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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繼續 따지고 치받다가… 나온 小說” : 文化 :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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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繼續 따지고 치받다가… 나온 小說”

이대웅 記者 入力 : 2017.12.06 16:41

神正論 小說로 풀어낸 辨證서 <붕어빵> 황의찬 牧師

황의찬 붕어빵
▲황의찬 牧師는 “全能者 하나님이 許諾하신다면, <붕어빵>에서 다룬 많은 主題들이 水面 위로 드러나 哲學, 史上, 神學 이슈의 端初를 提供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는 全的으로 하나님의 權能이고, <붕어빵>의 論點으로 풀이하자면 ‘사랑이 싹트는 土壤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때, 하나님께서 <붕어빵> 속 主題들 中 適切히 選擇해 水面 위로 끌어내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웅 記者
'神은 存在하는가?', '그 神은 全能者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質問에 뭐라고 答해야 할까? 그리스도人들은 이미 믿음과 敎理에 익숙해 있기에, 믿지 않는 이들에게 明瞭하게 풀어 說明한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自體가 요즘은 쉽지 않다.

冊 <붕어빵>은 小說 形式으로 '全能者 談論'을 展開하는 辨證書이다. 主人公 '나'가 붕어빵 布帳馬車를 運營하는 젊은 夫婦와 만나 나누는 對話 形式으로 構成돼 있다. 特히 神學的으로는 '神正論(theodicy, 神正論)', 世上의 惡과 苦痛의 問題에 對해 하나님의 醫로우心과 線河心을 辯護하고 있다. 그리고 小說 속에서 오가는 對話 속에 많은 '神學的 코드'를 숨겨 놓았다.

著者인 황의찬 牧師(전주온고을敎會)는 오랜 職場生活 後 침神대에서 碩士(M.Div.)와 博士(Th.D.) 學位를 取得하고 牧會를 하고 있다. 博士學位 論文인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聾啞 子女를 둔 牧師 아빠의 懺悔錄 <沈默하지 않는 하나님(異常 CLC)>을 펴냈다. 적지 않은 苦難을 經驗한 그가 어떻게 '善하신 하나님'을 小說로 辨證하게 됐는지 만나봤다.

-冊을 쓰게 되신 契機가 궁금합니다.

"저는 平素 끊임없이 質問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結婚하고 아이 둘을 낳았는데, 둘 모두 聽覺障礙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牧會하기 前이었기에, 처음엔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러십니까?' 하면서 한때 敎會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以前에 靑年會長도 했고, 나름대로 熱心히 信仰生活을 했는데 말입니다. 저는 7男妹로, 동생 둘은 聖潔敎 쪽 牧會者입니다. 조카나 親戚 中에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우리 子女들만 둘 다 聽覺障礙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왜 나에게만 이런 苦難을 주십니까?' 하고 끊임없이 質問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聽覺障礙 2級이던 둘째 아들이 스스로 世上을 떠났습니다. 이제 6年 半이 됐네요. 그런 過程에서, 하나님께 繼續 答을 求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答해주지 않으시면 견딜 수 없었고, 聖經을 읽으면서도 '나는 詛呪받았나' 하는 質問을 많이 했습니다. 聖經을 읽을 때 나름대로 늘 敏感했고, 하나님께 答을 求하다 보니 저만의 獨特한 觀點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答을 求하셨는지요.

"信仰의 近間에 對해 質問을 하실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그럴 理 없으시다', 이것이 제 믿음입니다. 어느 때부턴가 그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瞬間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제 삶의 實存에 비춰, 그렇게 對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송명희 詩人이 '하나님은 公平하다'고 노래했는데, 저도 共感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세월호 事件, 홀로코스트, 리스본 大地震, 黑死病 때 沈默하셨느냐고요.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느냐고요. 그런 質問에 對해 神學은 갈수록 '全能者가 善하지 않거나, 全能하지 않거나 둘 中 하나'로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對答은 未洽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한 理由가 있습니다. 惡과 苦痛 뒤로 隱匿하실 때조차 그럴만한 事情이 있고, 그래서 뒷짐을 지고 서 계시지만 오히려 더 가슴 아파하십니다. 그게 제 믿음입니다. 아들을 보낼 때도, 하나님이 저보다 더 가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神正論을 小說 形態로 풀어내신 것인지요.

"'하나님이 果然 善하신가?'에 對해 제가 받은 나름의 應答을 牧會者들 앞에서 꺼내면, 잘 믿질 않았습니다. 博士課程 論文으로 惡과 苦痛에 對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敎授님들이 反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冊에서 밝히는 것처럼 뭐라고 辨證을 하고 싶었습니다.

論文으로 쓰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것 같아서, 小說 形態를 擇해 脚註도 參考圖書 目錄도 없이 이야기처럼 툭 던져보기로 했습니다. 안 믿는 분들도 便하게 읽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랜 苦悶 끝에 이러한 形式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치받은 사람입니다. 博士課程 세미나를 하면 牧師들 5-6名이 함께하는데, 牧師님들이 묻습니다. '皇 牧師님은 왜 그렇게 치받느냐?'고요. 多幸히 敎授님들은 제 便을 들어주시지요. 아이들이 農人人 理由도, 제 아들이 그렇게 떠난 理由도 저는 하나님께 다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살지,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詛呪한 게 아니다' 하는 對答을 들어야 했습니다.

聖經을 읽을 때도, 하나님이 누구를 詛呪했다고 써 있으면 귀가 '번쩍'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墮落했을 때도 그들을 詛呪하지 않으셨습니다. 땅을 詛呪하고 뱀을 詛呪하셨을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저 懲罰을 내리셨지요.

저는 처음 아이들의 障礙를 알았을 때, 詛呪를 받은 줄 알았습니다. 十誡命 속에 '나를 미워하는 者의 罪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三四 臺까지 이르게 하신다(출 20:5)'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버지인 저 때문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新約에선 또 아니라고 하지요. 그러면 '하나님, 都大體 뭡니까?' 끊임없이 質問합니다.

그 答이 이 <붕어빵> 속에 들어 있습니다. '全能者란 이런 분'임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제가 삶 가운데 만난 '좋으신 하나님'은 世上의 惡과 苦痛에 無責任하新 분이 아니었습니다. 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 許諾 없이는 안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問題와 苦難에 하나님께서 無責任하시지 않다는 것이 제가 받은 對答입니다. 이 冊에는 그러한 神學的 主題들을 많이 심어 놓았습니다."

황의찬 붕어빵
▲붕어빵, 황의찬, CLC, 248쪽, 12,000원.
-題目은 왜 '붕어빵'인가요.

"첫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붕어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形象 말입니다. 子息은 父母의 붕어빵 아닙니까. 둘째로 全能者 談論을 '붕어빵 布帳馬車'에서 세 사람이 對話로 풀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惡과 苦痛에 對한 質問' 때문입니다. 詩篇 37篇에 '惡한 者의 亨通을 부러워하지 말라(7절)'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손을 대서 人間들에게 自身의 全能者 됨을 드러내 버린다면, 世上은 '빵틀에서 나온 붕어빵'李 될 수 있습니다. 이를 冊에서 歸謬法的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全能者라면, '惡한 自家 亨通하고 善한 者가 苦難받는 世上'을 보시고 왜 親히 干涉하지 않고 내버려 두시냐고요? 하나님이 惡한 者의 亨通을 아예 禁止시켰다면, 人間들은 不合理한 것을 하나 하나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提起하기 始作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다 修正하고 고쳐 주신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럼 結局 自由意志는 無色해지고, 꿀벌이나 개미들의 社會처럼 돼 버릴 것입니다.

이처럼 '붕어빵' 속에는 肯定的·否定的 두 가지 意味가 있습니다. 肯定的 意味는 사람이 하나님의 붕어빵이라는 것이고, 否定的 意味는 神正論에 對한 것입니다. 自身의 存在를 人間 앞에서 드러내고 손대기 始作하면, 모든 사람이 빵틀에서 나온 붕어빵과 같아진다고 말씀드렸죠. 수많은 사람들이 '나는 왜 장동건처럼 만들지 않으셨나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不合理합니다. 自由意志가 없어지고, 사랑도 意味가 사라집니다."

-設令 다 똑같아진다 해도, 모두 幸福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人間 社會에서 가장 不合理한 것이 '더러 惡한 者가 亨通하고 善한 者가 苦痛받는 일'이겠지요. 사람들이 提起하는 가장 큰 不平不滿일 것입니다. 말씀드렸듯, 사람들의 不滿을 듣고 惡한 者의 亨通을 禁止시킨다면, 모든 것이 다 똑같아질 것입니다. 自由意志 없는 被造物로 轉落하는 것이지요.

오직 人間에게만 自由意志를 許諾하셨습니다. 그 目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人格的으로 交際하기 위해서입니다. 人格的 交際란 사랑하고 사랑받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全能者가 自身을 '커밍아웃'하고 人間들을 모두 平準化시켜 버리면, 사랑이 없어집니다. 自由意志를 附與하는 瞬間, 人間들 속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不可避합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 어렵습니다.

"이 冊의 主題를 거칠게 要約하자면 '全能者가 들지 못하는 바위를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矛盾되는 狀況이지요. 저는 이 冊을 쓰기 위해 各種 神正論 冊을 읽었습니다. 읽어보니, 全能者를 否定하기 위해 開發한 奇拔한 아이디어들이 많더라고요(웃음).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基督敎人이 아닌가>에서 한 神父에게 質問합니다. '全能者라면 네모난 동그라미를 만들 수 있는가?' 基督敎人은 여기에 答해야 하는 것이지요. 아까 말씀드린 '全能者라면 들지 못하는 바위를 만들 수 있느냐?'는 中世 때부터 있던 質問입니다.

全能者가 어디 있느냐면서 이런 質問을 할 때, 섣불리 對答하지 못하면 全能者의 全能性은 사라집니다. 全能者 談論이 그냥 깨지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對答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全能者가 自身이 들지 못하는 바위를 만든다? '全能(全能)'이라는 말에는 '電池(全知)'가 包含돼 있는데 中世 때부터 이어진 이런 質問, 被造物이 全能者를 비웃으면서 이러저러한 質問을 할 것도 모를 理 없지 않겠느냐고 하겠지요. 全能者가 自身이 들지 못하는 바위를 애써서 만들지 않으면 卑屈한 것이고요. 그렇다고 만들어서 더욱 全能者임을 보여주겠다고 하면, 被造物들이 共感할 수 없겠지요.

全能者는 그런 次元이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기 프로젝트'를 計劃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被造物 中에 人間에게만 '自由意志'를 주시면서 人間을 파트너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려 하십니다. 그런데 '사랑하기'는 全能者가 가장 잘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天地創造입니다. 그리고 '사랑받기'에 있어서는 全能者의 全能함도 쓸모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 全能者가 '造作'을 한다면, 그것은 人間들이 '條件反射'하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비록 小說로 쓰셨지만, '辨證'은 要塞 人氣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사탄의 詭計라고 생각합니다. 冊에는 市場의 '光澤約 장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녹슨 냄비를 반짝반짝 닦아서 보여주는데, 사 와서 해 보면 그만큼 안 됩니다.

辨證이 人氣가 없다는 것은, 머리로는 理解가 되지만 實生活에 適用이 안 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詭計입니다. 小說 첫 部分을 보면, '容恕'에 對한 이야기입니다. 容恕가 事後的 行爲가 아닌 事前的 行爲임을 辨證합니다. 머리로는 理解가 안 됩니다. 實生活에서 누가 容恕를 辭典的으로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나름대로 適切하게 辨證하려 애를 썼습니다.

황의찬
▲李 冊에 對해 이승구 敎授(合同神대)는 推薦辭에서 “韓國말로 神學하고 韓國 사람이 神學하는 일의 좋은 試圖”라며 “가장 어려운 神正論의 問題를 가장 쉽게 接近하도록 貴한 作業을 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웅 記者
事業을 하면 '眞相顧客'李 올 것을 미리 豫想하고 應對 매뉴얼을 만들어놓지 않습니까? 이는 나중 犯罪를 미리 容恕하는 것입니다. 容恕가 充分히 事前的 行爲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實生活에서 容恕를 事後的 行爲로만 認識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詭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2千年 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내 罪를 미리 容恕하셨는가?'에 對한 하나의 對答입니다. '事前的 行爲로서의 容恕'입니다.

깊이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容恕가 事後的 行爲라면 天國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로마 皇帝들은 죽음이 臨迫하면 스스로 穀氣를 끊었습니다. 基督敎를 公認한 콘스탄티누스 皇帝는 죽기 前 洗禮를 받은 것으로 有名하지요. 當時는 洗禮를 罪 謝函으로 認識했기에, 皇帝는 洗禮 받고 나서 또 罪를 지으면 天國에 가지 못할까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穀氣를 拒否하는 것은 罪가 아닙니까? 나중 犯罪를 미리 容恕함받지 않고서는 天國에 갈 사람이 없습니다. 容恕는 事前的 行爲이지요. 冊에서 이런 內容들을 좀 더 仔細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이番 이야기는 反對로, 머리로 理解한다 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學問的으로 이야기한다면 只今처럼 熾烈한 論難만 될 것이기에, 小說을 통해 툭 던져놓는 形式을 取했습니다. 이 冊이 꼭 나와야 하는 理由가 있다면, '神正論'에 부딪쳐 信仰에서 돌아선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트 어만이라는 浸禮敎 牧師이자 神學校 敎授도 聖經에 '神正論'에 對한 解答이 없다면서 宗敎學 敎授로 路線을 바꿨다고 합니다. 그러나 <붕어빵>을 읽고 나면, 聖經에 '對答이 없다'는 말은 안 할 것입니다. 이 冊이 絶對的이라는 건 아니고, 하나의 可能性을 提示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辨證에는 聖靈의 活動과 도우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許諾하신 理性을 통해 全能者에 對해 많은 部分을 理解할 수 있습니다. 100% 可能할 순 없겠지만, 그런 部分에서 聖靈의 도우心이 必要할 것입니다."

-비전이 있으신지요.

"來年이면 64歲가 됩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에 對해 힘 닫는 데까지 쓰고 싶습니다. 올해 冊을 세 卷 썼는데, 앞으로 每年 2卷은 쓰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使命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使命인 것 같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붕어빵'입니다(웃음). 하나님께서 世上을 創造하신 것이 '짝퉁, 붕어빵' 이미지와 닮았습니다. 變症 하면 哲學과 思想, 神學 같은 무거운 主題였지만, 이렇게 가볍게 接近할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 것 같습니다.

좀 操心스러운 말씀이지만, 앞으로 쓸 冊들은 <붕어빵>의 脚註가 될 것입니다. <붕어빵>에서 조금이라도 擧論됐던 神學的 主題들을 補充하기 위한 著述을 準備 中입니다. 神學을 工夫하신 분들은 숨겨진 코드를 發見하실 수 있을텐데, 믿지 않는 분들도 읽어야 하기에 꼭꼭 숨겨놓았습니다.

하나만 例를 든다면, '否定神學(否定神學)'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 아니시다'로 表現하는 것은 可能하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다'고 規定하는 것은 不可能하다는 神學 思潮 -編輯者 週.) 이를 패러디해서 冊 中 '子息은 OOO이라고 말하는 瞬間 틀렸다'고 한 場面이 나옵니다. 意圖的으로 引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하나님은 善하신 분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善하다 惡하다'고 말하기 前에, 全能者는 '~하다'라는 말이 붙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善을 行할 수도, 惡을 行할 수도 있습니다. 全能하시니까요.

그러나 '사랑하고 사랑받기 프로젝트'를 計劃하신 분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일 때, 사랑은 善이고 그 反對는 惡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面에서, 하나님은 善하시다는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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