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스페셜 - 月曜인터뷰] 신재순 “10·26 當時, 난 딸 둔 離婚女였다”

中央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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綜合 08面

1979年 10月 26日 朴正熙 大統領 弑害事件 當時 現場에 있었던 신재순(54)氏가 本誌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LA 中央日報 백종춘 記者]

歷史의 現場에 있었다. 韓國 現代史의 한 分水嶺이 됐던 1979年 10月 26日, 그 궁정동 晩餐에 불려갔었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目擊者의 한 名이 됐다. 事件은 그女의 人生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그女는 只今 中堅 俳優로 活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女는 거의 隱遁生活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外國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偶然인지 必然인지 在美同胞를 만나 結婚해 美國으로 건너왔다. 美國 로스앤젤레스(LA) 隣近에 자리 잡고 살았다. 歲月은 어느덧 萬 32年이 흘렀다. 20代 初盤이던 그女는 이제 孫女 3名을 둔 50代의 中年이 돼 있었다.

朴正熙 大統領이 김재규 中央情報部長의 銃擊을 받고 숨을 거둔 10·26事件 現場에 있었던 신재순(54·當時 H臺 演劇映畫科 3年)氏. 그女는 83年 以後 美國 LA 近郊에서 살고 있었다. 3年 前부터는 가디나에서 구이집을 經營하고 있다.

 구이집에는 지난 9月 初 처음 들렀다. 門을 열고 들어서는 瞬間 카운터에 서 있는 女人이 신재순氏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飮食을 注文하고 燒酒가 몇 巡杯 돈 後 從業員을 통해 申氏를 모셨다. 앉자마자 記者 身分을 밝히고 飮食店에 들른 것이 인터뷰 때문이라고 率直히 말했다. 그女는 單칼에 拒絶했다.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飮食이나 맛있게 들고 가라고 했다. 첫 對面은 그렇게 끝났다. 一週日 後 다시 그곳을 찾았다. 이番에는 첫 만남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狀況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辭讓하겠다고 했다. 쉽지 않았다. 그날 以後 여러 次例 다시 찾았다. 마침내 그女는 마음을 열기 始作했다. 인터뷰 날짜가 定해졌다. 言論과의 인터뷰는 約 14年 만이다.

그해 12月 16日, 심수봉氏(왼쪽 帽子 쓴 사람)와 함께 陸本戒嚴軍法會議에 出頭했을 當時의 신氏 모습. [中央포토]

 -10·26 事件 當時 김재규 中央情報部長이 했다는 ‘버러지’ 發言의 眞相은 무엇입니까.

 “10·26 事件 以後 김재규 中央情報部長이 차지철 警護室長에게 銃을 쏘기 前에 ‘閣下, 이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政治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法廷에서 陳述했습니다. 이는 保安隊(當時 戒嚴司 合同搜査本部를 그는 이렇게 表現했다)에서 시켜서 한 말입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어요. 94年에 出刊한 自傳的 小說 『그곳에 그女가 있었네』에도 한결같이 主張했었지만 事實이 아닙니다. 調査 過程에서 要員들은 ‘함께 자리했던 심수봉이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너는 왜 다르게 이야기하느냐’며 다그쳤고 持續的으로 세뇌시켰습니다. 나중에는 나 自身조차 어느 게 眞實인지 혼란스러울 程度였습니다. 그 發言이 왜 그렇게 重要한지는 只今도 모르겠습니다.”

 김 部長이 車 室長에게 銃을 쏘기 前에 무슨 말을 했느냐는 只今도 論難거리로 남아 있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심수봉氏는 申氏의 冊이 나온 後 4個月쯤 뒤에 펴낸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冊에서 “金 部長이 大統領 앞에서 다른 參謀들과 다툰다는 것은 想像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버러지 같은…”이라는 發言은 全혀 없었다고 主張했다. 申氏의 이番 證言으로 김재규의 ‘버러지’ 關聯 發言 部分은 새로운 整理가 必要하게 됐다. 當時 外部의 事件 目擊者 두 名 얘기가 一致하기 때문이다.

反面 한겨레신문은 79年 11月 30日 류택형 辯護士가 남한산성 陸軍矯導所에 收監 中이던 김재규를 찾아가 나눈 對話의 錄音을 公開하면서 김재규가 ‘버러지’ 發言을 한 것으로 지난 18日 報道했다. 한겨레가 傳한 김재규의 關聯 育成은 “나는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하고 이 말을 하고 ‘빵! 빵-! 하고”로 돼 있어 그해 11月 6日 合搜部 發表와 類似하다. ‘버러지’ 部分 發言은 심수봉·신재순氏-合搜部·김재규 間에 差異가 있어 繼續해서 미스터리로 남을 可能性이 있다.

김재규 前 中央情報部長이 1979年 朴正熙 前 大統領 弑害事件 現場檢證에서 朴 前 大統領을 銃으로 쏘는 모습을 再演하고 있다. [中央포토]

 -10·26 事件 以後 어떻게 지냈나요.

 “10·26事件은 나에게는 運命的인 事件입니다. 全혀 想像도 하지 않았던 뜻밖의 일입니다. 平生 지울 수 없는 事件으로 人生의 方向을 完全히 바꿔놓았습니다. 萬若 그 事件이 나지 않았다면 演藝界 쪽으로 풀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습니다. 正말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參席한 자리에 大統領이 앉아 있었고 거기서 部下에게 銃擊을 받고 돌아가신 거예요. 以後 10·26事件을 무던히도 잊으려고 努力했습니다. 하지만 完全히 벗어나지는 못했어요. 아직도 衝擊이 남아 있습니다. 그 事件은 내가 태어나서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目擊한 것이었습니다. 또 銃擊 事件이었기 때문에 銃에 對한 恐怖가 如前합니다. ‘땅’ 소리만 나면 只今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지요. ”

 -當時의 銃擊 現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自身들이(김재규 部長과 擧事 計劃에 加擔했던 中庭 要員들) 計劃했던 일이 成功했다고 確信해서 안 죽였을 거라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데려다 주면서 ‘오늘 벌어진 일에 對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그 以後 입이 무거운 女子가 됐지요.”

 -朴正熙 大統領과는 짧고도 悲劇的인 만남이 됐는데요.

 “ 獨裁를 하기는 했지만 經濟的으로 나라의 發展을 많이 이루고 國民을 위했던 분입니다. 事件 現場에서 銃傷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괜찮아’라고 한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는 瞬間까지 毅然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이었어요.”

  그는 또 다른 告白을 했다. 10·26 事件 當時 이미 結婚해 딸까지 둔 離婚女였다고 했다. 大學生 未婚 女性으로만 알려졌던 것과는 달랐다.

 -大學生 때 結婚을 한 契機가 있다면.

 “大學 2學年 때 結婚을 했습니다. 結婚과 함께 休學했었지요. 財力家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家庭的인 男子는 아니었습니다. 當時에도 車를 몰고 다닐 程度로 餘裕 있는 生活을 했습니다. 막 20代를 넘긴 젊은 나이였고, 참으며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딸을 데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以後 子息의 未來를 걱정한 親庭어머니가 어느 날 孫女를 親家로 데려갔습니다. 5~6年 前에 큰딸로부터 連絡이 와 다시 만났습니다. 只今 美國 샌프란시스코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大型 銀行의 幹部로 일하고 있지요.”

 그는 離婚으로 끝난 두 番째 結婚에서도 딸을 하나 얻었다. 現在 같이 살고 있다. 큰딸이 낳은 딸과 작은딸이 낳은 두 딸 等 모두 3名의 孫女를 두고 있다.

 신재순氏에겐 작은 所望이 하나 있다. “子息들, 孫女들 잘되고, 하고 있는 비즈니스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또 내가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周邊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幸福했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나중에는 다시 韓國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조용한 시골에서 田園生活을 하며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萬若 機會가 된다면 演劇도 해보고 싶어요. 언제든지 오면 받아준다는 學校 先輩가 代表로 있는 劇團이 있어요. 自身은 없지만 하고 싶어요.”

 申氏는 두 달 前부터 敎會에 나가고 있다. 심수봉氏가 勸誘했다고 한다. 새로운 信仰人의 삶을 꾸려 가며 마음의 平安을 찾고 있다.

LA 中央日報 김병일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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