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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憶해야 할 5·18民主化運動 | 5·18民主化運動 | 5·18記念財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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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憶해야 할 5·18民主化運動

5·18 민주화운동은 아시아 민주화운동의 희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5·18 民主化運動은 1980年 5月 18日부터 27日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頂點으로 한 當時 新軍部 勢力과 美軍의 指揮를 받은 戒嚴軍의 鎭壓에 맞서 光州市民과 全南道民이 ‘非常戒嚴 撤廢’, ‘維新勢力 剔抉’等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民主主義 爭取를 위해 抗拒한 歷史的 事件입니다. 抗爭 期間 中 22~27日 닷새 동안은 市民들의 自力으로 戒嚴軍을 물리치고 光州를 解放區로 만들어 世界史에서 그 由來가 드문 自治共同體를 實現하기도 했습니다.

戒嚴軍에 依해 鎭壓당한 以後5·18民主化運動은 한때‘北韓의 使嗾에 依한 暴動’으로 罵倒당하기도 했으나 眞相糾明을 위한 끈질긴 鬪爭으로 1996年에는 國家가 記念하는 民主化運動으로, 2001年에는 關聯 被害者가 民主化 有功者로, 5·18 墓地가 國立5·18 墓地로 昇格되어 그 名譽를 穩全히 回復하였습니다. 5·18 民主化運動은 韓國 民主主義의 分水嶺이 되는1987년 6月 抗爭의 動力이 되어 民主主義 爭取와 人權回復으로 이어졌습니다.

只今 5·18民主化運動은 獨裁政權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民衆에게 貴重한 經驗을 提供해주고 있으며, 同時에 民主化運動이 志向해야 할 精神的인 指標로도 作用하고 있습니다. 또한 全 世界人들에게는 偉大하고 아름다운 事件으로 記憶되고 있습니다. 韓國 民主主義의 밑거름 役割을 했다는 面에서 光州와 大韓民國의 民衆은 5·18 精神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으며, 그 精神을 民主·人權·平和·統一 等 새로운 時代에 새롭게 提起된 課題로까지 擴張시켜나가고 있습니다.

‘朴正熙 時代’ 18年의 終末과 民主主義의 餘名

1961年 5月 16日, 軍部가 武力으로 國家 權力을 掌握했다.

4·19革命이 일어나고 이듬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政權을 簒奪한 軍部의 中心엔 日帝 强占期 日本 陸軍士官學校를 卒業하고 關東 軍少尉로 任官한 經歷을 지닌 朴正熙가 있었다. 朴正熙 政權 아래 값싼 勞動力과 農漁民의 犧牲을 바탕으로 한 輸出 中心의 ‘先 成長 後 分配’ 政策으로 開發獨裁가 이뤄졌다. 이는 政治·經濟·社會分野의 수많은 不均衡을 일으켰다. 이에 對해 國民들이 거세게 反撥했지만 朴正熙 政權은 三選改憲, 維新憲法, 緊急措置 等을 통해 軍事獨裁 體制를 維持하려 했다.

暴壓性을 더해가던 軍事獨裁는 1979年 10月 16日 ‘ 部·馬 民主抗爭 ’을 契機로 難關에 부딪쳤다. 結局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月 26日, 朴正熙는 部下였던 김재규 의 銃에 依해 죽게 된다. 軍事獨裁에 呻吟하던 國民들은 朴正熙의 死亡을 韓國 民主主義의 새로운 餘名으로 받아들였다.

김재규 현장검증(박정희시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사 제공
김재규 現場檢證(朴正熙弑害) -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경향신문사 提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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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主義의 餘名을 짓밟은 ‘12ㆍ12 軍事政變’과 ‘5ㆍ17’ 戒嚴 擴大

그러나 朴正熙가 死亡한 後, 新軍部는 國家 權力을 掌握하기 위해 ‘ 12ㆍ12 軍事政變 ’을 일으켰다. 이에 反하여 在野人士와 主要 野黨議員은 ‘戒嚴解除와 民主化 履行’을 主張했고, 全國의 수많은 大學生은 學院의 自律化와 民主化를 要求했다. 民主化에 對한 熱望이 社會 全般에 걸쳐 噴出되던 ‘80年의 봄’이었다.

1980年 5月 10日, 23個 大學 代表로 構成된 全國 總學生 會長團은 ‘ 非常戒嚴의 卽刻 解除, 전두환ㆍ신현확 等 維新殘黨의 退陣 ’ 等을 담은 決議文을 布告하였고, 거리示威를 計劃했다. 이런 示威의 兆朕을 感知한 전두환 中央情報部長은 北韓이 南韓을 侵略할 兆朕을 보인다는 理由로, 非常警戒態勢 突入 命令을 내렸다.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민족민주화대성회 참석을 위해 교문을 벗어나 금남로로 향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교수들, 이들 뒤를 학생들이 따르며 민주주의를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大型太極旗를 앞세우고 民族民主化大聖會 參席을 위해 校門을 벗어나 금남로로 向하고 있는 全南大學校 敎授들, 이들 뒤를 學生들이 따르며 民主主義를 위한 口號를 외치고 있다.

5月 13日부터 民主化를 要求하는 사람들은(특히 大學生을 中心으로) 거리示威를 始作했다. 5月 15日 서울驛 앞 集會는 그 頂點을 이뤘고, 그날 밤 신현확 國務總理는 示威를 그만두라는 特別談話를 發表했다. 그에 反撥한 示威隊는 ‘서울驛 回軍’을 斷行했고, 野黨 指導者들은 政府 側에 ‘19日까지 時局收拾對策에 對한 答辯을 하라’ 要求했다. 그러나 新軍部는 5月 17日 24時를 期해 全國 戒嚴令 擴大 를 施行했다.

示威는 서울뿐만이 아닌 光州에서도 展開되었다.

5月 14日, 전남대학교 總學生會長이던 박관현을 筆頭로 大學街와 全南道廳 一帶에서 거리示威가 벌어졌다. 示威를 벌이던 사람들은 “戒嚴令을 解除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는 口號를 외쳤다.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
全南 道廳 앞 廣場에서는 噴水臺를 中心으로 2萬 餘名의 市民과 學生들이 모여 ‘民族民主化大聖會’를 열고 大大的인 횃불行進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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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 正門 앞에서 觸發된 5ㆍ18民主化運動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學校正門에서 戰警과 對峙하고 있는 전남대生들.

國民의 期待와 要求를 저버린 新軍部의 ‘戒嚴令 擴大’는 많은 이들이 示威에 加擔하게 만들었다. 新軍部는 在野 政治人과 民主化運動 關聯者를 示威의 中心勢力이라 여겨 年金하고 拘禁했다. 또 國會를 비롯한 政府機關, 大學, 各種 言論社와 放送社 等에 戒嚴軍을 駐屯시켰다. 이때, 전북대학교에 駐屯한 戒嚴軍에 依해 이세종 學生이 死亡하는 事件이 發生하기도 했다.

>+(십자)완장을 찬 위생병마저 페퍼포그 차량 옆에서 저항의지도 없는 학생을 곤봉으로 힘껏 내려치고 있다.
+(十字)腕章을 찬 衛生兵마저 페퍼포그 車輛 옆에서 抵抗意志度 없는 學生을 棍棒으로 힘껏 내려치고 있다.

5月 18日 戒嚴軍은 全南大學校 正門 앞에서 登校를 하는 學生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學生들이 거세게 抗議하자 戒嚴軍은 鎭壓棒을 앞세워 學生들을 毆打하고 連行하기 始作했다. 이를 挽留하려던 市民까지도 暴行을 當했다. 登校하지 못한 學生들은 이런 戒嚴軍의 暴力을 알리기 위해 全南道廳으로 進出했다. 消息을 傳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道廳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市民은 消極的이었고, 組織化되지 않았다.

以後 戒嚴軍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解散하라는 威脅과 暴力을 加했다. 戒嚴軍의 鎭壓棒은 警察의 鎭壓棒과는 다른 形態로, 毆打를 當한 市民은 深刻한 負傷을 입었다. 戒嚴軍의 殘忍함에 憤怒한 市民이 戒嚴軍의 意圖와는 달리 거세지고 集團化되자, 戒嚴司令部는 光州地域의 通行禁止 時間을 저녁 7時로 調整했다.

젊은 부부가 금남로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가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젊은 夫婦가 금남로2街를 지나다 空輸部隊가 휘두른 棍棒에 머리를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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戒嚴軍의 增派와 民主化運動의 本格化

경찰병력이 시위군중에 밀리기 시작하자 금남로에 재투입된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받쳐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警察兵力이 示威群衆에 밀리기 始作하자 금남로에 재투입된 戒嚴軍이 兩손에 鎭壓棒을 받쳐들고 示威群衆을 向해 前進하고 있다.
19일 오후3시경 계엄군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댔다
19日 午後3時頃 戒嚴軍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出動, 全 地域을 들쑤셔댔다.

5月 19日 새벽 3時頃 增派된 戒嚴軍이 광주역에 到着했다. 市民의 抵抗은 極甚해졌고, 都心곳곳에서는 市民과 戒嚴軍의 激烈한 對峙와 衝突이 일어났다. 裝甲車와 헬기까지 動員하던 戒嚴軍은 結局 發砲하기에 이르렀다.

19日 午後 4時 30分頃 , 當時 高等學生이었던 김영찬 軍은 桂林派出所 隣近에서 戒嚴軍이 쏜 銃에 맞아 重傷을 입었다. 前날 戒嚴軍에게 영문도 모른 채 無慈悲하게 毆打당했던 聽覺障礙人 김경철 氏도 19日에 死亡했다.

20日 午前 8時頃 , 戒嚴 當局에 依해 中學校와 高等學校에도 休校令이 내려졌다. 午後가 되자 都心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戒嚴軍은 鎭壓棒으로 이를 沮止하려 했다.

午後 6時 40分頃, 금남로에는 버스, 貨物車, 택시 等으로 構成된 200餘 臺의 車輛 示威隊가 出現했다. 戒嚴軍과 警察은 催淚彈과 가스로 이를 沮止하고, 搭乘者를 攻擊했다. 사람들은 奴僮廳과 稅務署로 몰려가 政府의 殘酷한 鎭壓을 糾彈했으며, 光州의 狀況을 제대로 報道하지 않는 放送局에 찾아가 抗議하기도 했다. 이 過程에서 光州 MBC放送局 建物에 火災가 發生하기도 했다.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의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있는 행동이었으며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午後 7時頃 무등競技場을 出發한 200餘臺의 車輛示威는 戒嚴軍의 蠻行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目擊한 運轉技士들의 勇氣있는 行動이었으며 5月 抗爭의 最大 轉換點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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戒嚴軍의 集團 發砲, 市民軍의 登場, 撤收하는 戒嚴軍

계엄령 철폐를 외치는 시민들이 광주 동구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부대원 및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19회 전라남도민 체육대회 아치가 당시를 알려주고 있다
戒嚴令 撤廢를 외치는 市民들이 光州 東區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空輸部隊員 및 警察과 對峙하고 있다. 19回 全羅南道民 體育大會 아치가 當時를 알려주고 있다.

5月 21日 午前 2時 , 이윽고 光州와 外部를 連結하는 電話가 遮斷되었다. 都心 곳곳에서 戒嚴軍에 依해 悽慘히 殺害된 屍身이 發見되었고, 都心 여기저기 火災로 말미암은 불꽃과 煙氣가 피어 올랐다.

午前 8時頃 , 戒嚴軍 사이에서 誤認에 依한 交戰이 發生하여 軍人 多數가 死亡하기도 했다.

午後 1時頃 , 全南道廳을 向한 市民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戒嚴軍은 沮止線을 突破하려는 市民을 向해 銃을 亂射했다. 狙擊手는 市民을 向해 照準 射擊을 했고, 銃彈에 맞은 市民은 次例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戒嚴軍의 射擊은, 屍身을 隊列에서 끌어내고 負傷者를 病院에 後送하려는 市民에게도 向했다. 光州 市內의 病院은 移送된 患者와 屍身으로 넘쳐났다. 戒嚴軍이 鎭壓을 위해 銃器를 使用하자 市民은 스스로를 武裝하기 始作했다. 아시아自動車 工場에서 裝甲車 等의 車輛을 確保하고 光州·全南 一帶의 警察署와 豫備軍 彈藥庫에서 武器를 꺼냈다. 武器를 確保한 市民들은 漸次 ‘市民軍’이란 이름으로 編制되었고 以後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戒嚴軍과의 攻防은 市街戰 樣相을 띠었다.

結局, 午後 5時 30景 戒嚴軍은 全南道廳에서 撤收하기에 이른다.

시민군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내를 질주하자 시민들이 박수치며 격려하고 있다.
市民軍들이 太極旗를 휘날리며 市內를 疾走하자 市民들이 拍手치며 激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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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立된 市民共同體의 抗戰

광주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이 쏟아져나와 주먹밥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했다.
光州市內 各 洞마다 婦女子들이 쏟아져나와 주먹밥을 만들거나 飮食을 만들어 市民軍들에게 提供했다.

都心에서 물러난 戒嚴軍은 光州의 外郭을 둘러싸고서 光州와 全南을 오가는 市民을 向해 銃을 쏘며 通行을 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戒嚴軍의 銃彈에 목숨을 잃었다. 市民軍이 全南道廳을 사수한 5月 21日부터 26日까지의 7日 동안, 光州에서는 市民 自治制 가 實施되었다. 사람들은 戒嚴軍과 熾烈하게 부딪혔던 現場을 收拾하기 始作했다.

부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룬 광주시내 각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광주시민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헌혈에 앞장섰다
負傷者들로 超滿員을 이룬 光州市內 各 病院에서 피가 不足하다는 消息이 알려지자 많은 光州市民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獻血에 앞장섰다.

以後 全南道廳 噴水臺에서는 每日 ‘ 市民蹶起大會 ’가 開催되었다. 蹶起大會에서는 事件의 眞相과 情況을 알리는 聲明書와 鬪士會報 等의 油印物이 配布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發言함으로써 難局을 打開하기 위한 智慧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等을 代價 없이 나눴고, 負傷者를 돕기 위해 獻血을 하는 等 함께 살아가는 共同體를 實踐했다.

新軍部는 他 地域에 光州가 ‘ 治安 不在 狀態 ’인 곳이라 傳했다. 收拾對策委員會를 꾸린 光州 市民은 戒嚴軍 代表와 만나 協議를 導出해내려 했지만, 肯定的인 結果를 가져오진 못했다.

5月 26日 , 戒嚴軍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道廳을 向했다. 김성용 神父를 비롯한 市民 代表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進入을 沮止했고, 艱辛히 하루를 버텨냈다.

항쟁당시 광주는 무정부상태였지만 시민들이 구성한 수습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모아내고자 했다
抗爭當時 光州는 無政府狀態였지만 市民들이 構成한 收拾對策委員會를 中心으로 光州市民들은 自發的으로 秩序를 지키고 어려운 難局을 打開하기 위한 智慧와 勇氣를 모아내고자 했다.
항쟁기간 전남도청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고, 항쟁지도부는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한편 시국을 성토하였다
抗爭期間 全南道廳앞 廣場은 事態의 推移를 알고자 하는 市民들로 가득 메워졌고, 抗爭指導部는 民主守護汎市民蹶起大會를 통해 事態의 本質을 알리는 한便 時局을 聲討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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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南道廳을 지켰던 사람들과 戒嚴軍의 再進入 그리고 15年間의 5·18精神 繼承鬪爭

시내를 재장악하기 위해 화정동에 위치한 ‘돌고개’를 넘고 있다
市內를 再掌握하기 위해 화정동에 位置한 ‘돌고개’를 넘고 있다.

5月 27日 새벽 , 光州 都心 곳곳에서는 ‘戒嚴軍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市民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오래도록 光州 市民의 腦裏에 남아 5·18民主化運動 의 精神을 잇겠다는 意志와 熱情을 갖게 만들었다.

盜聽을 死守해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많은 市民軍이 道廳에 남아있었다. 새벽 4時頃, 戒嚴軍은 다시 道廳을 向했다. 交戰 時間은 1時間 남짓 에 不過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市民軍이 屍身으로 남겨졌다. 이날 全南道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明確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當時 生命을 잃었던 많은 이들이 只今, 망월동 市立墓地 第3墓域에 安葬되어 있다.

5·18民主化運動 은 以後 韓國 社會에서 持續的으로 展開된 民主化運動의 原動力이 되었고, 軍部獨裁에 決定的 打擊을 加한 87年 6月 抗爭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民主化運動 은 95年 5·18特別法으로 制定되었으며, 前職大統領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等 92名이 내란·내란목적살인죄 等으로 處罰받기까지 全 國民의 念願이 모여 5·18民主化運動 精神繼承으로 이어졌다. 5·18民主化運動으로부터 87年 6月 抗爭에 이르기까지, 光州를 비롯한 全 國民이 보인 抵抗과 參與, 連帶意識은 오늘날 世界 곳곳에 重要한 民主化運動 事例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重要性을 認定받아 2011年 5·18民主化運動 關聯 資料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登載 되었다.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백 29구의 장례식, ‘폭도’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통제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슬픔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1980年 5月 29日 망월동에서 一齊히 進行된 1百 29具의 葬禮式, ‘暴徒’라는 이름으로 眞實이 歪曲되고 統制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遺族들의 슬픔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독일 ‘슈피겔’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사진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함으로써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이다
獨逸 ‘슈피겔’誌에 실린 아버지의 影幀寫眞을 든 아이 寫眞은 죽은 者와 살아남은 者를 絶妙하게 對備함으로써 光州의 아픔을 全 世界人에게 傳해준 5·18의 象徵的인 寫眞 中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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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民 滿足度 調査
시민 만족도 조사 [平均 1.08 點 / 353 名 參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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