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陵端午祭는 韓國에서 가장 歷史 깊은 祝祭 中 하나이다. 日帝强占期, 6.25戰爭을 비롯한 수많은 社會變化를 겪으면서도 江陵端午祭는 嶺東 地域의 住民을 하나로 묶는 求心體 役割을 해왔으며, 오늘날에도 江陵端午祭는 傳統文化의 戰勝로이자 再創造의 場이 되고 있다.
江陵은 韓半島의 옛 나라인 東濊의 땅이다. 記錄에 따르면 濊國에서는 10月에 舞天이라는 祝祭를 行하였는데 舞天이 秋收感謝祭라면 5月 端午祭는 相對的으로 穀物의 成長 儀禮的 性格을 띠는 播種期 祝祭라 할 수 있다. 이러한 點으로 볼 때 江陵端午祭의 歷史는 매우 깊을 것으로 斟酌되지만 具體的 記錄은 別로 남아있지 않다.
秋江 南孝溫의 『秋江冷話(秋江冷話)』에는 每年 3, 4, 5月 中 擇日하여 山神에게 祭祀를 지내고 사흘 동안 飮酒 加貿했다는 記錄이 있으며, 高麗史에는 太祖 王建이 身檢을 討伐할 때 當時 江陵 地域의 豪族이었던 왕순식에게 太祖가 말하기를 “꿈에 異常한 중이 甲옷을 입은 兵士 3千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그대가 軍隊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니 異常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왕순식이 “제가 明紬에서 出發할 때 大絃에서 勝社가 있어 祭祀를 지냈는데 大王이 補身 꿈이 이것입니다”라고 하여 大關嶺 성황사의 오랜 歷史를 斟酌케 한다.
江陵端午祭에 對한 最初의 記錄은 江陵 出身 許筠이 남겼다. 許筠은 江陵端午祭를 直接 보고 記錄을 남겼는데 祭祀를 받는 對象이 金庾信 將軍이라고 썼다. 金庾信은 어려서 明紬에 留學하여 武術을 익히고 三國을 統一한 後 죽어서 大關嶺 山神이 되었고 이 神이 영험하여 해마다 5月이면 大關嶺에 가서 神을 맞이하여 즐겁게 해 준다고 記錄하였다. 그래서 神이 즐거우면 그해는 豐年이 들고 怒하면 天災地變을 주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名酒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神을 섬겼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江陵端午祭의 具體的인 歷史는 알 수 없으나 江陵端午祭가 예부터 民衆 中心의 行事였으며 官의 積極的인 協助로 이루어진 民官共同의 祝祭였음을 알 수 있다.
現在도 江陵端午祭의 重要 提議(祭儀)는 江陵市場을 비롯한 各級 機關長들이 第官職을 遂行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江陵端午祭는 上下가 함께 했던 古代 提議가 지닌 祝祭的 모습을 穩全히 지닌 行事라고 할 수 있다. 江陵端午祭는 重要無形文化財 第13號로 指定되어 國家의 保護를 받고 있다.
? 端午祭의 節次
端午祭의 行事는 陰曆 4月 5日 신주근量(神酒謹釀, 神에게 드릴 술을 담그는 일)부터 陰曆 5月 7日 送信第(送神祭, 神을 大關嶺으로 보내는 祭祀)에 이르기까지 이 地域에서 펼쳐지는데, 祭祀의 對象은 大關嶺 山神(金庾信將軍으로 傳해짐)과 國史城隍神(國師城隍神, 범일국사(梵日國師)라고 傳해짐)이며 端午祭를 지내지 않으면 이 地域에 큰 災殃이 미친다고 傳해지고 있다.
現在 端午祭는 陰曆 4月 15日 大關嶺山神黨에서 祭祀를 올리고 神木(神木)을 모시고 내려와 구산城隍堂(邱山城隍堂)을 거쳐 홍제동에 있는 國史女城隍堂에 모셨다가 行事 前날인 陰曆 5月 3日 저녁 迎神制(迎神祭)를 지내고 位牌를 南大川 白沙場에 마련된 祭壇에 옮겨 모심으로 江陵端午祭의 序幕이 始作된다. 端午場에서는 5日間 아침마다 祭를 올리고 굿을 하며 豐農, 豐漁 等을 祈願하며 모두 한마음이 되어 祭를 올린다. 그밖에 官奴假面劇, 그네, 씨름, 農樂競演大會, 農謠京唱大會 等 수많은 民俗놀이와 다양한 行事가 開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