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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歷史의 展望 | 광주광역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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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歷史의 展望

光州歷史의 展望
  • 湖南地方은 韓半島의 西南部에 位置하여 溫和한 氣候와 기름진 平野를 두루 갖춘 天惠의 고장이며, 그 中心 都市인 光州는 일찍부터 政治·文化·經濟의 中樞的 役割을 遂行했다. 先史時代에 이미 先進文化를 누렸음은 신창동遺跡을 통해 살필 수 있으며, 馬韓이나 백제時代에도 相當한 役割을 遂行했다. 新羅의 三國統一 以後에는 全南地方에 無主가 設置되어 그 中心地가 되었으며, 後三國時代에는 甄萱이 이곳을 基盤으로 後百濟의 王이 되기도 했다. 統一新羅와 高麗時期에는 中央貴族 中心의 社會로 되면서, 이 地方이 疏外되었다. 高麗末 朝鮮初의 轉換期에는 高麗에 節義를 지키고 申王朝의 開創에 反對한 忠臣들이 이곳을 찾아 隱居하기에 이르렀다.

    바르게 살고 나라와 民族을 사랑하는 생각은, 人間이 本來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의 뿌리요 行動의 바탕이다. 사람은 理性的 動物이다. 善과 惡을 區別할 줄 알며, 슬기롭게 行動하고 떳떳한 삶을 營爲함으로써, 自身의 人生을 보람있게 꾸미고 싶어한다. 이러한 本來의 착한 마음이 世俗과 物質에 誘惑되어, 混濁하고 탐욕스럽게 되어 自身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키게 되는 것이다. 特히 政治權力은 모든 것을 左右하는 魔力을 지니고 있어, 旣得權者들이 恣行한 獨善과 跛行으로 우리 歷史가 그르쳐졌을 뿐 아니라 수많은 犧牲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天惠의 環境에 따른 넉넉한 마음과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精神으로 開放的이며 仔詳한 性格으로 義理를 所重하게 생각하는 이 地方 사람들은, 政治的 周邊部에 있으면서도 不遇하고 올곧게 살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받아주어 그들의 安息處가 되었다.

    高麗末에 名分과 義理를 重視하는 性理學이 傳播되자, 新進士大夫들은 그것을 그들의 思想的 基盤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蒙古에 阿附하여 權力과 農場을 獨占했던 權門勢族들을 攻擊하였다. 이어서 李成桂가 威化島回軍을 斷行하여 朝鮮王朝를 세우자, 士大夫들은 이를 따르는 現實派와 高麗王朝에 충성하고 節義를 지키려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정도전 . 照準 . 남은 . 倦勤 等은 朝鮮王朝에 參與하여 富貴를 누리는 사람들이었고, 정몽주 . 異色 . 吉再 . 이숭인과 杜門洞의 賢人들은 忠節을 生命보다 重要하게 생각하였다.

    李成桂가 朝鮮王朝를 創建하자 忠節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杜門洞에 隱居하였다. 그런데 이곳마저 불을 질러 못살게 하자, 이들은 다시 全國으로 흩어져 갔다. 이들 中 一部가 光州地方에 내려와 定着하였는데, 光州의 범세동과 탁광무 . 潭陽의 전신민 . 靈巖의 김자진 . 順天의 詔諭 等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王權을 안정시킨 李成桂나 太宗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높은 節槪와 德望을 所重하게 지키면서 弟子들을 길렀다. 한便 太宗의 政變과 世祖의 簒奪 그리고 燕山君의 暴政과 그 뒤를 이은 士禍(士禍)에서, 언제나 바른 便에 서고 批判的인 言論을 편 사람들과 그러한 世上을 嫌惡한 사람들 가운데 一部가, 政治의 周邊夫人 光州地方으로 落鄕 隱居했다. 이러한 現象은 黨爭의 時期에도 繼續되어, 光州地域은 流配地나 隱居地로서 恒常 많은 被害者와 隱居者들이 選擇하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光州를 비롯한 이 고장에는 正義가 넘쳐흐르게 되었으며, 그것은 光州地域 사람들을 支配하는 情緖가 되었다.

    이러한 地域 情緖가 있었기에 나라와 民族이 어려움에 處할 때면, 이 고장 사람들은 奮然히 떨쳐 일어나 救國의 隊列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倭亂에서 瀕死狀態에 빠진 이 나라를 救出했으며, 胡亂 때에도 勤王義兵에 앞장서서 參與했다. 封建勢力의 搾取로 農民大衆이 疲弊하여 沒落하게 되자, 1862(壬戌)年에는 全國的으로 70餘 個 地方에서 農民들의 抗爭이 일어났다. 當時 全羅道에서는 38個 地域이, 그 中 全南에서는 18個 地域이, 各各 農民抗爭의 隊列에 參與하여 不條理로 가득찬 못된 世上을 打倒하려 했다. 그리고 그 後 1894年에는 다시 東學農民革命을 展開함으로써, 反外勢의 自主獨立과 反封建의 近代化를 爭取하는 데 앞장선 主人公이 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東學農民革命을 武力으로 억누른 日本侵略者들이 이 나라를 倂合하려 하자, 最後까지 義兵抗爭을 展開한 愛國者들도 바로 光州를 비롯한 全南地域 사람들이었다. 아울러 國權을 빼앗고 民族을 奴隸 狀態로 빠뜨린 日本侵略者들의 彈壓과 收奪에 對抗하여 앞장서 싸우는 일에서도, 光州를 비롯한 湖南人들이 빠질 수가 없었을 것임은 勿論이다. 또한 이들은 3·1運動에도 積極 參與하였지만, 1929年의 光州學生獨立運動 때에는 住民 모두가 하나가 되어 日帝에 積極的으로 抗拒하였다. 뿐만 아니라 農民運動의 一環인 小作爭議가 가장 活潑하게 展開된 곳도 바로 이곳이었으며, 勞動爭議나 社會運動 및 國內外의 獨立鬪爭에 光州를 비롯한 全南人들이 恒常 앞장서 있었다.

    한便 解放과 함께 强要된 分斷과 獨裁政權에 對抗하여 가장 强力한 鬪爭을 展開한 것도 湖南人이었다. 正義의 便에서 나라와 民族을 지켜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 光州를 中心으로 한 湖南人들이었다고 하여 過言이 아닌 實情인 것이다. 이것들이 一時的이요 偶發的인 것이 아니라, 湖南 傳統의 意向(義鄕)精神의 繼承이요 發展이라고 하는 것은, 以上의 歷史가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數千年 동안의 前近代 社會는 王과 그 밑에 寄生하는 爲政者를 비롯한 官僚들의 世上이었다. 그들은 旣得權 勢力으로 君臨하면서, 民衆을 彈壓하고 收奪하여 나라와 歷史를 못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民衆이 主體가 되어 歷史를 발전시키면서, 안으로는 그들을 짓누르고 搾取하는 封建勢力을 打倒하고, 밖으로는 外勢의 政治的·經濟的 侵略을 粉碎함으로써, 民主世上과 自主獨立國家를 만들어 가는 時代가 近·現代人 것이다.

    우리나라의 歷史도 그러한 面에서는 世界史와 櫃를 같이하여 왔다. 彈壓과 收奪을 일삼아오던 支配層을 打倒하여 民主世上 . 大同世上을 만들고, 우리나라를 侵犯하는 外勢를 물리쳐 自主獨立을 이루고자, 近代史의 몸부림이 悽絶하게 展開되었던 것이다. 1894年의 東學農民革命은 바로 우리나라에서의 그와 같은 近代史의 序幕이었다. 이때 光州를 비롯한 湖南人들은 反封建의 近代化와 反外勢의 自主獨立을 爭取하기 위해서 일어섰으며, 여기에 數百萬이 加擔하여 近 一年에 걸쳐 革命이 進行되는 동안 數十萬이 犧牲되었다. 東學農民革命의 發祥地이자 主導勢力의 根據地로서 最後의 抗戰地域이었던 光州地方은, 日本侵略者와 이에 同調한 官軍들 그리고 發惡하는 旣得權 勢力에 依해서 徹底하게 殺傷당하고 收奪되었던 悲劇의 現場이었다. 그러나 光州地方 사람들은 이에 挫折하지 않았다. 日本侵略者들이 이 나라를 빼앗으려 하자, 再次 韓末義兵의 中心으로서 最後까지 抗爭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相當한 打擊을 주었지만, 그 報復으로 엄청난 殺傷과 財産의 掠奪을 當할 수밖에 없었다. 日本侵略者들은 南韓大討伐作戰이라는 全南義兵 掃蕩戰을 展開하여, 이 地域 義兵의 씨를 없앤 後에야 나라를 빼앗을 수 있었다.

    以後 日帝强占 36年 동안에도 帝國主義의 彈壓과 收奪에 正面으로 挑戰하면서 歷史를 발전시켰으며, 農民運動의 本고장이자 勞動運動과 社會運動의 溫床으로서 韓國의 近代化에 尖兵노릇을 堪當했다. 數千年 동안 支撐해 온 旣得權 體制는 韓日合邦으로도 깨지지 않았다. 旣得權 勢力은 日帝侵略者들의 앞잡이가 되어, 自身들의 地位를 더욱 鞏固히 하였다. 따라서 이의 打倒를 위한 獨立鬪爭은 곧바로 近代化 運動으로 連結되었다. 日帝 36年이 聯合國의 勝利로 終止符를 찍었지만, 이 나라에서 民主主義와 自主獨立은 遙遠하기만 한 課題였다. 韓半島가 美·蘇間 冷戰體制의 角逐場이 되었으며, 軍政을 거쳐 登場한 南北政權들의 獨裁體制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反封建의 民主化 鬪爭과 反外勢의 自主獨立을 志向하는 近代化 運動은 繼續되었으며, 그러한 싸움에는 언제나 近代化의 旗手였던 光州를 비롯한 湖南人들이 앞장섰다. 特히 1980年의 光州民衆抗爭은 4·19 革命을 통해 爭取된 民主主義를 壓殺한 軍部獨裁에 正面으로 抗拒한 것이었으며, 人間의 尊嚴性을 확인시켜 이 나라의 歷史發展에 큰 貢獻을 하였다. 4·19 革命으로 씨뿌려진 민주權力은, 權力에 굶주린 政治軍人들의 5·16 軍士쿠데타로 顚覆되었다. 그들은 亡國的인 地域感情까지 刺戟하면서 獨裁體制를 强化했고, 南北分斷을 固着化시켜 獨裁政權을 延長하는 일에만 血眼이 되었다. 朴正熙 軍事政權은 날로 離叛하는 民心을 鐵拳으로 封鎖하기 위해 維新獨裁를 恣行했으며, 獨占財閥과 野合하고 言論들의 保護를 받으면서 民衆들을 彈壓하고 地域差別을 强化시켜 나갔다. 1979年 10·26으로 그 指導者 朴正熙가 被殺되자, 그들의 保護와 特惠를 받아오던 全斗煥 . 노태우 等 新軍部는 12·12軍士 叛亂을 일으켰고, 5·17 戒嚴擴大를 통해 軍事政權을 延長시키려 했다. 이에 正面으로 맞서서 民主主義와 正義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바로 光州를 비롯한 全南人이었으며, 이때의 5·18精神은 1987年 6月抗爭으로 繼承되어 軍事政權에 致命打를 加하였다. 그러므로 1894年의 東學農民革命에서부터 1980年 光州民主化運動까지의 近代化 過程은, 光州를 비롯한 全南이 그 中心舞臺였고 이 고장 사람들은 언제나 그 主役이었다
市民 滿足度 調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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