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空輸 1旅團, 漢江을 건너다!
空輸 1旅團, 漢江을 건너다!
全斗煥과 그의 時代(9)공수1旅團이 國防部와 陸軍本部에 들어갈 때 唯一하게 抵抗한 것은 國防部 屋上에 있던 발칸포臺였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그날 保安司에서 가장 바빴던 이는 鄭棹永 保安處長과 許和平 祕書室長이었다. 柳學聖, 全斗煥將軍이 大統領과 軍首腦部를 說得하고 있는 사이에 鄭, 許 두 사람은 實兵部隊의 指揮官들을 說得하고 있었다. 保安處長은 軍部의 動向을 監視하는 任務를 띤 責任者로서 保安司에서는 司令官 다음으로 權限이 强한 자리로 알려져 있다. 保安處는 軍部 監視 및 統制의 手段으로서 全軍의 通信網을 統制·監聽하고 各 地區 保安部隊를 指揮한다. 鄭處長과 許室長은 이 날 밤 이 두 가지 手段으로써 指揮部가 흔들리는 陸軍本部를 制壓할 수 있었다.

保安處는 于先 陸軍本部 및 首警司와 通하는 隸下 部隊의 通信網을 監聽하고 있다가 出動準備命令이 내려가면 그 軍部隊 內의 保安部隊를 통해서 出動命令의 實踐을 막았던 것이다. 3軍 傘下 5軍團 所屬인 首都機械化師團에 陸本으로부터 出動準備命令이 내려가자 參謀長은 出動計劃書를 作成했다. 그런 命令이 내려갔다는 것을 알아챈 이 師團의 保安部隊長은 參謀長과 함께 손길남(孫吉男) 師團長을 찾아가 『絶對로 出動해서는 안 된다』고 說得했다.

孫師團長도 上級部隊로부터 出動命令이 내려오지 않아 子正이 지나서는 宿所로 돌아가 버렸다. 混亂期에는 正確한 情報判斷이 되어야 行動方向을 제대로 잡을 수가 있다. 陸軍本部는 隸下 部隊와의 通信網이 露出되고 情報網(保安部隊)李 잘린 狀態에서 합수本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全혀 모른 채 까막눈으로 싸우고 있었다. 합수本部 側은 陸本 側의 行動을 손바닥 들여 보듯 하면서 千里眼을 갖고 對處했다. 陸軍本部는 四肢(四肢)가 다 잘리고 눈마저 뽑혀나간 채 버둥대는 猛獸의 모습이었다.

12·12는 大領들의 밤

許和平 祕書室長은 그 날 밤을 電話機를 부여잡고 지샜다. 합수本部長과 景福宮 30 團長室 및 主要部隊腸을 이어주는 連絡責 役割을 했을 뿐 아니라 主要部隊의 陸士 同期生이나 先後輩 將校들에게 電話를 걸어 合搜本部側의 立場을 說明하는 데 바빴다. 陸軍本部의 命令에 따라 出動準備 態勢에 들어간 部隊의 聯隊長이나 參謀들에게 電話를 걸어 『야, 그게 아니야!』라면서 說得하면 部隊가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 首都圈의 聯隊長, 師團 參謀長과 參謀, 大隊長 等 실病 指揮官들은 거의 가 許大領의 正規陸士 同期生이거나 後輩들이었다. 韓 美8軍 情報通은 『그날은 大領들의 밤이었다. 非正規陸士 出身 將星들이 陸本을 支持하려고 해도 正規陸士 出身 大領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正規陸士 出身들은 上層部의 非正規 陸士 出身들 때문에 進級이 늦어지고 있는데 對해서 不滿이 쌓여 있었고, 能力이 떨어지는 그들 밑에서 受侮를 當해 왔다는 意識이 澎湃해 있었다』고 했다.

陸本은 初場에 出動準備命令을 내려두었던 首都機械化 師團과 26師團에 對해서 그 날 밤 끝내 移動命令을 내리지 않았다. 記者가 配定도(裵貞道)씨(경기도 利川에서 果樹園 經營)에게 『出動命令이 내렸다면 서울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正規陸士 出身 聯隊長들이 反撥했을 可能性은 없을까요.』
『세 聯隊長 中 두 사람이 正規陸士 出身이었습니다. 反撥의 可能性을 排除할 수 없습니다. 저 自身도 10·26事件 때 鄭 總長의 役割에 對해서 疑懼心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12日 밤에 鄭 總長이 連行 됐다기에, 퍼뜩 果然 嫌疑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狀況에서 합수本部 側을 鎭壓하려고 出動한다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陸本 側이 出動命令을 抛棄한 것이, 그럴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正規陸士 出身 將校들의 團結과 鄭總長에 對한 郡內의 疑懼心이 陸軍本部로 하여금 果敢한 鎭壓作戰을 펴지 못하게 한 要因이었다는 얘기다. 全斗煥 側에서는 陸本 側이 먼저 兵力을 動員했기 때문에 自慰手段으로써 對應兵力을 動員했다는 論理를 只今껏 維持하고 있다. 陸本 側이 初場에 9旅團에 出動準備 命令을 내린 것이, 이 命令을 監聽한 全斗煥君을 刺戟한 것은 事實인 듯하다. 全將軍은 밤 10時30分쯤, 機動性이 좋은 9旅團이 서울로 들어오기 前에 空輸1旅團을 먼저 불러들여야 한다는 判斷을 하고 景福宮30段에 와 있던 朴熙道准將을 본대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崔世昌 3旅團長에게는 特戰司의 指揮部를 制壓하라는 任務를 주어 3旅團으로 복귀시켰다.

首警司에서는 北岳山에 配置된 33 警備團의 一部 兵力에 對해 撤收하여 本部로 集結하도록 命令했다. 이 移動命令을 監聽한 합수本部 側에서는 首警司가 自身들을 包圍, 鎭壓하는 作戰을 펴고 있다고 判斷하여 서둘러 對應策을 마련한 것 같다고 金基宅參謀長은 말했다. 張司令官은 33警備團 兵力을 首警司 本部 防禦 目的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尹興祺 9旅團長은 3軍 支援司令部에 要請한 輸送車輛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자 할 수 없이 本部車輛으로 1個 對臺灣 直接 引率하여 出發했다.

出發 直前에 尹旅團長은 鄭柄宙 司令官室로 電話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때 特戰司令官실은 3旅團의 特功組로 부터 奇襲을 當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가 子正 무렵이었다. 京仁高速道路를 向해 나가던 9餘團은 南部循環道路와 京仁高速道路가 交叉하는 窟다리에 當到하였다. 머리 위에 난 南部循環道路를 거쳐 幸州大橋 쪽으로 가고 있는 박희도(朴熙道) 准將의 空輸1旅團의 車輛隊列 불빛이 보였다. 이때 本部에 남겨 둔 參謀長 신수호 大領으로부터 無線 連絡이 왔다. 『保安司令官의 特別指示이니 돌아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尹准將은 兵力을 돌렸다. 신수호 參謀長에게 兵力을 돌리도록 請託한 사람은 保安司의 오일랑( 吳一郞) 中領이었다. 두 사람은 甲種幹部候補 動機였다.

박희모(朴熹模), 1旅團의 서울進入 放置

1989年 3月 辨似한 鄭柄宙 將軍은 生前에 記者에게 이런 證言을 남겼었다.
『子正쯤 문홍구 合參本部長이 國防部에서 電話를 걸어 왔습니다. 電話를 노국방에게 바꾸어줍디다(기자 週:그때 노재현 長官은 聯合司 벙커에서 막 國防部로 돌아와 있었다). 노長官3 「丁壯軍, 朴熙道가 空輸旅團을 이끌고 國防部와 陸本을 치러 온다고 하는데 當身이 막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좀 퉁명스럽게 「아니, 長官님 隸下의 搜査機關(記者 週:합수本部를 意味)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시켜서 잡아넣으시지요」라고 했어요. 鄭司令官은 이 電話 直後에 9旅團長에게 出動을 督促했으며, 몇分 지나지 않아 被襲되었다고 한다.

卽, 9旅團을 出動시킨 것은 朴熙道 准將의 1旅團에 對한 防禦目的이었다는 얘기였다. 張首警司令官은 朴熙道 准將이 指揮하는 空輸1旅團이 幸州大橋로 接近中이라는 警察報告를 받자 朴熹模 30師團長에게 電話를 걸었다. 『1個 連帶를 配置하여 서울進入을 막아달라』고 했다. 얼마 뒤 張司令官이 다시 電話를 걸었더니 朴師團長은 『兵力이 野外訓鍊을 나가서 配置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1旅團이 서울로 들어오려면 세 關門을 通過해야 했다. 幸州大橋 南端의 開花哨所는 首都軍團 管轄인데, 朴熙道 旅團長은 이 哨所를 簡單히 占領하고 通過했다. 幸州大橋 北端의 檢問所는 30師團 管轄인데 朴熹模 師團長은 막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搜索의 首警司 憲兵團 檢問所였다.

張司令官은 『憲兵團은 只今 副團長이 指揮하고 있으니 조홍 丹粧의 命令을 듣지 말라. 兵力이 接近하면 發砲하라』고 指示했었다. 趙洪 團長은 保安司에 位置하여 檢問所에 電話를 걸어 『發砲하지 말라』는 正反對의 指令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問議가 部下들로부터 김기택(金基宅)參謀長에게 쏟아졌다 金參謀長은 『抵抗하지 말라』고 指示했다. 搜索檢問所 憲兵들은 1旅團이 接近하자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空輸1旅團 兵力은 텅빈 檢問所를 때려부수었다. 搜索檢問所에서 서울市內까지는 거칠 데가 없었다. 1餘團은 陸本과 國防部를 向해 疾走하였다. 아무리 小規模의 兵力이라도 軍隊가 漢江을 건너 서울로 들어오면 政權 次元의 問題를 惹起한다. 5·16때 不過 數千 名의 海兵隊와 空輸團 兵力이 漢江을 件넘으로써 第2共和國이 무너졌다. 12·12事態 때 제1공수여단의 서울進入度 비슷한 結果를 빚었다. 陸本 側 9餘 旅團은 돌아가고 全斗煥 側의 1餘團은 서울進入에 成功했다는 것이 12·12事態의 勝負를 最終的으로 결정지었다.

盧泰愚 所長이 불러들인 9師團의 1個 連帶, 李相奎(李相珪) 第2機甲旅團長의 1個 電車大隊, 장기오(張基梧) 准將의 空輸 第5旅團, 30師團 宋응섭 大領(陸士 16期·合參本部長 歷任)의 1個 連帶는 이미 勝負가 끝난 뒤 13日 새벽 3時를 전후하며 서울에 到着했던 것이다. 이들 部隊는 9旅團이 移動을 開始한 直後 全將軍 側에서 서울로 부른 것이었다. 서울進入을 沮止할 責任을 지고 있었던 朴熹模 師團長(甲種9期 出身)은 陸本 側을 위해서는 兵力을 내지 않는 代身에 宋大領의 連帶가 全斗煥 側의 請託에 依해 서울로 出動하는 것을 許諾하였다.

朴師團長은 그 뒤 中將으로 昇進하였고 轉役한 뒤에도 産業基地開發公社 理事長을 거쳐 水資源開發公社 理事長을 지냈다. 그는 記者의 거듭된 電話에 應答해주지 않았다. 空輸1旅團이 國防部와 陸軍本部에 들어갈 때 唯一하게 抵抗한 것은 國防部 屋上에 있던 발칸포臺였다. 首警司 放砲團 所屬인 이 防空砲隊는 張司令官으로부터 射擊命令을 받아두었었다. 全斗煥側에서는 國防部와 陸本의 다른 部隊에 對해서는 抵抗하지 않도록 손을 써 두었으나 이 防空砲隊를 잊어먹었던 것이다. 國防部로 空輸團 兵力이 들어오자 발칸포가 불을 뿜어 壽命의 死傷者가 發生했었다.

[ 2016-06-28, 23:0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이중건     2017-08-26 午前 1:22
김일성父子世襲은 叛亂을 源泉封鎖하기 위해
唯一思想, 唯一指導體制를 세워
私的인 모임은 學友會라도 徹底히 彈壓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