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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목을 따러 왔수다" 1968年 1月 22日 TV 生放送 記者會見에서 國民을 소스라치게 했던 김신조(71)氏는 只今 國家安保의 重要性을 說破하는 '安保 傳道師'로 變身해 있다. 그를 두 次例 찾아가 "되살리기 싫다"는 44年前의 記憶을 더듬게 했다.
-靑瓦臺 浸透組는 어떻게 編成됐나.
"67年 偵察總局 傘下에 浸透 作戰과 게릴라전을 專門으로 하는 124 部隊가 생길 때 創設 要員으로 들어갔다. 그 前에는 다른 特殊 部隊에서 强度 높은 浸透 訓鍊을 이미 받은 狀態였다. 그 해 12月 各 部隊에서 差出된 사람들이 黃海道 연산군 房整理의 6基地에 모여 訓鍊을 받기 始作했다. 訓鍊을 받다 보니 平素 任務와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靑瓦臺 攻擊 任務를 正式으로 下達 받은 것은 68年 1月 9日이다. "
-軍事分界線을 넘어 서울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檢問도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當時 이 나라 防禦態勢가 그랬다. 우리는 그 以前에도 浸透 經驗이 많은 베테랑 들이었다. 能力은 想像을 超越한다. 20㎏軍裝을 메고 山길을, 그것도 밤中에만 한 時間에 12㎞씩 달리게 訓鍊 받았다. 숨어야 할 때에는 무덤을 파 내고 들어간다. 그러니 어떻게 잡겠나. "
-轉向을 決心한 契機는.
"搜査 過程에서 單 한番이라도 拷問이나 毆打를 했으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當時 防諜隊長 윤필용 將軍이 나를 尊待하고 人間的 待遇를 해 徐徐히 내 마음이 바뀌었다. 또 나는 投降할 때까지 手榴彈은 勿論 銃 한 발 쏘지 않았다. 內 彈倉이 支給받은 狀態 그대로였다. 當時 軍警과 民間人 여러 名 犧牲됐지만 내가 하지 않은게 立證돼 處罰을 면했다. "
-同僚 要員들의 屍體를 모두 다 確認했나.
"屍體 2具를 못찾았는데 한두달쯤 지나 臨津江에 民間人 차림 屍體가 한 具 떠올랐다. 腐敗가 甚해 確認은 어려웠지만 情況上 1·21 事態 逃走者로 處理했다. 1具는 끝내 못찾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1名은 살아남아 北으로 歸還했다. "
-그 사람이 박재경 大將이라는 報道가 있었다.
"數年 前 情報機關에서 박재경의 寫眞을 여러 張 갖고 와 아는 얼굴인지 물었다. 하도 歲月이 지난 뒤라 自信있게 對答 못했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왜 그런 報道가 나왔을까.
"어느 北韓軍 將校가 歸順해 그렇게 證言한 것으로 알고 있다. 自己가 北에 있을 때 相關이 박재경의 아들이었는데, 그로부터 박재경에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24 部隊員들 中에는 꼭 1·21 事態가 아니더라도 浸透했다 돌아간 사람이 많다."
예영준 記者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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