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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幹현대] 未濟事件의 再構成② 大邱 개구리 少年 失踪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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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濟事件의 再構成② 大邱 개구리 少年 失踪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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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진 記者
記事入力 2015-10-24

우리나라 3大 未濟 事件 中 하나인 大邱 개구리少年 失踪은 大邱 臥龍山에 도롱뇽 알을 採取하러 갔던 初等學生들이 行方不明 된 事件을 말한다. 이 事件을 둘러싸고 온갖 說이 亂舞하면서 아이들 周邊人들에게도 疑心을 보내는 눈초리가 많았다. 當時 事件은 全 國民的인 關心을 받으며 大大的인 警察 搜査가 進行됐으나 아이들을 찾지 못하고 漸次 國民들의 腦裏에서 잊혀졌다. 그러다 11年이 지난 2002年 아이들이 失踪된 臥龍山 中턱에서 개구리 少年들의 遺骨이 發見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頭蓋骨 等 여러 證據들로 아이들이 누군가에 依해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點이다. 殺人犯은 臥龍山 一帶를 잘 알고, 勞動者이거나 勞動者로 일한 經驗이 있으며 殺人 自體를 즐기는 사이코패스 性向의 人物로 推定됐다. 그가 살아 있다면 또다시 犯罪를 저질렀을 可能性도 强하게 提起되고 있다. <편집자 週>


 

도롱뇽 알 採取하러 隣近 臥龍山 올라간 5名의 아이들

그대로 行方不明…警察 總出動 搜索에도 屍身 못 찾아

    

周邊人物 對한 臆測도…2002년 登山客에 遺骨들 發見

勞動者들이 쓰는 鈍器 自國의 遺骨…容疑者도 못 추려

 

 

[主幹현대=조미진 記者] 大邱 개구리 少年 失踪 事件으로 알려진 ‘大邱 聖書 初等學生 殺人 暗埋葬 事件’은 우리나라 ‘3代 未濟 事件’ 中 하나로 1991年 5名의 男子 어린이가 洞네 隣近 臥龍山에 도롱뇽 알을 잡겠다고 나섰다가 行方不明 된 事件이다. 그런데 2002年 아이들의 遺骨이 臥龍山에서 發見됐으며 누군가에 依해 殺害 된 痕跡들이 發見 됐다.

    

1991年 3月 臨時公休日

    

事件의 發端은 이렇다. 全國 市·軍·區議員 選擧로 法廷 臨時公休日이었던 지난 1991年 3月26日 午前 8時 頃 大邱 聖書 初等學校(現 初等學校)에 在學 中 이던 우철원(13·6學年), 조호연(12·5學年), 김영규(11·4學年), 박찬인(10·3學年), 김종식(9·3學年), 金泰龍(10·3學年) 以上 6名의 아이들은 조호연 軍의 집 앞에 모여 놀고 있었다.

 

그때 조호연君의 집에 貰 들어 살던 靑年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 나가서 좀 놀아라’고 말했다. 이에 아이들은 다른 場所와 놀이거리를 생각한 끝에 도롱뇽 알을 採集하러 洞네 隣近 臥龍山에 올라가기로 決定했다.

 

이中 金泰龍(3學年)君은 아침을 먹지 않고 나왔기에 집에 가서 빨리 아침을 먹고 뒤따라가기로 했다. 남은 다섯 名은 粉乳깡筒과 막대기를 들고 臥龍山으로 向했다. 밥을 먹고 아이들을 뒤따라간 태룡군은 臥龍山 入口에서 다른 아이들을 發見했다.

 

그러나 엄마가 ‘너무 멀리 나가서 놀지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山까지 아이들을 좇아가지 않고 곧 집으로 돌아갔다. 이 한 番의 選擇으로 태龍 君은 自身의 목숨을 救하게 됐다.

 

한便 當時 조호연의 兄(中學校 1學年)은 自轉車를 타고 臥龍山을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兄은 ‘도롱뇽 알을 잡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집으로 내려갔다.

 

臥龍山 기슭 마을에 살던 한 아주머니도 일찍 投票를 하기위해 學校 쪽으로 내려가던 中 午前 9時頃 山으로 올라가던 아이들을 目擊했다.

 

또한 우철원(6學年)君과 같은 班 親舊였던 김경열, 이태석 軍도 ‘正午 무렵 철원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臥龍山 入口를 지나는 것을 봤다’ 고 證言하기도 했다.

    

多急하게 들려 온 悲鳴소리          

    

같은 學校 4學年이었던 함승훈 軍도 이날 洞네 兄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採取하기 위해 臥龍山에 올라갔다. 그러다 途中에 兄들과 떨어져 혼자 臥龍山 中턱 무덤가까지 가게 됐다. 그런 渦中이었던 午前 11時 30分 頃 山 위쪽에서 約 10秒 間隔으로 두 次例 多急한 悲鳴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다섯 아이들의 行方은 杳然해졌다.

 

午後 6時가 지나도록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父母들은 아이들을 찾다가 이내 警察에 申告했다. 申告한 時間은 當日 午後 7時 30分이었으며, 警察과 父母는 새벽 3時까지 臥龍山 附近을 뒤졌지만 亦是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當時 警察 人力은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父母들의 申告에도 不拘하고 投票所 管理에 集中돼 있어서 初動 對應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또한 警察은 처음부터 이 事件을 失踪事件이 아닌 偶發的 家出으로 暫定結論을 내리고 搜査에 臨했던 것으로 追後 드러났다.

 

 

▲ 失踪됐던 大邱 개구리少年들.     © 主幹현대

 

 

2002年 地域 媒體 報道에 따르면 개구리 少年이 失踪된 지 一週日 後인 지난 1991年 4月1日 當時 大邱 達曙警察署 會議記錄에는 달서경찰서가 이 事件을 集團家出로 미리 規定하고 少年契에서 單獨 處理한 것으로 돼 있는 것이다.

    

事件 當日 臥龍山에서 悲鳴소리를 들었다는 함승훈 君의 證言도 警察은 큰 意味를 두지 않고 지나쳐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이 事件은 放送 媒體 等을 통해 霎時間에 알려졌고 當時 大統領이었던 노태우는 特別指示를 내려 全國의 警察과 軍人을 總動員해 現場인 臥龍山을 包含해 全國을 뒤졌다. 그러나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警察은 遺家族의 主張대로 臥龍山 一帶를 集中 搜索하지 않고 이를 中間에 中止하고는 다른 方向으로 搜査 人力을 動員했다. 申告接受 以後 이틀 동안 臥龍山 搜索을 한 後 家出로 方向을 旋回해, 搜査範圍를 擴大한 것이다.

    

警察은 臥龍山 一帶 搜索을 3月26日과 27日 兩日間 8回에 걸쳐 550名이 投入된 反面 有害業所 等의 搜査에 1076名을 動員했다.

    

警察 搜査의 誤謬와 疑惑

    

아울러 事件 發生 直後 金品을 노린 犯人으로 推定되는 30代 男子의 脅迫電話가 걸려왔으나 이를 끝까지 外部에 公開하지 않음으로써 結果的으로 犯人을 놓쳤다는 自省이 搜査 警察官과 失踪 어린이 家族들에 依해 提起되기도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5名의 아이들이 失踪된 지 2~3日 뒤 犯人으로 推定되는 30代 男子가 終熄軍의 집과 外三寸집으로 잇따라 電話를 걸어왔다. 이들은 現金 400萬원을 臥龍山 正常으로 가지고 오라고 要求했지만 警察은 돈을 노린 拉致犯들의 所行으로 알려질 境遇 模倣犯罪가 追後 發生할 것을 憂慮해 이를 公開하지 않았다.

    

첫 番째 脅迫 電話에 따라 돈을 갖고 約束 場所에 갔지만 犯人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外三寸 집으로 온 電話에 對해선 警察이 별다른 對應을 하지 않은 것으로 傳해진다.

 

失踪 當時 搜査팀에 屬해있던 한 警察官은 言論을 통해 “犯人이 終熄軍의 집으로 脅迫電話를 했다는 事實을 一切 外部에 알리지 말도록 上部로부터 指示 받았다”며 “當時에는 事件을 單純 家出 쪽으로 몰아가려는 雰圍氣였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一角에선 當時 社會雰圍氣에서 ‘별 다른 理由 없이 아이들을 誘拐, 殺害하는 犯罪’事例가 國內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에 警察이 이를 생각하기 어려웠다는 分析을 하기도 한다.

   

또한 當時는 아이들과 關聯해 各種 虛僞申告가 濫發하는 탓에 搜査를 擔當하는 警察들의 士氣를 떨어뜨리는 等 問題도 많았다. 그만큼 國民들의 關心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때문에 많은 陰謀說이 提起되기도 했다. 카이스트에 在職 中이던 某 犯罪心理學者는 失踪된 김종식君의 아버지인 김철규가 아이들을 죽이고 집 近處에 暗埋葬 했다고 主張하기도 했다. 該當 陰謀論은 이 事件을 脚色한 映畫 <아이들..>에서 仔細하게 나오기도 했다. 이로 因해 김철규氏는 陰謀의 主人公이 되며 괴로워했고 또한 事件에 對한 後遺症으로 술로 삶을 보내다 2001年 肝癌으로 生을 마감했다.

    

登山客이 遺骨 發見

    

그렇게 아이들을 찾지 못하고 11年이 지난 2002年 9月26日, 도토리를 주우러 臥龍山에 올랐던 한 登山客에 依해 失踪된 다섯 아이의 屍身이 發見됐다. 屍身은 臥龍山 中턱에 묻혀있었고 이곳은 過去 軍部隊 射擊場 敷地였던 場所였다. 또한 隣近 아이들이 彈皮를 주웠던 곳이어서 誤發彈에 依해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推測도 나왔다.

    

그런데 遺骨 發掘 當時 4名의 遺骨이 먼저 發掘됐고, 追後 마지막 한 名의 遺骨이 追加로 發見됐다. 이 때 먼저 發掘된 4名 兒童의 遺骨은 허술한 方法으로 發掘됐으며 以後 追加로 發見된 遺骨만이 法醫學者에 依해 제대로 된 道具와 方法으로 發掘됐다. 때문에 아이들 遺骨에서 齒牙 損失 等이 많았던 것이 잘못된 遺骨 發掘에 依한 것이라는 指摘이 提起되기도 했다.

    

또한 이때 警察은 正確히 剖檢도 안 된 狀態에서 ‘아이들은 遭難을 當했고 低體溫症으로 死亡한 것이다’라고 結論을 내리는 愚를 犯했다.

    

이러한 警察의 主張은 法醫學者들과 遺家族들의 反撥에 부딪혔다. 

 

첫째, 臥龍山은 300m도 안 되는 野山이라 遭難當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充分히 山을 내려올 수 있는 나이였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우철원君은 13살이었으며 實際로 2011年 SBS <그것이 알고 싶다> 製作陣이 13살 아이들을 對象으로 實驗해 본 結果 모두 山을 내려오는 데 成功하기도 했다.

늦은 밤이라고 해도 바로 近處에 마을이 있어 불빛을 쉽게 捕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한 아이의 옷소매가 뒤로 묶인 狀態였고 이 매듭의 形態나 强度가 풀리지 않도록 잘 묶여진 形態로 普通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아닌 專門家나 關聯 業界 從事者들이 쓰는 形態였음에도 警察은 ‘低體溫症에 걸리면 體溫을 錯覺하는 等 理解하기 힘든 異常한 行動을 할 수도 있다’며 一蹴했다.

    

結局 警察의 立場과 달리 法醫學者들은 剖檢을 통해 아이들의 사인을 ‘鈍器나 凶器에 依한 他殺’로 結論을 내렸다.

 

▲ 개구리少年 失踪 事件을 다룬 지난 2011年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場面들.     © 主幹현대

    

 

여러 痕跡들에 비춰 遺骨이 發見된 地點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少年들이 누군가에 依해 殺害돼 옮겨졌을 可能性이 說得力을 얻었다. 아울러, 頭蓋骨 關節部分 一部 骨折現象과 3具의 頭蓋骨이 甚하게 損傷된 點은 凶器 等에 依해 頭蓋骨 및 齒牙에 强力한 衝擊이 加해 졌을 것으로 推定됐다.

 

다음은 2002年 아이들의 屍身과 場所 等을 綜合해 法醫學팀이 밝힌 少年別 死因이다.

    

▲우철원 - 頭蓋骨 左右側豆腐에 關東된 구멍의 모서리에는 ㄷ字 形態의 틈으로 갈라져 있으며 작은 구멍은


끝이 아주 날카로운 物體가 머리 위에서 아래로 衝擊을 加해 發生한 痕跡이다. 頭蓋骨의 25個의 損傷이 경사지게 나타났고 左側 두政府 陷沒骨折 亦是 ㄷ字 形態의 損傷과 구멍의 가장자리가 銳利한 것도 衝擊을 준 物體의 가장자리가 銳利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김종식 - 앞머리에 貫通된 損傷이 있고 腐蝕과 함께 이끼가 끼었지만 事後에 農器具나 돌 等에 依해 損傷될 수는 없다. 損傷도 우철원君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鈍器에 依한 損傷이며 頭蓋骨 右側 側豆腐의 10㎝假量 船上骨折과 뒷머리의 작은 損傷도 死亡 前 衝擊에 依한 것이다.

    

▲김영규 - 右側 側豆腐에 주먹 또는 鈍器로 價格했을 境遇 나타나는 陷沒이 發見됐다. 精密檢査한 衣類品 中 옷깃과 매듭, 단추部分이 찢어져 있으며 이는 剛한 힘에 依한 것으로 推定된다.

    

▲박찬인 - 白骨化가 가장 甚하게 나타났다. 이는 頭蓋骨이 地上에 露出돼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작은 損傷이 있었지만 腐蝕 또는 自然 風化에 依해 나타날 수 있어 사인을 斷定할 수는 없다.

    

▲조호연 - 少年들의 頭蓋骨 中 가장 狀態가 良好, 死因 所見이 없다.

    

이 밖에도 풀리지 않는 疑惑들은 存在한다.

于先 事件 當時 廣範圍한 人員이 動員되었음에도 10年이 지난 後에야 屍身이 發見됐다. 臥龍山은 앞서 말했듯이 300m도 안되는 작은 野山에 不過한데도 屍身이 發見되지 않았다는 것.

    

앞서 法醫學者들은 아이들이 殺害되고 時差를 두지 않고 埋藏된 것으로 推定했는데 屍身이 發見된 場所는 수풀이 우거진 場所였고 비가 오면 실개川이 만들어지는 場所였기에 當時에는 發見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數萬名을 動員해 臥龍山 隣近을 찾았기에 이는 如前히 疑問點이다.

    

둘째, 아이들이 마을과 매우 멀리 떨어진 山 反對便에 묻혀있었다는 點이다.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잡으러 가봤자 山 앞쪽 中턱日 것으로 推定되는데, 反對쪽 山 中턱에서 屍身이 發見됐다. 때문에 犯人이 아이들을 誘導했거나 强制로 끌고 갔을 確率 等 여러 可能性이 提起 됐다.

    

셋째, 한 두名이 아닌 5名의 아이들이 被害를 當했다는 點이다. 아무리 聖人이라 하더라도 혼자 5名의 아이들을 穩全히 잡아둘 수 없을 거라는 推定이다. 3名을 自身의 手中에 넣더라도 1~2名은 달아날 公算도 있다. 그런데 5名이 아이들이 全部 犧牲된 것이다.

    

넷째, 犯人은 周圍 地理를 잘 알며, 使用된 凶器(鎔接用 망치)를 볼때 周圍의 勞動者 出身이다. 周圍 地理를 알지 못하면 山에서 또한 헤맸을 것이며, 適切한 賣場자리도 定하지 못했을 것인데 그런 痕跡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時間은 너무 지나버렸고, 警察은 그 以上의 證據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 事件은 容疑者 조차 추려내지 못하고, 事件 發生 15年이 지난 2006年 3月 26日 公訴時效가 滿了되며 永久 未濟 事件이 돼 버렸다.

犯人이 누구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追加 犯罪를 저질렀는지 等 모든 게 迷宮 속에 남게 된 것이다.

 

happiness@hyunda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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