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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 나무위키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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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포함(包含)하여 숭례문(崇禮門)까지의 범위(範圍)에 걸친 도로(道路) · 시설(施設) · 기관(機關)에 대(對)한 내용(內容)은 세종대로(世宗大路) 문서(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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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光化門廣場 | Gwanghwamun Square
[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BI ▼ ]
광화문광장 BI White
광화문광장 전경
주소(住所)
개장(開場)
2009년(年) 8월(月) 1일(日) 개장(開場)
2022년(年) 8월(月) 6일(日) 1차(次) 재개장(再開場)
2023년(年) 10월(月) 15일(日) 2차(次) 재개장(再開場)
관리(管理)
면적(面積)
18,840㎡
홈페이지 아이콘

1 . 개요(槪要) 2 . 역사(歷史)
2.1 . 조선(朝鮮) 2.2 .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2.3 . 1960년대(年代) 이후(以後) 2.4 . 2009년(年) 이후(以後) 2.5 . 2022년(年) 이후(以後)
3 . 상징성(象徵性)
3.1 . 과거(過去) 행정(行政) 중심지(中心地) 3.2 . 정치(政治) 집회(集會)·시위(示威)의 장(醬) 3.3 . 문화적(文化的) 랜드마크 겸(兼) 길거리 응원(應援) 의 성지(聖地)
4 . 관련(關聯) 사건(事件) 사고(事故) 혹은(或은) 시위(示威) 5 . 중건(重建) 계획(計劃)
5.1 . 2009년(年) 계획(計劃)
5.1.1 . 문제점(問題點)
5.1.1.1 . 입지(立地) 5.1.1.2 . 교통(交通) 5.1.1.3 . 집회(集會) 금지(禁止) 5.1.1.4 . 부실(不實)한 전시(展示) 시설(施設)들 5.1.1.5 . 역사성(歷史性) 무시(無視) 논란(論難)
5.2 . 문재인(文在寅) 정부(政府) 제시안(提示案) 5.3 . 서울시청(市廳) 문화재청(文化財廳) 공(公)동안 5.4 . 최종(最終) 확정안(確定案)
6 . 대중매체(大衆媒體)에서

1. 개요(槪要) [편집(編輯)]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은 2009년(年) 8월(月) 1일(日)에 완공(完工)되어, 현재(現在) 대한민국(大韓民國)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세종대로(世宗大路) 사거리(射距離) 사이 중앙(中央) 서측면(西側面)에 조성(造成)된 시민공간(市民空間)이다.

2. 역사(歷史) [편집(編輯)]

광화문 서울 변천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의 변천사(變遷史)

2.1. 조선(朝鮮)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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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편집(編輯)]

경성부 광화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광화문(光化門)통(1930년대(年代))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일제(一齊) 육조(六曹)거리 의 이름을 '광화문(光化門)통(光化門通)'으로 변경(變更)했다. 3.1 운동(運動) 때 현재(現在)의 교보문고(敎保文庫) 앞( 서울 고종(高宗) 어극(御極) 40년(年) 칭경기념비각(稱慶記念碑角) )에 사람들이 모인 기록(記錄)이 남아 있다. 1926년(年)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광화문(光化門) 자리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廳舍) 를 건축(建築)하면서 육조(六曹)거리의 도로(道路)를 확장(擴張)했으니, 이것이 세종대로(世宗大路) 를 구성(構成)하는 세종로(世宗路) 의 원형(原形)이다. 한국전쟁(韓國戰爭) 직후(直後)에는 장훈(張勳) ( 서울특별시청(서울特別市靑) 도시계획(都市計劃) 과장(誇張) )에 의(依)해서 세종로의 너비 2배(倍)만큼 ( 53미터 100미터 ) 넓혔다.

2.3. 1960년대(年代) 이후(以後) [편집(編輯)]

1970년대 광화문
광화문(光化門) 아치와 중앙청(中央廳) [1] (1968년(年)~1982년(年))
1968년(年), 서울시(서울市)는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 의 동상(銅像) [2] 을 세우면서 동시(同時)에 철골(鐵骨) 아치를 설치(設置)하였다. 이후(以後) 1971년(年)에는 이전(以前)의 일시적(一時的)으로 설치(設置)되었던 폭(幅) 20m 정도(程度)의 아치를 폭(幅) 50m 정도(程度)의 아치로 넓혀 설치(設置)하였다. 7년(年) 후(後)인 1978년(年), 20m 정도(程度) 더 폭(幅)이 늘어나 70m 정도(程度)의 아치가 되었다. 다만, 사진(寫眞)처럼 철골(鐵骨)로 유지(維持)되던 시기(時期)는 많지 않았으며, 대부분(大部分) "질서(秩序)와 안정(安定) 속에 국가(國家) 발전(發展) 이룩하자"나 "국민화합(國民和合) 이루어 정의사회(正義社會) 이룩하자"라는 선전성(宣傳性) 문구(文句)가 상시적(常時的)으로 자리를 채우고 있었고 박정희(朴正熙) , 전두환(全斗煥) 이 해외(海外) 순방(巡訪)을 떠날 때나 새로 취임(就任)했을 때, 해외(海外)의 정치인(政治人)이 한국(韓國)에 국빈(國賓)으로 방문(訪問)했을 때 환영(歡迎) 문구(文句)도 이 아치에 새겨졌다. 1979년(年) 10.26 이후(以後) 박정희(朴正熙) 前 대통령(大統領)의 국장(局長)을 다룬 《대한(大韓)뉴스》나 1980년(年) 전두환 前 대통령(大統領) 취임(就任)을 다룬 《대한(大韓)뉴스》 영상(映像) 등(等) 옛 영상(映像)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 1981년(年), 1988 서울 올림픽 유치(誘致) 이후(以後) '외국인(外國人)들이 볼 서울에 저런 흉물스러운 철골(鐵骨) 구조물(構造物)은 안된다!' 라는 의견(意見)에 따라 1982년(年) 결국(結局) 철거(撤去)되었다. 이후(以後) 1990년대(年代)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廳舍) 도 해체(解體)한 덕택(德澤)에 육조(六曹)거리와 광화문통(光化門通)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오늘날의 세종로가 되었다.

2.4. 2009년(年) 이후(以後) [편집(編輯)]

광화문1
세종대왕 동상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앞
세종대왕(世宗大王) 동상(銅像)

세종대로(世宗大路) 중앙분리대(中央分離帶)에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33년(年)부터 은행나무(銀杏나무) 가 심어져 있었는데, 이것이 육조(六曹)거리 에 서서 광화문(光化門) 경복궁(景福宮) , 북악산(北岳山) 을 한눈에 감상(鑑賞)할 수 있게 하는, 원 설계자(設計者)의 의도(意圖)에 역행(逆行)하는 설계(設計)라는 비판(批判)을 받았다.

이에 광화문(光化門) 중앙분리대(中央分離帶)를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으로 바꾸어 광화문(光化門)-육조(六曹)거리-시청(市廳)으로 이어지는 역사적(歷史的) 축선(軸線)을 강조(强調)하겠다는 계획(計劃)이 세워졌고 2008년(年) 5월(月) 27일(日) 착공(着工)에 들어가 2009년(年) 8월(月) 1일(日)에 개장(開場)하였다. # 중앙분리대(中央分離帶)를 광장(廣場)으로 바꾸면서 한국인(韓國人)이 가장 존경(尊敬)하는 위인(爲人)인 세종대왕(世宗大王) 의 동상(銅像) [3] 이 기존(旣存) 이순신(李舜臣) 동상(銅像)(1968년(年) 설치(設置)) 뒤에 세워졌다. 한편(한便) 광장(廣場)의 공간(空間)을 확보(確保)하기 위해서 전(全) 세계(世界)에서 가장 많은 왕복(往復) 차로(車路)수(20차로(車路))를 자랑했던 세종대로(世宗大路)는 12차로(車路)로 축소(縮小)되었다.

그러나 시민(市民)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자연스럽게 발생(發生)한 서양(西洋)의 광장(廣場)과는 다르게 조선시대(朝鮮時代) 육조(六曹)거리 시절(時節)부터 나라가 행정(行政) 중심지(中心地) 사이에 의도적(意圖的)으로 세운 관제(管制) 광장(廣場)이므로, 서양(西洋)의 광장(廣場)과는 그 기능(機能)과 역할(役割)이 정반대(正反對)라는 비판(批判)을 받고 있다. 1950년대(年代)부터 근(近) 60년간(年間) 이 자리는 광장(廣場)은커녕 20차로(車路) 대로였던 곳이기 때문에 생활권(生活圈)과 상권(商圈), 보행동선(步行動線)이 광장(廣場)을 통해서 연결(連結)되기는커녕 오히려 광장(廣場)을 기준(基準)으로 분리(分離)되어 있다 는 것이 가슴시린 현실(現實)이며, 무엇보다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그 자신(自身)이 중앙분리대(中央分離帶) 출신(出身)이라 세종대로(世宗大路) 중앙(中央)에 섬처럼 떠있기 때문에 일부러 세종대로(世宗大路)를 횡단보도(橫斷步道)로 건너서 가야하는 기이(奇異)한 광장(廣場)이 되었다. 그 결과(結果) 자연(自然)스럽게 들르는 곳이 아니라 의도적(意圖的)으로 가야 하는 곳 이 되어버려, 시위(示威)의 공간(空間), 화(火)가 나서 따지러 가는 곳으로 공간(空間)의 성격(性格)이 많이 달라져버렸다.

2.5. 2022년(年) 이후(以後) [편집(編輯)]

횡단보도(橫斷步道)를 통해서만 접근(接近)해야 하는 거대(巨大)한 중앙분리대(中央分離帶)라는 비판(批判)이 전격적(電擊的)으로 수용(收容)되어 광장(廣場)을 세종로(世宗路) 서편(西便)으로 붙여서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및 정부청사(政府廳舍)와 연결(連結)시키는 재조성(再造成) 작업(作業)이 시작(始作)되었다.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을 세종로(世宗路) 서편(西便)으로 붙이겠다는 계획(計劃)은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이 조성(造成)되기 이전(移轉)인 2005년(年)부터 승효상 유홍준 이 제안한(提案限) 방법(方法)이었고 실제로(實際로) 그렇게 될 뻔 했으나, 당시(當時) 오세훈(吳世勳) 시장(市場)이 중앙분리대(中央分離帶) 안을 채택(採擇)했다는 것이 속사정(事情). 후임(後任)인 박원순(朴元淳) 시장(市長)은 임기(任期) 초기(初期)부터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을 재조성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었고, 2018년(年)에 국제(國際) 설계(設計) 공모(公募)를 실시(實施)했다. 결과적(結果的)으로 (주(週))CA조경기술사(造景技術社) 사무소(事務所)의 '깊은 표면(表面)(Deep Surface)'이라는 설계안(設計案)이 채택(採擇)되었으며, 조경(造景)가 조용준 총괄설계자(總括設計者)가 새로운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 설계(設計)를 이끌었다. 3년(年)동안 기본(基本) 및 실시설계(實施設計) 기간(期間)을 거쳐 2022년(年) 8월(月) 6일(日) 재개장(再開場)되었다.

세종로(世宗路) 바닥을 파면(罷免) 당연히(當然히) 조선시대(朝鮮時代) 유물(遺物)이 나올 것으로 예상(豫想)되었고, 실제로(實際로)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육조(六曹)거리 유물(遺物)들이 많이 발굴(發掘)되었다. #

세종대로(世宗大路) 차로수(車路數)는 이젠 7-9차로(車路)로 더욱 줄어들어서 교통정체(交通停滯)가 더욱 심해졌다.

3. 상징성(象徵性) [편집(編輯)]

3.1. 과거(過去) 행정(行政) 중심지(中心地) [편집(編輯)]

세종대로(世宗大路) 에 설명(說明)된 연선(沿線) 기관(機關)들을 살펴 보면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 더 나아가 대한민국(大韓民國) 의 중심(中心) 역할(役割)을 하고 있다.

20세기(世紀)까지는 (한국(韓國) 의회(議會) 정치(政治)의 상징(象徵)이 여의도(汝矣島) 인 것처럼) 이곳을 한국(韓國) 행정부(行政府)의 상징(象徵)처럼 회자(膾炙)되기도 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회의사당(國會議事堂) 도 현(現) 서울특별시의회(서울特別市議會) 가 있는 옛 부민관(府民館) 자리(현(現) 서울특별시청(서울特別市靑) 맞은편(맞은便))에 있었다. 참고(參考)로 경기도청(京畿道廳) 도 경복궁(景福宮) 건너편(건너便)에 있던 시절(時節)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世紀)인 현재(現在)는 다수(多數)의 기능(機能)이 분산(分散)되어 이전(以前)만큼의 위용(威容)은 뽐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狀況)이다. 과거(過去) 6조(條)와 의정부(議政府), 경복궁(景福宮)의 기능(機能)은 청와대(靑瓦臺) 정부서울청사(政府서울廳舍) 가 행(行)하고 있었는데, 정부과천청사(政府果川廳舍) 정부세종청사(政府世宗廳舍) 로 상당수(相當數) 넘어갔고,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세종시(世宗市) 등(等)으로 정부(政府)의 행정(行政) 기능(機能)이 꽤 분산(分散)된 상황(狀況)이다. 심지어(甚至於) 대통령(大統領) 집무실(執務室) 역할(役割)을 하던 청와대(靑瓦臺)도 현재(現在) 일반(一般)에 공개(公開)되고 용산(龍山) 대통령실(大統領室) 로 이전(移轉)하였다.

3.2. 정치(政治) 집회(集會)·시위(示威)의 장(醬) [편집(編輯)]

서울역(서울驛) 광장(廣場), 서울광장(廣場) , 청계광장(淸溪廣場) , DDP , 여의도공원(汝矣島公園) , 국회의사당(國會議事堂) 앞 삼거리(三거리) 등(等)과 함께 시민단체(市民團體)들의 주요(主要) 집회(集會) 장소(場所) 중(中) 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歷史的)으로도 작은 시위(示威)부터 역사(歷史)를 바꾼 굵직한 시위(示威)까지 여기서 많이 진행(進行)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백성(百姓)들이 집회(集會)를 자주 하였고, 2014년(年) 청해진해운 세월호(歲月號) 침몰(沈沒) 사고(事故) 이후(以後)로 이곳에 세월호(歲月號) 시위(示威)를 위한 천막(天幕)이 세워지면서 진보단체(進步團體)들 중심(中心)으로 강(剛)하게 각인(刻印)되었다. 2016년(年) 박근혜(朴槿惠)-최순실 게이트 가 터진 이후(以後) 박근혜 퇴진(退陣)을 요구(要求)하는 집회(集會) 가 이곳을 중심(中心)으로 대규모(大規模)로 열리면서 대중적(大衆的)인 집회(集會)와 시위(示威)의 성지(聖地) 비슷하게 인식(認識)되어 민주주의(民主主義) 를 상징(象徵)하는 장소(場所)로 보는 사람도 있다. [4] 다만, 이전(以前)에도 청와대(靑瓦臺) 정부서울청사(政府서울廳舍) 가 인접(隣接)해 있어 이쪽을 공격(攻擊)하기 좋은 모양새(模樣새)라 시위(示威)는 많이 했었으며, 2019년(年) 조국(曺國) 전(前) 법무부장관(法務部長官) 규탄(糾彈) 집회(集會) 가 대규모(大規模)로 열리면서 더욱 그러해졌다.

일부(一部)는 관광(觀光)하거나 지나갈 때 여기 일대(一帶)는 시끄럽기 때문에 기피(忌避)한다고 한다. 이유(理由)는 주말(週末)이나 공휴일(公休日)에는 시위(示威), 집회(集會) 등(等)을 할 때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뿐만 아니라 세종대로(世宗大路) 양옆(兩옆)에 있는 인도(印度), 광화문(光化門) 바로 앞에 있는 인도(印度) 등(等)에서 1인(人) 시위(示威)와 소규모(小規模) 집회(集會)를 동시(同時)에 많이 해서 충돌(衝突)도 일어나고, 소란스럽기 때문이다. 사실(事實) 조선시대(朝鮮時代)부터 유생(儒生)들이 모여서 상소(上疏)를 올리고 집단농성(集團籠城)을 하던 유래(由來)가 깊은 시위명소(示威名所)이기도 하다.

이외(以外)에도 노재팬 시위(示威) , 청소년(靑少年) 기후위기(氣候危機) 결석(結石) 시위(示威) , 10.3 개천절(開天節) 문재인(文在寅) 정부(政府) 규탄(糾彈) 집회(集會) , 사랑제일교회(사랑第一敎會) 집회(集會) , 2020년(年) 8.15 광복절(光復節) 문재인(文在寅) 정부(政府) 규탄(糾彈) 집회(集會) , 2021년(年) 12월(月) 22일(日) 광화문(光化門) 시위(示威)(예정(豫定)) 등(等) 예로부터 한국(韓國) 시위(示威)의 중심지(中心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큰 반전(反轉)이 있는데,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은 2009년(年) 조성(造成) 당시(當時)부터 집회(集會) 시위(示威)가 금지(禁止)되었다 . 시(市) 조례(條例)에 따르면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은 '시민(市民)의 건전(健全)한 여가선용(餘暇善用)과 문화활동(文化活動) 등(等)을 위한' 목적(目的)으로 사용(使用)할 수 있다.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을 이용(利用)하는 방식(方式)을 '허가제(許可制)'가(價) 아닌 '신고제(申告制)'로 개정(改正)하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매번(每番) 무산(霧散)됐다. 그런데도 불구(不拘)하고 그런데도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이 시위(示威)의 상징(象徵)이 된 것은 이러한 행사(行事)를 일단(一旦) '문화제(文化祭)'로 신고(申告)하거나, 아니면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이나 일부(一部) 기업(企業) 건물(建物) 등(等) 광장(廣場) 인근(隣近) 장소(場所)에 집회(集會) 신고(申告)를 한 다음 실제로(實際로)는 광장(廣場)으로까지 침범(侵犯)하는 경우(境遇)라고 한다.

이러한 점(點) 때문에 광장(廣場) 내(內)에서는 항상(恒常) 경찰관기동대(警察官機動隊) 가 경계근무(警戒勤務)를 서고 있다. 서울경찰청(警察廳) 의 거의 모든 [5] 경찰부대(警察部隊)가 정(定)해진 순번(順番)대로 투입(投入)되어 인근(隣近)의 주한미국대사관(駐韓美國大使館) 정부서울청사(政府서울廳舍) [6] , 근처(近處) 주한일본대사관(駐韓日本大使館) 평화(平和)의 소녀상(少女像) 경비(警備)를 서면서 인근(隣近)에서 벌어지는 기습적(奇襲的)인 집회시위(集會示威)에 대응(對應)하는 역할(役割)을 맡는다. 때문에 광장(廣場) 이곳저곳에는 경찰(警察)버스 의 전원공급(電源供給)을 위한 배전반(配電盤), 기동경찰(機動警察)의 휴식(休息)을 위한 컨테이너 등(等)이 설치(設置)되어 있으며, 주위(周圍)에 경찰관(警察官)/의경(義警) 할인(割引)을 해주는 식당(食堂)들도 많다. 다만 야외근무(野外勤務)라는 특성상(特性上) 기후(氣候)의 영향(影響)을 직접적(直接的)으로 받는데다 [7] 높으신 분들 도 자주 오가고, 돌발상황도(突發狀況度) 잦은 곳이라 고된 근무환경(勤務環境)이라는 평(評)을 받는다. 서울에서 의무경찰(義務警察)로 복무(服務)한 사람이라면 여러모로 각별한 기억(記憶) 으로 남을 장소(場所).

3.3. 문화적(文化的) 랜드마크 겸(兼) 길거리 응원(應援) 의 성지(聖地) [편집(編輯)]

2010년대(年代) 후반(後半) 들어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에 있는 현수막(懸垂幕)은 모두 철거(撤去)되었고, 2022년(年) 8월(月) 새 광장(廣場)을 조성(造成)하기 위해 잔디랑 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졌다. 코로나19 까지 겹치면서 시위(示威)의 장(場)으로서의 기능(機能)은 다소(多少) 축소(縮小)되기 시작(始作)했다.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2020년대(年代)부터는 행정적(行政的), 정치적(政治的) 중심지(中心地)에서 문화적(文化的) 랜드마크로 탈바꿈하고 있다. 외교부(外交部)가 광화문(光化門) 일대(一帶)에 있는 관계(關係)로 미국(美國), 일본(日本), 호주(濠洲), 핀란드, 멕시코, 오만(傲慢) 등(等)의 각국(各國) 대사관(大使館)들도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인근(隣近)에 많이 모여 있는 편(便)이다. 덕분(德分)인지 관광객(觀光客)들도 많다. 정부(政府) 기관(機關) 뿐만 아니라 고층(高層) 빌딩에 각종(各種) 기업(企業) 본사(本社) 등(等)도 많이 입주(入住)해 있는 서울의 대표적(代表的)인 업무(業務) 지구(地區) 중(中) 한 곳이다. 한국(韓國) 대중(大衆) 지식(知識)의 상징(象徵)이었던 교보문고(敎保文庫), 통신(通信) 시장(市場)에서의 매우 높은 점유율(占有率)을 자랑하는 KT 본사(本社)가 존재(存在)한다.

4년(年)마다 FIFA 월드컵 이 열릴 때면 서울을 대표(代表)하는 길거리 응원(應援) 의 성지(聖地)가 되곤 한다. 길거리 응원(應援)의 원조(援助) 현장(現場)은 서울광장(廣場) 이지만 2010년대(年代) 이후(以後)에는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이 이 역할(役割)을 하고 있다. 특히(特히)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은 전국(全國) 길거리 응원전(應援戰)의 본진(本陣) 역할(役割)을 하는데 대한축구협회 붉은악마 서포터스가 서울시(서울市)에 장소(場所) 사용(使用)을 요청(要請)하고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바로 앞에 본사(本社)를 둔 KT가 후원(後援)하는 방식(方式)으로 응원(應援) 광장(廣場)이 만들어진다. 전국(全國)에서 제일(第一) 유명(有名)한 길거리 응원(應援) 장소(場所)답게 응원(應援)이 펼쳐질 때면 각(各) 방송국(放送局)과 신문사(新聞社)의 카메라 기자(記者)들이 이 광장(廣場)에 찾아온다. A대표(代表)팀이 출전(出戰)하는 월드컵 외(外)에도 FIFA U-20 월드컵 의 경우(境遇)에도 상황(狀況)에 따라 거리 응원(應援)을 펼치기도 한다. [8]

한국(韓國)에서 진행(進行)됐던 2023 월(月)즈 또한 고척돔 만큼이나 그 응원(應援) 열기(熱氣)가 뜨거웠다.

4. 관련(關聯) 사건(事件) 사고(事故) 혹은(或은) 시위(示威)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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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건(重建) 계획(計劃) [편집(編輯)]

5.1. 2009년(年) 계획(計劃)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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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提案)된 안에 따른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측면배치안(側面配置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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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實際로) 건설(建設)된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중앙배치(中央配置)안)
그러다 참여정부(參與政府) 말기(末期) 당시(當時) 유홍준 전(前) 문화재청장(文化財廳長) 은 광화문(光化門) 복원(復元)을 하면서 동시(同時)에 세종대로(世宗大路)에 광장(廣場)을 만드는 안(案)을 계획(計劃)해서 서울시청(市廳)에 전달(傳達)하게 된다. [9] 최초(最初)의 안은 원래(元來) 있었던 육조(六曹)거리에 맞춰 세종대로(世宗大路)를 미국(美國) 대사관(大使館)/KT 쪽으로 보내고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앞을 막아서 광장(廣場)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서울시(서울市)에서 여론조사(輿論調査)를 추가적(追加的)으로 진행(進行)하고 중앙설치(中央設置)안으로 결정(決定) 되었다. 그러면서 결국(結局) 기존(旣存) 왕복(往復) 20차로(車路)였던 세종대로(世宗大路)를 왕복(往復) 12차로(車路)로 줄이고 세종대로(世宗大路) 중앙(中央)에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을 만들게 되었다. [10]

5.1.1. 문제점(問題點) [편집(編輯)]

5.1.1.1. 입지(立地) [편집(編輯)]
현재(現在)의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은 넓은 도로(道路)인 세종대로(世宗大路)의 가운데 부분(部分)을 공원(公園)으로 만든 것인데, 대부분(大部分)의 도시공학자(都市工學者)들은 이 공원(公園)의 조성(造成) 목적(目的) 및 용도(用途)에 대(對)해 부정적(否定的)이다. 광장(廣場)은 본래(本來) 보행자(步行者)가 걸어서 쉽게 갈 수 있도록 연속적(連續的)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은 세종대로(世宗大路) 정중앙(正中央)에 섬처럼 만드는 바람에 접근성(接近性)이 떨어진다는 문제점(問題點)이 있다. 또한 동선(動線)과 시선축(視線軸)이 어그러졌다는 문제점(問題點)도 있다. 서현 교수(敎授)는 차라리 이 공원(公園)이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쪽의 인도(印度)에 접(接)하도록 만들어야 육조(六曹)거리의 의미(意味)뿐만 아니라 동선축(動線軸)과 시선(視線)축에 부합(符合)한다고 언급(言及)한 바가 있다. 그래서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은 서울시청(市廳) 앞의 광장(廣場)과 함께 정치적(政治的)인 목적(目的)의 산물(産物)이라고 욕(辱)을 먹는 중(中)이다. [11]

다만, 이러한 혹평(酷評)과는 별개(別個)로 북악산(北岳山) , 청와대(靑瓦臺) , 경복궁(景福宮) 전경(全景)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진(寫眞) 찍기에는 최적(最適)의 장소(場所). 외국인(外國人) 관광객(觀光客)들 사이에서 사진촬영(寫眞撮影)의 명소(名所)로 인기(人氣)가 많다. 외국인(外國人) 관광객(觀光客)들에게 경복궁(景福宮)은 필수(必須) 중(中)의 필수(必須)로 여겨지는 장소(場所)인데, 경복궁(景福宮) 온 김에 들렀다가 되려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이 인상(印象)깊었다는 주객전도(主客顚倒)가 일어나기도 한다.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은 일단(一旦) 규모(規模)도 세계(世界)에서 손에 꼽을 정도(程度)지만 동상(銅像)/경복궁(景福宮)/북악산(北岳山)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도(構圖)가 특히(特히) 강렬(强烈)한 인상(印象)을 남겨서 호평(好評) 일색(一色)이다. 각종(各種) 시위(示威)까지 끼얹어지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그래서 요즘은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에 시위(示威) 목적(目的)으로 오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外國人) 관광객(觀光客) 빼고는 잘 오지 않는다. [12]
5.1.1.2. 교통(交通) [편집(編輯)]
세종대로(世宗大路) 가 왕복(往復) 20차로(車路)에서 12차로(車路)로 축소(縮小)되어 교통정체(交通停滯) 가 극심(極甚)해졌다. 게다가 고양시(高陽市) 파주시(坡州市) 에서 오는 광역(廣域)버스들이 이 광장(廣場) 때문에 광화문정류소(光化門停留所)의 반대편(反對便)인 KT정류소(停留所)에서 승객(乘客)을 태울 수 없는 사태(事態)가 벌어졌다. 결국(結局) 노선(路線)이 조정(調整)되어 이 버스들이 서울 시내(市內)에서 나갈 때는 의주(義州)로 를 지나게 되었다. 그 외(外) 분당(盆唐), 용인(龍仁), 하남(河南), 의정부(議政府)(종로(鍾路)1가(家)로 노선(路線) 단축(短縮)), 수지(收支)에서 오는 광역(廣域)버스들의 경로(經路)가 거의 남대문로로 변경(變更)되어 종각역(鐘閣驛) - 을지로입구역(乙支路入口驛) - 숭례문(崇禮門) 구간(區間)이 헬게이트 가 되었다. 1년여(年餘) 동안 남대문로(南大門路) 정체(停滯)로 몸살을 앓은 남대문경찰서(南大門警察署)가 서울시(서울市)에 요청(要請)해, 결국(結局) 하남(河南), 일부(一部) 분당행(行) 광역(廣域)버스를 제외(除外)하고 점차적(漸次的)으로 본래(本來) 노선(路線)으로 환원(還元)했다. 이 때문에 대중교통(大衆交通) 종사자(從事者)와 자가(自家) 운전자(運轉者)들 역시(亦是) 모두 한 마디씩 하는 중(中). 광장(廣場)을 조성(造成)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만 그 광장(廣場)이 모두가 만족(滿足)하는 광장(廣場)이 아닌 정치적(政治的) 산물(産物)이라는 점(點)이 문제(問題). 세종대로(世宗大路) 등(等)은 규격상(規格上) 광(狂)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원래(元來) 광장(廣場)의 기능(機能)을 포함(包含)한다. 단순(單純) 교통(交通)의 의미(意味)가 아니라 집회(集會) 기능(機能)이 있었던 것. 교통(交通)만 생각하면 도로(道路)가 그리 넓어야 할 이유(理由)가 없다.

여름에는 분수(分數)를 가동(稼動)하기도 하는데, 겨울에는 차도(車道)로 넘쳐흐른 분수(噴水)물이 얼어 교통사고(交通事故)를 유발(誘發)할 수 있다는 비판(批判)이 뒤늦게 제기(提起)되면서 늦가을부터는 전혀(全혀) 가동(稼動)하지 않기로 결정(決定)하였다.
5.1.1.3. 집회(集會) 금지(禁止) [편집(編輯)]
이 광장(廣場)에서 정치적(政治的) 집회(集會)를 금지(禁止)한 것 때문에 까이기도 하였다. 홍보용(弘報用) 공터(空터) 로 용도(用途)를 한정(限定)해버렸다는 것. 실제(實際) 서울 시(市) 조례(條例)에도 각종(各種) 정치적(政治的) 목적(目的)의 집회(集會)는 금지(禁止)되어 있으며 순전히(純全히) 관제(官制) 행사(行事)만 허용(許容)할 정도(程度)다.

그런데 허용(許容)을 해도 집회(集會)가 힘든 게, 실제로(實際로) 광장(廣場)이라고 만들어놓은 게 상(賞)-하행(下行) 편도(片道) 2차선(車線) 도로(道路) 가운데 만들어놓아 차(車)들이 달리는 가운데 서 오가는 위험성(危險性)이 존재(存在)하며, 실제로(實際로) 택시가 광장(廣場) 안쪽으로 돌진(突進)하는 사고(事故)도 종종(種種) 일어난다. 즉(卽) 어지간한 대규모(大規模) 집회(集會)가 아닌 한 집회(集會)가 불가능(不可能)하다.

집회(集會)가 금지(禁止)되는 법적근거(法的根據)는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조례상(條例上) 문화재(文化財) 인근(隣近) 100m 이내(以內)에서 행사(行事)를 진행(進行)하거나 행사(行事)를 목적(目的)으로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을 점용(占用)할 때에는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의 허가(許可)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規定)과 함께 집시법(集示法)상으로도 외교기관(外交機關) 100m 이내(以內)에서 집회(集會)를 할 수 없다 [13] 는 규정(規定) 때문인데 다만 집시법(執匙法)의 금지조문(禁止條文)엔 예외적(例外的)으로 집회(集會)가 가능(可能)한 경우(境遇)도 규정(規定)하고 있다.
  • 집시법(執匙法) 제(第) 11조(兆) 4의
    • 가. 해당(該當) 외교기관(外交機關) 또는 외교사절(外交使節)의 숙소(宿所)를 대상(對象)으로 하지 아니하는 경우(境遇)
    • 나. 대규모(大規模) 집회(集會) 또는 시위(示威)로 확산(擴散)될 우려(憂慮)가 없는 경우(境遇)
    • 다. 외교기관(外交機關)의 업무(業務)가 없는 휴일(休日)에 개최(開催)하는 경우(境遇)

이 3가지 경우(境遇) 중(中) 하나에 해당(該當)할 경우(境遇) 외교기관(外交機關) 100m 내(內)에서도 집회(集會)가 가능(可能)하다.

또한 집회시(集會時)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의 사용(使用)에 관(關)한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의 입장(立場)은 확고(確固)한데 해당(該當) 조례(條例)의 그 어느 조문(條文)에도 집회(集會)를 금지(禁止)한다는 규정(規定)은 없으며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의 운영(運營)과 안전(安全) 관리(管理), 문화(文化) 행사(行事) 등(等)에 대(對)한 행정적(行政的)인 처리(處理)는 서울시설관리공단(施設管理公團)이 담당(擔當)하지만 집회(集會)나 시위(示威)는 조례(條例)에 우선(優先)해 상위법(上位法)인 집시법(集示法) 규정(規定)에 따르게 된다고 밝혔다. [14]
5.1.1.4. 부실(不實)한 전시(展示) 시설(施設)들 [편집(編輯)]
세종대왕동상(銅像) 뒤편(뒤便)으로 가보면 동상(銅像)의 좌대(座臺) 뒤편(뒤便)에 문(門)이 달려있는데 내부(內部)로 들어가보면 지하(地下)로 계단(階段)이 연결(連結)되어 있다. 내려가 보면 ' 세종(世宗) 이야기'와 ' 충무공(忠武公) 이야기'라는 전시관(展示館)이 있다. 이 전시관(展示館)은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에서 KT빌딩에 이르는 지하(地下) 공간(空間)에 조성(造成)되어 있는데,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 조성(造成) 전(全) 존재(存在)하던 지하(地下)U턴 차로(車路)를 재활용(再活用)하여 만들어졌다.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을 자주 가본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다가 '어 이런 곳에 이렇게 큰 전시관(展示館)이 있었어?'하며 놀라는 곳. 당연히(當然히)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이나 KT빌딩 쪽에서도 접근(接近) 가능(可能)하다.

이 시설(施設)에 대(對)한 호불호(好不好)가 상당히(相當히) 갈린다. 전시관(展示館) 내부(內部)에 놓여있는 전시물(展示物)이래봐야 어린애들이 왜구(倭寇)들을 쏴 죽이는 오락기(娛樂器)를 가져다 놓은 수준(水準)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의 위업(偉業)을 제대로 전달(傳達)하지 못하고 허접(許接)하게 다루었다는 비판(批判)을 받는다. 이름에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여서 전시(展示) 시설(施設)을 만드는 것 자체(自體)가 유치(幼稚)하다는 의견(意見)도 있다.
5.1.1.5. 역사성(歷史性) 무시(無視) 논란(論難)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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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과 그 앞에 있던 월대(月臺)
  • 월대(月臺) 복원(復元) 문제(問題)
    역사성(歷史性)을 무시(無視)한 대표(代表) 사례(事例)로 월대(月臺)와 해치상(獬豸像) 위치(位置)가 바뀐 점(點)이 주로(主로) 꼽힌다. 광화문(光化門) 앞에는 광장(廣場) 역할(役割)을 하는 월대(月臺)가 있었다. 월대(月臺) 역시(亦是) 궁궐(宮闕)의 일부(一部)였다. 베이징의 천안문도(天安門度) 그렇고, 동아시아(東아시아)의 궁궐(宮闕) 정문(正門) 앞에는 궁궐(宮闕)의 격(格)을 높이고 기타(其他) 행사(行事)를 치르기 위한 월대(月臺)를 설치(設置)하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이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건물(建物)이 들어서고 광복(光復) 이후(以後)에 콘크리트 광화문(光化門)이 세워지면서 월대(月臺)는 사라졌고 복원(復元)은 더 요원(遙遠)해졌다. 경복궁(景福宮) 완전(完全) 복원(復元)을 위해 문화재청(文化財廳)을 포함(包含)한 유관(有關) 기관(機關) 모두가 총력(總力)을 기울이는 상황(狀況)에서 서울시(서울市)에서도 기왕(旣往) 서울 광장(廣場)을 만든다면 월대(月臺) 복원(復元)을 위해서 광화문(光化門)에 이어서 만드는게 옳다고 보는 의견(意見)이 적지 않았다. 서울 시청(市廳) 광장(廣場)도 시청사(市廳舍) 앞에 바로 이어서 만들었으니 전례(前例)도 있었고 경복궁(景福宮) 앞으로 광장(廣場)을 세우면 궁궐(宮闕)에 대(對)한 접근성(接近性)과 광장(廣場)에 대(對)한 접근성(接近性) 모두 해결(解決)할 수 있는 묘책(妙策)이었으나 사직(辭職)로 문제(問題)도 있고 해서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러나 2023년(年), 드디어 월대(月臺)가 복원(復元) 되며 역사(歷史) 고증(考證)이 드디어 맞게 되었다. 이로 인(因)해 월대(月臺) 앞 도로(道路)가 살짝 휘었다고.

    해치 위치(位置)도 사실(事實) 원래(元來)보다 앞으로 나와야 한다. 과거(過去) 사진(寫眞)들을 보면 해치 위치(位置)가 지금(只今)보다 수십(數十)미터 앞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 육조(六曹)거리 원형(原形) 논란(論難)
    육조(六曹)거리가 관악산(冠岳山)을 향(向)하고 있다는 것과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시절(時節) 일제(日帝)가 의도적(意圖的)으로 육조(六曹)거리 의 축(軸)을 조선신궁 을 향(向)하도록 돌렸다는 오해(誤解)가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른 논란(論難)과는 다르게 사실(事實)이 아니다.

    광복(光復) 이후(以後) 한국(韓國)에서는 일제(日帝)의 영향(影響)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원형(原形)을 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대두(擡頭)되기 시작(始作)했다. 문제(問題)는 이 과정(過程)에서 원형(原形)이 원래(元來) 그랬던 것인데 일제(日帝)가 왜곡(歪曲)시킨 것이라 오해(誤解)한 경우(境遇)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육조(六曹)거리도(度) 이러한 사례(事例) 중(中) 하나다. 원래(元來) 육조거리는 일직선(一直線) 형태(形態)가 아니라 살짝 동쪽(東쪽)으로 굽어진 형태(形態)였다. # 앞서 말한 대로 관악산(冠岳山)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 1912년(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제작(製作)한 육조(六曹)거리 도면(圖面)인 '경성부(京城府) 지적원(指摘院)도'에도 이렇게 살짝 굽어진 형태(形態)의 육조(六曹)거리 모습이 보인다. # 일제(日帝)가 방향(方向)을 틀어다 놓은 것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건물(建物)이지 육조(六曹)거리가 아니다 . 일제(日帝)가 왜곡(歪曲)시킨 부분(部分)은 광화문(光化門)을 이전(移轉)시키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건물(建物)을 경복궁(景福宮) 축선(軸線)(육조(六曹)거리 축선(軸線)이 아니다)과 어긋나게 바꿔놓은 것 [16] 과, 육조(六曹)거리의 축선(軸線) 끝자락이 되는 남산(南山)에 조선신궁 을 만든 것이다.

5.2. 문재인(文在寅) 정부(政府) 제시안(提示案) [편집(編輯)]

2017년(年) 5월(月) 10일(日) 출범(出帆)한 문재인(文在寅) 정부(政府) 에서는 대통령(大統領) 집무실(執務室)을 정부서울청사(政府서울廳舍) 로 옮기면서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수정(修正)을 추진(推進)할 예정(豫定)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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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수정안(修正案) 계획(計劃)도
위에 언급(言及)한 수정안(修正案)대로라면, 경복궁(景福宮)으로부터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이 보행도로(步行道路)로 연결(連結)되고,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에서 맞은편(맞은便) 미국(美國) 대사관(大使館)까지 세종대로(世宗大路) 전체(全體)가 공원(公園)으로 꾸며진다. 구체적(具體的)으로는 광화문(光化門) 월대(月臺)와 해태상(獬豸像)을 조선(朝鮮) 후기(後期) 때 위치(位置)로 복원(復元)하기 위해 경복궁(景福宮) 앞 율곡로 130여(餘)m를 지하화(地下化)하고 지하(地下)로 내린 율곡로는 지하철(地下鐵) 3호선(號線) 구간(區間)을 피해(被害) 곡선화(曲線化)할 계획(計劃)이다. 또 현재(現在) 11차(次)로인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양(兩) 옆 세종로도(世宗路度) 전면(全面) 지하화(地下化)해 KT 광화문지사(光化門知事) 앞부터 경복궁(景福宮) 방향(方向)으로 30m 이상(以上)의 도로(道路)가 모두 지하화(地下化)할 예정(豫定)이다. #

어차피(於此彼) 대통령(大統領) 집무실(執務室)이 정부(政府)서울청사(廳舍)로 옮겨지게 되면 대통령(大統領)의 동선(動線), 보안시설(保安施設), 전파(電波) 교란(攪亂) 등(等)의 경호(警護) 문제(問題)로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구조(構造)에 변화(變化)를 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기사(記事) 후반부(後半部)를 참고(參考)할 것 .

하지만 결국(結局) 2019년(年) 1월(月) 4일(日), 유홍준 '광화문(光化門) 대통령(大統領) 시대(時代)' 자문위원(諮問委員)은 청와대(靑瓦臺) 춘추관(春秋館)에서 가진 브리핑을 통해, 시설(施設), 부지(敷地) 등(等)의 현실적(現實的)인 문제(問題)로 인해 대통령(大統領) 집무실(執務室) 정부서울청사(政府서울廳舍) 이전(移轉)과 청와대(靑瓦臺) 개방(開放)은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재구조화(再構造化) 사업(事業)이 끝난 후(後)에 장기적(長期的)인 과제(課題)로 검토(檢討)하겠다고 발표(發表)하여, 문재인(文在寅) 전(前) 대통령(大統領)의 대통령집무실(大統領執務室) 정부서울청사(政府서울廳舍) 이전(移轉) 공약(公約)은 사실상(事實上) 백지화(白紙化) 되었고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재구조화(再構造化) 사업(事業)에도 변화(變化)가 생기게 되었다. #

5.3. 서울시청(市廳) 문화재청(文化財廳) 공(公)동안 [편집(編輯)]

광화문광장 조성 기본계획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조성(造成) 기본계획(基本計劃)
그러다가 2018년(年)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은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방향(方向)으로 확장(擴張)돼 횡단보도(橫斷步道)를 건너지 않아도 닿을 수 있는 '매머드 광장(廣場)'이 될 예정(豫定)으로 변경(變更)되었다. 광화문(光化門) 앞을 가로지르는 사직(辭職)로 자리에는 서울광장(廣場)(13,207㎡)의 3.4배(倍) 크기 역사광장(歷史廣場)이 새로 조성(造成)되는 것이다. 이 경우(境遇)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이 지금(只今)보다 3.7배(倍) 커지며, 10차선(次線)은 6차선(車線)으로 축소(縮小)될 전망(展望)이었다.

2019년(年) 1월(月) 21일(日)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재조성사업(再造成事業) 국제공모전(國際公募展) 최종(最終) 당선작(當選作)으로 '딥 서피스 [17] (부제(副題):과거(過去)와 미래(未來)를 깨우다)'를 공개(公開)했다. 국제설계공모(國際設計公募)를 거쳐 CA조경기술사사무소(造景技術士事務所) 진양교 대표(代表) 등(等)이 낸 모형(模型). 경향신문(京鄕新聞) 도로(道路)를 6차선(車線)으로 축소(縮小)하고, 특히(特히)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쪽은 광화문광장과 연결(連結)된다. [18] (수정(修正) 가능성(可能性) 문단(文壇)에서 제기(提起)한 2번(番) 안과(眼科) 특히(特히) 더 유사(類似)) 이순신동상(李舜臣銅像), 세종대왕상(賞) 역시(亦是) 예상(豫想)대로 이동(移動)된다.

광화문(光化門) 앞에 있었던 조선시대(朝鮮時代) 월대(月臺)와 육조(六曹)거리를 복원(復元)함으로써 역사성(歷史性)을 살렸다. 또한 광화문(光化門)과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을 연결(連結)하며,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쪽 도로(道路)를 없애고 그 자리에 '시민광장'을 유치(誘致)한다. 이렇게 되면 총(總) 광장(廣場) 면적(面積)이 126,100㎡까지 늘어난다고 한다.

더불어 현재(現在) 분리(分離)되어 있는 광화문(光化門)~시청(市廳)~을지로~동대문(東大門) 4km에 달(達)하는 지하(地下) 시설(施設)을 통합(統合), 확장(擴張)해 광장(廣場)을 조성(造成)하기로 하였다. 채광(採鑛)은 자연광(自然光)을 이용(利用)하는 선(線)큰(Sunken) 구조(構造)로 변경(變更)한다고 했다. 그리고 광화문역(光化門驛) 시청역(市廳驛) 을 연결(連結)하고 GTX A 노선(路線)을 유치(誘致), 신분당선(新盆唐線)까지 유치(誘致) 해서 5개(個) 노선(路線) [19] 이 지나는 복합(複合) 역사(歷史)를 만들어 강북의 교통(交通)허브로 만들겠다고 했다.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신분당선(新盆唐線) 광화문(光化門) 연장(延長) 에 미련(未練)을 못 버린 듯하다. 이 부분(部分)에 대(對)해서는 국토교통부(國土交通部) 가 태클을 걸었다. 광화문역에 GTX를 정차(停車)시키면 비용(費用) 부담(負擔)도 커지고 표정속도도(表定速度度) 떨어진다는 것. #

예측(豫測)대로 세종대왕(世宗大王) 동상(銅像)은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앞으로, 이순신(李舜臣) 동상(銅像)은 옛 삼군부(三軍府) 터인 정부서울청사(政府서울廳舍) 앞으로 옮기기로 했다. 다만 박원순(朴元淳) 전(前) 시장(市長)은 이순신(李舜臣), 세종대왕(世宗大王) 동상(銅像) 이전(以前) 부분(部分)은 공론화(公論化) 과정(過程)을 거친 후(後)에 확정(確定)짓겠다고 밝혔다. # 같이 인터뷰한 심사위원장(審査委員長)의 표현(表現)을 통해 추정(推定)하면, 시(詩) 입장(立場)에서는 이순신(李舜臣) 동상(銅像)을 현위치(現位置)에 두는 데에 부정적(否定的)이진 않은 듯.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와 문화재청(文化財廳)이 각각(各各) 669억(億)원, 371억(億)원을 부담(負擔)해 총(總) 1,040억(億)원의 예산(豫算)으로 2021년(年) 완성(完成)하기로 발표(發表)했다.

행안부(行安部)에도 이견(異見)을 제시(提示)했다. # 계획(計劃)대로라면, 정부서울청사(政府서울廳舍) 에도 손을 대게 되는데, 여기에 부정적(否定的)인 반응(反應)을 보였다. 건물(建物) 4개(個)가 철거(撤去)되고 청사(廳舍) 앞 도로(道路)가 없어지는데 당연(當然)한 반응(反應)이다. 이에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합의(合意)를 진행(進行)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부겸(金富謙) 전(前) 장관(長官)이 직접(直接) 비판(批判)에 가세(加勢)하면서 갈등(葛藤)이 고조(高調)되고 있다.
  • 비판(批判)
기존(旣存)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이 지녔던 역사성(歷史性) 복원(復元) 부분(部分)의 아쉬움, 섬 같은 입지(立地)로 인한 단절성(斷絶性) 등(等)의 문제점(問題點)을 상당수(相當數) 개선(改善)했다는 것은 분명(分明) 의의(意義)가 크다. 그러나 다음의 비판(批判)이 있다.

먼저, 교통(交通)에 대(對)한 우려(憂慮)가 있다. 이미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조성(造成)을 위해 세종대로(世宗大路) 는 칼질을 당(當)했다. 그리고 그 결과(結果) 광화문(光化門) 일대(一帶)는 현재(現在) 심각(深刻)한 교통혼잡(交通混雜)을 겪고 있다. 그런데 가뜩이나 모자란 도로(道路)가 더 줄어들면 결국(結局) 현(現) 모습의 최대(最大) 단점(短點)이 극대화된다는 소리다. 이에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이 주변(周邊)을 지나는 차(車)들에게 도심부(都心部) 혼잡(混雜) 통행료(通行料) 부과방침(賦課方針)을 정(定)했다. 이렇게 될 경우(境遇) 자연(自然)스럽게 교통량(交通量) 축소(縮小)와 승용차(乘用車) 통행(通行) 억제(抑制)가 이루어지고 대형(大型) 차량(車輛) 중심(中心)으로 재편(再編)될 것이라는 예상(豫想)이라고. 확장공사(擴張工事)가 이루어지기 전(前)인 2020년(年) 4월(月)부터 차(車)없는 거리 행사(行事)때 오른쪽 6차선(車線)만 이용(利用)해서 운행(運行)하는 것으로 시뮬레이션 하기로 했다. 또 오른쪽 6차선(車線)이 일방통행(一方通行)이 아니라 버스 전용차선(專用車線)은 반대(反對)로도 운행(運行)할 수 있게 하기로 하였다. 4월(月)부터 세종대로(世宗大路) 편도방향(片道方向)에 가변식(可變式) 이동시설물(移動施設物)을 설치(設置)하는 것이 주요(主要) 골자(骨子)다. 양방향(兩方向) 버스차선(車線)은 상시(常時)로 운행(運行)이 가능(可能)하도록 경찰(警察)과 협의(協議)·추진(推進)할 예정(豫定)이다.

다음으로는 랜드마크인 이순신(李舜臣) 동상(銅像)과 세종대왕(世宗大王) 동상(銅像)이 이동(移動)되는 것에 대(對)한 반감(反感)을 들 수 있다. 의외로(意外로) 교통(交通)보다 이 부분(部分)에 대(對)한 반감(反感)이 거세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역사적(歷史的)인 인물(人物) 2명(名)을 대신(代身)해서 촛불관련(關聯) 디자인을 한다는 것에 대(對)해 반대(反對)하는 여론(輿論)이 많다. 심지어(甚至於) 진보(進步) 성향(性向) 언론사(言論社)에 달린 댓글에도 이 부분(部分)은 건들지 않았으면 하는 의견(意見)이 더 많았다. 박원순(朴元淳) 시장(市長)이 동상(銅像) 이전(移轉) 여부(與否)는 공론화(公論化) 과정(過程)을 거쳐 결정(決定)하겠다고 밝혔고,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설계자(設計者)는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 동상(銅像) 이전(移轉)과 촛불문양(文樣) 새기기는 포기(抛棄)한다고 했다.

5.4. 최종(最終) 확정안(確定案)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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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年) 공사(工事) 최종(最終) 준공(竣工) 후(後) 광장(廣場) 모습
  • 계속(繼續)된 비판(批判)이 이어지자 서울시(서울市)는 박원순(朴元淳) 전(前) 서울시장(市長) 의 사망(死亡) 이후(以後)에도 논의(論議)가 계속(繼續)되어 2차(次) 수정안(修正案)을 내놓았다. #
    • 도로(道路) 교통(交通) 관련(關聯): 대형(大型) 차량(車輛)은 세종대로(世宗大路) 에서 U턴 을 못 하고 사직(辭職)로 정부청사사거리(政府廳舍四거리)까지 올라가서 L턴을 해야 하고 세종대로사거리(世宗大路射距離) P턴도(度) 현재(現在)보다 더 뒷편(뒤便)에서 하는 등(等) 도로교통(道路交通)도 큰 폭(幅)으로 변경(變更)된다. #
    • 광장(廣場) 크기 축소(縮小): 기존(旣存)보다 살짝 축소(縮小)되어 차로(車路)가 넓어져서 우회도로(迂廻道路) 문제(問題)는 일단락(一段落)되었고 교통(交通) 문제(問題)는 좀 나아졌다. 그리고 수정안(修正案)에서 나온 전면(全面) 보행화(步行火)를 단계적(段階的)으로 진행(進行)한다.
    • 동상(銅像) 이전(移轉): 두 동상(銅像)은 이전(移轉)되지 않을 예정(豫定)이며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조성(造成) 당시(當時) 측면(側面)안에 좀 더 다가간 모양새(模樣새)를 띄고 있다.
  • 박원순(朴元淳) 전(前) 서울시장(市長) 의 사망(死亡) 이후(以後)로도 공사(工事)는 중단(中斷) 없이 진행(進行)되자 이에 한 시민단체(市民團體)에서는 행정소송(行政訴訟)을 냈다. #1 , #2
  • 2021년(年) 재보궐선거(再補闕選擧) 에서 오세훈(吳世勳) 이 서울시장(市長)으로 당선(當選)되면서, 재구조화(再構造化) 사업(事業)이 일시적(一時的)으로 중단(中斷)되었으나 # 2021년(年) 4월(月) 29일(日), "이미 34% 공정(工程)이 진행(進行)되었고, 250억(億)이라는 막대(莫大)한 예산(豫算)이 투입(投入)됐다"고 설명(說明)하며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 재구조화(再構造化) 사업(事業)을 계속(繼續)하기로 결정(決定)하였다 # 다만, 사업(事業)을 재개(再開)하되 월대(月臺) 복원(復元) 등(等) 일부(一部) 설계(設計) 변경(變更)을 추가(追加)하고, 그로 인해 공사(工事) 기한(期限)도 2022년(年) 4월(月)을 완공(完工) 시기(時期)로 잡았다. #
  • 2021년(年) 3월(月)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공사(工事) 도중(途中) 조선시대(朝鮮時代) 수로(水路)와 옛 삼군부(三軍府) 터로 추정(推定)되는 기단(基壇)을 발견(發見)했다고 한다. 서울시(서울市)는 공사(工事) 기간(期間) 연장(延長)은 없을 것이며, 발굴(發掘) 조사(調査)를 진행(進行) 중(中)이라고 밝혔다. 본격적(本格的)인 확장(擴張) 공사(工事)에 앞서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발굴(發掘) 작업(作業)을 벌이면서 바닥을 파보니 수로(水路)와 각종(各種) 도자기(陶瓷器), 기와편(便), 식기(食器) 등(等) 조선시대(朝鮮時代)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서울시(서울市)는 가급적(可及的) 유적(遺跡)을 현(現) 위치(位置)에 보존(保存)하고, 교육적(敎育的) 가치(價値)가 높은 유적(遺跡)은 노출(露出)해 시민(市民)들이 감상(鑑賞)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方針)이며, 필요(必要)할 경우(境遇)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의 상부(上部) 구조물(構造物)의 위치(位置)도 조정(調整)할 수 있다고 한다. #
  • 2022년(年) 7월(月) 20일(日) 기준(基準) 공정률(工程率)은 92.5% 정도(程度)이다.
  • 서울시(서울市)는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공사(工事)를 2022년(年) 6월(月)까지 마무리하고 8월(月) 전면(全面) 개장(開場) 한다고?1월 25일(日) 밝혔다. 중대재해처벌법(重大災害處罰法)이 시행(施行)되는 가운데, 시공사(施工社)가 시간(時間)에 쫓겨 공사(工事)를 서두르지 않도록 당초(當初) 4월(月)로 잡혔던 개장(開場) 시기(時期)를 늦췄다고 시(詩)는 설명(說明)했다. # #
서울 광화문
공사(工事) 막바지에 들어간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 전경(前景)

6. 대중매체(大衆媒體)에서 [편집(編輯)]

  • 광장(廣場)이 개설(開設)되던 해에 방영(放映)된 KBS 드라마 아이리스 에서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 총격(銃擊) 씬 을 촬영(撮影)하여 화제(話題)가 되었었다. # 이전(以前)까지는 이 곳에서 총기(銃器) 액션을 찍은 전례(前例)가 없었기 때문에 언론(言論)들의 집중적(集中的)인 관심(關心)을 받았다. [20]
  • 골든 슬럼버 에서 극(劇) 중(中) 대통령(大統領) 후보(候補) 유영국이 차량(車輛) 폭파(爆破) 암살(暗殺)을 당(當)하는 곳으로 나온다.
  • 바이올리니스트 여근하의 Somewhere in Seoul 중(中) 1번(番)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에서 :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에서의 민초(民草)들의 삶의 여정(旅程)과 추억(追憶) 그리고 애환(哀歡)을 고스란히 담은 클래식 바이올린 곡(曲). 광화문(光化門)이 제목(題目)이 아니다. 광화문(光化門) 건물(建物) 자체(自體)를 음악(音樂)으로 재현(再現)한 것이 아닌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에서의 개인적(個人的) 체험(體驗)과 감흥(感興)을 음악(音樂)으로 표현(表現)한 음악기행문(音樂紀行文)이다.
  • Plague Inc. 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상황(狀況)을 보여주는 시티캠으로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이 나온다. 이순신(李舜臣) 동상(銅像)의 모습이 인상적(印象的)인데, 국민(國民)이 전멸(全滅)된 상태(狀態) 시(時) 훼손(毁損)되는 연출(演出)이 마치 이순신(李舜臣)이 나라의 멸망(滅亡)을 한탄(恨歎)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程度)다. [21]
  • 황후(皇后)의 품격(品格) 첫 화(禍) 첫 장면(場面)에서 조선시대(朝鮮時代)~현대(現代)까지 광화문일대(光化門一帶) (서울중심지(中心地))의 변화(變化)를 보여주면서 경복궁(景福宮)과 극(劇) 중(中) 궁궐(宮闕)(이화궁)일대(一帶)를 전부(全部) 보여줬다.
  • 아직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이 생기기 전(前)인 2005년(年) 방영(放映)된 MBC 드라마 제(第)5공화국(共和國) 에서는, 불도저를 개조(改造)해 만든 전차(戰車) 부대(部隊)를 김진영 대령(大領)이 회군(回軍)시키는 씬을 광화문(光化門) 앞 대로(大路)에서 촬영(撮影)했었다.
  • 승리호(勝利號) 에서 우주(宇宙) 엘레베이터 터미널이 위치(位置)한 장소(場所)로 나온다.
  • 택배기사(宅配技士) 에서 쉘터가 위치(位置)한 장소(場所)로 나오며 주변(周邊)에 문화회관(文化會館)과 주한미국대사관(駐韓美國大使館)이 파손(破損)된채로 폐건물(廢建物)로 남아있는등 세기말(世紀末)의 분위기(雰圍氣)를 보여준다.
  • 스위트홈 에서 그린빌에 있는 비밀통로(祕密通路)의 도착지(到着地)로 나온다 작중(作中) 생존자(生存者)들이 비밀통로(祕密通路)로 통해 이곳에 도착(到着)해 정찰중(偵察中)인 군병력(軍兵力)들과 마주해 군병력(軍兵力)이 생존자(生存者)들을 군(軍)트럭에 태워간다. 작중(作中)에 바이러스 때문인지 상황(狀況)이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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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舊)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2] 조각가(彫刻家) 김세중 의 작품(作品) [3] 홍익대(弘益大) 교수(敎授)이자 조각가(彫刻家)인 김영원의 작품(作品) # [4] 이와 연관(聯關)해 알쓸신잡(알쓸神雜) 2기에선, 조선(朝鮮) 시대(時代) 종묘(宗廟) , 사직(辭職) 이 조선(朝鮮)의 정신적(精神的) 기둥, 물질적(物質的) 욕망(欲望) 비슷한 것을 기원(祈願)하는 상징물(象徵物)이었다면, 21세기(世紀)엔 광화문(光化門)과 마천루(摩天樓)가 이에 비견(比肩)되는 상징물(象徵物) 아니겠냐는 의견(意見)이 나오기도 했다. [5] 국회기동대(國會機動隊)를 비롯한 시설전담중대(施設專擔中臺)는 당연히(當然히) 투입(投入)되지 않는다. [6] 외곽(外郭) 경비(警備)만 경찰(警察)이 담당(擔當)한다. 주한미국대사관(駐韓美國大使館)은 미해병대(美海兵隊) 가, 정부서울청사(政府서울廳舍)는 청원경찰(請願警察) 이 내부경비(內部經費)를 담당(擔當)한다. [7] 실제로(實際로) 폭염(暴炎) 때문에 근무(勤務)를 서던 의경(義警)이 실신(失神)한 사고(思考)가 있었다. 현재(現在)는 경력(經歷)에게 양산(量産)과 아이스팩을 보급(補給)해주고 있다. [8] 2회(回) 연속(連續) 4강(强) 진출(進出)이라는 성과(成果)를 이뤄낸 2019년(年)과 2023년(年) 대회(大會)가 여기에 속(屬)한다. [9] 유홍준의 책(冊) 나의 문화유산답사기(文化遺産踏査記) 에 소상히(昭詳히) 기록(記錄)되어 있다. [10]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을 만들기 이전(以前) 세종대로(世宗大路)는 왕복(往復) 20차로(車路)로 대한민국(大韓民國), 아니, 전(全) 세계(世界)에서 가장 넓은 도로(道路) 를 자랑했었다. 하지만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을 만든 이후(以後) 왕복(往復) 12차로(車路)로 줄었고, 지금(只今) 전(全) 세계(世界)에서 가장 넓은 도로(道路)를 자랑하는 곳은 중국(中國) 징강아오고속공로 (왕복(往復) 50차로(車路))이다. 그리고 한국(韓國)에서도 무진대로 (왕복(往復) 16차로(車路))와 영동대로(嶺東大路) (왕복(往復) 14차로(車路))에 밀렸다. [11] 서울광장(廣場)의 경우(境遇) 국제(國際) 공모(公募)에서 서현 교수(敎授)의 "빛의 광장(廣場)" 설계안(設計案)이 최종(最終) 당선(當選)되었고, 국내외(國內外)에서 매우 큰 호평(好評)을 받았다. 그러나 어른의 사정(事情)으로 인해 폐기(廢棄)되고, 현재(現在)의 잔디광장(廣場)으로 대신(代身) 건설(建設)된 사례(事例)가 있다. 물론(勿論) 이 과정(過程)에서 건축계(建築界)와 서현 교수(敎授) 측(側)의 강(强)한 반발(反撥)이 있었다. 다만 서현 교수(敎授)의 방(房)안은 LCD를 광장(廣場) 바닥에 설치(設置)하는 것으로 전자제품(電子製品)의 특성상(特性上) 한시성(한時性) 문제(問題)가 존재(存在)했고 토목(土木) 공사(工事)를 제외(除外)한 시공(施工) 예산(豫算)이 60억(億) 가량(假量)이었던 관계(關係)로 민자(民資) 유치(誘致)나 기증(寄贈)이 필수적(必須的)인 상황(狀況)이긴 했다.. 이 과정(過程)에서 서울시(서울市)가 예산(豫算) 상(上)의 이유(理由)로 결정(潔淨)한 방안(方案)이 현재(現在)의 서울광장(廣場) 형태(形態)이다. [12]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부터 양옆(兩옆)에 있는 건물(建物)들 앞 인도(人道), 서울광장까지 1인(人) 시위(示威)부터 다규모(多規模) 시위(示威)까지 엄청 시끄럽다. [13]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의 최소(最小) 70m 이내(以內)에는 주한미국대사관(駐韓美國大使館)이 있다. [14] 다만 서울시(서울市)는 서울특별시(特別市)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의 사용(使用) 및 관리(管理)에 관(關)한 조례(條例) 제(第)1조(條) [15] 에 따라 정치적(政治的) 목적(目的)의 행사(行事)는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의 조성(造成) 취지(趣旨)에 어긋나 허가(許可)하지 않는걸 원칙(原則)으로 하고 있어 사실상(事實上) 정치적(政治的) 목적(目的)의 집회(集會)는 금지(禁止)된다. 이를 두고 헌법(憲法)과 집시법상(執匙法上) 보장(保障)되는 국민(國民)의 기본권(基本權)인 집회결사(集會結社)의 자유(自由)를 법률(法律)의 위임규정도(委任規定度) 없이 조례(條例)로 제한(制限)했다는 비판(批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비슷한 사례(事例)로 '서울 광장(廣場) 조례(條例)'가 상위법(上位法)에 반한다는 이유(理由)로 개정(改正)되어 현재(現在) 서울광장(廣場)에서의 집회(集會)는 허가제(許可制)가 아닌 신고제(申告制)로 운영(運營)되고 있기도 하다. 다만 이에 대(對)한 반박의견도(反駁意見度) 있는데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이 서울시(서울市)의 관리대상(管理對象)이자 재산(財産)인만큼 시설(施設)의 관리(管理) 책임(責任)과 사용허가(使用許可) 권한(權限)은 지방사무(地方事務)에 해당(該當)함에 따라 조례(條例)로 규정(規定)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당(該當) 조례(條例)가 헌법(憲法)과 상위법령(上位法令)이 보장(保障)하는 집회결사(集會結社)의 자유(自由)를 제한(制限)하는 조례(條例)가 아니라 단순히(單純히) 집회(集會)에서의 해당(該當) 광화문(光化門) 광장(廣場)의 사용여부(使用與否)에 대(對)한 허가제(許可制)를 담은 것인만큼 문제(問題)가 없다는 의견(意見)이다. [15]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은 시민(市民)의 건전(健全)한 여가(餘暇) 선용(善用)과 문화(文化) 활동(活動) 등(等)을 지원(支援)하는 공간(空間)으로 이용(利用)될 수 있도록 광장(廣場)을 관리(管理)해야 한다. [16] 나중에 다시 돌아온 광화문(光化門)은 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건물(建物)에 맞춰져 세워졌고, 결국(結局) 다시 수정(修正)되었다. [17] Deep Surface : 깊은 표면(表面). [18] 서현 교수(敎授)의 '빛의 광장(廣場)'의 핵심(核心)이었던 요소(要素)다. [19] 1호선(號線) , 2호선(號線) (이상(以上) 시청역(市廳驛)), 5호선(號線) (광화문역(光化門驛)), 신분당선(新盆唐線) , GTX A (이상(以上) 신설(新設)) [20] 참고(參考)로 인근(隣近) 서울광장(廣場)은 1967년작(年作) 4월(月)이 가면 같은 영화(映畫)에서 등장(登場)한 적이 있다. 문희 성훈(聖訓) 이 "아듀"를 외치며 서로 이별(離別)하는 장면(場面) # 인데 지금(只今) 보면 참으로 형용(形容)할 수 없는 오글거리는 센스가 느껴지는 장면(場面)이다. [21] 국가 절멸[22] 단(單) 월대(月臺) 는 구현(具現)이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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