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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聯 操縱士 證言 "나는 이래서 KAL 007을 擊墜할 수밖에 없었다"
蘇聯 操縱士 證言 "나는 이래서 KAL 007을 擊墜할 수밖에 없었다"
蘇聯 邀擊機 操縱士 겐나디 午時포비치 最初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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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航空 007篇 점보機가 사할린 上空에서 蘇聯 미그機의 미사일 攻擊으로 擊墜되어 269名이 死亡한 것은 1983年 9月1日 새벽이었다. 이 事件은 冷戰 時代에 일어나 많은 미스터리를 남겼다. 冷戰이 끝나는 過程에서 蘇聯이 確保하였던 블랙 박스를 公開하고 미사일을 쏜 미그기 操縱士의 證言이 나와 疑問이 相當部分 解消되었다. 加害者인 蘇聯 戰鬪機 操縱士 午時포비치 中領을 인터뷰한 월간조선 2003年 11月號 記事를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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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記者 20年 만의 最初 인터뷰-KAL 007機 擊墜 蘇聯 邀擊機 操縱士 午時포비치

KAL 007篇 점보機를 擊墜, 269名을 죽인 蘇聯 邀擊機 操縱士 午時포비치는 韓國 遺族들에게 謝過했다

鄭昺善 조선일보 記者

   
007機의 運命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꼬리날개의 로고 照明燈을 끄지 않았더라면


『엔진과 꼬리에 미사일 두 발 名中, 불길에 휩싸여 螺旋形을 그리며 墜落했다. 旅客機로 알았다면 擊墜命令에 異議 提起했을 것』

『空中에서 KAL 007基를 繼續 追跡하는 過程이었고 어느새 結局 사할린 港口都市인 네벨스크市 上空에까지 이르렀다. 이 瞬間이었다. 分明히 말하지만 사할린 海上이 아니라 네벨스크 上空이었다. 管制所로부터 두 番째로 「擊墜하라」는 命令이 下達됐다. 그 瞬間, 나는 戰鬪機 速度를 바짝 내어 飛行機 앞으로 楕圓을 그리면서 回轉한 뒤 미사일을 發射했다. 처음에는 熱誘導 미사일을 發射해 날개 쪽에 달린 엔진 쪽에 命中했고, 두 番째는 放射能 미사일을 發射해 꼬리 部分에 命中했다. 처음 미사일을 發射했을 때 爆發音에 이어 閃光, 後暴風 때문에 눈을 감았다. 約 0.5秒의 瞬間으로, 눈깜짝할 새였다. 첫 미사일 發射 直後 爆發 與否를 感知하지 못했고, 2次 미사일을 發射한 뒤 미사일이 飛行機에 命中하는 모습을 보았다. 瞬息間에 火焰에 휩싸이는 모습을 본 뒤 飛行基地가 있는 小콜 機智로 機首를 틀었다. 그러고 나서 「目標物 擊墜, 任務 完遂」라고 至上管制所에 報告했다』
269名의 生命을 앗아간 사람

月刊朝鮮이 1993年 7月號에 報道한 KAL 007期 關聯 記事를 놓고 인터뷰에 應한 午時포비치.
大韓航空(KAL) 007機(氣)가 擊墜된 지 20年. 記者는 當時 007基를 擊墜했던 蘇聯軍 操縱士 겐나디 午時포비치(59)와 인터뷰하는 데 成功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被害者인 韓國의 記者로서는 처음이었다. 20年 동안 그의 肉聲을 直接 들은 韓國 記者는 없었다.

인터뷰는 KAL 007期 被擊 20周年을 맞아 반드시 必要하다는 생각에서 推進됐다.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269名의 搭乘客과 乘務員들의 遺家族들을 위해서라도 인터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歲月이 흐른 채 그냥 歷史 속에 묻히고, 國民들의 腦裏에서 잊혀 간다는 것도 問題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程度 궁금症을 解消하는 게 當然하다는 確信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랫동안 그 方法을 두고 苦悶해 왔다.

午時포비치를 만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가 果然 지난 歲月 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記憶 속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所在를 알아낸다는 것도 如干 어려운 問題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事件이 發生한 지 20年이 지나 그를 찾아 낸다는 것은 如干 複雜한 일이 아니었다. 그를 追跡하는 것은 하나씩 端緖를 잡아 가는 方法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그와 關聯된 消息들이 들려오면 記錄하는 方法도 動員됐다. 住所나 電話番號도 어렵게 追跡해야 했다. 그러나 KAL 007期 被擊 20周年을 맞아 우연하게도 親分이 있는 知人을 통해 午時포비치의 住所와 連絡處를 얻을 수 있었다.

KAL 007期가 擊墜된 지 正確히 20周年이 되는 지난 9月1日에도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數次例 電話를 했지만, 通話는 쉽지 않았다. 겨우 家族들과 몇 次例 通話를 한 뒤 訪問 日子와 時間 等을 미리 通報한 뒤 인터뷰 約束을 잡았다. 그는 러시아 南部 黑海(黑海)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크라스노다르市 周邊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크라스노다르 시내가 아니고 그곳에서도 約 150km 떨어진 「마이코프」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電話 通話를 하며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묻자 『飛行機, 버스, 택시를 次例로 타고 오라』고 말했다. 說明하는 사람은 쉬울지 몰라도 그 地域의 모든 것에 낯선 記者에게는 當惑스러웠다. 一旦 메모를 한 뒤 地名만은 正確히 적었다.

10月3日 크라스노다르行 飛行機를 탔다. 모스크바에서 크라스노다르까지는 飛行機로 두 時間이 所要됐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뭔가 새로운 事實을 밝혀질 수 있기를 期待했다. 機內에서 準備해 간 인터뷰 資料를 다시 한 番 챙기고 質問을 準備했다. 1993年 6月15日 「國際民間航空機構(ICAO)가 發表한 KAL 007期 被擊 關聯 再調査 報告書」도 다시 읽었다. 準備한 資料들과 ICAO 報告書를 反復해서 읽었다. 궁금한 것은 正確히 質問하고 答을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에서 曖昧한 狀況이 表現된 文句는 줄을 그어 가며 整理했다.

白髮이 星星한 시골 사람

크라스노다르는 모스크바와 氣溫差가 많이 났다. 到着 當日 攝氏 20度를 오르내렸다. 攝氏 10度 程度의 모스크바 날씨를 勘案해 입은 옷들은 거추장스럽고 덥고 땀이 날 程度였다. 記者가 탄 飛行機가 到着하자마자 때마침 이곳을 訪問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大統領이 탄 飛行機가 離陸했다. 空港에는 警護員들이 곳곳에 있었다.

저녁時間에 到着했지만 거리 곳곳에는 三星과 LG 廣告板이 나붙어 親近感이 들었다. 이곳에 사는 러시아人은 全體 人口의 約 20%에 不過했다. 카프카스 山脈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체첸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라, 체첸人 等 카프카스 民族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民族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黑海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탓에 날씨가 좋아 天惠(天惠)의 穀倉(穀倉)地帶로 脚光받는 곳이다. 都心 全體가 나무로 뒤덮인 綠色 都市였다.

10月4日 午前 일찌감치 아우디 乘用車를 렌트해 마이코프로 向했다. 市內에서 郊外로 約 2時間을 自動車로 달려야 했다. 크라스노다르 市內의 좁고 긴 道路를 빠져나오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마이코프는 우리로 치면 시골 邑內쯤 되는 곳이다. 道路는 比較的 包裝이 잘돼 있어 速度를 내는 데 別 問題가 없었다. 隨時로 時速 180km를 넘게 달리기도 했다. 인터뷰를 빨리 해야겠다는 마음이 急해서였다.

마이코프라고 적혀 있는 里程標를 보면서 줄곧 내달렸다. 가는 길에 소들을 大量으로 放牧하는 곳도 보았고,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市場도 보았다. 替勞老젬으로 불리는 黑色土(黑色土)로 이뤄진 끝없는 大平原이 펼쳐졌고, 해바라기 栽培 現場도 보였다. 黑海가 가까워서인지 곳곳에 干拓地도 보였다.

마이코프에 到着한 뒤에는 「셈나차치 레트 악차브랴(17年 10月)」라 불리는 마을을 찾아가야 했다. 아마도 볼셰비키 革命이 發生했던 1917年 10月을 象徵하는 마을 같았다. 午時포비치가 살고 있는 最終 目的地였다. 마이코프에서 다시 5km 程度 車를 더 타고 들어갔다. 市內에서 마을로 가는 入口를 물어본 뒤 午時포비치가 살고 있다는 마을 「17年 10月」로 갔다. 마을은 우리로 치면 邑內에서 더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다.

道路鋪裝度 안 된 狀態였고, 그냥 울퉁불퉁한 新作路가 펼쳐진 그런 곳에 位置하고 있었다. 一字形으로 50餘 채의 시골 家屋이 늘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入口의 처음 본 집 한 채는 집짓기가 한창이었다. 마을 住民들에게 午時포비치 宅을 물었다. 36番地라고 알려 주었다. 車를 돌려 몇 집을 지나갔다. 36番地라고 적혀 있는 집 앞에 到着했더니, 午時포비치와 夫人 루드밀라가 나무椅子에 나란히 앉아 記者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트레이닝 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다. 둘 다 아무 꾸밈 없는 시골 사람과 같은 첫印象이었다. 午時포비치는 來年이 還甲의 나이다. 이미 오래 前부터 白髮이 星星한 것 같았다. 키는 170cm에 못 미처 보였지만 體重은 相當히 나가 보였다.

韓國에서 온 記者라고 紹介했더니 아주 반색을 했다. 그는 記者를 마당으로 案內했다. 午時포비치가 살고 있는 집은 1985年 사할린에서 移徙 오면서 지은 房 두 칸짜리 시골 집이었다. 只今은 그 집 바로 옆에 2層짜리 甓돌집을 새로 짓고 있었다. 只今 午時포비치에게는 이 집을 빨리 짓는 게 가장 큰 所望이다. 그는 『2年內 집을 完成하기 위해서는 木材를 事故, 電氣·가스 問題를 解決하는 게 急先務』라고 했다. 아직 基礎工事와 建物 壁만 지어졌지만 겨울이 오기 前에 할 수 있는 作業을 더 해야 한다고 말했다.

學生 時節부터 操縱 배워

夫婦는 마당으로 나무冊床을 들고 나와 인터뷰 準備를 했다. 나무로 된 冊床 위에 하얀 천을 깔았다. 記者는 午時포비치와 마주 앉았다. 夫人은 배를 내놓았다. 그리고 直接 집에서 栽培한 것이라며 限死코 勸했다. 한입 맛을 본 뒤 인터뷰를 始作하자 이런저런 反應을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質問에 對한 그의 態度를 보니 率直하고 眞實한 모습이었다. 러시아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純粹하고 착한 印象의 할아버지와 같았다.

그는 『韓國에서 온 記者를 만나니 적잖이 緊張된다』면서도 『그동안 왜 韓國 記者가 오지 않았는지 궁금하다』고 疑訝해했다. 그동안 그는 英國과 獨逸, 美國, 日本 記者 等을 만나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寫眞을 자꾸 찍자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다. 이런 모습이 나가면 좀 醜해 보인다며 諒解를 求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괜찮다며 寫眞을 繼續 찍었다. 그러나 夫人이 자꾸 옷을 갈아입으라고 成火였다. 하지만 내 主張을 받아들여 그냥 그런 純粹한 모습으로 인터뷰를 始作했다.

인터뷰는 現 生活부터 擊墜 當時 狀況까지 20年을 넘나들며 始作했다.

―어떻게 이 마을에 와서 살게 됐는가.

『사할린에서 KAL機를 擊墜한 뒤 5日째 轉出 命令을 받았다. 當時 上官들은 어디로 가고 싶냐고 希望地를 물었다. 妻家가 있는 마이코프로 가겠다고 했다. 모스크바나 大都市가 아닌 이곳으로 가겠다고 하자 上官들이 모두 荒唐해했다. 춥고 눈이 많이 오는 等 別로 環境이 좋지 않은 사할린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따뜻한 南쪽이 그리웠다』

―이곳과는 어떤 因緣이 있는가.

『나는 시베리아 出身이다. 태어난 곳은 시베리아 케메로보라는 곳이다. 西部 시베리아 中心地인 노보시비르스크에서 約 260km떨어진 곳이다. 18年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學校 다니면서 航空클럽에 加入해 飛行機에 對해 關心을 갖기 始作했고, 나중에는 操縱을 하기도 했다. 6個月 동안 理論敎育과 實際 飛行敎育을 받았다. 學校를 卒業하기 前 指導 先生님이 「操縱士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後 이곳에 있는 軍事學校에 入學하게 됐다. 클럽 會員 16名 中 5名이 合格했고, 그 5名에 내가 들었다. 이곳 學校에 다니면서 아내를 만났다』

―夫人과 結婚하게 된 過程을 말해 달라.

『이곳 軍事學校에서 4年6個月 동안 工夫하면서 이 都市와 情이 많이 들었다. 學校에서는 軍隊 內務班과 같은 곳에서 生活했다. 힘들고 어려운 過程이었다. 軍事學校는 學年當 150名씩이었다. 어느 날 學校에서 外泊을 나와, 담배를 사러 가게에 들렀다. 當時 商店 店員이었던 只今의 아내를 본 뒤 첫눈에 반했다. 그 뒤 댄스 파티 等에 아내를 招請하면서 자주 만나게 됐고, 結婚하게 됐다』

―첫 赴任地는 어디였나.

『1967年 軍事學校 卒業 後 中尉 階級章을 달고 간 첫 赴任地는 極東(極東)의 「소콜로브코」였다. 「우수리스크」 하면 잘 알 것이다. 韓國人(高麗人)들이 많이 居住하는 곳이다. 中國과 國境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무엇보다 故鄕과 가까운 基地에서 勤務하고 싶었던 欲望에서 그곳을 選擇했다. 機會가 되면 父母님을 뵐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사할린에서는 몇 年 동안 勤務했는가.

『7年 勤務했다. 勤務地를 다섯 番 바꿨지만 가장 오랫동안 있던 곳이기도 하다. 사할린 하늘을 날면 두 눈을 감고도 어디가 어딘지 눈에 선할 程度였다. 程度 많이 들었다. 어디보다도 緊張感이 넘치는 勤務地이기도 했다』


『그 일 뒤로 精神이 나간 것 같기도』

―언제 轉役했는가.

『1986年 轉役했다. 只今은 年金으로 生活을 꾸려 나가고 있다. 空軍 戰鬪操縱士들의 停年 退任은 蘇聯時代부터 45歲였다. 그 나이가 되면서 自然스럽게 退役한다. KAL機 擊墜事件 發生 後 强壓的으로 退役한 것은 아니다』

―KAL機 擊墜 事件 發生 直後 KGB (國家安保會議)에서 입操心하라고 糖負荷眞 않았는가.

『처음에는 나 스스로 영문을 몰라 操心했다. 軍에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時間이 흐르면서 차츰 자유스러워졌다. KGB에서도 特別한 監視나 敎育을 하지는 않았다. 只今은 내 마음대로 살고, 하고 싶은 말도 다 할 수 있는 立場이다』

―子女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아들 알렉(27)은 職業軍人으로 在職 中이다. 空軍 所屬이지만 操縱士는 아니고, 飛行機 整備兵으로 일하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적잖이 失望한 듯하다. 딸 올랴(35)는 結婚해서 마이코프에서 살고 있다. 다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週末에는 늘 찾아온다. 家族들과 함께 時間을 보내는 재미로 산다. 딸이 낳은 孫子들도 있다. 孫子 녀석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本人 性格은 어떤 便인가.

『내 性格을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내가 代身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夫人 루드밀라氏가 거들었다.

『男便은 性格이 沈着하고 차분하다. 親庭어머니가 참 좋아했다. 時間이 나면 家事를 돕는 等 무척 家庭的이다. 只今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仔詳한 아빠였다. 20年 前 事件 發生일도 아이들과 學校에 가기로 했었다. 아들 初等學校 入學式 날이었기 때문이다. 1991年 媤아버지와 1996年 媤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이다. 親庭 어머니가 돌아가신 1993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83年 KAL機 擊墜 事件 以後 많은 變化를 겪었다. 憂鬱해하기도 하고,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等 心理的 變化를 많이 겪었다. 한동안 精神이 나간 사람 같기도 했고, 많이 아픈 사람같이 보이기도 했다』

―只今도 술·담배를 많이 하는가.

『只今은 하지 않는다. 1996年부터 다 끊었다. 한番 기침을 甚하게 하면서 機關紙 問題로 苦生을 했다. 그 後 술과 담배를 끊었다. 한참 때는 보드카는 2甁, 담배는 1匣 班에서 2匣을 피웠다』

―요즘 하루 日課는.

『軍隊에서 지냈던 것처럼 規則的인 生活을 하고 있다. 아침 6時쯤에 일어나 20分 程度 體操를 하고, 每日 鬚髥을 깎고, 그러고 나서는 집안일을 始作한다. 요즘은 집 짓는 데 大部分 時間을 보내고 있다』

―집 짓는 데 드는 費用도 만만찮을 것 같은데.

『年金을 받아 쓰고 있지만 많이 모자란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푸틴 大統領을 두고 하는 말. 러시아에서는 普通 이름과 父稱을 쓴다)가 別로 돈을 주지 않는다』

그는 每달 自身이 6000루블(藥 200달러)의 年金을 받고, 夫人 루드밀라는 1500루블의 年金을 받아 生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돈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고 집을 짓는 데 使用할 수는 없는 狀況이라고 했다. 같은 操縱士지만 退役 後 大宇나 年金 支給 等에서 러시아 操縱士들은 美國과 比較가 안 된다며 혀를 찼다.

그는 『美軍 操縱士 出身은 轉役 後 年間 20萬 달러가 넘는 年金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곳에 태어난 게 罪』라고 말했다.

午時포비치는 1985年에 現在 살고 있는 집을 샀다. 居室과 房이 하나 딸린 家屋이었다. 그리고 1988年 집을 增築했고, 이番에는 다시 房 4個와 駐車場 等이 딸린 집을 짓고 있었다. 最近에는 집 짓는 데 쓰라고 시베리아 故鄕에서 살고 있는 누이同生이 돈을 보내왔다고 했다. 얼마나 보내왔는가고 물었더니 1萬 루블(藥 40萬원)이라고 말했다. 형편없는 돈이지만 그래도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누이同生의 精誠이 고맙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始作한 뒤 얼마 있다가 午時포비치는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그 사이 집 周邊을 둘러보았다. 닭들이 한가롭게 마당에서 노닐고 있었다. 夫婦는 그리 크지 않은 고양이와 개들도 키우고 있었다. 典型的인 우리네 시골집과 같았다. 집안에는 큰 沙果나무가 있었는데 沙果가 떨어져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집 안쪽으로는 텃밭이 있었고 얼마 前 감자를 收穫했는지 마른 잎새들이 보였다.

午時포비치가 옷을 갈아입는 房으로 들어가 寫眞을 찍었더니 뭘 이런 것까지 찍느냐고 寫眞 찍는 것을 拒否했다. 그가 잠자는 안房 한쪽 壁面에는 아직도 戰鬪機 操縱士에 對한 未練이 많이 남아서인지 큼지막한 수호이 戰鬪機 寫眞이 걸려 있었다. 안房과 居室에는 大宇와 골드스타(LG의 前身) 마크가 찍힌 TV가 各各 놓여 있었다.

KAL機에 300m까지 接近

옷을 갈아입고 나온 午時포비치와 KAL 007機 擊墜事件에 對해 本格的으로 對話를 始作했다. 그는 『그날 事件(KAL機 擊墜事件)李 人生을 바꿔 버렸다』고 말했다. 『그 事件은 내 마음을 오랫동안 짓눌렀고 平生 괴로움 속에 살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軍人으로서 正當한 일을 했으며 名譽로운 任務를 遂行한 軍人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事件은 一波萬波(一波萬波)가 됐다. 世上에 亂離가 났었지』라고 當時를 回顧했다.

그는 그날 KAL 007이 被擊된 當時를 마치 어제 일처럼 時間과 情況들을 모두 또렷이 記憶하고 있었다. 더구나 『9月25日이 自身의 生日로, 生日을 앞둔 時期여서 더욱 생생하게 記憶하고 있다』고 말했다.

『事件 發生일에 戰鬪操縱士服과 軍靴를 신고 勤務 待機 中이었다. 國境을 侵犯한 飛行物體가 捕捉됐다는 消息을 듣고 出擊했다. 現地 時間 새벽 5時쯤(韓國時刻 子正)이었다. 緊急 出動 命令이 下達됐다. 通常 緊急 發振을 요할 때 發令되는 命令이었다. 나는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當時인 1983年에는 美國 偵察機가 러시아 領空 周邊은 勿論 領空을 隨時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던 時期였기 때문에 當然히 美國 偵察機 牽制 次元이 아닐까 斟酌했다. 當時에는 낮 勤務組와 밤 勤務組가 交代로 任務를 遂行했는데 그날 나는 밤 勤務를 志願했었다. 밤 勤務는 比較的 閑暇하고 非常 出擊하는 回數가 낮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普通 操縱士 2名이 한組를 이뤄 勤務했는데 타라소프라는 同僚와 한조였다』

―當日 언제 처음으로 KAL 007基를 目擊했는가.

『8500m 上空에서였다. 出擊 命令을 듣고 空中으로 치솟았는데 蘇聯 領空을 侵犯한 飛行機가 있다며 無線 連絡이 왔다. 瞬間的으로 그 高度로 發進했다. 戰鬪機 前方 30km 地點에 飛行物體가 있다는 것을 肉眼으로 確認하고 接近했다. 飛行機는 點滅燈을 깜빡거렸다. 이날 周圍는 어두웠고, 灰色 안개가 끼어 있었지만 飛行機를 보니 窓門이 아래 위로 2中으로 된 것임을 確認했다. 보잉 747 旅客機의 1層과 2層으로 된 窓門이었던 것 같았지만 窓門 사이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物體가 識別되지 않았다』

―至上管制所에서 「點滅燈을 깜빡거리고 있는가」고 물어 왔는가.

『물어 왔다. 나는 「깜빡거린다」고 報告했다. 이는 通常 旅客機나 貨物機에 採擇된 것으로, 戰鬪機 操縱士로서 基本的으로 確認하는 事項이다. 그러나 當時는 美國 偵察機가 數도 없이 出沒하던 때였고, 軍部의 雰圍氣도 날카로웠다. 사할린 周邊 上空은 美國이 蘇聯 防空網과 地上 레이더 基地 情報를 캐내기 위해 血眼이 돼 있는 곳으로, 말 그대로 戰爭터였다. 말이 諜報戰이지, 거의 戰爭하는 雰圍氣였다』

―飛行機를 發見하고 追擊을 始作했는가.

『飛行機에 接近을 試圖했다. 가깝게는 300m까지 近接했었다』

照明彈 發生해도 無反應… 미사일 두 발 發射… 엔진과 꼬리날개 名中



―언제 擊墜 命令을 받았나.

『飛行機가 캄차카 上空에서 사할린 半島 上空을 向해 繼續 接近해 오자 「飛行機를 擊墜하라」는 命令을 받았다. 蘇聯 領空을 侵犯했기 때문에 相對 飛行機를 擊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突然, 管制所에서 命令取消 指示가 내려졌다. 그리고는 飛行機를 地上에 着陸시키라는 命令을 받았다. 아마도 只今 생각하면 蘇聯 軍部도 飛行機가 旅客機였을 可能性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疑問이 든다』

―着陸指示를 받고 어떤 行動에 取했는가.

『KAL 007基와 같은 高度로 날아가 불빛으로 信號를 보냈다. 날개 쪽에 달린 警告燈을 깜박거리며 數次例 信號를 보냈다. 國際信號 規定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飛行機에서는 아무 應答이 없었다. 地上 管制所에서는 小型 照明彈 미사일을 發射해 보라는 命令을 받았다. 그래서 네 次例 發射했다. 連發形式의 照明彈 미사일을 네 次例 發射했다. 아마도 照明彈을 네 次例 發射했으니, 250餘 發의 散彈이 發射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反應이 없었다. 너무 異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或是 照明彈이 아닌 徹甲彈을 發射한 것은 아닌가.

『照明彈을 發射했지만, 徹甲彈을 發射했다 하더라도 불꽃이 일기 때문에 밤에 識別이 可能했을 것이다』

―再次 擊墜 命令을 받은 때는 언제였는가.

『空中에서 KAL 007基를 繼續 追跡하는 過程이었고 어느 새 結局 사할린 港口都市인 네벨스크市 上空에까지 이르렀다. 이 瞬間이었다. 分明히 말하지만 사할린 海上이 아니라 네벨스크 上空이었다. 管制所로부터 두 番째로 「擊墜하라」는 命令이 下達됐다. 그 瞬間, 나는 戰鬪機 速度를 바짝 내어 飛行機 앞으로 楕圓을 그리면서 回轉한 뒤 미사일을 發射했다.

처음에는 熱誘導 미사일을 發射, 날개 쪽에 달린 엔진 쪽에 命中했고, 두 番째는 放射能 미사일을 發射, 꼬리 部分에 命中했다. 처음 미사일을 發射했을 때 爆發音에 이어 閃光, 後暴風 때문에 눈을 감았다. 約 0.5秒의 瞬間으로, 눈깜짝할 새였다, 첫 미사일 發射 直後 爆發 與否를 感知하지 못했고, 2次 미사일을 發射한 뒤 미사일이 飛行機에 命中하는 모습을 보았다. 瞬息間에 火焰에 휩싸이는 모습을 본 뒤 飛行基地가 있는 小콜 機智로 機首를 틀었다. 그리고는 「目標物 擊墜, 任務 完遂」라고 至上管制所에 報告했다』

―飛行機를 擊墜했는데 旅客機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내가 擊墜한 飛行機는 點滅燈이 깜빡이는 것을 除外하고 識別할 수 있는 方法이 없었다. 窓門을 통한 機內의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擊墜한 飛行機가 아직도 偵察機라고 確信한다』

그는 戰鬪機를 몰고 사할린의 방공군 空港에 着陸해 보니 司令官과 同僚 飛行士들이 堵列해 祝賀해 주었고, 또 指揮官들로부터는 卓越한 飛行術과 射擊術로 敵의 飛行機를 擊墜했다며 稱讚을 받았다고 말했다. 午時포비치는 그 瞬間 自負心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날 이 事件은 稀代의 旅客機 擊墜事件으로, 世界的인 스캔들로 飛火하면서 그의 人生은 地獄으로 빠져들었다.

『蘇聯 政權은 旅客機 擊墜 理由에 對해 거짓 理由를 찾았으며, 眞實 公開를 回避했다. 蘇聯 領空을 侵犯한 旅客機가 點滅燈을 켜지 않았다고 했다. 戰鬪操縱士는 그 飛行機가 어떤 類(劉)의 飛行機인지 識別할 수 없는 狀態였고, 飛行機 側과 交信을 試圖했는데도 아무런 答信이 없었다고 發表했다. 턱도 없는 거짓말을 해댔다. 너무도 뻔한 事實을 왜 隱蔽하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正當하게 있는 事實을 밝혀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이런 것을 러시아 俗談으로 「하얀 실로 검은 천을 꿰맸다」고 한다. 眞짜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事故 當時 美國과 日本은 日本 軍 基地에서도 나와 地上 管制所 間 交信 內容을 모두 盜聽하고 있었을 텐데 뭣 때문에 當時 蘇聯 政府가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狀況이었다』

『내가 英雄인지, 殺人犯인지』

그는 이어 『蘇聯 當局은 내가 點滅燈을 보았다고 했지만 이를 보지 않았다고 속였고, 飛行機와 交信 努力을 한 적이 없는데 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相對 飛行機와 交信을 하려면 適正한 周波數가 있어야 했는데 周波數를 찾지 못했고, 言語障礙로 無線 連絡을 할 수도 없었다. 事故 直後 모스크바에서 情報 專門家들이 사할린 機智에 急派돼 왔다. 나와 地上 管制所 간 無線 交信 內容을 僞造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交信 內容을 바꿨다. 點滅燈이 깜박이지 않았다고 錄音했다. 그리고 9月3日에는 TV 放送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空軍司令官 參謀들이 「當身 이렇게 말하라」며 原稿를 다 적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 瞬間부터 그는 KAL 旅客機 擊墜犯으로 烙印되는 運命으로 바뀌었다. 事實 事件 直後 그는 그 波長이 엄청난 方向으로 일고 있다는 것을 直感했다.

그 當時의 狀況에 對해 그의 말이 繼續된다.

『事件 直後, 처음에는 蘇聯 當局으로부터 英雄 稱號를 받을 것으로 期待했지만 며칠 지난 뒤에는 어떤 罪科를 받을지 몰랐다. 極刑을 받을 수도 있거나 아니면 監獄까지 갈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當時 사할린에는 4萬餘 名의 高麗人(韓日同胞)李 살고 있어 蘇聯 政府는 이들이 무슨 行動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았다.

事件 發生 以後 우리 家族은 「낯선 사람에게 大門을 열어 주지 말라」는 命令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登下校時 警護員이 配屬됐다. 사할린을 떠나라고 命令을 받은 것도 하루 前 奇襲通報를 받았다. 겨우 하루 만에 짐을 챙겨 떠나라는 命令을 받고서 불이 났거나 亂離를 當한 사람처럼 쫓겨났다. 옷가지 等 必要한 짐은 컨테이너에 던져 두고, 家口는 다 두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只今 살고 있는 이곳에는 내가 卒業한 學校가 있었는데 敎授들 亦是 「卒業生인 나에 對해 훌륭한 先輩로 在學生들에게 自負心을 느끼게 했다」고 말했지만, 어느 날부터는 그런 말도 아예 못 하게 했고, 나 自身이 어느 곳에서라도 떳떳하게 그날의 일에 對해 말하는 것 自體도 禁止됐다. 그리고 나는 言論과 世上에서 잊혀져 갔다. 한동안 내 自身이 英雄인지, 殺人犯인지, 政府가 나를 어떻게 待遇하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當時 蘇聯 政權도 國際的 非難에 直面하면서 多急해졌다. 事件 直後 안드로포프 當時 蘇聯共産黨 書記長은 1983年 9月1日(모스크바 時刻)에 生涯 마지막 政治局員 會議를 열었다. 案件은 當時 國內 經濟問題와 國際關係 等이었다. 會議 直前 우스티노프 國防長官이 韓國 民間航空機를 擊墜시켰다고 傳했지만, 안드로포프 書記長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療養次 크림半島로 떠났다. 그러나 國際輿論이 豫想 外로 들끓자, 안드로포프는 모스크바에 있던 當時 제2인자 格인 체르넨코에게 電話를 걸어 攻勢的인 姿勢를 取할 것을 指示했다. 다음날 체르넨코가 書記長을 代身해 非常 政治局員 會議를 召集했고, 事件 發生 一週日 뒤인 9月7日에 蘇聯 政府는 特別聲明을 통해 『KAL機가 諜報行爲를 하다 擊墜됐다』고 發表했다. 蘇聯은 當時 사할린 海域에서 블랙박스를 건져냈지만 숨길 수 있는 모든 것을 祕密로 한다는 原則에 따라 이 事實은 祕密로 分類됐고 숨겨졌다.

『旅客機는 美國이 擊墜, 나는 偵察機 擊墜』

午時포비치는 20年 동안 똑같은 質問을 받고 있다고 했다. 「擊墜시킨 旅客機에 乘客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라는 質問이다. 『率直히 나는 搭乘客들이 있다는 認識도 못 했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旅客機라는 생각도 했지만, 旅客機를 改造한 偵察機로 생각했다. 只今까지도 分明히 確信하는 것은 그 飛行機는 偵察機였을 것으로 믿고 있다. 乘客들은 分明히 없었다고 確信했다』

그의 말에도 一理가 있다. 當日 KAL機가 사할린 上空에 이르기 直前 美國 諜報機 RC 135期가 周邊 地域 偵察을 試圖했고, 蘇聯 레이더網에 잡힌 뒤 곧바로 KAL機가 나타난 것도 偶然의 一致치곤 悲劇이었다. 美 諜報機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事故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家庭이 생길 수 있다. 더구나 RC 135기가 KAL 007機와 같은 보잉機를 改造해 만든 것이어서 正確한 識別이 不可能한 狀態에서는 充分히 錯覺을 할 수 있다는 結論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午時포비치는 事件 發生 後 6年 만에 外國人과 처음으로 接觸했다. KAL 007機를 素材로 冊을 쓴 英國 作家 케리와의 만남이었다. 以後 事件 發生 10年째인 1993年 이즈베스티야紙와 인터뷰를 했고, 美 言論과는 1996年 뉴욕타임스와 첫 인터뷰를 했다. 以後 日本 記者가 다녀갔지만 한결같은 質問들이었다고 말했다. 20年 만에 찾아온 韓國 記者마저 같은 質問을 한다는 意味로 받아들여졌다.

『擊墜 直後에도 機內 乘客들이 없었다는 얘기들이 곧바로 나왔다. 屍身들을 發見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旅客機가 墜落한 地點 사할린 海上에서는 異常한 것들이 있었다, 女性 化粧品 파운데이션 通, 헌 옷들이 發見됐지만 屍身은 그리 많이 發見되지 않았다. 當時 蘇聯 政府는 旅客機 殘骸를 찾기 위해 祕密 作戰을 펼쳤다.

이 作戰에 參席했던 特殊部隊는 海底 殘骸 收去 作業을 비디오로 撮影했다. 이 테이프는 情報機關에 넘겨졌고, 祕密情報로 分類됐다. 하지만 나는 이 비디오 테이프를 봤다. 發見된 屍身은 勿論 팔·다리 等 屍身의 一部였다. 屍身을 收去한 結果, 겨우 6~7名 程度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 人員 程度가 飛行機에 타고 있고 있었을 것으로 專門家들도 推定했다』

그는 記者에게 『269名이 타고 있었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屍身이나 屍體 조각들이 發見되는 것이 當然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都大體 269名의 屍身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고 記者에게 反問했다. 그는 美國 等에서는 海上에서 流失됐거나 바닷가재 等이 屍身을 먹어치웠을 것으로 推定했지만 常識的으로 不可能한 일이라고 말했다.

午時포비치는 『或是 當日 擊墜된 飛行機와 同時에 또 한 臺의 旅客機가 사할린 上空을 날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는가』라고 되물었다. 『내 생각으로는 當日 비슷한 航路에 時差를 두고 보잉 旅客機 2臺가 飛行했을 것이라고 推定된다. 1代는 캄차카에서 사할린 上空으로 날아오다가 사할린 上空에서 擊墜됐고, 다른 한 臺의 旅客機는 頂上 航路를 따라 飛行하며 日本 管制所 側과 交信을 했다고 본다. 그 旅客機도 누군가에 依해 擊墜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美國이 擊墜했을 것이다. 나는 이 飛行機에 269名의 搭乘客들이 탔을 것으로 推定한다』

그의 推定은 ICAO 報告書에 言及된 內容과 單純 比較해 보면 어느 程度 推定이 可能할 수도 있다. 報告書에는 美國 偵察機 RC 135기가 KAL 007機가 出現하기 直前 사할린 周邊 上空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報告가 있다. 午時포비치는 當時 이 偵察機를 自身이 擊墜했고, 뒤따라오던 旅客機는 美國이 擊墜했을 것이라는 論理였다. 그는 特히 『내가 擊墜한 飛行機는 頂上 航路를 無慮 600마일이나 벗어났기 때문에 旅客機가 길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다. 旅客機 操縱士는 勿論 地上 管制所度 이를 放置할 수 없는 問題』라고 强調했다.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正말 遺憾』

―ICAO 調査에서 KAL氣는 慣性航法裝置(INS) 代身, 羅針盤 防衛 飛行을 한 것으로 報告됐다. 이 때문에 航路를 離脫했다고 調査됐다.

『아무리 羅針盤 防衛 飛行을 했다고 하더라도 操縱士는 勿論 副機長들마저 그런 錯覺을 하며 飛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操縱士들이 다 눈을 감고 操縱席에 있지 않는 限 不可能한 일이다. 擊墜된 飛行機는 旅客機로서는 到底히 갈 수 없는 不可能한 航路로 飛行을 했다』

그는 飛行機의 位置와 正常的인 旅客機 航路를 直接 그림을 그려 가며 600마일이라는 것은 엄청난 差異라고 斷定했다.

―KAL 007期가 旅客機가 아닌 偵察機라는 確信을 아직까지 갖고 있는가.

『그렇다. 하늘에 盟誓한다』

―實際 戰爭에 參與해 본 적이 있는지.

『戰爭에 參加한 적은 없지만, 模擬 戰爭은 많이 치렀다. 訓鍊 中에 實際 狀況을 假想한 訓鍊을 자주 했다』

―當日 實際로 KAL機에 가장 近接한 것은 몇 미터 程度였는가.

『約 300m까지 接近했었다. 飛行機를 擊墜하기 直前 着陸을 誘導(柔道)하기 위해 가장 近接했던 距離이다. 兩側 날개에 附着된 綠色과 붉은色 警告燈을 깜빡이는 瞬間이었다. 그러나 反應이 없었다. 이때 제대로 信號에 應했더라면 事故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誘導 瞬間 飛行機와 戰鬪機의 位置를 直接 그렸으며, 그 位置는 被擊된 飛行機 右側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只今도 蘇聯 當局의 미사일 發射 命令에 對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軍人 身分이었다. 軍人은 命令에 服從할 뿐이다. 當時 나는 任務를 훌륭히 遂行했다고 생각했다. 미사일 發射도 誤差 없이 正確히 명중시킨 데 對해 自負心을 갖고 있다』

―當時 KAL기와 交信은 不可能했는가.

『交信을 試圖해 보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方法이 없었다. 交信하려면 周波數도 同一해야 하고 言語가 통해야 한다. 나는 英語를 하나도 모른 狀態였다. 言語가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交信을 試圖할 수 있겠는가. 結局 交信 試圖도 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當身이 擊墜한 그 飛行機는 KAL 旅客機로 確認됐고, 乘客과 乘務員 等 269名의 搭乘客이 타고 있었다.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正말 遺憾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遺族들에게 未安한 마음을 禁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機內에 아무도 없었다고 確信했다. 率直히 말해 確認할 方法도 없었다. 오직 窓門을 통해 움직이는 物體를 確認할 수 있었지만, 앞에 말한 대로 움직이는 物體를 全혀 보지 못했다』

『旅客機임을 確認했다면 擊墜 命令에 異議 提起했을 것』

―當時 擊墜한 飛行機에 「대한항공」이라는 한글이나 漢字, 「KAL」이라고 쓰인 英文字를 보지는 않았는가. 또 KAL氣는 꼬리 部分에 스팟 라이트(로고等)을 켜고 다녔는데, 꼬리 部分에 等이 켜져 있지 않았는가.

『본 적 없다. 點滅燈 外에 어떠한 等도 켜고 있지 않았다. 아무런 文字나 글字, 그리고 大韓航空 마크 等 어느 것도 볼 수 없었다』

記者는 月刊朝鮮이 1993年 6月 ICAO 報告書를 中心으로 報道한 記事 全文을 보여 주었다. 月刊朝鮮이 報道한 記事에는 被擊된 KAL機와 同一한 氣體의 모습이 담긴 寫眞이 있었고, 大韓航空의 英文表記와 漢字表記 그리고 로고等을 보여 주었다. 午時포비치는 『當時 飛行機에는 아래·魏 層으로 2中으로 窓門이 있었는데, 模樣이 좀 달라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飛行機에 標示된 어떠한 標示나 글字를 본 적이 없었다고 强調했다.

―萬若 사람이 탄 旅客機라고 생각했다면 미사일 發射를 하지 않았을 수 있었으리라고 確信하는가.

『그런 家庭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면 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分明히 上部에 報告했을 것이다. 旅客機라는 事實을 確認했다면 擊墜를 分明히 反對했을 것이다』

―擊墜 命令을 어길 수도 있었다는 말인가.

『只今 생각하면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誘導 着陸을 試圖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心情이었나.

『地上 管制所에서도 深刻하게 行動하라고 했듯이, 나 亦是 아주 조심스럽고 緊張된 狀態에서 誘導 着陸 試圖에 나섰다. 그러나 飛行機가 中立地域으로 公海上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었다. 萬若 誘導에 應했더라면 事故를 면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確信한다』

―擊墜된 飛行機의 마지막 모습을 記憶하는지. 어떤 모습이었는가. KAL 007期 最後의 모습을 본 마지막 當事者인데.

『첫 미사일이 發射돼 엔진 部分에 命中된 것은 불과 0.5秒의 짧은 瞬間이었다. 瞬間的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나 두 番째 미사일이 飛行機에 命中된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飛行機는 火焰에 휩싸여 爆破됐고 불길이 솟구쳤다』

―飛行機가 空中에서 完全히 酸化했는지, 아니면 몇 조각으로 分離돼 떨어져 나갔는지 보았는가.

『그렇게 仔細히 볼 수 있는 餘裕가 없었다. 飛行機가 불길에 싸여 螺旋形으로 墜落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飛行機가 火焰에 싸여 爆破하는 瞬間 機首를 돌려 基地로 歸還했다』

―왜 陸地 上空에서 被擊됐는데 海上에서 殘骸가 發見됐는가.

『飛行機는 陸地 上空에서 海上으로 移動 中이었다. 卽 사할린 上空을 지나고 있었다. 擊墜된 飛行機는 進行方向으로 가면서 螺旋形으로 約 5km를 날아가며 사할린 海上 마네론 섬 周圍에 殘骸들이 떨어진 것이다』
美軍 偵察機 邀擊에 500回 出動

―當時 蘇聯 空軍 操縱士들에게는 擊墜를 할 수 있는 獨自的인 權限이 없다고 들었다. 事實인가.

『空軍 戰鬪操縱士들은 命令에 依해 움직인다. 敵機(適期)를 發見하더라도 獨自的인 判斷으로 擊墜할 수 있는 權限이 없다. 반드시 管制所의 命令에 따라 擊墜할 수 있도록 守則이 定해져 있다』

―事件 發生 當時 사할린 小콜 基地(基地)는 어떤 命令 시스템이 놓여 있었는가.

『小콜 基地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約 140km 떨어진 곳에 있다. 小콜 基地는 하바로프스크 司令部 指示를 받고, 하바로프스크 司令部는 몽골과의 接境에 있는 시베리아 울란우데에 있는 上級 司令部 指示를 받고, 울란우데 司令部는 모스크바 司令部의 最終 命令 指示를 받도록 돼 있다. 卽 모스크바→울란우데→하바로프스크→사할린으로 이어지는 命令 體系 속에 놓여 있었다. 當時 미사일 發射 命令도 結局 모스크바에서 最終 命令이 下達된 것이다』

―最初 KAL機가 캄차카 上空 蘇聯 領空을 侵入했을 때 蘇聯이 擊墜 機會를 놓친 것으로 알고 있다. 或是 當時 蘇聯 領空을 侵犯한 이 飛行機를 놓쳤을 境遇, 上部에 依해 擔當者들이 모두 肅淸되거나 問責될 것으로 두려워하고 强迫 觀念에 社로 잡힌 나머지 再次 擊墜에 나섰다는 說도 있다.

『아니다. KAL機가 캄차카 上空에 接近했다가 暫時 公海上으로 나가자, 첫 擊墜 命令을 撤回한 것이다. 萬若 캄차카 上空에서 公海上으로 接近했을 때 擊墜를 했다면 問責이 따랐을 것이다. 國際的으로도 問題가 생긴다. 그런데 公海上에 暫時 나갔던 飛行機가 사할린 領空 正面으로 接近해 왔다. 管制所에서는 이미 線을 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誘導 着陸에 應하지 않자 다시 發射 命令이 下達된 것이다. 正말 當時 狀況은 마치 平常時 美軍 偵察機의 움직임을 彷彿케 한 것이었다』

―當時 사할린은 美蘇 間 諜報戰이 熾烈하게 펼쳐지는 等 「空中 戰爭터」로 불렸다고 들었는데 어느 程度였는가.

『낮에는 거의 每日 美 偵察機가 蘇聯 領空을 파고 들었다. 하루에도 몇 次例씩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反復했다. 그래서 낮 勤務하면 지치고 힘들며 危險하기도 했다. 每日 戰爭을 치르는 氣分이었으니까. 敵이 먼저 攻擊하면 空中戰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낮 勤務를 하다가 밤 勤務로 옮긴 것도 이 때문이다. 밤에는 偵察機의 活動이 뜸하고 月光(月光)이 없으면 比較的 偵察機의 出沒도 적었다. 내가 勤務했던 7年 동안 美 偵察機를 監視하고 領空에서 警戒 飛行을 한 것만도 500次例 以上 된다. 이 程度면 理解가 된는가』

―美國 偵察機는 어떤 式으로 活動을 했나.

『사할린과 쿠릴 列島 사이에 나타나는 게 一般的이다. 그리고 사할린 商工人 蘇聯 領空으로 侵入했다. 그 瞬間이 되면 蘇聯 사할린 小콜 基地는 操縱士들에게 發進 命令을 내린다. 美國과 日本은 이를 다 알고 利用한 것이다. 美軍 諜報機의 活動은 純全히 情報를 把握하기 위한 말 그대로 諜報活動이 目的이었다. 美國은 러시아 軍 基地 運營方法과 레이더 統制 시스템을 確認하기 위해 出擊했다. 勿論 地上과 操縱士 間 交信 內容을 모조리 盜聽했다. 사할린에는 小콜 基地 위쪽에 空軍 飛行基地가 한 곳 더 있었다. 사할린을 南北으로 나눠 이 基地와 小콜 基地가 任務를 나눠 分擔했다. 偵察機가 北쪽으로 가면 北쪽基地에서 監視를 했고 兩쪽에서 出動 任務를 移讓하는 式이었다. 美 諜報機는 한마디로 지그재그로 사할린 蘇聯 領空을 침했했다가 사라지기를 反復했다. 卽, 擊墜를 하려면 公海上으로 빠져나가는 式이었다. 特히 3個月에 한 次例씩 集中的으로 偵察活動을 했다. 그때가 되면 基地는 아예 非常狀態에 突入했다. 蘇聯도 마찬가지로 그런 偵探 活動을 했을 것이다. 勿論 우리는 偵察 業務와는 상관없는 戰鬪操縱士들이었다』

『내가 擊墜한 飛行機가 KAL期라면 正말 머리 숙여 容恕를 빌겠다』

―只今 活動은 자유로운지. FSB(聯邦保安局: KGB 後身)으로부터 制約은 받고 있지 않는가.

『活動에 制約받지 않고 있다. KGB亦是 變化와 激動의 時代여서 그런지 別 制約을 加해 오지 않았다. 勿論 草創期는 으레 조심스럽게 行動을 했다. 事件 發生 10年이 지난 뒤부터는 行動이 比較的 자유로웠다. 蘇聯이 崩壞되면서 民主主義로 가는 過程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只今은 아무런 制約도 없고 海外旅行에도 支障이 없다』

―海外旅行은 한 적 있는지.

『1993年 事件 發生 10周年을 맞아 獨逸에 갈 機會가 있었다. 이즈베스티야紙 周旋으로 獨逸 쾰른, 함부르크에 갔었다. 日本에서도 招請 움직임이 있었는데 웬일인지 連絡이 없다』

―아직도 政府가 제대로 待遇를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率直히 말해, 美國 같았으면 나는 國民들의 英雄이 됐을 것이다. 내가 받은 것이라고는 勳章뿐이다. 勳章에는 命令 完遂에 對한 英雄 訓長이 아닌 單純히 宇宙 訓鍊者에게 주는 勳章에 不過한 것이었다. 政治 軍人들이 모두 짜 맞춘 듯하다. 그래서 더욱 속상하고 괴롭다』

午時포비치는 이제 平凡한 農民으로 轉落한 自身을 後悔하지는 않지만 戰鬪機 操縱士로서, 退役 後 더 좋은 待遇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最小限의 名譽를 간직하지도 못한 채 結局 너무도 平凡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데 憤을 참지 못했다.

―韓國에서 遺家族이나 누군가가 招請을 한다면 갈 것인가.

『勿論이다. 가지 않을 理由가 없다. 機會가 주어진다면 韓國民 모두에게 當日 發生한 모든 眞實을 밝히고 싶다. 이番에 報道를 통해 제 身上이 仔細히 나가리라고 본다. 저의 眞實된 마음을 그대로 傳해 주기 바란다. 萬若 내가 擊墜한 飛行機가 正말 269名을 태운 KAL 旅客機였다면 遺族들에게 머리 숙여 容恕를 求하겠다』

午時포비치는 A4 用紙에 自身의 心情을 적었다.

「遺家族들 여러분 罪悚합니다. 내가 擊墜한 飛行機는 旅客機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變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搭乘客이 있고 旅客機였다면, 내 行動은 잘못된 것입니다. 勿論 軍人으로 命令을 遂行한 것은 當然하지만 말입니다. 遺家族들에게 謝過를 드립니다. 萬若 搭乘客들이 있다는 것을 確認했다면 다른 行動을 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 番 遺家族들에게 眞心으로 罪悚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午時포비치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드림」

그는 親筆 사인까지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表示했다.

인터뷰는 한나절 以上 繼續됐다. 點心 時間이 되자 夫人은 「♥메니」라 불리는 러시아式 饅頭와 野菜 샐러드를 차려두고 食事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보드카와 麥酒 等을 내놓았다. 러시아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食事하며 알코올 40度가 넘는 보드카를 勸했다. 夫人은 나와 自身의 자리에만 술盞을 두었다. 그리고 보드카를 가득 따랐다. 7年째 술을 끊은 男便에게는 보드카를 주지 않았다. 夫人은 『그가 오랫동안 맘苦生을 한 代價로 몸이 疲弊해졌다』며 『只今은 禁酒禁煙으로 健康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眞實이 다 밝혀질 때 나는 이 世上에 없을 것』

夫人과 둘이서만 보드카를 석 盞 以上 마셨다. 禮儀上 한 盞만 마시겠다고 했더니 『코샤크 騎兵隊들이 터전을 잡고 있는 이곳 傳統이 그렇지 않다』며 석 盞을 連거푸 勸했다. 醉氣가 若干 돌자 記者는 아예 「요르쉬」라고 불리는 「러시아式 보드카 爆彈酒」를 마셨다. 韓國 記者들은 爆彈酒를 즐겨 마신다며 爆彈酒 示範을 보였더니 關心을 보였다.

KAL 007期가 被擊된 지 20年이 지났다. 午時포비치의 主張과는 反對로 그가 擊墜시킨 飛行機는 美軍 偵察機가 아니고 KAL 007篇 점보였음이 否認할 수 없는 物證으로 確定되었다. 남은 疑問은 왜 KAL 操縱士들이 INS를 끄고 羅針盤 飛行을 하여 蘇聯 領空으로 들어갔는가이다. KAL 007基를 擊墜한 蘇聯 戰鬪機操縱士 午時포비치조차 1983年 9月1日 새벽 어떤 飛行機를 向해 미사일을 發射했는지 그 眞實을 모르고 있다고 主張했으나 加害者의 無知, 또는 辨明으로 볼 수밖에 없다. 午時포비치는 무엇 때문에, 왜 러시아(事件 發生 當時 蘇聯)가 旅客機 擊墜 事實을 事實대로 發表하지 않고 眞實을 公開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記者는 2年 前 2001年 사할린을 訪問, KAL 007期 問題를 取材한 적이 있다. 州道(主導)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自動車로 4時間 距離의 네벨스크까지 가 KAL機 犧牲者 追慕碑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러나 追慕碑는 第2次 世界 大戰 當時 犧牲됐던 日本軍을 追慕하기 위해 日本 側이 造成한 共同墓地가 있는 곳 한켠에 位置해 있었다. 마음도 아프고 속도 傷했다. 눈에 띄지도 않는 追慕碑가 그날의 悲劇을 象徵하고 있는 것도 가슴 아팠거니와 아무도 돌보지 않고 이제 關心조차 없는 듯하다.

午時포비치와 인터뷰를 마치고 準備해 간 膳物과 若干의 謝禮金을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記念寫眞을 찍고 午時포비치 夫婦와 作別을 告했다.

『아마도 20年 前 被擊 事件의 眞實이 모두 公開되는 瞬間, 나는 이 世上에 存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午時포비치가 인터뷰 中 한 말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KAL 007機는 運命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番 인터뷰를 통해서 重要한 事實을 하나 確認할 수 있었다. 午時포비치氏는 KAL機가 꼬리날개에 달린 照明燈을 켜지 않았다고 證言했다. 萬若 KAL 操縱士가 이 照明燈을 켜 놓았더라면 午時포비치氏는 밤하늘에 환하게 비치는 꼬리날개의 KAL 로고 表示를 보고 民間 旅客機라고 確信하여 管制師의 擊墜 命令에 强力한 異議를 提起했을 것이고, 007의 運命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月刊朝鮮 趙甲濟 記者는 1984年 4月號의 「KAL에 칼을 댄다」는 深層取材 記事에서 이 問題를 이렇게 提起했었다.

「달은 下弦이었고 水平線 위 60度 角度에 있었으며 夜間의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 報告書는 또 「KAL機의 垂直 꼬리에 달린 로고(社章) 照明燈은 普通은 켜지만 켜고 안 켜고는 機張 마음대로다」고 했다. 이 問題는 KAL 操縱士들 사이에 한동안 話題가 됐었다. 結論부터 말하면 ICAO 報告書는 잘못 적고 있다. 「로고 照明燈」은 보잉 747, DC10, A300 等 大型機의 꼬리날개에만 있다. 垂直 꼬리에 크게 그려진 KAL 마크를 兩쪽의 水平 날개에 붙은 照明燈이 비춰 주면 夜間飛行 때 환하게 보인다. KAL에선 3年 前 이것을 켜지 말도록 操縱士들에게 指示했다. 『電球壽命을 아끼자』고 그랬다는 말도 있고 『整備 部署 쪽의 要請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高空에선 衝突 危險이 없으므로 켤 必要가 없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도 있다. 航法等과는 달리 이 照明燈을 켤 法的 義務는 없다. 一部 操縱士들은 그러나 會社의 消燈 指示에 反對했었다고 한다.

『飛行機 會社에서 만든 것은 그대로 作動하는 게 原則이다』는 反論이었다. KAL은 007機 被擊 뒤부터는 이 照明燈을 다시 켜도록 했다. 『萬若 그때 KAL 007期가 로고 照明燈을 켜고 있었더라면 蘇聯 邀擊機들은 6~8마일 바깥에서도 民航機임을 알았을 터이고 KAL機를 스파이기라고 한 그들의 거짓말은 더욱 非難을 받았을 것이다. 鐵面皮 같은 蘇聯 邀擊機 操縱士도 너무나 뚜렷한 KAL 表示를 報告書는 생각을 달리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로고 照明燈이 켜졌더라면 事件의 破局을 막아 주었을지도…. 當時의 어둠에선 邀擊機 操縱士가 2000피트 위에 있는 KAL機의 胴體에 쓰인 글씨를 判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判讀 可能 距離에 接近했을 때는 이미 發射 命令을 받은 뒤여서 그런 問題엔 神經도 안 썼을 터이고…』

이런 부질없는 想像을 하는 것은 나뿐만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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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01: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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