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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 炭鑛 勞使紛糾 流血事態로 번지다

中央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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綜合 33面

사북 炭鑛 勞組支部長의 夫人 김순이氏가 拉致돼 기둥에 묶여 있는 모습(1980年 4月 24日子 中央日報 1面 寫眞).

사북 炭鑛 勞使紛糾 流血事態로 번지다

1980年 4月 24日 江原道 사북 炭鑛에서 發生한 示威가 처음으로 新聞에 報道되기 始作했다. ‘鑛夫들의 集團 亂動’으로 報道된 이 事件과 함께 한 女人이 기둥에 묶여 있는 寫眞은 當時 사람들에게 큰 衝擊을 주었다. 게다가 이 事件으로 警察 한 名이 死亡하면서 事件의 正確한 眞實은 오랜 期間 동안 묻혀 있었다.

事件은 炭鑛의 劣惡한 條件 때문에 일어났다. 60年代 以後 韓國 社會는 急激한 近代化와 都市化의 물결이 휩쓸고 있었지만, 炭鑛만은 例外였다. ‘막장 人生’이라는 말이 있을 程度로 社會로부터 疏外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던 곳이 바로 炭鑛이었다. 막장은 坑道의 막다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힘든 作業으로 인해 鑛夫들은 都市 勞動者들에 비해 若干 높은 賃金을 받았지만, 劣惡한 作業環境에 시달려야 했으며, 生必品의 不足으로 인해 物價도 다른 地域보다 30% 程度 높은 便이었다. 툭하면 터지는 것이 坑道 埋沒 事故였고, 運이 좋아야 奇跡的으로 救出되는 일들이 頻發했다. 作業 中 微細한 炭가루를 繼續 吸入하다가 塵肺症에 걸려 死亡하는 境遇도 茶飯事였다.

사북 炭鑛은 當時 採炭量 年間 160萬t에 從業員 數가 3000名이 넘는 國內 最大의 民營 鑛山이었다. 이는 全國 採炭量의 9%에 達했다. 當時 政府는 70年代 두 次例의 午日쇼크로 因해 石炭 生産量을 늘리기 위한 石炭産業 育成政策을 實施하고 있었다.

이렇게 劣惡한 狀況에서 炭鑛 勞動者들은 79年 10·26 事件 以後 民主化 흐름에 맞추어 勞組를 中心으로 賃金 引上을 推進했다. 그러나 勞組 支部長이 會社 側과 祕密裏에 妥協하면서 事態가 惡化되기 始作했다. 政府는 모든 集會를 不許한다는 方針이었지만, 勞組員들은 4月 21日 籠城에 들어갔다. 이를 鎭壓하러 나선 警察과 맞서는 過程에서 4名의 鑛夫들이 警察의 지프에 치이는 事件이 發生했다. 그리고 이에 興奮한 鑛夫들에 依해 한 名의 警察이 死亡하였으며, 鑛夫들이 사북 地域을 掌握하는 事態가 發生하였다.

多幸히 사북 事態가 報道되기 始作한 4月 24日 政府 側 對策委員들과 勞動者 代表들의 合意가 이루어져 事態가 解決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週 後 合同搜査本部는 70餘 名의 鑛夫와 婦女子들을 連行하고, 25名을 軍法會議에 回附했다.

事件이 發生한 지 30年이 지났지만, 當時의 眞相은 社會的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但只 너무도 非常食的인 드라마에 對해 ‘막장’이라는 修飾語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북炭鑛이 있었던 그 자리에 서 있는 巨大한 카지노 안에는 또 다른 막장이 있다는 事實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박태균 서울대 國際大學院 敎授·韓國現代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