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의 ‘大寒’ 國號 抹殺作戰…“韓國 代身 朝鮮으로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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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帝國 120周年] 다시 쓰는 近代史 <15> 3·1運動-尹奉吉 義擧-카이로宣言

상해 홍구공원 작탄(炸彈) 의거(1932.4.29)를 사흘 앞두고 윤봉길 의사가 거류민단 사무실 대형 태극기 앞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기념촬영을 했다. 윤봉길 의거는 중국 인민들과 장개석 총통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한·중 군사동맹’을 이끌어 내고 마침내 카이로선언의 한국 독립 조항으로까지 이어졌다. [사진 국가보훈처, 중앙포토]

上海 홍구公園 炸彈(炸彈) 依據(1932.4.29)를 사흘 앞두고 尹奉吉 義士가 居留民團 事務室 大型 太極旗 앞에서 大韓民國臨時政府 金九 主席과 記念撮影을 했다. 尹奉吉 義擧는 中國 人民들과 蔣介石 總統의 마음을 움직이고 世界를 놀라게 하면서 ‘韓·中 軍事同盟’을 이끌어 내고 마침내 카이로宣言의 韓國 獨立 條項으로까지 이어졌다. [寫眞 國家報勳處, 中央포토]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확증한 국제문서인 ‘카이로선언’(1943.11.27)은 대한제국 멸망 이후 41년간 지속된 항일 독립전쟁의 역사를 증언한다. 수많은 피식민지 국가들 가운데 한국(Korea)만 두 번씩이나 거명하며 ‘자유와 독립’을 확정했다. 카이로선언을 주도한 세 나라의 영수. 왼쪽부터 중국 장개석 총통,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

韓國의 獨立을 最初로 確證한 國際文書人 ‘카이로宣言’(1943.11.27)은 大韓帝國 滅亡 以後 41年間 持續된 抗日 獨立戰爭의 歷史를 證言한다. 수많은 피植民地 國家들 가운데 韓國(Korea)만 두 番씩이나 擧名하며 ‘自由와 獨立’을 確定했다. 카이로宣言을 主導한 세 나라의 領袖. 왼쪽부터 中國 蔣介石 總統, 美國 프랭클린 루스벨트 大統領, 英國 윈스턴 처칠 總理.

데라우치 마사打케 陸軍大將은 1910年 5月 30日 第3代 痛感으로 任命되자마자 祕密裏에 ‘倂合準備委員會’를 構成하고 7月 7日 21個 弔意 ‘倂合實行方法稅目’을 樹立했다. 그 第1條가 ‘나라의 名稱’에 關한 것이다. “韓國을 改稱해 朝鮮으로 할 것”이라는 方針부터 定해 놓았다. 强制 竝呑이 이뤄지기 前부터 日帝는 ‘大寒’이란 國號부터 抹殺하려고 나선 것이다.

1943년 12월 2일자 뉴욕타임스 1면에 카이로선언 기사와 함께 실린 ‘한국 독립 약속(Pledge Free Korea)’ 제목.

1943年 12月 2日子 뉴욕타임스 1面에 카이로宣言 記事와 함께 실린 ‘韓國 獨立 約束(Pledge Free Korea)’ 題目.

‘韓國 强點’李 完了되는 1910年 8月 29日 直後인 9月 2日에는 메이지 日王까지 나서 “짐이 韓國의 國號를 고쳐 朝鮮이라 하는 件을 再嫁해 이에 公布케 하노라”라는 勅令을 發表했다. 第1代 總督이 된 데라우치는 全國 言論·出版·敎育界와 社會政治團體에서 ‘大寒 抹殺’ 作戰을 展開했다. ‘大寒’이란 名稱을 단 新聞과 雜誌, 團體는 ‘大寒’을 떼거나(가령 大韓每日申報→每日申報), 다른 이름으로 바꾸게 했고(가령 大韓新聞→漢陽新聞), 이를 拒否하면 販賣禁止시켰다.(이완범, ‘國號 大韓民國의 命名’ 60~61쪽)

‘大寒’ 名稱 단 新聞·團體 團束 #떼거나 이름 바꾸게 强制 #海外 獨立運動團體들 繼續 使用 #3·1運動 때도 “大韓獨立萬歲” 외쳐 #傷害 臨政 國號부터 大韓帝國 繼承 #尹奉吉 義擧에 感銘받은 蔣介石 #金九 만나 光復軍 支援 '韓·中 同盟' #高宗이 쓰던 用語 ‘自由와 獨立’ #카이로宣言 條項 揷入에 앞장 #李承晩 "金九·尹奉吉·蔣介石 德 #카이로宣言에 韓國 獨立 條項"

이와 함께 日帝는 韓國史를 歪曲한 歷史冊들을 配布하기 始作했다. 이 무렵 日本人들이 지은 4卷의 ‘朝鮮史’가 出刊된다. 이케다 쓰네타로(池田常太郞)가 펴낸 『日韓合邦素砂(日韓合邦小史)』(1910. 9. 20), 日本歷史地理學會가 編纂한 『韓國의 倂合과 局社』(1910. 10),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쓴 『조선통사(朝鮮通史)』(1912), 아오惹起 쓰나타로(靑柳綱太郞)가 著述한 『李朝五百年史(李朝五百年史)』(1912) 等이다.

이 冊들 속에서 高宗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大院君과 明成皇后의 對立 構圖 속에 高宗은 그저 ‘世上物情에 어둡고 柔弱한 君主’ 卽 ‘暗約(暗弱) 君主’로 存在感 自體를 喪失했다. 明成皇后는 媤아버지 大院君과의 葛藤으로 나라를 망친 ‘亡國의 女人’으로 貶下됐다. 이때 만들어진 韓國史의 歪曲된 構圖는 1945年 光復 後 韓國人들이 쓴 歷史冊에 그대로 답습돼 只今에 이르고 있다. (이태진, 『高宗時代의 再照明』 108~123쪽)

1910年 9月에 벌써 이런 冊들이 出刊되었다는 것은 그보다 이미 오래前부터 準備를 해왔다는 얘기가 된다. 實際 日帝는 1886年 東京帝國大學을 設立하고 1888年에 國史課를 設置하여 日本 歷史와 造船社를 함께 硏究하기 始作했다. 그 結果 시게노 야스쓰구(重野安釋)·구메 拘泥다케(久米邦武)·호시노 히사시(星野恒)가 共同 著述한 『國事案(國史眼)』(1890), 하야시 다이스케의 『朝鮮史(朝鮮史)』(1892) 等이 19世紀 末에 이미 編纂됐다. 일찍부터 征韓論(征韓論)과 함께 韓國 侵略을 念頭에 두고 韓國史를 歪曲하기 始作했던 것이다. (한영우, 『未來를 여는 우리 近現代史』 104쪽)

日帝가 아무리 極惡하게 ‘大寒’을 지우려고 해도 大韓은 決코 지워지지 않았다. 海外(滿洲·沿海州·美洲 等)로 나간 獨立運動家들은 ‘大寒’이란 國號를 使用하며 大韓帝國을 繼承할 意志를 놓지 않았다. 大部分의 獨立運動 團體들 앞에는 ‘大寒’이 붙었다. 1919年 3·1萬歲運動에서 全 國民이 외친 口號도 다름 아닌 “大韓獨立萬歲”였으며, 그 餘波로 樹立된 上海臨時政府의 이름이 ‘大韓民國臨時政府’였다. 政府 形態는 바뀌었지만 ‘大寒’이라는 國家는 繼續 이어졌던 것이다. (한영우, 『未來를 여는 우리 近現代史』 109, 129~130쪽)

‘大寒’은 臨時政府를 거쳐 다시 1945年 光復 以後 樹立된 大韓民國의 國號로 繼承되었다. 그런 點에서 大韓帝國의 歷史는 滅亡으로 敍述을 그쳐선 안 된다. 1904年 2月 日本軍의 再侵略(甲辰倭亂)으로 大韓帝國은 一時 滅亡했지만 그것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41年의 長期 抗戰을 통해 마침내 ‘大韓民國’으로 復活했기 때문이다. 韓國의 獨立을 最初로 確證한 國際文書人 ‘카이로宣言’(1943. 11. 27)이 그 41年間 抗爭의 피어린 歷史를 證言한다. 大韓帝國 歷史에 對한 技術은 한時도 그치지 않았던 獨立戰爭을 통해 光復이 쟁취되는 時點, 적어도 카이로宣言까지 擴張되어야 하는 것이다. (황태연, 『甲辰倭亂과 國民戰爭』 21~24쪽)

카이로宣言 속 두 個의 ‘祕密 코드’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작탄(炸彈) 의거 현장.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축하와 일제의 상해사변 전승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윤 의사가 던진 폭탄은 식단 중앙에 명중했다. 폭음과 연기가 뒤덮이며 식장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일제의 상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폭사했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해내지 못한 위업을 한국의 한 청년이 능히 처리했으니 장하고도 장한 일“이라며 찬탄했다. [중앙포토]

尹奉吉 醫師의 上海 홍구公園 炸彈(炸彈) 依據 現場. 日王의 生日인 천장절 祝賀와 日帝의 上海事變 全勝을 記念하는 자리였다. 尹 義士가 던진 爆彈은 食單 中央에 命中했다. 爆音과 演技가 뒤덮이며 式場은 阿鼻叫喚으로 變했다. 日帝의 上海 派遣軍 總司令官 시라카와 요시노리 隊長이 暴死했고 數十 名이 重輕傷을 當했다. 蔣介石 總統은 ’中國의 百萬 軍隊가 해내지 못한 偉業을 韓國의 한 靑年이 능히 處理했으니 章하고도 壯한 일“이라며 讚歎했다. [中央포토]

카이로宣言에는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할 두 個의 ‘祕密 코드’가 들어 있다. 第2次 世界大戰 當時 植民地가 된 수많은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들 가운데 唯獨 ‘韓國(Korea)’만을 두 番 씩이나 明記해 놓은 背景이 무엇일까, 이것이 첫 番째 祕密이다. 두 番째 祕密은 韓國의 國名과 함께 쓰인 ‘自由와 獨立’이란 表現이다. 自由는 大槪 平等과 한 雙으로 묶여 言及되는 것이 一般的이다. 잘 쓰이지 않는 ‘自由와 獨立’의 竝列 表記는 高宗이 거의密勅(1909)에 使用한 以來 獨立軍 사이에 一種의 固有名詞처럼 쓰였다. 이런 表現이 어떻게 카이로宣言에 그대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카이로宣言의 韓國 關聯 內容은 다음과 같다. “앞에 말한 세 强大國(美國·英國·中國)은 韓國 百姓의 奴隸 狀態를 留念하고 適切한 時點에 韓國이 자유로워지고 獨立的이 되어야 한다고 決議한다.”(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카이로宣言에 이 文句를 넣은 이는 蔣介石 中國 總統이었고, 腸 總統이 韓國의 獨立을 代辯하게 된 背景에는 大韓民國臨時政府와 金九 註釋이 있었다. 腸 總統과 金 主席이 ‘韓·中 軍事同盟’까지 맺는 契機는 尹奉吉 醫師의 上海 홍구公園 炸彈(炸彈) 依據(1932. 4. 29)였다. 尹奉吉 義擧 以後 腸 總統의 韓國 光復軍에 對한 支援이 始作됐다. 事實上 大韓民國臨時政府를 承認한 것이었다.

腸 總統은 尹奉吉 義擧에 對한 讚歎을 여러 次例 밝혀 놓았다. “中國의 百萬 軍隊가 해내지 못한 偉業을 韓國의 한 靑年이 능히 處理했으니 章하고도 壯한 일이로다.” (『蔣介石일機』 1932. 5. 26)

尹奉吉의 炸彈 義擧는 左右 路線 싸움으로 分裂되며 힘을 잃어가던 臨時政府를 다시 소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中國 人民들과 蔣介石 總統의 마음을 움직이고 世界를 놀라게 하면서 ‘韓·中 軍事同盟’을 이끌어 내고 마침내 카이로宣言의 韓國獨立 條項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腸 總統이 카이로 協商 過程에서 임정의 ‘終戰 卽時 獨立’ 方針을 積極 代辯한 背景에는 또 하나의 理由가 있었다. 當時 美軍-中國軍-光復軍 사이에 存在했던 軍事外交的 相互依存 關係다.

美國이 日本 本土 攻擊을 開始하면서 세 나라 軍隊의 依存 關係가 形成됐다. 美國 空軍의 爆擊機는 日本에서 700㎞ 떨어진 航空母艦에서 離陸해 日本 本土로 날아가 目標 地點을 爆擊하고 나면 燃料가 다 떨어져 發進航母로까지 歸港할 수 없었다. 美軍 飛行士들은 日本 本土 爆擊 뒤 가까운 中國 本土로 날아가 中國軍 作戰地域 안에 落下해 中國軍의 救出을 받아 美軍으로 歸還할 수 있었다. 中國軍 作戰地域이 넓을수록 美軍 操縱士의 生還可能性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에 美國 政府는 日本軍의 侵攻에 맞서 싸우는 中國軍을 支援했다. 狀況이 이러했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카이로宣言 協商에서도 蔣介石의 朝鮮獨立 條項 要求를 受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태연, 『甲辰倭亂과 國民戰爭』 21~24쪽)

美軍과 中國軍의 依存 關係를 維持하고 擴大하는 過程에 韓國 光復軍이 重要한 役割을 遂行하고 있었다. 中國을 侵略한 日本軍 兵士들 가운데에는 强制徵集된 韓國人이 많이 包含돼 있었다. 光復軍은 中國軍과 抗日 聯合作戰을 펴는 過程에서 이 韓國 出身 日本軍에 對해 心理戰을 벌여 이들을 脫營하게 함으로써 日本軍의 戰列을 瓦解시켰다. 中國軍 안에는 日本語와 韓國語를 다 驅使할 수 있는 兵士가 全無했다. 光復軍의 規模가 數千 名에 不過했을지라도 中國軍의 對日 抗戰에서 光復軍의 役割이 必須的이었던 理由다. 이 같은 軍事的 實益이 있었기에 蔣介石 總統은 金九 主席과의 關係를 重視하고 한·中 軍事同盟을 繼續 維持하면서 카이로宣言의 韓國獨立 條項을 넣었던 것이다.

金九와 獨立運動家들이 愛用한 ‘나라의 獨立과 百姓의 自由’라는 表現까지 蔣介石 總統은 그대로 引用해 넣었는데, 이는 本來 高宗이 1909年 3月 15日 내린 ‘서북간도와 附近 各地 人民들에 對한 勅諭’에 나오는 말이다. 高宗은 “오로지 獨立이라야 나라이고, 오로지 自由라야 百姓이다”고 闡明하면서 抗日 獨立戰爭을 鼓吹했다.(이태진, 『日本의 韓國倂合 强制硏究』 315~317쪽)

이에 앞서 乙巳勒約 直後 自決한 閔泳煥의 遺書에도 이 表現이 登場하는 것을 볼 때 1905年부터 高宗과 勤王勢力 사이에서 쓰이기 始作한 것으로 보인다. 李奉昌과 尹奉吉의 ‘韓人애국단 入團宣誓門’에 쓰인 文句도 ‘自由와 獨立’이었다. 臨時政府 文書와 獨立運動家들의 言說 속에 이 ‘自由·獨立’이란 表現은 數도 없이 登場한다. (『大韓民國臨時政府資料集』, 國史編纂委員會 編纂, 2005)

프랭클린 루스벨트 ‘40年 信託統治’ 劃策

프랭클린 루스벨트 大統領은 蔣介石 總統이 韓國獨立 條項을 繼續 넣자고 하는 것을 始終 탐탁해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日帝 植民地 36年보다 더 긴 ‘40年 信託統治’ 陰謀를 劃策하면서 韓國의 ‘終戰 卽時 解放’을 沮止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反對로 루스벨트 大統領과 그의 特別補佐官 해리 홉킨스가 韓國獨立 條項을 넣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韓國은 두 名의 루스벨트 大統領과 안 좋은 因緣이 있다. 大韓帝國이 滅亡하던 1905年 當時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大統領이 日帝와 태프트-가쓰라 密約을 맺으며 韓國을 背信하고 日帝의 韓國 竝呑을 도왔다. 高宗이 한·미수호통상조약의 ‘居中調停’ 條項을 내세워 李承晩과 호머 헐버트 等을 美國에 特使로 派遣해 도움을 要請하던 瞬間 美國은 우리의 손을 뿌리쳤던 것이다.

이 같은 事實은 오늘날 美國이 6·25戰爭 以來 韓國의 가장 든든한 同盟國이고 앞으로 南北統一 以後에도 繼續 한·미 同盟을 維持해야 한다는 當爲性과는 別個의 事案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中國이 힘을 繼續 키워가며 傲慢한 行爲를 더해가는 오늘의 狀況에서 韓國의 自由와 獨立을 維持하는 데 美國과의 軍事同盟은 必須的이다. 韓國과 멀리 떨어져 있는 美國은 日本이나 中國처럼 韓國의 領土에 對한 野慾이 거의 없기 때문에 同盟國으로서 가장 적합한 條件의 强大國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美國이 大韓帝國 時期에 韓國에 犯한 誤謬와 잘못까지 모두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金九의 信託統治 反對鬪爭은 1945年 光復 以後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선 1943年 重慶臨時政府에서 ‘第1次 反託鬪爭’을 展開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40年 信託統治’ 意圖를 看破한 金九와 臨時政府의 反託鬪爭으로 루스벨트의 意圖는 一旦 挫折되었지만 카이로宣言 속에 ‘適切한 時點(in due course)’이라는 曖昧模糊한 表現으로 그 痕跡을 남겼다. 韓國의 從前 卽時 獨立을 留保한 이 表現은 두고두고 問題가 되었는데 루스벨트와 처칠의 合作이었다. (황태연, 『甲辰倭亂과 國民戰爭』 585~617쪽)

루스벨트와 蔣介石의 晩餐會談에 同席한 홉킨스 特別補佐官이 作成한 기안에서 이 問題의 文句는 當初 “日本의 沒落 後 가장 빠른 可能한 時點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로 되어 있었다. 이를 루스벨트가 修正해 만든 表現이 “日本의 沒落 後 適當한 時點에(at the proper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였다. 루스벨트의 修正을 거치며 “가장 빠른(the earliest)”이란 表現이 빠진 것이다. 이것으로써 루스벨트가 終戰 後 卽刻 獨立을 願하는 韓國·中國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結局 文學的 才能이 있는 처칠이 루스벨트의 속셈을 읽고 “in due course”로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 最終案이 되었다. 印度를 植民地로 두고 있던 英國의 처칠은 自身들의 植民地에도 影響을 미칠 것을 憂慮하며 韓國獨立 條項 自體를 넣지 말자는 立場이었다. (정병준, ‘카이로會談의 韓國問題 論議와 카이로宣言 韓國條項의 作成過程’ 331~336쪽)

카이로宣言에서 一時 隱蔽됐던 ‘40年 信託統治’ 陰謀는 1945年 光復 直後 ‘5年 信託統治’로 縮小돼 다시 登場했다. 모스크바 三相會議에서 美國 國務長官이 英國과 蘇聯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固執한 이 ‘5年 信託統治’ 方案은 蘇聯의 仲裁로 ‘3年’으로 修正되어 決定됐다. 그러나 이 ‘3年 信託統治’ 決定도 金九의 ‘第2次 反託鬪爭’에 依해 粉碎되었다. 金九는 1945年 12月 大韓民國臨時政府 內閣會議를 다시 召集해 임정의 指揮 아래 李承晩과 聯合해 汎國民的 反託鬪爭을 展開했다. 이를 통해 美國의 意圖는 勿論 蘇聯의 使嗾를 받는 左翼 贊託勢力까지 모두 물리치고 勝利할 수 있었다.

2000年代 들어 李承晩·루스벨트·홉킨스 3人이 카이로宣言의 受勳者라는 主張이 나왔는데, 이것은 事實(史實)과 配置된다. 大韓民國 初代 大統領이 되는 李承晩 自身이 直接 名文(明文)으로 카이로宣言에 韓國條項을 넣은 功勞를 尹奉吉·金九·蔣介石 3人에게 돌렸던 事實은 意外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李承晩은 이봉창·尹奉吉 等 韓人애국단員들의 義擧를 記錄한 『度矮實技(屠倭實記)』의 國譯판(1946. 6. 2.) ‘序文’에서 이렇게 밝혀 놓았다. “尹 義士의 壯擧(壯擧)가 있은 後로 中國 官民(官民)의 韓人을 對하는 態度는 友好와 信賴로 一變해 한·中 兩國은 自古로 脣齒(脣齒)의 關係에 있음을 다시금 確認하게 되었으니, 國民政府는 勿論이요 蔣介石 主席부터가 金九 先生을 絶對로 信賴해 陰으로 陽으로 大韓臨時政府를 聲援해준 것은 모두 이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中에도 韓國 解放의 端緖가 된 카이로會談에서 蔣介石 主席이 率先해서 韓國의 自主獨立을 主唱해 聯合國의 同意를 얻었다는 事實은 亦是 그 原因이 尹 義士의 壯擧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李承晩은 또 1947年 4月 13日 中國 南京을 訪問해 蔣介石과 만난 자리에서 “張 主席이 카이로會議 時 韓國의 獨立 主張을 積極 擁護하여준 데 對하여 再三 感謝의 例를 표한다”고 稱頌한 바 있다. (정병준, ‘카이로會談의 韓國問題 論議와 카이로宣言 韓國條項의 作成過程’ 319쪽)

카이로宣言 속 韓國獨立 條項 揷入, 그리고 1·2次 反託鬪爭의 勝利를 통한 韓國의 光復은 結局 大韓民國臨時政府가 있었기에 可能한 일이었다. 그리고 1919年 臨時政府의 樹立은 3·1萬歲運動이라는 全 國民的 公憤의 熱氣가 있었기에 可能했다. 國民的 公憤이란 日帝의 ‘高宗 毒殺’에 對한 憤怒였다.(이태진, 『끝나지 않은 歷史』 220~221쪽)

當時 日帝는 우드로 윌슨 美國 大統領이 公表한 民族自決主義 宣言의 國際的 波長이 韓國에까지 波及될 것을 憂慮하고 있었다. 高宗은 파리講和會議에 密使를 派遣해 乙巳勒約의 强制性을 暴露하며 國際的 獨立鬪爭을 벌이는 同時에 이와 別途로 自身의 北京 亡命 計劃을 推進하고 있었다. 滿洲에서 新興武官學校를 設立해 ‘民族 將校’를 育成하던 獨立運動家 李會榮이 高宗의 亡命 日程을 調律했다. 陸路가 아닌 배便을 選擇하고, 北京에 行宮을 마련하는 等 具體的 準備를 順調롭게 進行하다가 高宗의 갑작스러운 昇遐로 中斷되고 말았다.



諮問 專門家   한영우 서울대 名譽敎授, 이태진 서울대 名譽敎授, 황태연 동국대 敎授, 서영희 韓國産業技術大 敎授.



參考資料  『甲辰倭亂과 國民戰爭』(황태연·청계·2017), ‘카이로會談의 韓國問題 論議와 카이로宣言 韓國條項의 作成過程’(정병준·『역사비평』·2014年 5月), 『日本의 韓國倂合 强制硏究』(이태진·지식산업사·2016), 『끝나지 않은 歷史』(이태진·太學士·2017), 『未來를 여는 우리 近現代史』(한영우·경세원·2016), ‘國號 大韓民國의 命名’(이완범·『황해문화』·2008年 가을)


배영대 文化先任記者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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