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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水만 그냥 두었으면 世界的 觀光地가 되었을 텐데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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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大邱는 깊숙한 內陸 地域으로 認識되지만 아득한 옛날에는 그와 正反對였다. 恐龍들이 많이 살았던 1億4500萬 年-6500萬 年 前의 大邱는 巨大한 湖水였다. 湖水는 大邱를 中心으로 북쪽으로 慶尙北道 安東, 南쪽으로 全羅南道 光陽에 이르기까지 평평한 물결을 일렁였다.

慶尙北道는 洛東江과 琴湖江이 繼續 흙을 실어날라 巨大 湖水를 메운 끝에 마침내 땅으로 變했다. 그래도 地帶가 낮은 곳은 如前히 湖水로 남았다. 只今도 全國 1萬7505個 湖水의 32%인 5,547個 湖水가 慶尙北道에 있다. 當然히 大邱에도 개발이라는 美名 아래 都市化가 本格化된 1980-1990年代 以前까지는 無數한 湖水들이 있었다.
 
일제는 1919년 3월 8일 대구 독립만세 운동이 발원된 곳이라는 이유로 서문시장을 본래 장소(달서문 터 앞에서 동산파출소 터 사이)에서 현재의 위치로 강제 이전시켰다. 사진은 현재의 서문시장 입구.
 日帝는 1919年 3月 8日 大邱 獨立萬歲 運動이 發源된 곳이라는 理由로 西門市場을 本來 場所(達西門 터 앞에서 동산派出所 터 사이)에서 現在의 位置로 强制 移轉시켰다. 寫眞은 現在의 西門市場 入口.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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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가 强制로 메운 天王黨地

大邱에서 가장 안타까운 埋立 事緣을 가진 연못은 天王黨地(天王堂池)이다. 천왕당지의 本來 이름은 남지(南池)였던 것으로 推定된다. 이때 南쪽은 達成의 南쪽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달성공원은 新羅가 서기 261年(沾解王 15)에 달벌성을 築成한 現場인 데서 斟酌되듯이 예로부터 大邱의 基準點이었다.

天王黨지는 1928年에 埋立되었다. 日帝는 비산동과 內唐洞 等地의 古墳을 마구 파헤쳐 그 흙으로 천왕당지를 메운 後, 達西門 터(中區 慶尙監營길 1) 앞에서 동산 派出所 터(동산동 15) 앞 오토바이 골목 一帶에 자리잡고 있던 西門市場을 그곳으로 强制 移轉시켰다. 일제로서는 1919年 3月 8日 大邱 獨立萬歲 運動의 發源地인 西門市場을 본래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북대學校 뒤쪽 복현五거리 一帶의 배자못, 대구교대 앞의 대명동 映宣못,  達成高等學校 一圓의 감삼못, 원臺 地下道 둘레의 비산동 날뫼못, 수성구청 周邊의  梵語못, 松蘿市場 一帶의 신암동 소래못, 달성공원 西쪽의 舍利못, 大邱MBC 앞의 한골못, 메워져 西區廳 자리가 된 평리동 들마못, 亦是 메워져 梟木公園이 된 東區 효목동 소못 等은 日帝가 아니라 우리가 없앴다. 大邱에는 本來 크기의 30%假量만 殘存한 聖堂못, 그리고 日帝 强占期 때의 本來보다 조금 더 커진 수성못이 남아 있는 湖水의 全部이다. 
 
대구는 엄청나게 많은 호수를 거느린 도시였지만 재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모두 매립해버렸다.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수성못(사진)이 유일하고, 30%쯤 남은 성당못도 희귀한 잔존 사례에 들 정도이다.
 大邱는 엄청나게 많은 湖水를 거느린 都市였지만 再開發이라는 美名 下에 모두 埋立해버렸다. 原形이 남아 있는 것은 壽城못(寫眞)李 唯一하고, 30%쯤 남은 聖堂못도 稀貴한 殘存 事例에 들 程度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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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佛誌의 痕跡을 말해주는 이름들

大邱廣域市 北區 山格洞 1370-1番地(大學路 80)의 경북대학교 北門에서 500m假量 오른쪽으로 나아가면 복현五거리가 나온다. 五거리를 지나 250m쯤 直進하면 왼쪽에 '北區 靑少年 會館'을 거느린 야산이 나타난다. 야산은 公園으로 造成되어 있다. 

이 公園의 이름을 記憶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公園 안 배드민턴場 會員들은 그 이름을 大體로 알고 있을 법하다. 北區 山格洞 산9-2번지에 있는 테니스장의 이름은 '大佛 배드민턴 클럽'이다. 공원 이름이 '大佛 公園'인 까닭에 自然스레 그런 이름을 얻었다. 

대불이라면 얼핏 '大佛(大佛)'李 떠오른다. 公園 안이나 隣近에 大佛事라는 考察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공원과 배드민턴場에 대불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뿐이 아니다. 왼쪽으로 大佛 公園을 낀 채 검단동으로 넘어가는 道路도 이름이 '대불 서로'이다. 복현동 536番地(黔丹로 8-14)의 建物에도 '大佛 老人 福祉館'이라는 懸板이 걸려 있다. 大邱EXCO 뒤便에는 '大佛 스포츠 센터'도 있다.

大佛東은 없는데 '大佛' 이름 붙은 곳은 많아

大佛동도 아닌 복현동과 山格洞에 大佛 公園, 大佛 배드민턴 클럽, 大佛 老人 福祉館, 大佛 서로, 大佛 스포츠 센터 等이 있다? 이 一帶와 대불이라는 어휘 사이에 역사적 相關性이 있겠다 싶은 느낌이 저절로 일어난다. '北區 靑少年 會館 建立 由來費'를 읽어본다.
 
大邱의 영봉 八公山의 雄壯한 姿態와 悠久한 琴湖江을 隣接한 이곳 大佛山 자락에 位置한 '北區 靑少年 會館'은 元來 大佛山 옆 大佛地(一名 倍자못)이 오랜 歲月 동안 '아래들'을 비롯한 山格, 黔丹 一帶의 農土를 肥沃하게 적셔주던 것을 이 一帶가 流通團地 等으로 開發되면서 그 用途가 宅地로 바뀌게 되어 이를 記念하고자 當時 제2대 大邱廣域市 北區議會에서 '大佛地 記念事業 特別委員會'를 構成하여 (中略) 1998年 5月 1日 (北區 靑少年 會館) 起工式을 갖고 2000年 12月 28日 開館式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由來費에 言及되어 있듯이, 복현五거리 一帶는 不過 25年 前인 1994年만 해도 3萬7千餘 坪(11,212㎡)에 이르는 크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개발 名目으로 매립하지 않았으면  大邱 市民들은 오늘도 복현五거리 一帶에서 이 湖水와 만나 삶의 餘裕를 滿喫할 수 있을 것이다. 그 湖水의 이름이 바로 大佛地(大佛池)였다

옛날에 이 湖水를 가다듬던 사람들은 커다란(大) 部處(佛)를 發掘했다. 그 以後 湖水에 大佛地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때가 正確히 언제인가는 알 수 없다. 다만 日帝가 1918年에 製作한 <大邱地形圖>에 처음으로 大佛地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전영권의 <살고 싶은 大邱, 興味로운 大邱 旅行>에 따르면, 불상이 發見된 때는 1918年보다 以前인 것은 分明하다.

그런가 하면, 16세기 人文地理書 <新增東國輿地勝覽>과 18世紀 <大邱邑誌>에는 大佛地價 佛像地(佛上池)로 記錄되어 있다. 上(上)李 '윗 上'이므로 佛像지는 '部處가 물 위로 떠오른 蓮못'이라는 뜻이다. 卽 佛像地와 大佛지는 속뜻이 같다. 大佛地라는 이름이 16世紀 以前부터 存在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大佛誌의 本來 이름은 倍자못

佛像지나 大佛地로 불리기 前에는 이 湖水에 이름이 없었을까? 못의 本來 이름이 '배菜못'이었다는 말도 傳해진다. 못 周邊에 裵氏와 채씨들이 많이 居住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뒷날 發音하기 쉽게 '倍자못'으로 바뀌었다는 口傳이다. 그러나 배菜못 또는 胚子못이라는 이름이 언제 생겨났는지, 그것이 불上智보다 먼저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감삼못이 넓게 펼쳐져 있었던 광장타운아파트와 달성고등학교 일대가 지하철 감삼역 표지판 뒤로 보이는 풍경
 감삼못이 넓게 펼쳐져 있었던 廣場타운아파트와 達成高等學校 一帶가 地下鐵 감三役 標識板 뒤로 보이는 風景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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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분명한 것은 現在의 大邱 市民들이 大佛地보다 褙子못이라는 이름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事實이다. <內 故障 大邱>를 펴낸 권영재度 '當時 많은 學校는 배자못(대불지)으로 逍風을 갔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褙子 公園, 褙子 배드민턴 클럽, 褙子 서로, 褙子 老人福祉館이 아니라 對佛 公園, 大佛 배드민턴 클럽, 大佛 서로, 大佛 老人福祉館이 되었다. 褙子못은 못도 죽임을 當했지만 그 이름까지 빼앗기고 만 것이다.

都市 開發 美名下에 사라진 감삼못

褙子못이 없어지기 10年 前인 1984年에는 감삼못이 완전히 埋立되었다. '完全히'라는 表現을 쓰는 것은 그보다 10年 以上 前인 1973年에 達成高等學校를 新設하느라 못의 東便이 먼저 埋立되었기 때문이다. 7,576坪(25,000㎡)에 達하던 감삼못 자리의 大部分은 그 以後 廣場타운이라는 大團地 아파트가 1次, 2車라는 접두어까지 뽐내며 차지하고 있다. 

감삼동이라는 이름의 由來 中에는 '감' '셋'에서 왔다는 說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가 1988年에 펴낸 <우리 고장 大邱- 地名 由來>에 따르면, 約 300餘 年 前에 員님이 現在의 감삼동 69-1番地 一帶인 時等(枾登, 감나무에 감이 많이 달려 있는 山등성)을 지나던 中 붉은 감을 보고 그 탐스러움에 反하여 感歎詞를 連發했다.

人事次 나와 있던 마을 代表가 감을 따서 員님에게 待接하였다. 員님은 '감이 매우 맛있구나!'라면서 連거푸 세 個나 먹었다. 이윽고 마을 代表가 洞名을 지어주십사 請하니 員님은 '感을 세 個나 먹은 곳'이니 '감삼동이 어떠냐?' 하였다. 그 以後 이 마을은 감삼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감삼동에 가면 감나무도 없고 감삼못도 없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세 곳 있어서 감삼동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說話도 있지만, 샘터로 傳해지는 감삼동 148-6番地, 190-2番地, 284-3番地 어디에도 샘은 없다. <우리 고장 大邱- 地名 由來>의 表現에 따르면 '1970年에서 1980年代에 걸쳐 都市의 開發로 住宅地로 바뀌어 아파트와 單獨住宅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을 뿐이다.
 
최계복의 1933년 작품인 <영선못의 봄>은 이 못의 당시 규모와 성격을 잘 말해준다. (<최계복 사진집>의 수록 작품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 여러모로 다릅니다.)
 최계복의 1933年 作品인 <영선못의 봄="">은 이 못의 當時 規模와 性格을 잘 말해준다. ( <최계복 사진집="">의 收錄 作品을 再撮影한 것이므로 原作과 여러모로 다릅니다.)
ⓒ 최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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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대 앞 映宣못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없어진 湖水라면 映宣못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寫眞의 開拓者 中 한 사람으로 꼽히는 최계복의 1933年 作品 <映宣못의 봄>을 보면 洋服에 中折帽까지 쓴 中年 紳士 等 賞春客을 가득 태운 놀잇배가 映宣地를 宣諭하고 있다. 그만큼 映宣지가 대단한 遊園地였다는 뜻이다.

大邱敎育大學 맞은便 映宣市場 入口의 <映宣못터> 標識石에는 '映宣못이 있던 자리는 現在의 映宣市場과 그 一帶 住宅街로 規模는 2萬餘 坪 程度였다. 映宣못은 市街地에서 가까운 데다 물이 많고 周邊 景致가 좋아 市民들이 여름에는 낚시와 水營, 겨울철에는 얼음지치기 等을 즐기는 休息處로 사랑을 받았으며, 가뭄 때에는 農事에 利用되었고 장마 中에는 洪水 調節 役割을 했다. 그後 都心地 開發에 따라 매립 公社로 못은 없어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는 案內文이 새겨져 있다.

映宣못은 自然 湖水는 아니다. 2000年 發刊 <大邱 示唆>는 映宣못이 朝鮮 末期에 築造되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傳說에 따르면 映宣못은 朝鮮 末期에 12年 동안의 工事 끝에 만들어졌는데, 어떤 高位 官吏가 私費를 들여 축조했다고 한다. 道士가 나타나 映宣못 자리를 가리키면서 '저곳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아주 해로운 일이 생길 것이고, 12年에 걸쳐 못을 만들면 나라에 아주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깊었던 그 管理가 그 말을 따랐다는 것이다.

未來에 對한 展望을 가진 指導者가 必要하다

只今까지 大邱가 아득한 옛날에는 땅이 아니라 巨大한 湖水였다는 것과, 1980-1990년대의 都市化 過程에서 大部分 埋立되고 말았다는 '事實'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사실'을 摘示하는 데에 執筆 目的이 있지 않다. 지질학적 變動을 考慮할 때 大邱만큼 수많은 湖水를 가진 都市는 地球上에 存在할 수 없는데, 왜 大邱는 湖水 都市로서의 世界的 位相을 不過 30年이란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잃어버렸을까, 그 點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대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3,000여 기의 고인돌을 가진 도시였지만 이 역시 거의 대부분을 땅에 파묻고 말았다. 사진은 수성구 상동 171번지 앞에 남아 있는 고인돌.
 大邱는 世界에서 가장 많은 3,000餘 基의 고인돌을 가진 都市였지만 이 亦是 거의 大部分을 땅에 파묻고 말았다. 寫眞은 수성구 상동 171番地 앞에 남아 있는 고인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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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指導者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大邱에는 그런 指導者가 없었다. 그저 都市 擴張이라는 土木的 眼目뿐이었고, 그 까닭에 世界的으로 類例가 없는 天惠의 自然 景觀을 도로 내고 아파트 짓는 눈앞의 再開發 利益 앞에 헌납했다. 

本來가 巨大 湖水였기에 수많은 蓮못을 거느릴 수 있었던 大邱, 겨우 30年 만에 호수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只今의 大邱, 그런 大邱의 變貌를 통해 未來社會를 내다볼 줄 아는 指導者가 있어야 地域 共同體가 다른 곳과 差別性 있는 發展을 이룩할 수 있다는 敎訓을 깨닫는다.

世界에서 가장 많은 湖水를 거느린 大邱, 그 湖水에서 信川과 琴湖江 또는 洛東江으로 이어지는 川邊 따라 亦是 世界 最多의 고인돌이 놓여 있는 大邱, 이제는 그 長官을 볼 수 없다. 湖水와 고인돌이 그대로 있었으면 世界 稀貴의 觀光 都市가 되었을 텐데 單 30年 만에 그 天惠의 機會를 스스로 뭉개버렸다. 그 안타까움을 글로 적느라 몸을 떨면서, 대구가 只今도 잃어가고 있는 다른 것에는 무엇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본다.

태그 : #倍자못 , #壽城못 , #감삼못 , #聖堂못 , #大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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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篇小說 <韓人애국단><義烈團><大韓光復會><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等과 歷史紀行서 <全國 壬辰倭亂 遺跡 踏査旅行 叢書(前 10卷)>, <大邱 獨立運動遺跡 100곳 踏査旅行(2019 大邱市 選定 '올해의 冊')>, <三國史記로 떠나는 慶州旅行>,<金庾信과 떠나는 삼국여행> 等을 著述했고, 大邱市 敎育委員, 中高校 敎師와 大學講師로 일했습니다.

오마이뉴스 編輯記者. 市民記者 必讀書 <아직은 좋아서 하는 編輯> 著者, <이런 質問, 해도 되나요?> 共著, 그림冊 에세이 <짬짬이 育兒> 著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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