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런 집단(集團)들도 있긴 하지만 흔하게 알려진 근본주의(根本主義) 집단(集團)들은 대부분(大部分) 세속(世俗) 사회(社會)와 충돌(衝突)하여 해(害)를 끼치는 경우(境遇)가 많은데 그 이유(理由)는 교리(敎理)를 확대해석(擴大解釋)한 나머지
경전(經典)의 내용(內容)을 자신(自身)들이 가장 잘 지키고 있다고
주장(主張)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서술(敍述)된 것처럼, 종교계(宗敎界)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가 나타날 경우(境遇) 가장 대표적(代表的)인 특징(特徵)은
생활양식(生活樣式)이나 가치판단(價値判斷) 등(等)에 있어 교리(敎理)에 근거(根據)한 자신(自身)들의 기준(基準)을 절대화(絶對化)하는 자체(自體)는 개인(個人) 차원(次元)에선 큰 문제(問題)가 되지 않으나 그것을 사회(社會) 전반(全般)에 강요(强要)하고 뜯어고치려는 노력(努力)을 하는 것이 문제(問題)이다.
아미시
같이 아예 고립적(孤立的)인 근본주의적(根本主義的) 집단(集團)들은 사회(社會)에 물의(物議)를 끼치지 않는다는 일각(一角)의 주장(主張)도 있는 모양(模樣)인데, 아미시 공동체(共同體) 내(內)에서
작은 사회(社會)
의 전형적(典型的)인 성폭력(性暴力), 근친(近親) 문제(問題)를 보고 그런 말이 나올지 의문(疑問)이다.
예(例)를 들어 유대인(유대人)
하(下)레디
들은 과거(過去) 자신(自身)들의 조상(祖上)들도 현실(現實)에 맞춰 지키던 600여(餘) 개(個) 계율(戒律)을 현대(現代) 문명(文明)을 거부(拒否)하며 지키는데, 이들이 이어받았다고 주장(主張)한 순수(純粹) 유대인(유대人), 즉(卽) 과거(過去) 수천(數千) 년(年) 전(前) 유대인(유대人)들은 자신(自身)들의 언어(言語) 토라 뿐만 아니라 세속(世俗) 지식(知識)까지 다 배웠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에 무력(武力)으로 원주민(原住民)을 쓸어버리고 유대인(유대人)만을 위(爲)한 신정국가(神政國家)를 건설(建設)해야 한다는 주장(主張)을 했는데, 19세기(世紀)까지 정통(正統) 유대교(유대敎) 랍비들은 회당(會堂)에서도 히브리어만 쓰고 개신교식(改新敎式)으로 찬송가(讚頌歌)를 만들어서 활용(活用)하자는 진보적(進步的)인 주장(主張)에도 반대(反對)했지만, 과격적인(過激的人) 시온주의는 그저 미친소리로 여기고 회당(會堂) 안에서 시온주의를 선동(煽動)하는 무리들을 빗자루를 휘둘러 쫓아낼 정도(程度)였다. 그러나 19세기(世紀)부터 시작(始作)된 유럽의 반유대주의(反유대主義), 동유럽(東유럽)의
포그롬
이나 나치의 유대인(유대人) 박해(迫害)로 유럽 내(內) 보수(保守) 정통(正統) 신학(神學)을 가진 유대인(유대人) 공동체(共同體)가 파괴(破壞)되자, 2차대전(次大戰) 전후(前後) 평소(平素)에 회당(會堂)에도 나오지 않던 과격(過激) 급진(急進) 무리들이 자신(自身)들이 정통(正統)이라 주장(主張)받기 위해 극단적(極端的) 종교근본주의자(宗敎根本主義者)가 되었다는 시각(視角)도 있다.
개신교(改新敎)에서도 우리가 오늘날 근본주의(根本主義)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미지들은 사실(事實) 근본주의(根本主義)가 아니다. 18세기(世紀)까지 유럽의 개신교(改新敎) 학자(學者)들에게 있어, "세상(世上) 끝까지 복음(福音)을 전(傳)하라" 는 문구(文句)는 1~2세기(世紀) 사도 시절(時節)에만 해당(該當)된다고 보는 게 통설(通說)이었다. 그리고
성령체험(聖靈體驗), 방언(方言)
은 역시(亦是) 성서시대(聖書時代)에만 나오는 것으로 보는 은사중지론(恩師中持論)이 19세기(世紀)까지 통설(通說)이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시기(宗敎改革時期) 칼로 전도(傳道)하는 과혁혁명론자(裹革革命論者)와 성령(聖靈)을 직통(直通)으로 받는다는 토마스 뮌처를 비롯한 재세례파(再洗禮派)들을 이단(異端)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은사중지론(恩師中持論)을 설파(說破)한 대표적(代表的) 인물(人物)인 벤저민 워필드(B.B.Warfield)는 실제로(實際로)
장로회(長老會)
의 유명(有名)한 신학자(神學者)이기도 하다.
근본주의(根本主義)하면 보통(普通)
이슬람
이나
기독교(基督敎)
(그 중(中)에서도 특히(特히)
극단주의(極端主義)
계통(系統)) 등(等)
유일신교(唯一神敎) 계통(系統) 종교(宗敎)들
을 떠올리기 쉬우나 실제로(實際로)는 다른 종교(宗敎)도 근본주의(根本主義)는 당연히(當然히) 존재(存在)한다.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은 나라에 따라서 권유(勸誘) 수준(水準)으로 끝나는 경우(境遇)도 있지만 일부(一部) 막장스런 나라들은 아예
강요(强要)
하는 사회(社會) 분위기(雰圍氣)를 만들어서 아예 나라 전체(全體)나 특정지역(特定地域) 이미지에 손상(損傷)을 입히는 경우(境遇)도 있다.
예컨대
최근(最近) 힌두교(힌두敎)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組織)하여 이슬람 도축업자(屠畜業者)들을 살해(殺害)하고 다니며
미얀마와 태국(泰國)의 극단주의(極端主義) 불교도(佛敎徒)들은 소수(少數) 종교(宗敎)인 이슬람과 소수(少數) 민족(民族)들을 탄압(彈壓)한다.
간혹(間或) 아미쉬 공동체(共同體)들을 근본주의(根本主義)라 여기지만 이들은 자신(自身)들의 생활(生活) 방식(方式)이나 종교(宗敎)를 절대화(絶對化)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강요(强要)하지도 않고 자신(自身)들이 반대(反對)하는 현대문명(現代文明)에 대(對)해 위협(威脅)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들은 세상(世上)에는 다양한 가치체계(價値體系)를 갖고 살아가는 타인(他人)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인정(認定)하고 있다. 따라서 근본주의(根本主義)라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主張)도 있는데, 일단(一旦) 당장(當場) 아미시 공동체(共同體)가 그렇게 외부(外部)에서 보는 것처럼 털어도 먼지 안 나오는 사람들인지 부터 의문(疑問)이고
[9]
애초(애初)에 근본주의(根本主義)의 정의(正義)에서 사회적(社會的) 민폐(民弊)는 부차적(副次的) 요소고(要素高), 17세기(世紀) 이민(移民) 당시(當時)의 종교관(宗敎觀), 사회관(社會觀)을 의식적(意識的)으로 그대로 유지(維持)한다는 점(點)에서 아미시는 근본주의(根本主義) 맞다.
이바디
이슬람 처럼 그냥 외부(外部)와 차단(遮斷) 자체(自體)를 끊고 사는 것이지, 외부(外部) 전파(電波)를 안한다고 해서 근본주의(根本主義)가 아닌 게 아니다.
한국(韓國)의 경우(境遇) 매우 보수적(保守的)인 가톨릭의
모더니즘
비판(批判)을 통한
근본주의(根本主義)
와 개신교(改新敎) 대다수(大多數) 교파(敎派)에서
정통주의(正統主義)
적(敵) 태도(態度)를 통해 근본주의(根本主義)와 비슷하게 보이는 문제(問題)
[10]
는 분명(分明) 있을지언정 다른 나라들처럼 타(他) 종교인(宗敎人)을 상대(相對)로 살해(殺害)나 테러 등(等)의 종교(宗敎) 분쟁(紛爭)이 미약(微弱)한 수준(水準)이다. 이는 좋은 치안(治安)에 기여(寄與)하고 있다.
근본주의(根本主義)가 한국(韓國)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理由)로,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
은 한국(韓國)은
샤머니즘
적(敵)
기복신앙(祈福信仰)
과 유가적(儒家的) 현실주의(現實主義)가 뿌리깊게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意見)을 보였다. 즉(卽), 종교(宗敎)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는 주장(主張)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복신앙적(祈福信仰的) 요소(要素)는 종교(宗敎) 내부(內部)에서 크게 비판(批判)하고 있기도 하고 적대시(敵對視)하는 경향(傾向)도 있기에 무조건(無條件) 옳은 주장(主張)이라고 하기엔 아니다. 또, 이러한 주장(主張)은
주기철
을 비롯해서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제(問題)로 일제(日帝)에게 희생(犧牲)당한 아픈 역사(歷史)가 있는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을 자극(刺戟)할 우려(憂慮)가 있다. 또한, 이런 근본주의(根本主義) 회귀(回歸)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以後) 조선(朝鮮)이 멸망(滅亡)할 때까지 200여년(餘年) 동안 분명히(分明히) 있었다. 이 시기(時期)에 성리학(性理學) 교조주의(敎條主義)로 인해 여성인권(女性人權)이 급격(急激)하게 후퇴(後退)한 것도 사실(事實)이다.
한국(韓國)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가 자리잡기 힘든 또다른 이유(理由)는 일본(日本)
[11]
, 러시아
[12]
, 중국(中國)
[13]
, 몽골
[14]
, 영국(英國)
[15]
, 아랍권(圈)
[16]
, 그리스
[17]
, 에티오피아
[18]
, 이탈리아
[19]
, 동유럽(東유럽)을 제외(除外)한 서양권(西洋圈) 공통(共通)
[20]
, 스페인
[21]
, 포르투갈
[22]
, 프랑스
[23]
, 오스트리아
[24]
와 달리 돌아가고 싶은 근본(根本)에 대(對)한 향수(鄕愁)가 희미(稀微)하다는 점(點)에 있다. 원래(元來) 근본주의(根本主義)는 그 존재(存在) 자체(自體)가 과거(過去) 회귀(回歸)의 성격(性格)을 갖는다. 전세계적(全世界的)으로 원리주의(原理主義)와 근본주의(根本主義)가 횡행(橫行)하는 국가(國家)나 지역(地域)의 특징(特徵)은
즉(卽)
라떼는 말이야
의 국가(國家)버전 내지(乃至)는 민족(民族)버전이 근본주의(根本主義)이다. 즉(卽), 한국(韓國)의 역사적(歷史的) 전성기(全盛期)가 언제냐라는 질문(質問)에 대(對)한 대답(對答)이 돌아갈 근본(根本)인데, 현재(現在) 한국인(韓國人)들에게는 너무 멀거나, 내 역사(歷史)같지 않다는 것이다. 대표적(代表的)으로 우리나라가 강성(强盛)했다고 생각한 시기(時期)는 고구려(高句麗)와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渤海), 고려(高麗) 전기(電氣)에서 중기(中期) 정도(程度)로 여기지만 현대(現代)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랑스러웠던 시기(時期)인 것은 인정(認定)하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는 점(點)도 있다. 이는 TV 및 여러 매체(媒體)로 접(接)하는 사극(史劇)이 대부분(大部分) 조선시대(朝鮮時代)이고 사료(史料) 및 상세(詳細)한 자료(資料)도 조선시대(朝鮮時代)가 가장 많이 남겼다는 점(點)에서 영향(影響)이 크다.
[25]
중국(中國)의 역사서(歷史書) 및 한국(韓國)의 역사서(歷史書)에서도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에 대(對)해 기술(記述)한 내용(內容)이 부족(不足)한 점(點)이 있지만, 현재(現在) 우리나라가 각종(各種) 역사(歷史), 철학(哲學), 설화(舌禍), 과학기술(科學技術), 음식(飮食), 문화(文化) 등(等) 한국적(韓國的)인 가치(價値)를 발굴(發掘)하고 표현(表現)할 때 가장 많이 응용(應用)되고 활용(活用)되는 시대(時代)가 조선시대(朝鮮時代)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는 강성(强盛)했던 나라였다는 점(點)에서 인지는 하지만 평소(平素) 일상적(日常的)으로 크게 느껴지지 않고, 드라마와 영화(映畫) 등(等)을 통해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모습을 자주 접(接)한 까닭으로 조선시대(朝鮮時代)를 더 친숙하게 여긴 점(點)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의 세(世)가 약(弱)하다는 점(點)이 한 몫한다고 본다.
[26]
마라타 동맹(同盟)
이나
프라티하라 왕조(王朝)
시절(時節) 힌두 통일왕조시대(統一王朝時代)로 돌아가겠다고 길게는 1천년(千年) 시간(時間)을 거슬러올라가는 현(現)
인도(印度) 인민당(人民黨)
의 프로파간다나
오스만 제국(帝國)
의 부활(復活)을 주장(主張)하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의 튀르키예주의(注意) 같은 것도 허황되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2천년(千年)도 넘은 우리 것인지도 확실(確實)하지 않은 역사(歷史)로 돌아가자는 주장(主張)을 한국인(韓國人)들이 받아들일리가 만무(萬無)한 것이다.
현재(現在)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력(國力)은 비록 실효지배영토(實效支配領土)는 과거(過去)의 반(半)토막이 났을지언정 지난 천년(千年)을 통틀어도 가장 강력(强力)한 세계(世界) 10위권(位圈)의 경제적(經濟的),군사적(軍事的) 선진국(先進國) 수준(水準)으로 국력(國力)이 성장(成長)했고 코로나 사태(事態) 이후(以後)에는 오히려 전세계적(全世界的)으로 선망(羨望)과 주목(注目)의 대상(對象)이 되고, 한국산(韓國産) 제품(製品)이라는 이유(理由)로도 이전(以前)보다 높은 가격(價格)에 팔리는 프리미엄을 누릴 정도(程度)로 국력(國力)에 맞먹는 국격(格) 상승(上昇)이 이루어졌다.
지금(只今) 한참 잘나가고 앞으로 더 잘나갈 사람이나 민족(民族)이 한참 멀리 있던 과거(過去)나 근본(根本) 따위 신경(神經)쓸 이유(理由)가 없다.
거기다 대비효과(對比效果)로 길게는 17세기(世紀) 초(初)(양란(洋亂)으로 인한 국토(國土) 초토화(焦土化)), 가까이는 지난 100년(年) 동안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과거(過去)는 대부분(大部分)의 국민(國民)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리즈시절(時節)이 아니라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흑역사(黑歷史)
쪽에 가깝다.
[27]
한국인(韓國人)이라면 조선말기(朝鮮末期) 외세(外勢)로 인한 혼란(混亂),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6,25로 초토화(焦土化)된 국토(國土), 피로 얼룩진 군사독재정권(軍事獨裁政權) 지배(支配)를 당(當)했던 지난 100년(年) 중(中) 누구도 이 역사(歷史)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한국(韓國)에서는 국가(國家)나 집단(集團) 전체(全體)의 근본주의(根本主義) 성향(性向)을 주장(主張)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중적(大衆的) 지지도(支持度) 받지 못한다.
[28]
한국(韓國)의 노년(老年) 보수층(保守層)이 '그때가 좋았지'라고 이는 개인(個人)의 신체적(身體的),정신적(精神的) 전성기(全盛期)인 2~30대(代) 젊은 시절(時節)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지, 그 시절(時節)의 경제적(經濟的) 절대빈곤(絶對貧困),사회적(社會的) 경직성(硬直性)까지 다시 돌리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설혹(設或) 그 시절(時節)을 부러워해도 그건 "라떼는 말이야~ 물질적(物質的)으로는 가난해도 정신적(精神的)/심리적(心理的)으론 퐁요로웠어~" 식(式)이지 절대(絶對) 그시절(時節)의 처참(悽慘)한 절대빈곤(絶對貧困)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다. 애초(애初)에 그런 가난도 좋아했다면 산업화(産業化) 시기(時期)에 그렇게까지 악착같이(齷齪같이) 열심히(熱心히) 일하고 노력(努力)하지도 않았을것이다.
또한 한국(韓國)은 근본주의(根本主義)로 퇴행(退行)해서 외세(外勢)의 침탈(侵奪)을 비롯한
국제(國際) 정세(情勢)의 풍파(風波)를 겪은 역사(歷史)
도 이미 있는데다,
그 근본주의(根本主義) 퇴행(退行)때문에
나라가 망(亡)해 고통(苦痛)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지금(只今) 당장(當場) 못살아도 그때의 과거(過去)를 반복(反復)했다가 또 망(亡)할거라는 공포(恐怖)가 사람들에게 내재(內在)되어있어
더 거부감(拒否感)이 심(甚)할 수도 있다.
[29]
흔히들 조선시대(朝鮮時代)는 전반(全般)에 걸쳐서 유교(儒敎)에 목매단 시대(時代)로 여길 수도 있지만 그건 후기(後記) 얘기고 전기(電氣)까지만 해도 시집살이(媤집살이)도 하고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사례(事例)에서도 보듯 마냥 여성(女性)이 남성(男性)에게 눌려지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甚至於) 세종대왕이
주자(走者)라고 다 맞는 건 아니지 않는가?
라는 말을 할 정도(程度)로 그래도 국가적(國家的)으로 밀어주는 게 유교(儒敎)니까 유교(儒敎)를 제일(第一) 앞세우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유교(儒敎)를
우선적(優先的)으로
앞세우는 거지, 그것만이 옳고 그것만을 따르라고 강요(强要)하는 시대(時代)는 아니었다. 허나 양(兩)란(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친 뒤, 뒤이어지는 경신대기근(更新大飢饉) 등(等) 기후변화(氣候變化)로 닥친 재앙(災殃)으로 인해 조선(朝鮮)의 사회질서(社會秩序)가 흔들리면서 기존(旣存)의 지배층(支配層)인 양반(兩班)
[30]
은 다시 기존(旣存)의 지배질서(支配秩序)를 유지(維持)하기 위해서 유교(儒敎)를 끌어왔고 덕분(德分)에 조선후기(朝鮮後期)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조선(朝鮮)의 모습이 되었다.
문제(問題)는 그렇게 해서 사회질서(社會秩序)가 잘 잡히고 조선(朝鮮)이 다시금 조선전기(朝鮮前期)의 영광(榮光)을 누렸냐면 역사(歷史)에서 보듯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역사(歷史)는 영조(英祖), 정조(正祖) 시기(時期)만 평가(評價)가 좋은 편(便)이고 정조(正祖) 이후(以後)부터는 우리가 다 아는 막장 시대(時代)가 열린다. 한국(韓國)에서의 유교(儒敎)가 현대(現代) 한국인(韓國人)들에게 욕(辱)을 먹는 대부분(大部分)의 이유(理由)가 조선후기(朝鮮後期)와 이후(以後) 변질(變質)된 유교적(儒敎的) 전통(傳統)에서 유래(由來)되니 이미 근본주의(根本主義)에 데여본(餘本) 역사(歷史)와 여파(餘波)가 남아있는 현실(現實)이 근본주의(根本主義)의 싹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이유(理由)일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한국(韓國) 개신교도(改新敎徒) 이러한 유교(儒敎) 근본주의(根本主義)를 밀어내버리고 가장 교세(敎勢)가 큰 종교(宗敎)가 되었다. 이들은 개신교(改新敎) 정통(正統) 신학(神學)을 근본(根本)이라고 자칭(自稱)하면서 다양한 서양(西洋)의 기술(技術)과 사조(思潮)들을 개신교(改新敎)의 시각(視角)으로 갖고 왔다. 이들은 오히려 민주주의(民主主義)와 페미니즘을 금지(禁止)하는 근본주의(根本主義)는커녕 개신교(改新敎)의 중요(重要) 교리(敎理)들만 강경(强勁)하게 지키고 성경(聖經)에 등장(登場)하지 않는 것들은 방조(幇助)하는 보수주의(保守主義) 신학(神學)이 주류(主流)를 점(占)해버렸고, 자신(自身)들의 신앙(信仰)을 유지(維持)하고 교세(敎勢)를 더욱 키우기 위해서 성경(聖經)과 충돌(衝突)하지 않는 선(線)에서 새로운 시도(試圖)를 꾸준히 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미국(美國)을 비롯한 제(第)1세계(世界)와 크게 연계(連繫)되어 있기에 한국(韓國)을 제(第)1세계(世界)에 편입시키는데 큰 역할(役割)을 하였고, 한국(韓國)의 황금(黃金)기와 궤(櫃)를 같이 하고 있다.
이승만(李承晩)
,
김구(金九)
,
안창호
,
함석헌
,
길선주
등(等) 개신교(改新敎) 신자(信者)였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도 왕조(王朝)와 유교(儒敎) 근본주의(根本主義)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말아먹는 것을 직관(直觀)했기에 개신교(改新敎) 신자(信者)들을 자신(自身)들의 지지기반(支持基盤)으로 삼긴 했어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건국(建國)할 때 진지(眞摯)하게 정교일치(政敎一致)를 시도(試圖)하지 않았다.
[31]
오히려 이들은 개신교(改新敎) 정통(正統) 신학(神學)의 영향(影響)으로 중요(重要) 교리(敎理)만 잘 지키고 나머지를 너무 널널하게 허용(許容)한 탓에 몇몇 교회(敎會) 행정(行政)과 실생활(實生活)에서 성경(聖經)의 일부(一部) 내용(內容)들을 안 지켜서 비판(批判)받고 있다.
[32]
근본주의(根本主義)나 극단주의(極端主義)와 같은 말의 문제(問題)는 이것이
일부(一部) 이단(異端)
논리(論理)와 맞닿아있다는 것이다. 가령(假令) 종교적(宗敎的) 가르침에 의(依)한 범죄(犯罪)가 일어났다 하면 해당(該當) 종교인(宗敎人)들이 발벗고 나서서 자신(自身)들이 따르는 종교(宗敎)의 이름값을 지키기 위(爲)해 "이건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이나 극단주의자(極端主義者)들이 책임(責任)이지 온건(穩健)(moderate)주의자(主義者)들은 상관없음"이라고 하면서 비판(批判)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特히) 종교(宗敎)에 의(依)한 테러가 많이 발생(發生)하는 서구권(西歐圈) 등지(等地)의 경우(境遇) 근본주의(根本主義)와 극단주의(極端主義)에 책임(責任)을 돌리지 특정(特定) 종교(宗敎)의 명백히(明白히) 존재(存在)하는 교리(敎理)에 대(對)해서는 가치판단(價値判斷)이나 비판(批判)이 쉽게 무력화(無力化)된다는 폐해(弊害)가 있다. 더 큰 문제(問題)는 이러한 일부(一部) 이단(異端) 논리(論理)가 지지(支持)를 얻는 순간(瞬間) 세(勢)를 확장(擴張)하여 자신(自身)들과 믿음의 방향(方向)이 조금 다른 집단(集團)에
너
이단(異端)
이라는 식(式)으로 낙인(烙印)을 찍는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원천봉쇄(源泉封鎖)의 오류(誤謬)
에 빠져선 안 된다. 근본주의(根本主義)와 극단주의(極端主義)의 극단적(極端的) 태도(態度)를 해당(該當) 종교(宗敎)의 평화적(平和的) 교리(敎理)로 비판(批判)하려는 운동(運動) 또한 존재(存在)한다는 것을 감안(勘案)해야 한다. 근본주의(根本主義)와 극단주의(極端主義)의 폭력적(暴力的)이고 자극적(刺戟的)인 행동(行動)을 통해 해당(該當) 종교(宗敎)의 궁극적(窮極的)인 목표가(目標價) 옅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온건주의자(穩健主義者)가 근본주의(根本主義)의 존재(存在) 자체(自體)를 부정(否定)하는 경우(境遇)도 있지만, 대개(大槪)는 이런 극단적(極端的)인 행동(行動)을 교리(敎理)에 대(對)한 곡해(曲解)와 왜곡(歪曲)으로 해석(解釋)하여 근본주의(根本主義)를 비판(批判)한다. 이런 경우(境遇)엔 온건주의자(穩健主義者)들은 근본주의(根本主義)가
근본(根本)
이란 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매우 불쾌(不快)해한다. 해당(該當) 종교(宗敎)의 근본(根本)이 그런 폭력적(暴力的) 태도(態度)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종교(宗敎)들이 과학(科學)과의 공존(共存)을 추구(追求)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런 온건주의(溫乾主義)가 주류(主流)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아래 내용(內容)은 근본주의(根本主義)와 극단주의(極端主義)를 구분(區分)하지 못하고 서술(敍述)된 부분(部分)이 더러 있고, 무엇보다 종교적(宗敎的) 교리(敎理)와는 상관없는
민족주의(民族主義)
또는 부족주의적(不足主義的) 동기(動機)에 의(依)한 행동(行動)의 결과물(結果物)을 근본주의(根本主義) 탓으로 돌리는 오류(誤謬)가 많이 범(犯)해지고 있다. 이런 사례(事例)에서 근본주의(根本主義)는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이 자기(自己) 민족(民族)의 우월성(優越性)을 주장(主張)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수단(手段)일뿐, 본질적(本質的)으로는 자기(自己) 민족(民族)이 가장 강(剛)한 힘의 논리(論理)일 뿐이다. 가령(假令)
불교(佛敎)
문서(文書)에 있는
이슬람
대(代) 불교(佛敎)라든지
힌두교(힌두敎)
문서(文書)에 나와 있는 힌두교(힌두敎) 대 타(他) 종교(宗敎)라든지 하는 문제(問題)들은 신도(信徒)들이 불교(佛敎)나 힌두교(힌두敎)의 교리(敎理)를 근본주의적(根本主義的)으로 실천(實踐)한다기보다는 부족주의(部族主義)나
민족주의(民族主義)
에 더욱 강(剛)한 동기(動機)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 문서(文書)는 읽는데 주의(注意)를 요하며 꽤 많은 수정(修正)이 필요(必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