兄弟福祉院 事件 搜査했던 檢事 “國家가 責任져야” 特別法制定 促求

中央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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綜合 27面

서울 대검찰청 앞에 선 김용원 변호사. [연합뉴스]

서울 大檢察廳 앞에 선 김용원 辯護士. [연합뉴스]

蔚山에서 釜山 方向 道路 한 쪽에 있는 蔚州郡의 한 初等學校. 山 아래 있어 空氣가 좋기로 有名하다. 30餘 年 前만 해도 이곳은 兄弟福祉院의 强制 勞役 現場인 反正牧場이었다. ‘韓國版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人 大虐殺)’라고 불리는 釜山 兄弟福祉院의 人權 實相이 밝혀진 始作點이기도 하다.

1986年 12月 21日 釜山地方檢察廳 鬱散支廳(現 蔚山地檢) 檢事였던 김용원(63) 辯護士(法務法人 한별 代表辯護士)는 知人과 山에 꿩 사냥을 나갔다가 허름한 作業服을 입고 일하는 勞動者들을 發見했다. 몽둥이 든 警備員들이 이들을 監視했다. 知人은 “일하다 逃亡가면 半쯤 죽여놓는다더라”고 傳했다. 重犯罪임을 直感한 金 辯護士는 바로 內査에 着手, 이듬해 1月 16日 浮浪인 收容所인 釜山 兄弟福祉院을 押收搜索했다.

75年부터 12年 동안 3000名 넘는 受用者를 監禁·暴行·性暴行하고 當時 基準 12億원의 國家 補助金을 橫領한 兄弟福祉院 事件은 그렇게 世上에 알려졌다. 確認된 死亡者만 551名이다. 金 辯護士는 87年 1月 박인근(2016年 死亡) 兄弟福祉院 院長과 職員들을 業務上 橫領, 特殊監禁 等으로 拘束했다. 朴 院長은 1審에서 懲役 10年을 받았다가 2審 等 7番의 裁判을 거치며 最終 2年 6個月을 宣告받았다.

31年 後인 올해 1月 17日, 金 辯護士는 兄弟福祉院 對策委員會와 함께 서울 서초구 頒布大路 大檢察廳 앞에 섰다. 이들은 記者會見을 열고 眞相 糾明을 위한 兄弟福支援 特別法 制定을 促求했다. 2016年 陳善美 더불어民主黨 議員이 ‘兄弟福祉院 被害事件 眞相 糾明 法律案’을 發議했고, 現在 國會에 繫留 中이다.

1980년대 부산 형제복지원. [중앙포토]

1980年代 釜山 兄弟福祉院. [中央포토]

92年 檢察에서 나와 오랜 時間 兄弟福祉院 眞相 糾明을 主張해온 金 辯護士는 “當時 釜山地檢長 等의 搜査 外壓으로 收容者 3000餘 名을 調査조차 하지 못했다”며 “兄弟福支援 特別法을 制定해 언제, 어떤 理由로, 어떻게 人權 蹂躪을 當했는지 眞相을 밝히고 最小限 金錢的 補償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當時 需用者들은 賠償을 받지 못했다.

兄弟福祉院은 朴正熙·전두환 政權의 內務部 訓令 410號에 따라 만들어지고 運營됐다. 金 辯護士는 “家族에게 通報도 하지 않고 길에서 사람을 잡아다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强制 奴役을 시켰다. 사람들은 맞아 죽거나 病에 걸려 죽었다”며 “國家가 運營費 全額을 負擔하고 管理·監督한 만큼 그곳에서 벌어진 暴行·死亡 事件에 國家의 責任이 있다”고 强調했다.

그는 “國會에서 過去事 整理 基本法 改正을 論議하고 있지만, 立法 進行이 遲遲不進하다”며 “人權 先進國이 되려면 國家가 過去에 저지른 暴壓的 行爲를 反省하는 段階부터 거쳐야 한다”고 다시 목소리를 높인 理由를 밝혔다. “兄弟福祉院 안에서 일어난 人權 蹂躪 實相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擔當 檢事로서 責任을 느낍니다. 같은 87年에 있었던 박종철 事件이 다시 注目받은 것처럼 市民 數百名이 죽은 兄弟福祉院 事件 亦是 지난 일이라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金 辯護士는 오는 8日 서울大學校 社會發展硏究所 等이 主催하는 포럼 ‘또 하나의 1987 兄弟福祉院을 생각한다’에 討論者로 參席할 豫定이다. 그는 最近 檢察 改革과 關聯해서는 “신중하게 檢察 權限을 分散·再配置해야 한다”고 말했다.

蔚山=최은경 記者 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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