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銃소리에 뒷담 넘었다…쿠데타에 3番 숨은 國防長官

  • 카드 發行 一時 2024.05.07

<第2部> 한남동의 銃소리

4回. 12·12는 5·16의 데자뷔

12·12街 成功할 수 있었던 決定的 原因은 軍 首腦部가 優柔不斷했기 때문이었다. 最高責任者인 國防長官의 行跡을 追跡해 보면 特히 그렇다. 마치 1979年 12·12街 1961年 5·16 같다. 그러나 이런 데자뷔 現象은 個人 次元의 問題는 아니었다.

‘쿠데타’ 提報 無視한 國防長官

1979년 2월 노재현 국방장관(왼쪽)이 신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취임식에서 부대기를 전달하고 있다. 이 무렵 노재현은 당시 전두환 1사단장을 보안사령관으로 추천했다. 중앙포토

1979年 2月 노재현 國防長官(왼쪽)李 新任 鄭昇華 陸軍參謀總長 就任式에서 部隊旗를 傳達하고 있다. 이 무렵 노재현은 當時 전두환 1師團長을 保安司令官으로 推薦했다. 中央포토

노재현 國防部 長官은 12·12 몇 週 前인 11月 末 ‘전두환 中心의 쿠데타 陰謀’에 對한 提報를 받았다. 提報者는 美8軍 司令官 위컴 大將이었다.
위컴은 이형근 前 陸軍參謀總長으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이형근은 軍番 ‘1番’(最初의 韓國軍)으로 有名한 元老다. 위컴은 노재현 國防長官 外에 류병현 聯合司 副司令官과 문홍구 合參本部長에게도 提報했다.

그런데 노재현 長官은 쿠데타說을 깔아뭉갰다. 문홍구는 쿠데타說을 듣고 노재현을 찾아갔다. 노재현은 “나도 전두환 將軍을 불러 알아보았는데, 그런 일 絶對 없을 것이니 安心해”라고 말했다. 정승화 參謀總長도 이런 諜報를 받았다. 그러나 그 亦是 無視했다. 정승화는 “戒嚴司令官을 相對로 설마 그런 變亂을 일으킬 수 있으랴”는 생각에 別 措置를 取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재현 長官은 元來 전두환과 가까웠다. 全斗煥이 陸軍參謀總長 首席副官으로 勤務하던 1969年 當時 노재현은 陸軍參謀次長으로 가깝게 지냈다. 전두환을 保安司令官으로 推薦한 사람도 노재현이다. 그러나 노재현은 鄭昇華 逮捕에 反對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노재현은 全斗煥의 謀議를 霧散시키기 위한 積極的인 行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재현은 전두환 勢力의 움직임을 疑心하는 提報者들에게 ‘그럴 理 없다’고 否認함으로써 全斗煥의 謀議를 감싸준 셈이다.

5·16 當時 장도영 參謀總長 닮은 꼴

1961년 5월 20일 계엄사무소 앞의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 수반(왼쪽)과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추대로 권좌에 올랐던 장도영은 44일 후 반혁명 혐의로 쫓겨나 미국 유학을 떠났다. 중앙포토

1961年 5月 20日 戒嚴事務所 앞의 장도영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 兼 內閣 首班(왼쪽)과 朴正熙 最高會議 副議長. 朴正熙의 推戴로 權座에 올랐던 장도영은 44日 後 反革命 嫌疑로 쫓겨나 美國 留學을 떠났다. 中央포토

그런 點에서 노재현은 1961年 5·16 當時 장도영 陸軍參謀總長을 닮았다. 장도영은 朴正熙 少將으로부터 쿠데타 計劃을 미리 詳細히 報告받았다. 朴正熙는 장도영을 ‘革命의 指導者’로 모시고자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