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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의 "별들의 故鄕" :: 不變의 ‘아줌마’ 演技인 강부자의 젊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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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선 김용림 반효정 나문희 김영옥 여운계 박원숙 尹汝貞·· TV 드라마를 드라마답게 이끌어 가는 名實相符(名實相符)韓 女子 演技派 重鎭들이다. 그들 中에 빼놓을 수 없는 人物이 강부자다. 2009年 2月로 萬 68歲가 넘었다. 나이로는 할머니가 됐지만 젊은 時節부터 只今까지 ‘후덕한 아줌마’ ‘수다꾼 아줌마’ ‘뚝배기 아줌마’ ‘스트롱 아줌마’ 等 다양한 캐릭터의 아줌마 專門 演技人으로 變함없이 살고 있다. 달처럼 둥싱둥실한 얼굴 雰圍氣와 꾸밈없는 수더분한 말씨가 庶民的인 情感을 느끼게 하는 탤런트다.


1980年, 只今부터 30年 前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女는 38살이 된다. 그 때 그女는 人生과 演技에서 다같이 젊은 아줌마로서의 黃金期였다. 3살 年上인 同僚 탤런트 이묵元과 사이에 1男1女를 두고 알뜰하게 살아가던 그는 <漢陽郞君> <로맨스家族> <연화> <외아들> <結婚行進曲> <野 곰례野> <醫女 미사> 等 人氣 드라마의 人氣 演技人으로 氣勢騰騰 했다. 한때는 國會議員으로 活動했으니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는 自身에게 苛酷할 程度로 生活姿勢가 徹底하고 꼼꼼한 것으로 소문나 있다. 한 家庭의 主婦로서도 빈틈없이 살아가지만 演技生活도 欠 잡히지 않게 活動하는 演技者로 알려져 있다.

38살의 姜富子가 터놓고 告白한 人生 이야기를 追憶해보자.



데뷔 作品은?

1962年 3月 KBS-TV 탤런트 2期로 始作해 이듬해 <구두창과 트위스트>라는 作品에서 寡婦의 仲媒를 서는 45살 仲媒쟁이 役을 맡았다. 21살 때였다. 1980年까지 18年間 1千5百餘 篇에 出演했지만 處女 役은 19살 北韓 女軍 役을 맡았던 反共드라마 <數値>와 홈드라마 <로맨스 家族> 等 두세 篇뿐일 거고 나머지 大部分 作品의 配役이 아줌마였다.


후덕한 이웃집 아줌마처럼 느껴져 누구에게나 便한 性格 같기도 하고 反對로 속이 무서운 까다로운 性格 같기도 하다. 實際 本人의 性格은?

내가 무섭게 한 적이 없는데 조카아이들은 얼굴만 보고 虎狼이姑母로 부른다. 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反對다. 겉으로는 强하게 보이지만 속은 눈물 많고 情에 弱하다.


NG를 모르는 演技者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 大使 暗記力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徹底히 準備를 하기 때문이다. 錄畫 前날에 臺本이 나오므로 미리 準備할 時間이 주어진다. 每番 綠化에 臨하면서 絶對로 失手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한다. 그래도 18年間 10番 程度는 NG를 낸 것 같다.



대단한 記錄이다. 언제부터 어떻게 演技者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는가?

7살 때 演劇公演을 했다. 洞네 아이들을 모아 어머니 치마를 幕으로 쳐놓고 大廳마루에서 俳優 흉내를 냈는데 洞네사람들의 稱讚을 받았다. 그러다가 强勁女中에 다닐 때는 내가 쓴 脚本으로 1人3役의 演劇公演을 해 全校生들의 拍手를 받았다. 學校 放送室에서 내 멋대로 進行도 하고 제법 끼를 發揮했다. 충남대 國文科에 進學했다가 처음에는 라디오 連續劇 <靑실紅실>에 反해 聲優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가 탤런트가 됐다.


탤런트가 되려면 演技力 實技 테스트를 받는 過程이 따르는데 地方 出身으로 合格이 된 것은 그만큼 演技才能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렇게 評價를 받은 것같다. 나는 옷차림부터 세련된 服裝이 아니었다. 合格 後 탤런트敎育을 받으러 나갈 때까지 몇 달間 나는 하얀 모시적삼과 검정 통치마를 입었다. 周邊사람들이 ‘强勁통치마’로 불렀다. 나에게는 몸의 볼륨을 드러내는 洋裝이 語塞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치맛자락으로 앞가슴을 동여매 가슴을 감추는 옛날式 衣裳이 몸에 베여 있던 때였다.

탤런트가 된 뒤 21살 때 브래지어를 처음 購入했으니 只今 後輩들은 理解 못하고 웃을 일이었다. 4男4女 中 내가 여섯째인데 8男妹를 키운 어머니가 워낙 保守的이고 嚴格하셔서 處女가 브래지어를 하는 것을 理解 못하셨다.


夫君과는 어떻게 만나 結婚했나?

탤런트 同期生이다. 間或 내 곁에 다가와서 툭 치고 지나가곤 해서 異常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싫지가 않았다. 나는 수유동에 살았고 總角 時節 男便은 미아동이 집이라 같은 버스에 탈 때도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내가 왜 結婚 안하느냐고 묻자, “강부자 氏가 해야 나도 한다”고 말해 그것이 請婚이란 걸 알았다.


新婚生活 初期 얘기를 듣고 싶다.

戀愛를 4年間 하고 結婚해 10萬원짜리 傳貰집에서 살림을 始作했다. 탤런트도 1萬5千원씩 月給을 받을 때인데 우리는 5個年 計劃을 세워 1年 안에 電話 假說, 3年 안에 집 장만, 5年 안에 自家用 사자고 約束했는데 熱心히 活動해 計劃을 모두 앞당겼다.


두 子女를 두기까지 家庭을 다복하고 和睦하게 이끌어왔다고 周邊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實際 苦悶한 일도 없었는지?

夫婦란 남남이 만나서 사는 건데 모든 일이 한마음이 될 수는 없다. 우리도 이따금 意見이 對立한다. 아이들이 있으면 단둘이 房門을 걸어 잠그고 다투거나 意見을 調律한다. 우리 夫婦는 戀愛 때부터 덤덤한 느낌을 주고받았던 때문인지 結婚生活도 덤덤하게 持續해 오히려 크게 動搖하거나 시끄러운 일을 겪지 않았다. 아직까지 男便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듣지 못했다.


아내의 活動이 더 많고 人氣나 收入도 比重이 더 큰 것으로 인해 男便의 콤플렉스 같은 것은 없는가?

그런 憂慮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우린 事情이 다르다. 男便은 性質이 불같은 데가 있어서 내가 오히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눈치를 살피고 지낸다. 내가 버는 것은 別로 크게 눈에 보이지 않는데 男便이 벌어 오는 돈은 참 所重해 보일 때가 많다.



돈은 얼마쯤을 벌고 싶은지?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만 只今 생각은 먹고 쓰고 若干의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면 만족하겠다. 너무 많으면 管理하느라 거추장스럽고 神經이 쓰일 것이니까.


演技生活은 언제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欲心 같아서는 還甲줄까지 하고 싶지만 나를 必要로 하는 放送局에서 決定할 問題다. 希望事項이지만 臺詞를 暗記할 能力이 있는 날까지 드라마 出演을 繼續했으면 좋겠다.



姜富子는 回甲을 저만치 넘어 선 只今도 訂正한 演技者로 남아 있다. 그女의 希望대로 臺詞를 暗記할 수 있는 날까지 演技活動이 中斷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강부자 / 國內俳優
出生 1941年 2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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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래쓴만년필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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