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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敞東學農民革命 > 高敞東學農民革命 > 高敞地域일지 : 高敞東學農民革命

고창군 태극기. 국가상징 자세히보기

고창군高敞東學農民革命

1855. 12. 3日 (陽 1856.1.10)

東學農民革命을 이끈 全琫準將軍이 高敞郡 고창읍 죽림리 63番地 (고창현 산내면 粥 림리 黨村)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幼年時節을 보냈다. 1868年 全州로 이거 後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 黃새마을,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 窮冬면 장내리 嘲笑마을 等에 살았다. 1894年 고부民亂과 武裝氣泡를 中心으로 東學農民革命을 先導한 全琫準은 우리故障이 낳은 偉大한 民主主義 밑거름이 된 人物이다.

1892. 8月

손화중포는 禪雲寺 洞불암의 磨崖石佛에 들어있던 祕訣 冊을 奪取하였다. 當時 『祕訣이 世上에 나오는 날은 그 나라가 亡할 것이오. 亡한 後에 다시 興한다.』는 所聞이 있었다. 東學農民革命은 여러 人物들과 事件, 그리고 一連의 說話까지 여러 形態로 結合되어 일어났다. 그中에 한 가지 東學農民革命 初期에 일어났던 禪雲寺 도솔암의 彌勒祕訣 說話이다.

只今 高敞郡(當時 武裝縣) 아산면 禪雲寺 東南쪽 3킬로미터 地點에 도솔암이란 庵子가 있고, 그 庵子 뒤에 50餘 尺 높이의 層巖絶壁이 솟아 있는데, 그 絶壁에 彌勒이 하나 새겨져 있다. 이 彌勒像은 3千 年 前에 살았던 檢斷禪師 眞相이란 것으로 그 彌勒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祕訣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그 祕訣이 世上에 나오는 날에는 漢陽이 亡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祕訣과 함께 벼락살을 同封해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祕訣을 꺼내려고 손을 대면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그 벼락살이 같이 봉해져 있다는 것이 事實이라는 것은, 只今(當時)부터 130年 前에 全羅監司로 내려왔던 이서구가 그것을 꺼냈을 때 벼락이 쳤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全羅監司로 到任한 이서구는 어느날 宣化堂에 앉아 조용히 天地의 忘棄(나타나 있는 기운을 보고 무슨 兆朕을 알아냄)을 보고 있자니, 西南쪽에서 매우 상서로운 기운이 한줄기 뻗쳐올라가고 있는지라, 例事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말을 몰라 그쪽으로 달려가 보니, 그것이 禪雲寺 彌勒의 배꼽에서 뻗어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에 무엇이 들었기에 이러는가, 그 배꼽을 쪼아보니, 그 속에서 冊이 한卷 나왔는데, 그 瞬間 雷聲霹靂이 하늘을 찢는 바람에 魂飛魄散, 그 冊을 도로 거기 넣어놓고 石灰로 봉해버렸다는 것이다. 그 때 이서구가 본 것은 '全羅監司 이서구 開坼'이란 글字뿐이었다. 그 事件이 있은 뒤로 世上 사람들은 그 祕訣을 꺼내보고 싶어도 벼락을 무서워 꺼내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祕訣奪取 事件

壬辰年 8月 사이의 일이다. 어느날 손화중의 집에서는 禪雲寺 石佛 祕訣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祕訣을 내어보았으면 좋기는 하겠으나, 霹靂이 또 일어나면 걱정이라 하였다. 그 座中에 오하영이라고 하는 道人이 말하되, 그 祕訣을 꼭 보아야 할 것 같으면, 霹靂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重大한 것을 봉해서 둘 때에는 벽락살이란 것을 넣어 擇日하여 봉하면 後代人이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내 생각에는 只今 열어보아도 아무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서구가 열어볼 때에 이미 霹靂이 일어나 없어졌는지라 어떠한 벼락이 또다시 일어날 것인가. 또는 때가 되면 열어보게 되나니 여러분은 그것은 念慮 말고 다만 열어볼 準備만을 하는 것이 좋다. 여는 責任은 내가 맡아 하겠다고 하였다. 座中에서는 그 말이 가장 理致에 合當하다 하여, 靑竹 數百 개와 새끼 數十 타래를 求하여 父系를 만들어 그 石佛의 前面에 引致하고, 石佛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것을 꺼내기 前에 그 절 스님들의 妨害를 막기 위하여 미리부터 數十 名의 스님들을 結縛하여 두었는데, 그 일이 끝나자 스님들이 武裝官廳에 告發하였다. 前날 밤에 東學軍들이 스님들을 結縛하고 石佛을 깨뜨려 그 속에 있는 것을 盜賊질하여 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數百 名이 잡히었는데, 그中 怪獸로 강경중, 오지영, 고영숙 세 사람이 指目되었다.

武裝縣監은 여러 날을 두고 取調하게 되었는데, 첫 問題가 祕訣 冊을 바치라는 것이요, 손화중과 기타 主謀者 頭領들이 있는 곳을 대라는 것이었다. 갖은 惡刑을 다하면서 묻는다. 笞杖질이며, 棍杖질이며, 刑場 質이며, 周牢질이며, 볼기가 다 헤지고 앞정강이가 부러졌다. 그러나 所謂 祕訣이라는 것은 손화중이 가지고 가고 말았으며, 여러 頭領들도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여, 十 數 日 동안 刑罰을 받다가 棺이 取調한 것을 全羅監司에게 報告하여, 강경중, 오지영, 고영숙 3人은 모두 强盜 兼 逆賊罪로 몰려 死刑에 言渡되었고, 남은 百 餘 名은 嚴한 棍杖을 맞은 後 풀려나왔다.

그날 저녁 獄卒이 들어오면서 罪囚 3人의 結縛한 것을 모두 벗기더니, 모두 衣冠을 갖추어 나가자고 한다. 그 前에 萬一 들은 말이 없었다면 死刑이나 執行하자는 일이 아닌가 하고 걱정될 것이나, 大略 幾微를 알고 있었던 터라 그다지 놀랄 것은 없었다. 獄門 밖으로 썩 나서다 보니 數千 名의 사람들이 或은 燈불을 들고 或은 횃불을 들고 關門大路에 左右로 갈라서서 앞길을 引導한다.

五里亭 밖에 나와 한 道人의 집에 자리를 定하고 앉게 되었는데, 우리 兄님 두 분과 各 頭領이며, 村에 있는 道人들이며, 邑에 있는 道人들이 次例次例 나와 그 동안 苦生한 일을 다 말한 後에, 일이 이렇게 된 理由를 물은즉, 兄님은 말씀하되, 들은즉 武裝縣監 조경호가 무엇보다도 祕訣을 찾는다 하기로, 스님들과 議論하여 佛經冊 한 卷을 붉은 褓자기에 싸가지고, 數千 名이 떠들고 들어오며 銳利하게 通知하여, 武裝縣監에게 紗帽官服을 입고 잘 맞아들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 고을 五里亭에 當到하니, 武裝邑에서는 長利 되는 몇 사람이 棺에 아뢰 氣를 東學軍 數千 名이 고을을 陷落하고 官吏들을 죽인다고 말을 하였다 한다.
그 뒤로 손화중이 王이 될 것이라니 世上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所聞이 줄을 이어 接主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 東學의 現場을 文化財로 指定하자 中에서 (寺) 우리땅 걷기 理事長 신정일

1894. 3. 20 (陽 4.25)

고부民亂을 農民戰爭으로 발전시키려는 計劃이 失敗하자 全琫準은 部下 50餘 名만 거느리고 武裝으로 내려와 손화중을 說得하여 農民軍을 모아 全面的인 蜂起를 斷行 하였다.

武裝에서 東學農民軍이 『武裝窓醫布告文』을 發砲하였다.

  • 오하기문 叢書 1, 54쪽
  • 신용하 『甲午農民戰爭의 第1次 農民戰爭』, 『한국학보』29, 1985, 117-118쪽
    이때 모인 東學農民軍의 數는 約 4千餘 名이었다.
  • 東學關聯 判決 宣告書 叢書 18, 431쪽

東學農民軍은 氣泡와 同時에 氣泡의 目標와 行動指針을 包括的으로 提示하는

  • 1. 不殺生(不殺生) 불살물(不殺物)
  • 2. 忠孝銃展(忠孝叢全) 濟世安民(濟世安民)
  • 3. 軸滅量왜(逐滅洋倭) 澄淸聖徒(澄淸聖道)
  • 4. 救病入境(驅兵入京) 滅盡卷貪(滅盡權貪)
    事大名義를 發表하였다.

對한 界年史 叢書 4, 363쪽 示唆新譜 叢書 22, 292-293쪽, 295쪽 * 大韓季年史에는 4代 名義가 3月 25日에 내걸린 것으로 나와 있으나, 場所에 對해 서는 言及이 없다. 또 內容의 前後關係를 살펴볼 때 이용태의 蠻行으로 全琫準이 5,6 萬 名의 東學農民軍을 불러 모아 蜂起하였고 이때 4代 名義를 내걸었다고 하여 東學農民軍이 처음에 일어날 때, 卽 武裝 基布施에 '4大 名의'를 내건 것으로 말하고 있다. 「示唆新譜」에도 東學農民軍이 擧兵 當時에 내건 것으로 되어 있다. (배항섭, 「第1次 東學農民戰爭時機 東學農民軍의 進擊路와 活動 樣相」『東學硏究』11, 2002).

武裝의 府民들에게서 軍糧을 徵收한 뒤 '輔國安民創意'라고 쓴 旗발을 앞세우고 고부로 向하였다. 東學農民軍의 進擊路를 要約하면 武裝(3.20) - 高敞. 興德(3.21-22日) - 古阜(3.23) - 態인(3.26) - 금구.원평(4.1) - 扶安(4.4) - 古阜(4.6) - 井邑. 興德. 高敞(4.7) - 興德, 武裝(4.8) - 榮光.咸平.장성(4.11-21日) - 금구.원평(4.25) - 全州 (4.27)의 順으로 擴大되었다.

1894. 3. 27 (陽曆 5.2)

全琫準이 武裝에 都所를 設置하고 東學農民革命의 蜂起를 밝혀주는 官軍의 報告書 收錄에 依하면 3月 27日 接受된 武裝縣監 조명호의 報告 內容은 다음과 같다.

『이달 3月 16日에는 農民軍 數千 名이 武裝 同音치면 堂山(공음면 구수)에 集結 하기 始作하였다. 처음에는 100餘名에 不過하였으나, 3月 16日부터 3月 18日에 걸쳐 四方에서 몰려와 1,000餘名으로 增加하였다. 이들 가운데 數百 名이 法聖浦 진량면 黃玹리 대나무 밭에서 竹槍을 만들고 한便으로는 民家에서 鳥銃과 괭이, 호미. 낫. 가래 따위를 奪取해갔다. 이어 이들은 그 동안 東學에 反對하고 彈壓 하였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毆打하였다. 이웃마을 石橋村에 사는 米穀商 안덕필의 집을 襲擊하여 다른 사람이 맡겨놓은 白眉 60席을 빼앗고 그 집을 破壞하였다. 또한 같은 마을 송경수의 집 亦是 破壞하였다. 이 事件으로 隣接한 各 面이 시끄러워지고 百姓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들의 所行이 참으로 駭怪하나 良民과 어울려 있으므로 强力한 手段으로 禁止할 수 없기 때문에 한便으로 吏屬과 고을의 德望家를 보내어 理致를 다져 가며 타이르고 한便으로는 公文을 보내 解散을 勸告하였으나 그 무리들 當場의 氣勢가 張差 數千 名에 이르니 官의 힘으로는 到底히 물리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말로는 日間 다른 地域으로 옮기겠다하고, 또 그 道黨이 보내온 書面에도 亦是 不日間 이 고을을 떠나겠다하오나 매우 殊常한 무리들인지라 그 참뜻을 알 길이 없는고로 다시 利속으로 하여금 隱密히 廉探한 卽 隊伍를 짜기도 하고 다시 흩어지기도 하며 차차 裝備를 整理하는 氣色도 보이나 어느 곳을 向할지는 探知하기 어렵다. 알아낸 바가 이와 같으므로 于先 確認된 情報를 위와 같이 報告한다.』

1894. 3. 21 (陽 4.26)

武裝에서 起包한 東學農民軍이 20日과 21日에 걸쳐 高唱으로 移動, 21日은 高敞에서 宿營하였다.
東學農民軍은 3月 20日 武裝에서 布告文을 發砲한 다음 적어도 그 가운데 一部는 곧바로 高唱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當時 茁浦에 있던 日本人 派系生이 쓴 「고부 民謠日記」에 따르면 흥덕의 장사꾼들의 말에 依據하여 3月 20日 數萬 名의 東學 農民軍이 武裝의 굴치를 넘어 덕흥리를 지나갔으며, 다음 날은 高敞에 모였다가 漸次 西進하여 一部는 井邑으로 一部는 고부로 들어가고 一部는 沙布를 지나 茁浦로 왔다 고 하였다. 後述하는 바와 같이 東學農民軍이 흥덕에 들어 간 것은 3月 22日이었고, 高敞 쪽에서 移動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3月 20日 武裝에서 起包한 東學農民軍은 20日과 21日에 걸쳐 高唱으로 移動한 다음 高敞에서 하루를 宿營하고 22日 興德으로 移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高敞에 들어올 때 東學農民軍들은 '狗吠矯正節目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解散하였으나, 잡으려고만 하니 무슨 마음에서인가? 將次 全州로 가서 監營과 按覈使에게 그 理由를 묻고자 한다.'고 主張하였다. 高敞에 머물던 東學農民軍 가운데 一部는 3月 21日부터 井邑,古阜 方向으로, 一部는 沙布를 지나 茁浦 方向으로 갔다.

1894. 3. 22 (陽. 4.27)

高敞에서 宿營한 東學農民軍이 興德으로 向하여 이날 正午 무렵 東學農民軍은 말을 타거나 걸어서 旗발을 들고 喇叭을 불며, 북을 두드리고 銃을 쏘아대며 興德 事後砲로 들어갔다.

1894. 3. 23 (陽. 4. 28)

흥덕에서 하루를 머문 東學農民軍은 이날 扶安 茁浦로 向하였고, 午前 10時頃 머리에 黃色 頭巾을 쓴 十餘 名의 東學農民軍이 미리 茁浦에 들어와 點心 3千 5백상을 準備 하도록 要求하였으며, 點心때쯤 茁浦 事情으로 東學農民軍 數千餘 名이 들어왔다. 이들은 午後 6時쯤 고부로 向하였다. 東學農民軍은 靑紅백황色의 旗발을 上下로 흔들고 左右로 받치거나 或은 急하게 或은 느리게 흔들며 部隊를 指揮하였다. 東學農民軍의 武器로는 竹槍, 활, 화살, 窓이 있었고 은 救濟의 火繩銃이었다. 東學農民軍을 이끄는 圖章은 아직 精卒에도 이르지 못하는 장부라는 所聞이 돌았고, 東學農民軍은 고부로 出發하기에 앞서 廢井의 改革을 要求하는 檄文을 四方에 附着하였으며, 그 要諦는 '이 太祖의 革新政治로 돌아가면 그친다.' 는 것이었다. 東學農民軍의 旗발에는 '仁義禮智信'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或은 順天, 光州 等의 地域名이 쓰여 있었다. - 저녁 8時頃에는 起兵 20餘 名을 包含하여 銃槍 等으로 武裝한 3千餘 名의 東學農民軍이 고부에 들어왔다. 이들은 鄕校와 官衙 建物에 分散하여 駐屯해 있으면서 저녁은 邑內의 民家에 나누어 解決하였다.

1894. 3. 26 - 3. 29 (陽. 5.1 - 5. 3)

白山의 東學農民軍은 3月 26日 저녁에서 3月 29日 午後 2時 사이에 이른바 '白山大會'를 통해 陣容을 새로 갖추었다. 白山大會를 통해 大將에 全琫準, 總管領에 손화중,김개남, 總參謀에 김덕명,오시영, 領率長에 최경선, 祕書에 송희옥, 정백현을 選定하였다. 白山大會 當時 大將旗에는 輔國安民이라고 크게 써넣었고, 두 番째로 檄文을 써서 四方에 傳하였다. 白山에 설진해 있던 東學農民軍은 태인縣으로 書札 한通을 보내 砲手와 창수 各1百名을 거느리고 북과 喇叭, 징과 哱囉를 一齊히 울리며 기다릴 것을 要求하였으며, 書札 末尾에는 “濟衆의소”라고 署名하였다. 이날 저녁 6-7千 名의 東學農民軍이 태인邑으로 들어가 곧장 東軒과 內衙를 攻擊下 與 軍紀를 奪取하고 官廷에 功型들을 結縛하여 둔 채 하루를 머물렀다가 다음 날 金 具를 向해 出發하였다.

1894. 4. 6 (英. 5. 10)

扶安에 있던 東學農民軍은 4月 6日 아침 8時頃부터 扶安을 빠져나오기 始作하여 고부의 道蛟山으로 向하였고, 監營에서는 兵丁과 別抄軍 褓負商을 度蛟山으로 派遣하였으며, 東學農民軍과 이들은 黃土山에서 맞닥뜨려 午後 4時頃부터 接戰이 始作되었다. 태인에 남아 있던 東學農民軍들度 4月 6日 밤 8時頃에는 古阜 度蛟山으로 移動하여 그곳의 東學農民軍과 合勢하였으며, 다음날인 4月 7日 새벽 4時頃 황토현 戰鬪에서 東學農民軍은 監營軍을 크게 擊破하였다.

1894. 4. 7 (陽. 5.11)

황토현 戰鬪에서 監營軍과 勝利한 東學農民軍은 午後 2時頃 井邑의 年支援과 某川邊에 陣을 쳤다. 東學農民軍은 이날 8時頃 邑內로 들어가 井邑官衙를 攻擊하여 獄門을 破壞하고 收監되어 있던 東學敎徒 6名을 풀어주었으며 武器庫를 破壞하여 機械와 槍劍 等의 武器를 奪取한 다음 공型과 吏屬, 都使令의 家産을 破壞하고 褓負商의 주접 妻 3집을 불태웠다. 이들은 저녁을 먹은 다음 밤 10時頃 古阜 三거리로 가서 宿營 하였다.

1894. 4. 8 (陽. 5.12)

午前 10時頃에 東學農民軍은 고부군 神占 쪽에서 興德으로 進擊하여 民家에 要求하여 點心을 제공받아 먹은 다음 ??某君을 한 것이 무엇 때문인가. 반드시 實相을 調査할 것이다.??라고 하며 軍器庫를 부수고 丸藥과 槍劍, 鳥銃 等을 奪取한 後 午後 2時頃에 高唱으로 向하였다. 午後 2時頃에는 井邑 方向으로부터 各其 20餘 名과 40餘 名으로 構成된 東學農民 軍이 次例로 興德 李東勉 律縣 大路와 일南面 구산 앞 대로를 거쳐 곧장 高唱으로 向해 갔다. 밤 8時頃 東學農民軍 數千 名이 興德 으로부터 高敞에 들어와 곧장 官衙를 攻擊하여 獄門을 부수고 逮捕되어 있던 東學農民軍 7名을 釋放하고 대정縣監을 지낸 邑內 隱修龍의 집(高敞邑城 化粧室 옆 鄕軍會館터)을 攻擊하여 家産을 破壞 하고 放火하였으며, 이어 城안으로 들어와 軍器庫를 奪取하고 號笛 等 帳籍을 거두어 調査하였고, 東軒 및 各 工事를 破壞하고 縣監이 가진 人夫를 奪取하려 하자 縣監 김사준은 逃走하였다. 東學農民軍은 이날 밤 高敞에서 宿營하였다.

※ 이때 高敞에 들어간 東學農民軍은 銀대정 집뿐만 아니라 部內에 放火하여 내쫓긴 數가 1萬 8千餘 名이나 되었다는 記錄도 있다.
고창현에서 東學農民軍 7名이 逮捕되었다.
양호초土沙 洪啓薰이 忠淸兵士 이용복에게 甘結을 보내 忠淸道는 東學 徒黨의 巢窟이라 하면서 徹底히 그 情況을 探知하여 甘結이 到着한 後 3日 안에 前主婦로 急히 報告하도록 하였다.

軍艦이 無事히 到着하였다. 東學農民軍 百餘 名을 捕虜로 잡아 陣營에 가두었다. 古阜 道敎 戰鬪에서 全州 監營軍 70餘 名이 부상당하였다. 東學農民軍이 회덕의 白沙場에 있다고 하여 忠淸道 監營으로부터 회덕에 포군을 動員하여 보냈다. 中國 軍艦의 艦長 이화가 全州에 이르러 敵情을 偵探한 뒤에 形勢를 보아 陸地에 내리기로 서로 約束 하였다. 회덕의 東學農民軍이 官衙에 突入하여 武器를 奪取하여 진잠으로 向하자 錦營 에서, 軍士를 보내 줄 것을 要請하였다. 洪啓薰이 53週에 甘結을 보내 東學農民軍을 잡아들이고 民心을 안정시킬 것을 指示 하였다.

1894. 4. 9 (陽. 5. 13)

高敞에서 하루 밤을 머문 東學農民軍은 12時쯤 高敞을 떠나 武裝으로 向하였다.
午後 4時頃 武裝으로 들어갔다. 이때 東學農民軍의 數는 1萬餘 名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은 逮捕되어 있던 東學農民軍 40餘 名을 풀어주었고, 東軒과 工事를 破壞하였으며, 軍器庫를 破壞하여 火藥 等 武器를 奪取하였다. 또한 性內外의 認可를 불태웠다. 이어 逃亡간 裏書들을 手配하는 한便, 衙前과 軍校 10餘 名을 죽였고 周邊을 둘러싸는 城을 만드는 한便 武裝 官衙에서 10里쯤 떨어진 好山峯에 설진하여 3日을 머물렀 다. 招討使 洪啓薰의 追擊에 對備하여 陣을 치고 기다렸으나 京軍들이 미리알고 進路를 바꾸어 將星으로 갔다는 消息을 듣고 4月 12日 農民軍을 둘로 나누어 先發陣은 法聖浦로 進擊하고 主力部隊는 榮光으로 들어가 全曲과 馬匹을 徵發하고 軍糧을 確保하고 4日 동안 머문 뒤 官軍의 進路를 위會하기 위해 17日에는 咸平 務安으로 南下했다가 羅州로 左會하여 平定한 後 4月 23日 入手된 諜報를 쫓아 將星 황룡천 接戰을 통해 京軍을 大破하고 그 餘勢를 몰아 井邑, 態인, 원평, 금구를 거처 4月 27日 全州에 入城하였다.
무장현에서는 3月 20日 東學農民軍이 武裝을 떠나간 以後 4月 9日 逮捕한 29名을 包含하여 40餘 名의 東學農民軍이 逮捕되어 있다가, 4月 9日 다시 武裝을 占據한 東學農民軍에 依해 釋放되었다.

1894. 4. 10 (陽. 5. 14)

武裝의 東學農民軍이 官衙에 亂入하여 異敎 가운데 逮捕되어 被殺된 自家 10餘 名에 이르고 各 村落과 道路邊에 逮捕되어 被殺된 自家 數十 名이었다. 또한 군기와 什物 火藥 等을 남김없이 奪取해갔으며, 各種 文部와 門敵들을 불태웠다.

1894. 4. 11 (陽. 5. 15)

武裝에서 9名의 東學農民軍이 逮捕되었다.

1894. 4. 11 全羅監營의 報告 (醉語)

只今 흥덕의 兼官이 報告한 것을 보니 저 무리가 다시 그저께 泣顔에 곧바로 들어가 武器를 奪取하였고 點心을 먹은 後에는 高唱으로 곧바로 向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高敞 衙前의 文書 內容을 들어 보니 “그저께 戌時(午後 7-9時)에 동도 數千 名이 흥 德에서부터 본 邑에 곧바로 들어왔고, 玉을 부수어 갇혀있던 東學무리 7名을 釋放해 내보냈으며, 곧 東部로 向하여 銀대정(高敞出身으로 濟州의 대정縣監을 지낸 銀水龍 을 말함)의 집을 부수고 財産을 빼앗아 불을 질렀으며, 武器를 奪取하고 各種 公文書를 搜索하고 圖章을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本來의 守令은 어렵게 避하여 어제 武裝으로 方向을 바꾸어 갔다고 합니다. 休暇를 얻어 赴任하지않은 道內에 있는 守令을 재촉하여 내려 보낼 일입니다.

1894. 4. 11 午後 5-7時 全羅監營의 轉補(醉語)

只今 武裝에서 初 10日 報告한 것을 보니 該當守令이 赴任할 때에 留鄕所에서 올린글에 “監營의 指示에 軍士를 募集하여 출동시켜 동도44名을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初9日 司試에 동도 1萬餘 名이 或은 甲옷과 투구를 갖추고 各各 銃과 窓을 携帶하여 洞 헌과 各官廳에 곧바로 들어가 한결같이 모두 허물고 깨뜨렸으며 붙잡혀 갇힌 東學무 里를 풀어주고 邑 안의 民家에 불을 질렀는데 本館의 守令은 아직 赴任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저들 無理가 간 方向이 어느 곳인지 불같이 빨리 報告하도록 指示文을 보냈는데, 저 무리를 붙잡아 가둔 곳을 每番 이와 같이 毒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흉 惡한 마음을 알아보니, 더욱 분하고 한탄스러움이 極에 達합니다.

1894. 4. 13 (陽. 5. 17)

13日과 14日 兩日 밤에 或은 6-70名, 或은 4-50名이 各自 銃과 槍劍을 들고 扶安, 興德, 古阜, 井邑 等地로 흩어져 가는 것이 官軍 側이 보낸 貪吏에 依해 目擊되었으나, 무슨 理由인지는 確認되지 않았다.

1894. 4. 16 (陽. 5. 20)

東學農民軍은 武裝에서 蜂起한 以後 最初로 自身들이 蜂起한 目的이 '貪官汚吏로 하여금 허물을 고쳐 스스로 革新하게 하는 利로가 國太公으로 하여금 甘菊하게 하여 위로는 종사를 保全하고 아래로는 百姓들을 便安케 하여 父子間의 天倫과 君臣 間의 大義를 穩全히 하여 亂臣賊子를 없애는 데 있음'을 밝히는 通文을 倡義所의 名義로 全州에 있던 招討使 洪啓薰의 完營有進소 앞으로 보냈다.

1894. 4. 20 (陽. 5. 24)

洪啓薰이 公事廳에, 井邑으로부터 行軍하여 오시 頃에 흥덕을 거쳐 다시 高敞에 到着 하였고 來日 榮光으로 向하여 곧바로 咸平에 들어갈 計劃을 報告하였다.

1894. 4. 21 (陽. 5. 25)

咸平 務安 一帶에서 5日 間이나 駐屯해 있던 東學農民軍은 京軍이 追擊해 온다는 消息을 듣고 咸平을 떠나 4月 21日 午前 8時頃에 將星 월평리에 到着한 東學農民軍 1萬餘 名이 아침을 먹고 三峯 아래 있는 황룡촌에 陣을 쳤다. 招討使 一生이 高敞으로부터 長城에 들어와 點心을 먹고 榮光으로 떠났다. 洪啓薰이 全州로부터 行軍하여 高敞에 이르렀고 東學農民軍이 모인 곳으로 向할 計劃 을 報告하였다.

1894. 4. 22 (陽. 5. 26)

洪啓薰이 高敞 縣監에게 傳令을 보내 이춘경이 몰래 東學農民軍과 통하여 機密을 傳하였고, 서재성, 이동술은 東學農民軍으로 우리의 機密을 보냈다. 3名을 格式을 갖추어 獄에 가두라고 指示하였다.

1894. 5. 8 (陽. 6. 11)

東學農民軍은 四方으로 흩어져 一部는 金堤, 扶安, 古阜, 武裝 等地로 向하여 가고 一部는 금구, 태인 等地로 向하여 갔으며, 지녔던 槍과 칼 等 兵器의 一部는 혹 태인縣에 返納하고 一部는 或 지나는 各 點에 맡겨 두었다. 東學農民軍은 4로 나누어 南向하였는데, 2千名 假量이 흥덕乙 經由하여 武裝脂肪으로 갔다.

1894. 5. 8 (陽. 6. 11)

招討使 洪啓薰은 드디어 東學農民軍 側의 廢井改革 要求를 國王에게 報告하기로 約束 하였다. 이에 따라 午前에 全州城의 東學農民軍은 招討使에게 “歸化하는 오늘 그嚴한 命令으로 伸冤하게 되었으니 어찌 感服하지 않겠습니까? 그 怨恨을 呼訴하자 그民願이 陛下에게까지 알려져 이 世上 永遠하도록 그 德望을 稱頌하게 된 것은 오직 閣下의 處分에 있었으므로, 卽時 門을 나서서 明白히 밝혀주시기를 기다리고 병기는 下敎에 依하여 모두 거두어 올리겠습니다.”라는 글을 보내고 全州城에서 빠져나갔다. 이때 東學農民軍 大多數는 兵器를 返納하겠다고 招討使 洪啓薰에게 約束한 것과 달리 兵器를 가지고 나왔다.

*“招討使는 곧 檄文을 城中에 投入하여 奉遵 等이 願하는 바를 들어주어 그 目的을 達成하게 하겠으니 速히 都堂들을 解散하라는 뜻을 유달 하였다. 그러나 奉遵 等은 곧 轉運所 革罷社 等 27個組를 내여 가지고 常住하기를 請하였더니 招討使가 卽時 承諾한 故로”라는 「判決文」의 內容으로도 미루어 斟酌할 수 있다.
東學農民軍은 四方으로 흩어져 一部는 金堤, 扶安, 古阜, 武裝 等地로 向하여 가고 一部는 금구, 태인 等地로 向하여 갔으며, 지녔던 槍과 칼 等 兵器의 一部는 혹 態인 縣에 返納하고 一部는 或 지나는 各 點에 맡겨 두었다. 東學農民軍은 4輅路 나누어 南向하였는데, 2千 名假量이 흥덕乙 經由하여 武裝으로 갔다. 武裝으로 間 東學農民軍들이 民家를 討索하고, 全州 구미동의 富者집도 襲擊하였다.

1894. 5. 11 (陽. 6. 14)

東學農民軍은 5百餘 名이 古阜 흥덕리에서 留宿하고 11日 卯時頃 60餘 名은 高敞 으로, 나머지는 모두 武裝으로 向하였으며, 東學農民軍은 지나가는 年老에서 食上을 扮裝하고 짚신을 討索하였다.

1894. 6. 29(陽. 7. 31)

武裝 東學農民軍 5-6百 名은 日本病이 將次 이를 것이라 하면서 성중 亂入, 武器를 奪取하였다.

1894. 12. 11(陽. 1. 6)

高唱으로 潛入한 손화중이 10餘日 後인 12月 11日 高敞 부안면 수江山 山堂에 避身해 있다가 社民 이봉우等에게 逮捕되어 고창현에 갇혀 있다가 日本軍에게 넘겨졌다.

1895. 3. 29(陽. 4. 23)

午後 3時, 全琫準 等 21名의 東學農民軍 指導者들에 對한 最終 判決이 있었다. 이때 전봉준, 成痘한, 최경선, 손화중, 金德明 等에게 『大典會通』刑典의 「軍服騎馬作變 官文字 不待時참율」에 依하여 死刑이 宣告되었다. - 全琫準은 1895年 3月 29日 死刑宣告를 받고 손화중, 金德明, 최경선과 함께 最後를 마치니 享年 41歲였다. 日本新聞 時事新報에 依해 30日 새벽 2時 敎兄으로 執行된 事實이 밝혀졌다.

* 甲午政權은 近代的 司法制度에 依해 東學農民軍 指導者들을 處罰하지 않았다. 實際 近代的 司法制度는 이미 3月 25日附로 公布되어 있었고, 이제 4月 1一部로 施行될 것이었다. 1895年 3月 25日 法律 1號로 頒布된 '裁判所構成法'과 같은 날 勅令 50 號로 頒布된 '裁判所處務規定通則'에 依하면, 民事刑事事件 모두 적어도 2審의 裁判과 訴訟이 可能해졌다. 그러나 施行日인 4月 1日을 이틀 앞둔 3月 29日에 開設된 法務衙門 捲舌 裁判所에서 東學農民軍 指導者에 對한 判決이 時急하게 宣告된 것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刑法이 制定되지도 않은 狀況에서 一方的으로 封建的인 刑法인 『大典會通』刑典의 規定을 그대로 適用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東學農民軍들은 近代的 裁判制度의 施行過程에서 最小限의 人權마저 保障받지 못했다.

全琫準이 死刑宣告를 받고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成痘한과 함께 死刑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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