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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實의 힘을 만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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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운
6.25때 行方不明된 아버지가, 間諜이 되어 내려와 一家族을 包攝해 間諜團을 만들었고 이들이 北韓을 往來하며 間諜活動을 했다는 脚本에 따라 어머니, 동생, 三寸과 叔母, 姑母와 姑母夫, 外三寸과 姨母와 함께 두 달 以上 安企部 密室에서 拷問을 當하고 主犯으로 捏造되어 無期懲役을 宣告받았다(2차 珍島 間諜團 造作事件). 한등자, 박미심, 허현 先生을 治療한 醫師 오동민 氏는 이들이 當한 拷問을 “到底히 사람이 했다고 할 수도 없고, 사람한테 했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라고 證言했다. 當時 法廷에서 辯護士는 安企部에서 拷問을 當해 생긴 傷處가 아직도 이들의 몸에 남아있다면서 보여주라고 했으나 裁判長이 막았다. 身體鑑定度 받아들이지 않았다. 判決文에는 “…檢察에서의 被告人들의 陳述이 小論과 같이 그全 搜査機關에서 받은 拷問의 影響으로임의성없는 狀況에서 된 것이라고 記錄上 認定할 만한 資料가 없”다고 썼다(대법원 82度1092判決). 그런 ‘裁判’을 받아 박동운 先生 一家族은 間諜團으로 遁甲했고 삶은 風飛雹散 나고 말았다. 1981年 3月 5日 새벽 安企部 搜査官들에게 拉致되어 17年 5個月이 지난 1998年 8月 15日 집으로 돌아왔다. 監獄에 있는 동안 國際 엠네스티 會員들이 보내준 激勵 便紙에서 큰 慰勞를 받고 언젠가 監獄에서 나가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위해 도움되는 일을 하겠다고 決心했다. 釋放된 後 절에서 꿀벌을 기르며 事件의 眞實을 밝히기 위해 努力했고 2009年 11月 서울高等法院에서 열린 再審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眞實의 힘 設立에 앞장섰고 2015年 10月 第3期 眞實의 힘 理事長으로 就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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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홍
박동운 先生의 동생. 專賣廳에 勤務하며 돌도 안 된 아이와 아내, 세 食口가 團欒하게 살던 어느 날 새벽, 러닝셔츠 차림으로 安企部에 拉致됐다. 懲役 3年 6個月을 살고 나왔다. 釋放 後 태어난 둘째 딸은 ‘間諜의 子息’으로 살게 할 수 없어 美國으로 入養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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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례
박동운, 박근홍 先生의 어머니. 1950年 戰爭 통에 失踪된 男便을 代身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故鄕 進度로 避難을 갔다. 홀몸으로 媤父母를 모시며 온갖 險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두 아들을 키워 結婚을 시키고 孫子, 孫女를 얻어 이제야 남들처럼 사는가 하던 次에 變을 當했다. 懲役 4年을 꼬박 채우고 出所한 뒤 故鄕으로 돌아갔지만 절로 들어가 供養菩薩을 하며 살아야 했다. 2009年 再審 裁判은 이미 昏睡狀態에 빠진 狀態에서 進行됐다. 2010年 5月 아들들에게 “우리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世上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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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등자
박동운 先生과 함께 有罪判決을 받은 三寸 박경준 先生의 夫人이다. 全南 珍島郡 지막리에서 태어나 박경준 先生과 結婚했고 새벽부터 밤까지 農事일을 하며 6男妹를 키웠다. 1981年 3月 男便과 함께 安企部에 拉致되어 끔찍한 拷問을 當했다. 男便 박경준 先生은 “풋老物 데쳐 論據 맨키로” 딴사람이 되어 7年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靑瓦臺 앞에 거적이라도 깔고 우리 家族의 抑鬱함을 풀어야 한다”며 全國을 뛰어다니던 男便은 1998年 5月, 拷問 後遺症을 견디지 못하고 世上을 떠났다. 2009年 男便을 代身하여 無罪判決을 받은 法廷에서 “우리 아배 平生所願이 나 罪없소! 였다요”라며 限없이 울었다. 2016年 12月 永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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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현
박동운 先生의 姑母夫. 1938年 珍島에서 태어나 박미심 先生과 結婚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몸이 不便한 동생을 돌보면서 3男 1女를 키웠다. 1審 裁判에서 執行猶豫로 풀려나 故鄕으로 돌아왔지만 이웃들은 ‘間諜 옆집’에 살수 없다며 移徙를 해버렸다. “間諜이 아니”라고 쉴 새 없이 외쳤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왔다. 2009年 再審裁判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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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1940年 日本에서 태어났다. 解放이 되어 故國으로 돌아왔는데 자라면서 父母로부터 日本에 사는 親戚들 이야기를 들었다. 1980年 朝鮮新藥 常務로 在職하던 中 日本에 産業視察을 간 길에 “죽기 前에 꼭 한番 消息을 듣고 싶다”는 어머니의 6寸 內外를 만나 安否를 傳했다는 理由로 間諜으로 造作됐다. 1983年 3月, 事務室에서 安企部 搜査官들에게 끌려갔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陰濕한 地下室에서 59日 동안 拷問을 當하고 ‘朝總聯 間諜團’ 首魁로 造作되어 7年 동안 監獄을 살았다. 2010年 6月 서울高等法院에서 無罪判決을 宣告받고 檢察이 上告했으나 大法院이 棄却해 確定됐다.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苦痛과 眞實을 밝혀내는 데 걸린 고된 時間들이 자랑스러운 社會가 되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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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
1933年 태어나 1953年 警察에 投身해 1961年까지 江原道 警察國에서 일했다. 退職 後 春川 중앙시장에서 소매流通業을 하며 學校 育成會 任員과 라이온스클럽 會員으로 일하며 地域에서 尊敬을 받았다. 1983年 3月 南山 安企部에 不法 連行되어 두 달 以上 拷問을 當하고 ‘朝總聯 間諜團’ 一員으로 造作됐다. 5年 9個月의 監獄살이를 견뎌냈고 27年 만인 2010年 6月 서울高等法院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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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敎徒
1942年 大邱에서 태어나 高校 數學 敎師로 敎壇에 섰다. 글 모르는 아버지를 代身해 日本에 있는 아버지의 동생(三寸)과 便紙를 往來했다는 理由로 朝總聯 間諜團 造作事件에 얽혔다. 1983年 敎務室에 걸려온 電話를 받고 나간 길이 敎團과 마지막이었다. 執行猶豫로 풀려났으나 더 以上 學校에 돌아갈 수 없었다. 스승이 ‘間諜’이 되어 新聞에 大書特筆된 것을 보고 衝擊을 받았을 1983年 當時 飛雁高等學校 3學年 2班 學生들 앞에 ‘擔任先生’으로 한 番이라도 다시 서고 싶은 게 平生 所願이자 가슴에 맺힌 恨이다. 2010年 6月 서울高等法院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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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민
1950年 出生. 漢陽大 工大를 卒業하고 동아건설에 엔지니어로 就職했다. 사랑하는 女人을 만나 아들, 딸을 둔 幸福한 家庭을 이뤘다. 模範 엔지니어로 뽑혀 日本에 技術硏修를 받으러 갔다가 丈母의 付託에 따라 조카를 만나 安否를 傳했다가 間諜으로 捏造됐다. 1983年 3月, 會社에서 安企部로 不法 連行되어 두 달 동안 ‘죽음의 時間’을 거쳐 5年 9個月만에 出所했다. 間諜 烙印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美國으로 건너가 牧會 活動을 始作했다. 男便의 眞實을 밝히기 위해 뛰어다니던 아내는 癌으로 鬪病하다 하늘나라로 떠났다. “저 하늘에서 아직도 男便의 眞實을 위해 뛰어다닐지 모를” 아내를 그리며 살고 있다. 2010年 6月 서울高等法院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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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
1949年 江華島에서 태어났다. 父親과 叔父가 6·25戰爭 當時 行方不明되고 祖父母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969年 대우자동차에 入社했다. 祖父母와 어머니, 두 딸을 둔 家長으로 職場에서도 자리를 잡아 가던 1985年 1月, 어머니 배병희 先生과 함께 治安本部 옥인동 對共分室로 不法 連行되어 30餘 日 동안 拷問을 當했다. “母子 間諜”으로 造作되어 어머니는 3年 6月, 本人은 7年의 懲役을 살았다. 작은 體軀에 붉은 오랏줄로 꽁꽁 묶여 裁判을 같이 다니던 어머니의 모습이 只今까지도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2009年 7月 서울高等法院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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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윤
韓國 戰爭 後 敎師와 警察로 일하다 退職해 故鄕인 全南 進度로 내려왔다. 미역 養殖을 하며 아내, 네 子女와 團欒하게 살던 1980年 8月 어느 날, 戰爭 때 行方不明된 親戚 兄님의 家族과 親舊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始作했다. 석 先生이 搜査官들을 順順히 따라나선 것은 前職 警察로서 그들을 도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긴 歲月이 걸렸다. 南山 中央情報部로 끌려가 47日間 拷問을 當한 끝에 北韓 工作員이 되어 내려온 親戚 兄님을 8次例 만나 間諜行爲를 했다고 虛僞 自白했다(1차 珍島 間諜團 造作事件). 無期囚로 懲役 18年을 살고 1998年 8月 釋放됐다. 2009年 1月 서울中央地方法院에서 無罪宣告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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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자
全南 珍島에서 男便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며 農事일과 김 養殖을 하던 1980年 8月 中旬, 媤어머니, 男便, 媤同生과 함께 서울 南山 中央情報部로 끌려갔다. 53日間 모진 拷問을 當한 끝에 풀려났지만, 男便 김정인 先生은 間諜으로 몰려 死刑 宣告를 받았다(1차 珍島 間諜團 造作事件). “한 10年 지나면 나갈 수 있을 거”라던 男便은 1985年 10月 31日 주검으로 돌아왔다. “창자가 끊어지고 애肝腸이 녹아날 程度로 抑鬱”했지만, 다섯 아이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說明할 길도 찾지 못한 채 歲月이 흘렀다. 2010年 7月 서울高等法院은 “法院이 司法府 本然의 役割을 다하지 못하고, 眞實 發見을 疏忽히 함으로써 無辜한 한 生命을 刑場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닌가 悔恨을 떨칠 수 없다”며 無罪를 宣告했다. 檢察이 上告했으나 大法院이 棄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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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환
1946年 群山 앞바다 開也島에서 7男妹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열다섯 살부터 배를 타며 가장 노릇을 始作했다. 1968年 延坪島에서 조기를 잡다 北韓 警備艇에 끌려가 4個月 만에 돌아왔다. 結婚해 아들을 낳고 비로소 幸福을 꿈꾸게 된 1972年 1月 群山 警察署 刑事들에게 끌려가 “두 눈에서 피가 흐르는” 慘酷한 拷問을 當한 끝에 ‘拉北되었을 當時 北韓에 包攝된 間諜’으로 造作되었다. 時도 때도 없는 警察의 家宅搜査와 男便의 重刑宣告에 놀란 아내는 心臟痲痹로 世上을 떠났고 홀로 남은 어린 아들은 親戚들의 손에서 자랐다. 7年의 監獄살이 끝에 풀려났으나, ‘間諜’이라는 冷待와 警察의 監視로 故鄕을 떠나 緣故 없는 忠南 燕岐郡에서 工場 夜間 警備勤務를 했다. 2011年 大法院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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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名록
1946年 開也島에서 태어나 漁夫가 되었다. 1968年 洞네 親舊인 박춘환 先生이 탄 조기잡이 배가 拉北됐다 돌아왔다. 이와 關聯 1972年 1月 群山警察署에 끌려가 ‘박춘환이 間諜이라고 自白’할 것을 강요당하며 두 달 동안 拷問을 當한 끝에 虛僞自白했다. 反共法 違反으로 懲役 8月을 살고 出所했다. “開也島에서 나고 자란 깨벅쟁이 親舊들을 서로 疑心하게 만든 사람들”李 원망스럽다. 40年이 지난 2011年 無罪判決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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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봉택
1947年 開也島에서 나고 자랐다. 1972年 1月, 親舊 박춘환, 有名록 先生들과 함께 群山警察署로 끌려갔다. 慘酷한 拷問 끝에 親舊는 ‘間諜’이 되었고, ‘間諜을 申告하지 않은 不告知罪’가 붙었다. ‘아들이 間諜으로 懲役 산다’는 洞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삶을 놓았다. 2011年 3月 大法院에서 無罪를 宣告받았다. 抑鬱한 삶을 다시 돌려받을 수는 없어도, 眞實의 힘 設立이 그 삶에 값 하는 것이라고 믿고 熱心히 活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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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기
1950年 父親이 旅順事件 當時 處刑되어 遺腹子로 태어났다. 日本에서 運輸會社를 運營하는 叔父의 招請으로 日本을 드나들며 일을 배웠다. 故鄕 麗水로 돌아와 金細工을 始作해 基盤을 잡아가던 1986年, 保安隊로 끌려가 43日동안 拷問을 當하고 ‘間諜’이 되어버렸다. 더 抑鬱한 것은, 돌봐줄 이 하나 없이 외롭고 힘들었던 어린 時節과 아픈 家族史를 ‘빨갱이’로 덧漆하는 데 써먹은 일이다. 6年 監獄살이 내내 單 한 瞬間도 眞實을 밝히고 말겠다는 마음을 잃은 적 없이 살다가 2009年 광주고등법원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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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준
1939年 5月 全南 和順에서 태어났다. 初等學校 卒業 後 上京해 木手로 일하다가 結婚했다. 工夫하지 못한 것이 平生의 恨이 되어 세 아들만을 제대로 공부시키려고 뼈빠지게 일하고 돈을 벌었다. 日本을 오가며 木工일, 막勞動을 하던 中 同僚 日本人의 旅券을 使用한 일로 强制 送還됐는데 金海空港에 내리자 마자 釜山保安隊로 끌려갔다. 모진 拷問을 견디다 못해 化粧室 窓門으로 뛰어내린 後 保安隊 鐵條網을 넘어 도망치기도 했다. 朝總聯에 包攝된 間諜으로 造作되어 9年 동안 懲役을 살았다. 2010年 서울中央地方法院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檢事가 抗訴하고 上告했으나 서울高等法院과 大法院에서 棄却해 確定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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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1939年 黃海道 長淵郡에서 태어나 戰爭 때 南쪽으로 避難왔다. 열여섯 살부터 家族의 生計를 위해 온갖 일을 했다. 結婚해 세 아이를 낳고 美國으로 移住해 貿易業을 크게 일구었다. 輸出 相談을 위해 韓國에 왔다가 南營洞 對共分室로 끌려가 치욕스런 拷問을 當한 끝에 ‘間諜’이 되었다. 7年 監獄살이 내내 아들의 抑鬱함을 呼訴하러 다니던 어머니는 아들이 間諜 陋名을 벗은 걸 끝내 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2010年 2月 서울高等法院에서 無罪判決을 받았으나 檢事가 上告했고, 2012年 7月 大法院에서 無罪가 確定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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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삼근
1943年 群山 開也島에서 태어나 18살부터 배를 탔다. 1968年 조기를 잡다가 北韓警備艇에 拿捕된 後 歸還했는데, 反共法 違反으로 1年間 懲役을 살았다. 19年이 지난 1985年 全州保安隊로 連行되어 52日間 拷問을 當한 끝에 ‘間諜’李 되고 말았다. 6年의 監獄살이를 이를 악물고 견뎠다. 2009年 1月 광주고등법원에서 無罪를 宣告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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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운
여덟 살 때인 1955年 헤어진 아버지를 찾아 50餘 年 동안 헤맸다. 2006年 들어서야 '北派 工作員'이던 아버지가 陸軍特務部隊에 依해 오히려 ‘間諜’으로 造作되어 軍法會議에 回附, 1959年 死刑을 當했다는 事實을 알게 됐다. 數十 年 동안 眞相을 밝히러 온갖 險한 일을 다했지만 어떤 國家機關도 아버지의 죽음에 對해 알려주지 않았다. 2012年 10月, 서울高等法院은 아버지 “심문규는 間諜이 아니”라고 無罪判決을 내렸다. 아버지 遺骨을 찾아 넋이나마 慰勞해 드리는 것이 남은 所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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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주
1980年 5月 光州에서 ‘소년 市民軍’으로 살아남았다. 醫大生이던 1985年 “歐美留學生 間諜團 事件”에 連累되어 無期懲役을 宣告받았다. 收監 中 轉向을 拒否하며 300餘 日의 斷食과 憲法訴願, 유엔 人權理事會 個人通報 等의 方法으로 싸웠고 1999年 2月, 14年 6個月 만에 轉向을 拒否한 狀態에서 出所했다. 出所 後 醫大에 復學했고 2008年 家庭醫學科 專門醫가 됐다. 保安觀察處分取消 行政訴訟과 두 次例에 걸친 保安觀察法 違反 起訴와 裁判을 통해 轉向制度 廢止를 이끌어냈다. 拷問生存者의 後遺症과 治癒를 社會的 議題로 提起했고 光州트라우마센터 初代 센터長을 지냈다. 現 아나派議員 院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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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연
1993年부터 民主化實踐家族運動協議會(民家協)에서 良心囚, 國家保安法 等 다양한 人權問題를 社會的인 議題로 만들기 위해 努力했다. 人權侵害 被害者들을 事件 속 人物이나 救濟 對象이 아닌 苦痛 속에 있는 ‘사람’으로 만나왔다. 造作間諜 被害者와 家族들의 사무친 呼訴와 애닯은 눈물을 마주하며 眞實糾明을 위한 實態調査와 再審을 이끌었다. ‘拷問被害者’가 ‘生存者’가 되고 ‘傷處 입은 治癒者’로 거듭나기까지 함께 걸어왔다. 民家協 總務와 法務法人 地平 專門委員, 國家人權委員會 事務總長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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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精神科 專門醫, 2005年 ‘造作間諜 事件 被害者 박동운’ 聽聞會로 因緣을 맺은 以來 拷問被害者들의 苦痛에 깊이 共感했다. 眞實의 힘의 母胎가 된 拷問治癒모임을 2008年부터 4年 동안 進行했다. 2011年 雙龍自動車 解雇勞動者와 그 家族들을 위한 心理治癒센터 ‘와락’을 만들었고 光州트라우마센터에서 進行하는 518生存者 集團相談을 進行했다. 歲月號 慘事 以後 安山으로 옮겨 治癒空間 ‘이웃’에서 歲月號 遺族들의 治癒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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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환
1988年부터 辯護士 活動을 始作하여 다양한 分野의 訴訟과 仲裁事件을 處理하면서 國際人權法을 國內法 解釋과 法律實務에 導入하고 유엔을 비롯한 國際機構의 節次를 紹介하는 데 先驅的 役割을 했다. 國家人權委員會의 設立을 最初로 提案했고 法 制定 作業과 設立過程에 參與했다. 間諜造作 事件과 民間人 虐殺事件 等 重大한 人權侵害 被害者들의 呼訴를 들으며 法律家의 役割과 使命에 對해 省察해왔다. 2003年 造作間諜 事件에서 처음으로 再審 無罪判決을 이끌어낸 함주명 先生 事件을 始作으로 再審裁判의 理論的 實踐的 밑그림을 그리며, 裁判이 被害者들에게 治癒的 過程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現在 法務法人 警 辯護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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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혁
公認會計士, 稅務士. 企業構造調整과 關聯된 租稅問題, 個別 稅法 全般과 外國 稅法, 租稅條約 等 多樣한 租稅問題에 豐富한 經驗을 갖고 있다. 眞實의 힘 初代 監査로 參與해 拷問生存者의 苦痛과 삶을 가까운 곳에서 함께 했다. 複雜한 數字와 會計 節次에도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 있음을 證明해왔다. 現在 예일會計法人 公認會計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