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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敞東學農民革命 > 高敞東學農民革命 > 東學農民革命의 背景 > 東學農民戰爭 : 高敞東學農民革命

고창군 태극기. 국가상징 자세히보기

고창군高敞東學農民革命

從來에는 모든 東學農民戰爭 1次 鳳基地가 古阜라고 說明해 왔다.

이는 全琫準이 主導했던 '고부民亂'李 고부에서 發生했기 때문에 第1次 農民戰爭度 고부에서 일어났으리라는 先入觀에 支配되어 飼料를 精密하게 檢討하지 않았기 때문에 誘發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朝鮮總督府가 東學農民戰爭史를 整理하면서 徹頭徹尾하게 고부 사람들이 單純한 조병갑 郡守의 虐政에 견디다 못한 農民들의 民亂으로 縮小 志向시켜 他 地域 사람들이 加擔한 革命性을 故意로 掩蔽하고자 捏造, 歪曲시키는 데 親日 史學者들을 참여시킨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全琫準을 裁判할 때 當時 朝鮮朝 官邊 側이 作成한 '全琫準 判決 宣告書 元本'과 전봉준 自身의 供招를 보면 이를 明白히 알 수 있다. 그 記錄을 간추려 보면,

  • 첫째, 全琫準은 4千餘 名의 農民軍을 糾合해 武器와 食糧을 準備한 다음 第1次 農民戰爭을 武裝에서 일으켰다.
  • 둘째, 먼저 姑婦를 친 다음 繼續해서 態인→원평→금구로 進出하였다.
  • 셋째, 農民軍이 금구에 進出했을 때에 全羅 監營軍 萬餘 名이 農民軍을 鎭壓하러 온다는 情報를 듣고 一旦 고부로 물러갔다.
  • 넷째, 農民軍은 금구에서 扶安을 거쳐 고부로 後退하다가 官軍을 만나 밤 낮 하루를 激戰한 後 全羅 監營軍을 무찌르고 勝利했다.
    여태까지는 황토재 戰鬪가 農民軍이 고부에서 全州로 進出하다가 勝利한 戰鬪로 알려져 있었는데, 實際는 全州로 進出하다가 길을 바꾸어 고부로 돌아가면서 勝利한 戰鬪였다.
  • 다섯째, 1894. 4. 7 農民軍은 황토재 戰鬪에서 이긴 後 井邑→興德→高敞→武裝→靈光→咸平의 經路로 進出하여 將星에서 京軍(7百名)을 擊破하고 晝夜로 强行軍하여 4月 26日과 27日에 官軍보다 앞서 全州에 無血入城 하였다.

여기에서 첫째 - 셋째까지의 事實은 從來 全혀 모르거나 잘못알고 있던 事實이었음을 밝혀둔다. 또한 從來의 學界에서는 武裝에서 布告한 彰義門度 古阜氣泡 後 全州로 가는 途中 布告한 것으로 解釋하고 白山 檄文 等 보다 뒤에 布告한 것으로 判斷했었다. 이 彰義門은 陰曆 4月 9日 武裝에서 布告된 文件이 아니며, 當時 朝廷에 4月 5日에 接受된 그 以前의 武裝에서 布告한 彰義門으로, 第1次 農民戰爭의 첫 武裝氣泡 때의 創意 布告文인 것이다. 그럼 왜 第1次 農民戰爭이 고부에서 일어나지 않고 武裝에서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疑問이 생긴다. 그 理由는 두 가지 背景으로 說明할 수 있다. 그것은 武裝에 南接(南接)의 都所(都所)가 設置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接의 設置된 正確한 時期는 알 수 없으나 大略 按覈使 이용태가 姑婦에 到着하여 民亂의 主動者를 索出하기 始作한 2月 29日 - 3月3日頃이 아닌가 생각된다.

武裝에는 손화중이라는 大接主가 있었다. 손화중포는 全羅道 一帶에서 가장 規模가 크고 影響力이 莫强하였다. 또한 손화중은 1年 前의 報恩(報恩)集會 때 獨自的으로 湖南의 東學徒를 모았던 금구聚黨의 頭目이었다. 따라서 武裝에 都所를 設置하면 短期間 內에 效率的으로 大規模의 東學組織 勢力을 都所의 指揮 下에 둘 수 있었다. 또한 고부 接主 全琫準과 武裝 大接主 손화중은 單純한 동호接主가 아니고 서장옥 系列의 血盟적 同志였기에 相互 信任度가 絶對的이어서 손화중의 莫强한 組織力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武裝에 남接都所를 設置함으로써 東學의 組織과 活動을 宗敎의 範疇에 局限시키려는 北接의 制約과 干涉에서 벗어나 當時의 社會的 矛盾 解決을 위한 積極的인 鬪爭力을 發揮할 수가 있어 남接都所 設置의 重要性과 武裝에서 起包하게 된 背景과 原因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全琫準의 古阜 우거지와는 달리 武裝地域에는 所謂 逆賊謀議를 큰 不便 없이 圖謀할 수 있는 天安 全氏 문효公派의 世居地였다는 點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蛇足을 붙이자면 고부民亂의 바탕精神이 當時의 社會 改革이나 政治改革에 確固한 目的意識을 두지 않고 거의 單純하게 苛斂誅求에 견디다 못해 이판사판으로 蜂起했던 一般 農民들이 박원명 新任 郡守의 宥和策으로 解散되고, 以後 고부 按覈使 이용태의 主謀者 索出을 통한 强壓과 威力에 눌려 古阜地域 農民蜂起가 다시 일어날 힘을 잃어버렸던 事實 情況도 默過 할 수만은 없는 問題點이었다.

고부民亂의 解散 以後 按覈使 이용태가 8百名의 驛卒을 이끌고 고부에 陣을 치면서 狀況은 다시 惡化되었다. 主動者와 參加者를 索出한다는 名分下에 罪 없는 農民들을 마구 拘束하고 財物을 掠奪하였으며, 民亂에 加擔한 者와 그 家族들을 虐殺하였다. 이러한 蠻行은 고부에서 뿐만 아니라 武裝ㆍ態인ㆍ금구ㆍ정읍ㆍ김제ㆍ부안 等의 地域에서도 있었다. 이러한 이용태의 暴壓 속에서 全琫準은 고부蜂起에서 드러난 限界를 克服하고 農民戰爭으로 進展시키기 爲해 손화중과 金開男의 參與를 誘導했다. 마침내 全琫準은 손화중, 金開男, 金德明 等의 全羅道 남接界 主要 人物들과 손을 잡고 武裝에서 起兵할 수 있었다.

3月 16日 - 18日 사이에 四方에서 農民軍들이 晝夜로 武裝 同音치면(冬音峙面) 堂山(堂山: 現 공음면 구수)마을 앞 江邊에 千餘 名이나 集結하였다. 그 數는 漸次 불어나 4千君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 中 數百名은 법성 진량면(陳良面) 용현리(龍峴里) 대나무 밭에서 竹槍을 만들고 民家에서 銃砲 等을 마련해 갔다. 3月 20日까지 一團의 蜂起의 萬般 態勢를 갖춘 農民軍은 처음으로 政府를 살대로 한 創意 布告文을 宣布하여 農民軍이 일어난 뜻을 分明히 밝혔다. 그리고 周邊의 各 고을에 通文을 보내어 除暴救民, 輔國安民의 大義를 위해 모두 일어날 것을 呼訴하였다. 이것이 本格的인 1894年 3月의 1次 蜂起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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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終修正日 :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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