粥 먹고 몸 씻으며 ‘墮落’했다…싯다르타가 깬 ‘苦行의 虛像’

  • 카드 發行 一時 2024.05.08
 “삶이 苦痛의 바다” 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삶은 自由의 바다” 라고 力說하는 붓다의 生涯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백성호 宗敎專門記者가 ‘붓다前’을 連載합니다. ‘宗敎’가 아니라 ‘人間’을 다룹니다.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自身의 宗敎와 相關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지지고 볶는 日常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獅子가 돼라”라 고 말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돼라”라고 합니다. 어떡하면 獅子가 될 수 있을까. ‘붓다前’은 그 길을 담고자 합니다.
20年 가까이 宗敎 分野를 파고든 백성호 宗敎專門記者는 作家이기도 합니다. 『人文學에 묻다, 幸福은 어디에』『예수를 만나다』『결국, 잘 흘러갈 겁니다』등 10卷의 著書가 있습니다. 붓다는 왜 마음의 革命家일까, 그 理由를 만나보시죠.

(16) 苦行者는 몸을 씻는 것조차 墮落이었다

파키스탄의 라호르 博物館에는 붓다의 ‘고행상’이 있다. 간다라 美術의 秀作으로 꼽히는 彫刻像이다. 고행상을 보면 싯다르타의 苦行이 어디까지 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앙상한 皮膚 밖으로 갈비뼈가 赤裸裸하게 드러나고, 살은 꺼지고 핏줄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두 눈은 움푹 들어가 骸骨 같고, 뱃가죽도 쑥 꺼져 있다. ‘배를 만지면 등뼈가 손에 잡혔다’는 經典의 記錄이 實感 날 程度다.

#苦行의 終點에 解脫이 있을까

싯다르타는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둔 狀況이었다. 當時 그는 자이나교처럼 穀氣를 끊고서 三昧에 든 채로 죽기를 願했던 걸까. 그걸 完全한 涅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高杏林에서 싯다르타가 苦行의 極限에 이르러 목숨이 위태롭다는 消息이 아버지 숫도다나 王에게 들어갔다.

싯다르타의 고행 모습을 담은 고행상. 움푹 들어간 두 눈에서 깊은 고요가 엿보인다. 중앙포토

싯다르타의 苦行 모습을 담은 고행상. 움푹 들어간 두 눈에서 깊은 고요가 엿보인다. 中央포토

王은 卽時 馬夫 贊나를 보냈다. 따듯한 옷과 기운을 차릴 飮食을 함께 보냈다. 싯다르타는 이를 拒絶했다. 여기서 苦行을 멈춘다는 건, 遂行을 抛棄하는 거라 생각했다. 贊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宮으로 돌아갔다.

無慮 6年이었다. 싯다르타의 苦行은 出家 後 6年째 이어지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消息에 숫도다나 王은 다른 臣下를 보냈으나 所用이 없었다. 싯다르타의 固執을 꺾을 수는 없었다.

當時 苦行림에 있던 2萬餘 名의 苦行者가 싯다르타를 우러러보았다. 그 누구도 싯다르타처럼 죽음 直前의 苦行 狀態까지 가지는 않았다. 싯다르타는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의 境界線까지 갔다. 如此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例를 들면 이런 式이다. 서울에 있는 사람들에게 누군가 말했다. “釜山에 가면 엄청난 寶物이 있어.”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을 터이다. 그래도 論爭은 繼續된다. 釜山에 寶物이 있다는 主張과 없다는 主張이 맞선다. 이런 論爭을 終熄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釜山에 가보면 된다. 그럼 今方 안다. 釜山에 寶物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다.

싯다르타度 그랬다. 當時 印度의 修行者는 다들 苦行의 極限에 解脫이 있다고 했다. 解脫하면 生老病死의 問題가 풀린다고 했다. 싯다르타는 몸소 갔다. 苦行의 極限까지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寶物이 없었다. 깨달음도 없고, 解脫道 없었다. 팔리어 經典에서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