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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Db - 韓國映畫데이터베이스

官能的인 俳優 移民者의 誕生

by. 김종원(映畫社硏究者) 2020-01-15
영화배우 이민자 사진
 

<餘名> 以後 ‘寡婦’ 專門 俳優로 轉換 

移民者(李民子)는 異鄕이나 김동원과 거의 같은 時期에 俳優가 되었다. 日本 도호(東寶)映畫社에서 助監督 生活을 한 안진상(安鎭相)李 처음 메가폰을 잡은 <餘名>(1948)을 통해서였다. 解放 後 <安重根史記(史記)>(이구영, 1946)로 韓國映畫史의 序幕을 연 後 34篇째 製作된 作品이다. 賂物을 받고 密輸를 默認하려던 警察官(李錦龍 分)李 良心의 呵責을 받은 나머지 이 事實을 自白, 密輸犯을 一網打盡케 한다는 密輸 根絶龍 啓蒙映畫로, 移民者는 여기에서 漁村의 處女 役을 맡았다. ‘移民者의 섬세한 表情은 앞날이 屬望된다’ (정용배, 「映畫評 ‘餘名(黎明)을 보고’」, 『自由新聞』, 1949.3.25) 는 鼓舞的인 評을 들었다. 이 映畫를 製作한 仁川의 建設映畫社 代表 최철(崔鐵)은 뒷날 俳優가 된 최불암의 아버지이다. 
 
[寫眞] 데뷔作 <餘名>에서의 移民者

移民者는 2年 後 신상옥의 監督 데뷔作 <惡夜>(1952)에 女主人公 洋公主 逆으로 起用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6.25 戰爭이 일어나는 바람에 製作이 霧散될 뻔했으나 避難地 大邱에서 撮影돼 釜山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 還都 後 정창화 監督의 <最後의 誘惑>(1953)을 出發點으로 <未亡人>(박남옥, 1955)을 비롯한 <마의태자>(全昌根, 1956), <마인>(한형모, 1957), <誘惑의 江>(流頭宴, 1958), <生命>(이강천, 1958), <어머니의 길>(안현철,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幸福의 條件>(이봉래, 1959) 等과 <寡婦>(趙肯夏, 1960), <來日의 太陽>(오영근, 1962),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 <女人天下>(尹逢春, 1962), <피리 불던 母女 고개>(강찬우, 1962),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 <母女 기타>(강찬우, 1964), <갯마을>(김수용, 1965), <珊瑚의 門>(嚴심호, 1966), <슬픔은 波濤를 넘어>(김효천, 1968) 等 모두 140餘 篇에 出演하게 된다. 折半 以上이 主演이었다. 이 가운데 신경균 監督의 <화심(花心)>(1958), <애모>(1959), <有情無情>(1959), <回程>(1959), <그대 목소리>(1960), <울지 않으련다>(1960), <正祖>(1961), <女子의 一生>(1962), <兄夫와 새 언니>(1964) 等 9篇에 出演함으로써 그의 단골俳優가 되었다. 

 
[寫眞] <내가 낳은 검둥이>에 出演한 移民者


最初의 女性監督 박남옥의 <未亡人>에서는 社會倫理와 欲望 사이에서 갈등하는 戰爭未亡人의 삶을, <誘惑의 江>에서는 拉北된 男便을 잊지 못해 守節하는 女子의 苦行을, <내가 낳은 검둥이>에서는 混血兒로 인해 겪어야 하는 差別의 悲哀를, <마인>에서는 復讐를 위해 僞裝 結婚한 女性의 魔性을, <母女 기타>에서는 모진 삶의 시름을 노래로 사르는 極端 歌手의 事緣을, <아낌없이 주련다>에서는 年下의 靑年에게 母性愛的 사랑을 쏟는 30代 未亡人의 熱情을,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招魂에 寡婦가 된 큰딸(龍숙)의 빗나간 拜金主義的 面貌를, <갯마을>에서는 風浪 속에 주체하지 못하는 寡婦 海女의 愛慾을, 그리고 <珊瑚의 門>에서는 家庭敎師와 塗色行脚에 빠진 寡婦의 悔恨을 特有의 濃艶한 몸매와 感情線으로 表出해냈다. 그 大部分이 薄福한 未亡人, 寡婦 캐릭터였다. 
 
[寫眞] 最初의 女性監督 박남옥의 演出作 <未亡人>에서의 移民者, 오른쪽은 이택균


이와 같은 그女의 欲望이 總體的으로 集約된 配役이 바로 <아낌없이 주련다>의 댄스홀 마담 우정원이였다. “어마! 사내 냄새.” 波濤가 밀려오는 松島 바닷가에서 막냇同生과 같은 11歲 年下의 支配人 夏至송(신성일 分)의 품에 안기며 놀란 듯이 쏟아낸 禹 마담의 大使는 肉感的인 그女의 個性을 含蓄한 것으로, 第6回 夫日映畫賞 女優主演賞의 트로피를 쥐게 하는 結果로 나타난다. 
 
[寫眞] 移民者의 魅力을 遺憾없이 發現한 <아낌없이 주련다>의 한 場面


 學業마저 抛棄하고 들어선 俳優의 길
 
移民者는 1929年 4月10日 서울에서 韓醫師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戶籍上의 이름은 移用量(李容瑯)이다. 다음은 그女가 言及한 過去 回想記.

 “우리 집은 11代 宣祖가 忠武公 할아버지였다는 事實 때문에 家庭的으로 恒常 嚴肅한 雰圍氣가 감도는 便이었다. 그러기에 귀여움을 받는 初等學校 때도 나는 快活하고 性味 急한 버릇 때문에 恒常 어른들의 꾸중을 많이 들었다. 勿論 내的으론 무척 귀여워했겠지만 外形的으로는 恒常 謹嚴한 아버지였다. 내가 서울에서 防産國民學校를 卒業하고 무학여중(京城 舞鶴女子高等普通學校 : 筆者)을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밤 親舊들과 같이 韓服으로 옷을 바꿔 입고 父母님 몰래 劇場에서 현대극장의 公演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때 마음속으로 “저렇게 華麗한 俳優가 되어 보겠다”고 굳게 盟誓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현대劇場을 찾아가서 責任者를 만났는데 意外로 반가워하면서 훌륭한 俳優가 될 수 있는 素養이 있다고 激勵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父母님의 따뜻한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俳優의 길을 選擇한데는, 先天的으로 積極的인 性格을 지녔기에 可能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移民者. 「나의 데뷔 時節을 回想한다」 , 『스크린』, 1964年 9月號)      

移用量이 學業을 中斷하고 찾아간 곳이 현대劇場 硏究部였다. 1944年이었다. 현대극장은 1941年 柳致眞이 함세덕과 함께 이른바 ‘國民演劇’을 標榜하며 設立한 劇團이다. 移民者라는 藝名이 알려질 무렵 映畫 <太陽의 아이들>(최인규, 1944)에 出演하게 된다. 鐘을 치는 學校急死로 두세 컷에 不過한 端役이었다. 16歲 때였다. 이 映畫는 섬마을 初等學校 女敎師(김신재)가 學生들에게 內鮮一體 敎育을 시켜 軍 入隊를 督勵하는 內容을 담았다. 日帝 强占期 아래서 製作(1944年 11月4日 명치座 上映)된 마지막 映畫이기도 하다.

解放 이듬해, 서울 동양劇場에서 朝鮮樂劇團의 뮤지컬 <카츄샤>의 公演이 있었다. 이 作品의 音樂 指揮를 맡은 김형래는 김진규와 叔姪間이었다. 그는 조카를 端役으로 出演시키고 移民者를 拔擢했다. 그女는 잇따라 같은 해 6月 현대劇場과 아랑이 統合해 만든 낙랑극회의 創團公演 <山積>(함세덕 作, 演出)에 황철, 이해랑 等과 함께 出演하고 2個月 後 <山洪(山紅)아, 너만 가고>에 主役으로 나서게 된다. 눈이 크고 살결이 고운 移民者는 이 무렵 7살 年上인 김진규와 結婚하고 첫 아들을 낳았다. 이 같은 幸福感 속에서 映畫 <餘名>에 出演하게 된다. 하지만 無名俳優나 다름없던 男便(김진규)李 이강천 監督의 <피아골>(1955)로 浮刻돼 人氣 스타의 班列에 오르면서 그女는 두 아들을 둔 채 離婚하게 되는 試鍊을 겪는다. 1959年이었다. 30代 中盤에 이른 男便이 映畫 <옥단춘>(1955, 권영순)으로 俳優의 길에 나선 열아홉 살 處女 김보애와 사랑에 빠져 家庭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韓國의 에바 가드너’로 불렸던 蠱惑的인 官能美의 所有者 移民者는 1968年 隱退 後, 5年 만에 日本 도쿄로 건너가 룸살롱을 經營하며 在日 韓國人과 再婚, 새로운 삶을 始作하는 듯했으나 離婚 끝에 1986年 57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다.

初期畵面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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