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年) 44세(歲)의 나이로
민주당(民主黨)
에 입당(入黨)하며 정계(政界)에 입문(入門)했고, 그 해 "공공(公共)의 신뢰(信賴)를 받는 공공기관(公共機關)"을 핵심(核心) 가치(價値)로 내걸고 민주당 후보(候補)로 출마(出馬)하여
버팔로
시장(市場)에 당선(當選)되었다. 2년(年) 뒤인 1883년(年)에는
뉴욕주(뉴욕州)
지사(支社) 선거(選擧)에 민주당 후보(候補)로 출마(出馬)하여 당선(當選)되며 자신(自身)의 정치적(政治的) 입지(立地)를 한껏(限껏) 강화(强化)했다. 주지사(州知事) 재임(在任) 당시(當時) 공직사회(公職社會)의 부정부패(不淨腐敗)를 일소(一掃)하고 주정부(州政府) 개혁(改革)을 단행(斷行)해 꽤 성과(成果)를 거두었으며, '정직(停職)'함과 '성실(誠實)'함을 모토로 내세워 '소신(所信) 있는 원칙주의자(原則主義者)' 이미지로 호평(好評)받았다. 대중적(大衆的) 인지도(認知度)와 인기(人氣)가 크게 상승(上昇)하면서 대권주자(大權走者)로 급부상(急浮上), 뉴욕주지사(뉴욕州知事)로 임기(任期)를 시작(始作)한 지 1년여(年餘)밖에 되지 않은
1884년(年)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에 야당(野黨)인
민주당(民主黨)
후보(候補)로 지명(指名)되었다.
상대(相對) 진영(陣營)인 집권(執權)
공화당(共和黨)
에선 대선후보(大選候補)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大統領)이 아닌
제임스 G. 블레인
전(前) 국무장관(國務長官)을 선출(選出)했고 블레인과 본선(本選)에서 격돌(激突)하게 되었는데, 당시(當時) 공화(共和)-민주(民主) 양당(兩黨)의 정책(政策)과 공약(公約), 당론(黨論)은 관세법(關稅法) 찬반(贊反)
[6]
외(外)에 별다른 차이(差異)가 없었다. 때문에 1884년(年) 대선(大選)의 선거(選擧) 유세(遊說)는 정책(政策) 대결(對決)보다 상대(相對) 후보(候補)에 대(對)한
네거티브
공방전(攻防戰)으로 점철(點綴)되었고, 이는 서로를 향(向)한 무차별적(無差別的) 의혹(疑惑) 제기(提起)로 하나라도 더 흠집(欠집) 내고 트집 잡으려는 진흙탕 싸움으로 비화(飛火)하였다. 이로 인해 선거(選擧) 기간(期間) 내내
남북전쟁(南北戰爭)
당시(當時) 대리인(代理人)을 입대(入隊)시키고 병역(兵役)을 면제(免除)받은 전력(前歷)에 대(對)한 '병역(兵役) 기피(忌避)' 공격(攻擊) 등(等) 온갖 비난(非難)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甚至於) 공화당을 지지(支持)하는 일부(一部) 언론사(言論社)들로부터 "버팔로시(詩)에 사는 한 과부(寡婦)와 부적절(不適切)한 관계(關係)였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스캔들 기사(記事)가 터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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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當時) 폭로(暴露)된 스캔들을 풍자(諷刺)한 만평(萬坪). 이 스캔들이 보도(報道)되자 블레인 후보(候補)와 공화당(共和黨)은 만평(萬坪) 속 울고 있는 아기의 말을 비틀어 "엄마, 엄마, 우리 아빠 어디 갔어요?(Ma! Ma! Where’s my pa)"라는 선전(宣傳) 구호(口號)로 쓰면서 도덕적(道德的)으로 깨끗하지 못하다며 맹비난(猛非難)을 퍼부었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를 부인(否認)하거나 회피(回避)하는 대신(代身)
"백악관(白堊館)에 가셨단다, 하하하!(Gone to the White House, Ha! Ha! Ha!)"
라는 구호(口號)로 맞받아쳤다(...).
염증(厭症)이 날 정도(程度)의 혼탁(混濁)한 선거전(選擧戰)에 결국(結局) 그 과부(寡婦)와의 스캔들을 인정(認定)했는데, 당시(當時) 아직 결혼(結婚)하지 않은 상태(狀態)였고 상대(相對) 여성(女性)도 과부(寡婦)였기에 엄밀히(嚴密히) 말하면
불륜(不倫)
은 아니었다. 다만 19세기(世紀) 후반(後半) 미국(美國) 사회(社會) 분위기(雰圍氣)는 남녀(男女) 간(間) 성(性) 문제(問題)에 매우 보수적(保守的)이어서 그 자체(自體)로 트집 잡힐 일이 되었던 것.
혼외정사(婚外情事)
와
혼전임신(婚前妊娠)
을 매우 금기시(禁忌視)하던 것이 당시(當時) 사회(社會) 풍토(風土)였던 탓에 "정식(正式)으로 결혼(結婚)하지도 않고 관계(關係)를 맺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事實) 자체(自體)가 남녀(男女) 간(間) 순리(順理)를 어긴 것으로 비쳐졌고, 이 역시(亦是) 선거(選擧) 기간(期間) 내내 논란(論難)이 되었다. 여하튼(如何튼) 스캔들을 사실(事實)이라고 인정(認定)한 뒤 책임(責任)을 지고 아기의 양육비(養育費)를 지급(支給)하겠다고 선언(宣言)
[7]
하면서 정면돌파(正面突破)를 택(擇)하자 그 의연(毅然)함에 일부(一部) 유권자(有權者)들은 '정직(停職)'함을 내세운 모습에 부합(符合)한다며 오히려 지지(支持)를 보냈다. 게다가 병역(兵役) 면제(免除) 논란(論難)은 제임스 G. 블레인 후보(候補)도 똑같은 방식(方式)으로
남북전쟁(南北戰爭)
때 병역(兵役)을 면제(免除)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큰 타격(打擊)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의혹(疑惑) 제기(提起)와 폭로(暴露)로 얼룩진 1884년(年) 대선(大選) 개표(開票) 결과(結果) 박빙(薄氷) 승부(勝負) 끝에 간발(間髮)의 차이(差異)
[8]
로 당선(當選)되어 백악관(白堊館)에 입성(入城)할 수 있었다.
민주당(民主黨)
으로서도
남북전쟁(南北戰爭)
이후(以後) 처음 집권(執權)하게 되는, 기념비적(紀念碑的)인 승리(勝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