事部長人) 다무라를 사살(射殺)한 다음에는 이마세(歲)와 우메다 경부(頸部)를 사살(射殺)하고 다른 일본(日本) 경찰(警察) 여러 명(名)에게 중상(重傷)을 입힌 뒤에 추격(追擊)하는 일본(日本) 경찰(警察)에게 사격(射擊)을 가(加)하면서 가옥(家屋)의 옥상(屋上) 을 뛰어 다니며 도주(逃走)했다. 일본(日本) 경찰(警察)은 육군(陸軍) 병력(兵力)을 지원(支援)받아 산(産)을 포위(包圍)했지만 김상옥은 눈 덮인 남산(南山) 을 거쳐 금호동 에 있는 안장사 에 이르러 스님 에게 승복(僧服)과 짚신을 빌려 변장(變裝)하고 교묘(巧妙)하게 산(山)을 내려왔다. [8] 1월(月) 18일(日)은 무내미 이모(姨母)집에서 유숙(留宿)하고 1월(月) 19일(日) 새벽 삼엄(森嚴)한 일본(日本) 경찰(警察)의 경계망(警戒網)을 피해(被害)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隱身)하며 동상(凍傷)도 치료(治療) 하는 등(等) 앞으로의 거사(擧事) 계획(計劃)을 구상(構想)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年) 1월(月) 22일(日) 새벽 최후(最後) 의 은신처(隱身處)마저 일본(日本) 경찰(警察) 에 탐지(探知)되고 말았다. 상하이 로부터의 서신(書信)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傳)해 준 전우진이 일본(日本) 경찰(警察)의 수사망(搜査網)에 걸려들어 붙잡혀 고문당한 끝에 실토(實吐)하면서 은신처(隱身處)가 발각(發覺)된 것이다. 1월(月) 22일(日) 5시(時) 반경(半頃) 경기도(京畿道) 경찰부장(警察部長) 우마노가 총지휘관(總指揮官)이 되고 보안과장(保安課長) 후지모토가 부지휘관(副指揮官)이 되어 시내(市內) 4곳의 경찰서(警察署)에 총비상령(總非常令)이 내려졌다. 이때 기마대(騎馬隊)와 무장(武裝) 경관(警官) 400여(餘) 명(名)이나 동원(動員)되어 [9] 은신처(隱身處)를 중심(中心)으로 효제동 일대(一帶)를 겹겹이 포위(包圍)하였으며 왜경(倭警) 결사대(決死隊)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김상옥은 미처 피신(避身)하지 못하자 권총(拳銃)으로 무장(武裝)한 다음 방(房) 안 벽장(壁欌)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는데 구리다 경부(頸部)가 방(房)으로 들어와 벽장(壁欌) 안(案)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자 김상옥은 그를 가장 먼저 총(銃)으로 쏘았다. 그 다음 벽장(壁欌)과 붙어 있던 집 벽(壁)을 뚫고 순식간(瞬息間)에 옆집 74번지(番地)를 지나 76번지(番地)로 피신(避身)하였으나 겁(怯)에 질린 76번지(番地) 집주인(집主人)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抵抗)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番地)로 갔다. [10] 이후(以後) 담벼락을 지탱(支撐)해 권총(拳銃) 2자루로 무려(無慮) 3시간(時間) 반(半) 동안이나 총격전(銃擊戰)을 벌이다가 총알(銃알)마저 떨어지자 벽(壁)에 기댄 채로 "대(對)한 독립(獨立) 만세(萬歲)"를 외치면서 마지막 1발(發)을 스스로의 머리에 쏘아 자결(自決)해 순국(殉國)하였다. 현장(現場)은 현(現) 대학로(大學路) 36-4번지(番地) 일대(一帶)다. [11]

김상옥은 순국(殉國)하고 나서까지도 일본군(日本軍)들을 떨게 했는데 두 눈을 뜨고 이를 악문 채 양손(兩손)에는 권총(拳銃)을 꾹 쥔 채로 사망(死亡)하여 그의 시신(屍身)을 본 경관(景觀)들이 두려워했을 정도(程度)였다고 한다. 결국(結局) 그의 어머니 를 불러다 생사(生死)를 확인(確認)하게 하였다. 나중에 김상옥(金相玉)의 가족(家族)들이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했을 때 확인(確認)한 결과(結果) 몸에는 총(銃) 11발(發)의 총상(銃傷)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결(自決)에 사용(使用)한 두부(豆腐)의 1발(發)을 제외(除外)하면 10발(發)의 총알(銃알)을 맞은 것이다. 신념(信念)은 총알(銃알)로 부서지지 않는다 는 것을 몸소 증명(證明)한 셈. 수백여(數百餘) 명(名)의 추격(追擊)을 받으며 3시간(時間) 반(半)이나 총격전(銃擊戰)을 했음에도 피격(被擊)당한 총알(銃알)이 10발밖에 안 된다는 것도 대단하다.
  • 경성부(京城府)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에 폭탄(爆彈)을 투척(投擲)한 사람이 진짜(眞짜) 김상옥(金相玉)이 맞는지 의문(疑問) 을 제기(提起)하는 시각(視角)도 있다. 김상옥(金相玉)의 업적(業績)을 폄하(貶下)하려는 주장(主張)이 아니라 그의 궁극적(窮極的)인 목적(目的)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總督)을 서울역(서울驛) 에서 암살(暗殺)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日本) 경찰(警察) 의 심장부(心臟部)나 다름없는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에 폭탄(爆彈)을 투척(投擲)하면 당연히(當然히) 총독(總督)의 개인(個人) 경계(境界)도 강화(强化)될 것이 뻔한데 그런 거사(擧事)를 힘들게 만드는 우(愚)를 범(犯)할 이유(理由)가 있었겠냐는 것. 일제(日帝)는 진짜(眞짜) 장본인(張本人)을 찾지 못하고 김상옥(金相玉)의 소행(所行)으로 단정(斷定)해서 그를 추격(追擊)했다는 것이다. 다만 일각(一角)에서는 당시(當時)에 암살(暗殺)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判斷)하여 목표(目標)를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로 변경(變更)한 것일 수 있다는 의견(意見)도 제기(提起)되고 있다.
  • 일반적(一般的)으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들이 무장(武裝) 투쟁(鬪爭)에 사용(使用)하던 폭탄(爆彈)이 다소(多少) 만듦새가 조잡(粗雜)했던 것과는 달리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에 투척(投擲)된 폭탄(爆彈)은 위력(威力)이 대단했다고 한다. [12] 당시(當時)로서는 이 정도(程度)의 고성능(高性能) 폭탄(爆彈)을 제조(製造)할 기술력(技術力)을 지닌 독립운동(獨立運動) 단체(團體)가 의열단(義烈團) 밖에 없었던 것이 거의 분명하므로 김상옥(金相玉)의 의거(義擧)로 보는 것이 맞다는 의견(意見)이 지배적(支配的)이다. 김상옥(金相玉)이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에 폭탄(爆彈)을 투척(投擲)한 것은 일종(一種)의 실험적(實驗的)인 의거(依據)였다는 주장(主張)도 있는데 제조(製造)된 폭탄(爆彈)의 위력(威力)이 실전(實戰)에서는 어느 정도(程度)의 위력(威力)을 발휘(發揮)하는지 시험(試驗)도 해 볼 겸(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와 일본(日本) 경찰(警察)의 시선(視線)을 분산(分散)시키기 위해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에 폭탄(爆彈)을 투척(投擲)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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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옥(金相玉)이 전투(戰鬪)에서 사용(使用)한 권총(拳銃). 실물(實物)은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고 증거품(證據品)으로 찍힌 상단(上段)의 사진(寫眞)만 전(傳)해진다. 총열(銃열)이 조금 더 짧다는 점(點)과 방아쇠울이 다르게 생겼다는 점(點)을 빼면 S&W M2 와 비슷하다. 형태(形態)로 보아 은닉(隱匿)이 쉽도록 개인적(個人的)으로 개조(改造)한 모양(模樣)이다.
  •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훈장(建國訓長) 대통령장(大統領章) 및 독립장(獨立長)에 추서(追敍)되었다. 그의 유해(遺骸)는 1966년(年) 5월(月) 18일(日)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묘역(墓域)에 이장(移葬)되었다.
  • 우정사업본부(郵政事業本部) 에서 2023년(年) 1월(月) 27일(日) '김상옥 의사(義士) 순국(殉國) 100주년(周年)' 기념우표(記念郵票)를 발행(發行)하였다.
  • 이상(以上) 의 친구(親舊)로 유명(有名)했던 야수파(野獸派) 화가(畫家) 구본웅(具本雄) 이 중학생(中學生) 시절(時節) 그 김상옥(金相玉)의 순국(殉國) 현장(現場)을 목격(目擊)하였는데 이때의 강렬(强烈)한 영향(影響)이 그의 야수파(野獸派) 화풍(畫風)에 엄청난 영향(影響)을 끼쳤다고 한다.
  • 생전(生前) 별명(別名)은 '동대문(東大門) 홍길동(洪吉童)'이었다고 한다. 본진(本陣)과 같은 영덕철물점(盈德鐵物店)을 중심(中心)으로 독립자금(獨立資金)을 지원(支援)함은 물론(勿論), 무장투쟁(武裝鬪爭)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鍛鍊)하여 조선인(朝鮮人) 여학생(女學生)을 희롱(戱弄)하는 기마경찰(騎馬警察)을 맨손 [13] 으로 때려눕혀 검(劍)을 빼앗았을 만큼 무술(武術)에도 능(能)했으며 당시(當時) 총(銃)을 다루는 솜씨는 말 그대로 명사수(名射手)라 불릴 만큼 비범(非凡)했다고 한다. [14]
  • 사회활동(社會活動)에서도 상당히(相當히) 시대(時代)를 앞선 사람이다. 자신(自身)이 설립(設立)한 '영덕철물점(盈德鐵物店)'이라는 곳을 기반(基盤)으로 능란(能爛)한 사업수완(事業手腕)을 발휘(發揮)해 독립자금(獨立資金)을 조달(調達)했으며 당시(當時) 철물점(鐵物店) 종업원(從業員)들에게 요즘의 노동조합(勞動組合) 과 같은 단체(團體)를 설립(設立)해 자신(自身)들의 권익(權益)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고 단발령(斷髮令) 이후(以後) 사람들 사이에서 잘린 머리를 감추고 다니기 위해 모자(母子) 가 유행(流行)했는데 이것이 대개(大槪) 수입산(輸入産)이지라 말총을 이용(利用)한 모자(帽子)를 창안(創案)해 큰 인기(人氣)를 끌었다고 한다.
  • 그의 항일(抗日) 정신(精神)을 대표(代表)하는 일화(逸話) 중(中) 하나로 김상옥 의사(醫師)가 중국(中國) 에 있을 때 오랫동안 함께 활동(活動)하던 여류(女流) 독립투사(獨立鬪士) 장규동이 고문(拷問) 후유증(後遺症)으로 순국(殉國)한 일이 있었다. 이때 김구(金九) 는 김상옥에게 돈을 주며 '관(館)'을 사 오라고 했으나 김상옥은 그 돈으로 관(冠)을 사지 않고 권총(拳銃)을 사 왔다고 한다. 동료(同僚)의 원한(怨恨)을 갚고 독립(獨立)을 쟁취(爭取)하기 위해서는 관보(官報)다는 총(銃)이 더 필요(必要)하다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본 임시정부(臨時政府) 관계자(關係者)들은 크게 감탄(感歎)했다고 한다. 물론(勿論) 장례식(葬禮式)을 위한 관(官)은 동지(同志)들이 돈을 모아 따로 구입(購入)했다고 한다. [15]
  • 보통(普通) 여느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이 벌인 의거(義擧)를 기리는 행사(行事)를 할 때 '의거(義擧) 기념식(記念式)'이라는 표현(表現)을 쓰고 사망자(死亡者)들은 순국(殉國) '추모식(追慕式)'이라는 용어(用語)를 쓰지만 김상옥 의사(醫師)는 사망일(死亡日)이 1월(月) 22일(日)임에도 '순국(殉國) 추모식(追慕式)'이라는 말 대신(代身) '시가전(市街戰) 승리(勝利) 기념식(記念式)' 또는 '독립활동(獨立活動) 기념식(記念式)'이라는 용어(用語)를 쓴다. 비록 일본(日本) 제국(帝國) 경찰(警察) 과 서울시내(市內)에서 총격전(銃擊戰)을 벌이고 마지막 1발(發)로 순국(殉國)했으나 ' 시가전(市街戰) '이라고 칭송(稱頌)될 만큼 혁혁(赫赫)한 공로(功勞)를 세운 데다 당시(當時) 일제(日帝)에 준 충격(衝擊)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역사가(歷史家)에 따라서는 김상옥 의사(醫師)가 펼친 활약(活躍)으로 일본(日本)에 억눌린 한민족(韓民族) 이 저항(抵抗)을 위한 의지(意志)를 되찾았고 이후(以後) 항일(抗日) 무장투쟁(武裝鬪爭)을 위한 발판(발板)을 마련했다고 평가(評價)하기도 한다.
  • 실제로(實際로) 생존(生存) 애국지사(愛國志士) 중(中) 한 명(名)은 어릴 적 신문(新聞)에 난 김상옥 의사(醫師)의 투쟁(鬪爭)을 보고 '일본(日本) 놈들은 수천(數千) 명(名)인데 왜 이분은 홀로 싸우시는가?'라며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증언(證言)하기도 했다.
  • 순국(殉國) 당시(當時)의 일화(逸話)에서도 일본(日本) 제국(帝國) 경찰(警察) 들이 김상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잘 나타난다. 김상옥 의사(醫師)는 마지막 총알(銃알)로 자결(自決)한 후(後)에도 양손(兩손)에 권총(拳銃)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본 일본(日本) 제국(帝國) 경찰(警察) 들은 김(金) 의사(醫師)가 살아 있을까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結局) 김(金) 의사(醫師)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生死)를 확인(確認)하게 했다고 한다.
  • 종로(鍾路)5가(街) 효제동에는 김상옥 의사(義士) 의거(義擧)터라는 정류장(停留場)(정류장(停留場) ID : 01-204)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김상옥 의사(醫師)가 자결(自決)한 집이 있는 곳은 이미 허물어져 골목길의 일부(一部)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대신(代身) 종각역(鐘閣驛) 8번(番) 출구(出口) 앞에 김상옥 열사(烈士)의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폭파(爆破) 의거(義擧)를 기념(記念)하는 표지석(標識石)이 세워져 있다. #
  • 문서(文書) 상단(上段)에도 있는 김상옥 의사(義士)의 사진(寫眞)은 거사(巨事)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찍은 것인데 특이(特異)하게 뒷짐을 진 자세(姿勢)를 취(取)하고 있다. 일제(日帝)에게 나라를 빼앗기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손이 부끄러워 차마 드러낼 수 없어 손이 보이지 않도록 뒷짐을 지고 사진(寫眞)을 찍은 것이라고. 이 모습은 대학로(大學路) 마로니에 공원(公園)에 세워진 그의 동상(銅像)에도 재현(再現)되었다.
  • 관련도서(關聯圖書): <김상옥 평전(評傳), ISBN 978-89-285-0695-8>,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김상옥, ISBN 979-11-982658-0-7>, <경성(京城)을 쏘다, ISBN 978-89-6319-100-3>,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쌍권총(雙拳銃) 김상옥>, <이몸 하나로 일본제국(日本帝國)을 깨련다> 등(等)

4. 가족(家族) [편집(編輯)]

  • 부(部) : 김귀현 - 모(某) : 김점순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1995년(年)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 추서(追敍))
    • 누나 : 김아기 - 매제(妹弟) : 고봉근
      • 조카 : 고(高)ㅇㅇ
    • 형(兄) : 김춘옥 - 형수(兄嫂) : 박도순
    • 동생 : 김춘원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1990년(年) 건국훈장(建國訓長) 애족장(愛族章) 추서(追敍)) - 제수(祭需) : 이아기
      • 조카 : 김태순
  • 처(妻) : 정진주 [16]
    • 장남(長男) : 김태용 (동아일보 기자(記者), 요절(腰絶))
    • 양자(兩者) : 김태운(金泰運) [17] - 며느리 : 한정수
      • 손자(孫子) : 김주동 - 손부(部) : 최경순
      • 손자(孫子) : 김민홍 - 손부(部) : 여현미
      • 손녀(孫女) : 김영심 - 손서(孫壻) : 김영돈
      • 손녀(孫女) : 김영실 - 손서(孫壻) : 이두표
      • 손녀(孫女) : 김영욱(金榮郁, 1962. 2. 2 ~ ) - 손서(孫壻) : 최신호(最新號)(崔信浩, 1959. 9. 27 ~ ) [18]
        • 증손(曾孫) : 김종찬, 김종근, 김종한, 김지원(金支援)
        • 외증손(外曾孫) : 김용민(金容民), 김주아, 이선호, 이진호, 최예진, 최예은
    • 딸 : 김의정(요절(腰絶)) - 사위 : 김진익(요절(腰絶))
      • 외손(外孫) : 김효기(요절(腰絶))
      • 외손(外孫) : 김세원 - 외손부(外孫婦) : 지영희(池瑛熙)
        • 외증손(外曾孫) : 김남석, 김남연

5. 대중매체(大衆媒體)에서 [편집(編輯)]

일본(日本) 철혈(鐵血) 통치(統治)의 핵심(核心)인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폭탄(爆彈) 을 투척(投擲)하고 일본(日本) 군경(軍警)에 혼자 맞서 총격전(銃擊戰)을 벌일 정도(程度)의 인물(人物)임에도 이상(異常)하리마만큼 대중(大衆)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고 대중매체(大衆媒體)에서도 다뤄지지 않았다. 그나마 인터넷과 대중매체(大衆媒體)의 발달(發達)로 그의 행적(行跡)이 넷상(上)이나 유튜브 등지(等地)에서 다뤄지는 빈도수(頻度數)가 꽤 증가(增加)해서 예전보다는 확실히(確實히) 인지도(認知度)가 올라갔다. 드라마틱한 생애(生涯)로 영웅(英雄) 그 자체(自體)이기 때문에 영화(映畫) 드라마 를 만드는데 적합한 인물(人物)이지만 실제(實際) 작업(作業)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8.15 광복(光復) 이후(以後) 영화화(映畫化)를 위한 시도(試圖)가 있었으나 무산(霧散)되었고 이후(以後)에도 여러차례(次例) 시도(試圖)가 있었으나 번번히 엎어졌다. 그나마 가장 비슷하고 유명(有名)한 것이 아래에 기술(記述)된 영화(映畫) 암살(暗殺) 에서 하정우(河正宇) 가 분한 남주인공(男主人公) '하와이 피스톨'이다.
  • 2015년(年) 개봉(開封)한 영화(映畫) < 암살(暗殺) >에서 배우(俳優) 하정우(河正宇) 가 연기(延期)한 ' 하와이 피스톨 '의 모티브가 된 인물(人物)로 보인다. 김상옥(金相玉)의 별명(別名) 중(中) '경성(京城) 피스톨'이 있다는 점(點), 그리고 마지막 총격전(銃擊戰)까지 김상옥(金相玉)의 행적(行跡)이 캐릭터의 설정(設定) 및 상황(狀況) 여러 곳에서 오마주된다.
  • 2016년(年) 개봉(開封)한 영화(映畫) < 밀정(密偵) >에서 배우(俳優) 박희순 이 연기(延期)한 '김장옥'은 김상옥 의사(醫師)를 모티브로 한 인물(人物)이다.
  • 2019년(年) 드라마 <이몽>에서 조복래(朝服來)가 연기(延期)한 '김남옥'은 김상옥 의사(醫師)를 모티브로 한 인물(人物)이다.
  • 아래는 김상옥 의사(醫師)와 관련(關聯)된 다큐멘터리 자료(資料)다.
    • 김상옥 의사(醫師)의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폭탄(爆彈) 투척(投擲) 의거(義擧)를 중점적(重點的)으로 다룬 순국선열(殉國先烈)의 날 다큐멘터리 링크
    • 김상옥 의사(義士)의 생애(生涯)를 중점(重點)으로 순국(殉國)까지를 다룬 다큐멘터리 링크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1년(年) 11월(月) 18일(日) 방영분(放映分)에서 소개(紹介)되었다. 중간(中間)에 김상옥 의사(醫師)의 외손(外孫) 김세원 씨(氏)와, 동생 김춘원 씨(氏)의 딸로 2023년(年)에 95세(歲)의 고령(高齡)인 조카 김태순 씨(氏)가 출연(出演)해 인터뷰를 했고 외조카(外조카) [19] 의 음성(陰性) 인터뷰도 나왔다.
  • 세계일보(世界日報) 김동진 기자(記者)가 쓴 <1923 경성(京城)을 뒤흔든 사람들>이라는 서적(書籍)에서 김상옥 의사(醫師)와 의열단(義烈團)에 대(對)해 상세(詳細)하게 다루고 있다. 해당(該當) 서적(書籍)의 부제(副題)도 '의열단(義烈團), 경성(鏡城)의 심장(心臟)을 쏘다!'
[1] 의거(義擧) 101주년(周年) [2] 폭탄(爆彈) 투척(投擲) 후(後) 일본(日本) 경찰(警察) 들과 쌍권총(雙拳銃)으로 총격전(銃擊戰)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自決)하였다. [3] 상하이 를 떠나면서 남긴 김상옥 의사(醫師)의 말. 사실상(事實上)의 유언(遺言)이다. 오늘날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종로구(鍾路區) 서울효제초등학교(孝悌初等學校) 에 이 어록(語錄)의 비문(碑文)이 세워져 있다. [4] 현(現)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종로구(鍾路區) 효제동 [5] 오늘날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종로구(鍾路區) 서울효제초등학교(孝悌初等學校) . [6] 2021년(年) 환율(換率) 환산(換算) 기준(基準)으로 15억(億)이 넘는 금액(金額)이다. [7] 뒤에 『 독립신문(獨立新聞) 』으로 개제(改題) [8] 이때 추적(追跡)을 방지(防止)하기 위(爲)해 짚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안장사 방향(方向)으로 발자국이 향(向)하도록 짚신을 신었다는 이야기. [9] 실제로(實際로) 경관(景觀)이 몇 명(名)이나 동원(動員)됐는지는 설(說)이 다양(多樣)하다. 일부(一部)에서는 1000여명(餘名)이라고 주장(主張)하기도 하며 당시(當時) 언론(言論)에는 100명(名)이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10] 이 과정(過程)에서 72번지(番地) 거주민(居住民)이었던 이진옥(李鎭玉)이라는 노인(老人)이 유탄(流彈)에 부상(負傷)을 입었다. [11] 이때의 포위(包圍) 광경(光景)을 당시(當時) 17살이던 서양화가(西洋畫家) 구본웅(具本雄) 이 목격(目擊)했다고 한다. 구본웅(具本雄)은 자신(自身)이 목격(目擊)한 김상옥 의사(醫師)의 저항(抵抗)을 시화집(詩畫集) "허둔기(虛鈍器)"에 그림 로 남겼을 정도(程度)로 감격(感激)했지만 이후(以後)의 친일(親日) 행적(行跡)으로 논란(論難)이 있다. [12] 당시(當時) 언론(言論) 보도(報道)에서는 폭탄(爆彈) 제조자(製造者)가 유대인(유대人) 이나 아랍인(人) 일 것이라고 추측(推測)할 정도(程度)로 위력(威力)이 대단했다고 한다. KBS 다큐 등(等)에 따르면 폭탄(爆彈)의 제조자(製造者)는 이태준 선생(先生)이 소개(紹介)해 준 헝가리인(人) 이었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고 한다. 다만 이태준(李泰俊)은 이미 1921년(年) 죽었고 사건(事件)은 2년(年) 후(後)의 일이므로 사실성(寫實性)이 떨어진다고 보는 시각(視角)도 있다. [13] 기마경찰(騎馬警察)이라는 점(點)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相對)인 일본제국(日本帝國) 경찰(警察) 이 말에 타고 있었으므로 그가 훨씬 불리(不利)했음에도 제압(制壓)하고 검(劍)을 빼앗은 것이다. 그저 구전(口傳)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며 실제로(實際로) 이때 빼앗은 검(劍)이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 에 보관(保管)되어 있다. [14] 그 사격실력(射擊實力) 덕분(德分)에 쌍권총(雙拳銃)으로 소총(小銃)을 든 일본인(日本人) 순사(巡査) 수백명(數百名)과 대등(對等)이 싸웠다. [15] 비슷한 이야기가 곽낙원(郭樂園) 여사(女史)에게도 있다. 여사(女史)의 생일상(生日床)을 차리겠다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에게 "내(內) 먹을 것은 내가 마련할 터이니 돈을 달라"고 한 다음 생일날(生日날) 모인 사람들 앞에서 권총(拳銃) 2자루를 내놓았다고 한다. [16] 1967년(年) 12월(月) 26일(日) 사망(死亡)했다. [17] 김춘원의 아들 [18] 전주(全州) 최씨(崔氏) 최종(最終)록(崔鍾祿, 1921. 10. 6 ~ 2013. 12. 6)의 일곱째 아들이다.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상경대학(大學) 을 졸업(卒業)하고 대우증권(大宇證券) 지점장(支店長)으로 근무(勤務)했다. [19] 누이의 딸. 이름은 방송(放送)에서 등장(登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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