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
시대(時代)에는 풍수지리상(風水地理上) 이 산(山)에 화기(火氣)(火氣)가 강(强)해서 잘못하면 한양(韓孃)이 불타버릴 수 있다고 여겨서,
숭례문(崇禮門)
의 현판(懸板)을 세로로 세우고
육조(六曹)거리
에
해치
상(像)을 만들었으며, 숭례문(崇禮門) 바깥에 남지(南旨)(南池)라는 연못(蓮못)을 팠다.
[8]
세종대로(世宗大路)
의 선형(先兄)이 약간(若干) 꺾여진 이유(理由)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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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지만 풍수지리학자(風水地理學者) 최창조 교수(敎授)에 따르면 관악산(冠岳山)에서 사람이 터 잡고 살만한 곳은 연주암 자리뿐이라고 한다. 위의 문단(文壇)에 나온 대로 전체적(全體的)으로 화기(火氣)를 품은 산(山)인데다가 관악산(冠岳山) 서쪽(西쪽) 봉우리가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을 보기 때문에 관공서(官公署)나 병원(病院)이면 몰라도 사람이 터 잡고 살 동네(洞네)는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강의(講義)를 들은
서울대학교(서울大學校)
기숙사(寄宿舍)(관악사) 학생(學生)들은
"아니, 그러면 우리가 사람 살 동네(洞네) 아닌 데에서 단체(團體)로 숙식(宿食)하고 있단 말이야?"
라며 충공깽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서울대 기숙사(寄宿舍)>라는 책(冊)에 나온다.
[9]
실제로(實際로) 현재(現在) 서울대 자리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골프장(골프場)
이었다.
[10]
게다가 그 뒷부분(뒷部分)에는 1975년(年) 서울대 캠퍼스 이전(以前) 당시(當時) "
동숭동
은 바위가 큼직큼직해서 큰 인물(人物)이 많이 나오겠지만 관악은 바위가 조금조금해서 작은 인물(人物)은 많이 나와도 큰 인물(人物)은 나올지 모르겠다." 하고 평(評)했다는 얘기도 실렸다.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서남부(西南部) 권역(圈域)
[11]
과
경기도(京畿道)
광명시(光明市)
·
안양시(安養市)
·
과천시(果川市)
지역(地域)에 있는 초중고교(初中高校)의
교가(校歌)
(校歌)에 공통적(共通的)으로 '관악산(冠岳山)' 또는 '관악(冠岳)'이라는 단어(單語)가 들어간다. 그런데 관악산(冠岳山) 인근(隣近) 지역(地域)이 아닌데, 교가(校歌)에 관악산(冠岳山)이 들어가는 학교(學校)들도 있다. 이런 경우(境遇) 일부(一部) 학생(學生)들은 뜬금없다는 반응(反應)을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甚至於) 한강(漢江) 너머 신촌에 있는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의 교가(校歌)에도 관악산(冠岳山)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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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逆)으로
범계중학교(學校)
는 관악산(冠岳山)에서 3km 정도(程度)에 인접(隣接)해 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교가(校歌)에는 관악산(冠岳山)이 아니라, 안양시(安養市)에는 없는 모락산이 들어간다. 심지어(甚至於)
화성시(華城市)
에 있는
푸른중학교(中學校)
에도 교가(校歌)에 관악산(冠岳山)이 들어가 수많은 학생(學生)에게 혼란(混亂)을 주어 이 교가(校歌)는 거의 폐지(廢止)된 상태(狀態)다.
또한, 높은 확률(確率)로 서울 서남부(西南部)에 있는 학교(學校)에서 한 번(番)쯤은 연례(年例) 행사(行事)로 관악산(冠岳山)에
등산(登山)
을 가기도 하는데, 이때만큼은 가히(可히) 관(管)
惡
산(山)이라고 느껴진다. 그래도 등산부(登山部)가 아닌 이상(以上) 학교(學校) 행사(行事)로 등산(登山)을 가면 호수공원(湖水公園)을 둘러보는 정도(程度)에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