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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任 70名 軍番 못외우자 “넌 人間샌드백”… 精神 망가져 : 뉴스 : 東亞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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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任 70名 軍番 못외우자 “넌 人間샌드백”… 精神 망가져

백연상記者

入力 2014-08-04 03:00:00 修正 2014-08-04 13:04:55

[第2의 尹一兵을 求하라]<上>암흑의 23個月… 轉役한 날 죽음 擇한 李上兵



‘그날’ 以後 3週가 지났지만 李某 氏 夫婦는 性格 좋았던 막내아들(22·姨母 上兵)의 모습이 只今도 눈에 아른거린다. 맞벌이 夫婦는 늦게 歸家하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막내아들은 쌀을 씻어 밥을 지어놓을 만큼 대견한 아들이었다. 이 上兵의 中高校 時節 親舊인 安某 氏(22)는 “또래들처럼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좋아하고 親舊들과 사이도 좋았다”고 回想했다. 아들은 2012年 서울의 한 大學 祕書學科에 入學한 뒤 家族들에게 “卒業해서 좋은 會社에 就職하겠다”고 抱負를 밝히곤 했다.

“씩씩한 大韓의 健兒가 되어 돌아오거라.”

푹푹 찌던 2012年 8月 下旬 忠北 曾坪의 陸軍 師團 訓鍊所에서 이 氏는 아들을 둔 大部分의 大韓民國 父母들처럼 이 말을 건네며 子息을 軍隊에 보냈다. 이 上兵이 大學 첫 學期를 마친 뒤였다. 左右 各各 0.8, 0.7의 視力 탓에 兵務廳 身體等位 2級을 받았을 뿐 스무 살 아들의 몸과 마음은 모두 健康했다.


○ 使命感 갖고 入隊했지만…

이 上兵(當時 二等兵)은 慶北의 한 都市에 있는 第2彈藥廠 警備2中隊에 配置받았다. 첫 指示는 警備中隊 70名의 軍番과 階級 이름 및 勤務 守則 等이 적힌 종이를 나눠주며 모두 暗記하라는 것이었다. 이 上兵은 暗記가 서툴렀다. 堡礁 勤務 中 鐵帽와 銃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結局 先任兵들의 ‘軍紀잡기용 타깃’이 됐다.

上兵 等 先任兵들은 軍紀를 잡는다는 名目으로 內務室로 後任兵들을 ‘集合’시켰다. 줄을 세워놓고, 二等兵들의 얼굴과 腹部를 돌아가면서 주먹으로 때렸다. 失手가 잦은 이 上兵이 集中的으로 맞았다. ‘集合’은 1週日에 最小 3回 以上 反復됐다.

“選任들은 저보고 웃으면서 ‘人間 샌드백’이라고 했습니다.”

이 上兵이 올 2月 25日 國軍大邱病院 精神健康醫學科에서 軍醫官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이 上兵의 部隊에서는 苛酷行爲를 막는 方便으로 二等兵은 二等兵끼리, 一等兵은 一等兵끼리 같은 內務室을 使用하도록 하는 ‘同期 生活館’ 制度를 施行했지만 ‘上兵 內務室 集合’과 毆打는 反復됐다. 生活館 紀律을 擔當하는 當直士官에게 摘發된 적도 없었다.

“왼쪽 광대뼈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엄지발톱은 깨져 있더군요.”

아버지 이 氏(53)는 面會 當時 봤던 二等兵 아들의 모습을 이렇게 回想했다. 아들은 “勤務 守則을 외우려고 努力하지만 머릿속에 全혀 들어가지 않고, 자꾸 혼내기만 해서 무섭다”고 하소연했다. ‘누가 때렸느냐’고 물을 때면 아들은 “아무 일도 아니다”며 웃었다. 아들이 염려스러웠지만 “아빠가 軍 服務했을 때는 더 甚했어. 그래도 요즘은 훨씬 나아졌을 거야”라고 慰勞했다.

이 上兵의 動機病 A 氏는 “우리 中隊는 先任兵들의 暴力 問題가 가장 甚했지만 幹部들이 모른 척하는 境遇도 많았다”며 “先任兵이 後任兵들을 꽉 잡고 있어야 部隊가 잘 돌아간다는 幹部들의 認識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說明했다.

一兵이 된 이 上兵은 後任兵들을 받았지만 ‘짬(階級에 따른) 待遇’를 받지 못했다. 先任兵들이 새로 들어온 兵士들에게 “쟤(李 上兵)는 軍 生活 잘 못하니까 쟤처럼만 되지 마라”고 公公然하게 말하는 바람에 이 上兵은 猝地에 後任들로부터 ‘無視해도 되는 先任兵’이 됐다. 暴行도 繼續됐다. 動機 A 氏는 “우리 部隊는 夜間 勤務에 한 番 投入되면 6時間 동안 步哨를 서는데 暗口號 等을 잘 熟知 못했던 이 上兵은 勤務 時間 내내 軍靴로 다리를 繼續 차여 멍들고 까졌다”고 말했다.

2013年 3月頃 李 上兵의 精神 狀態가 惡化될 兆朕이 처음 나타난다. 動機 B 氏에게 自身의 物件을 주며 “난 이것들이 必要 없으니까 다 가져. 너무 힘들어서 自殺하고 싶어”라고 말한 것. B 氏는 곧바로 이를 中隊 幹部들에게 알렸다. 幹部들은 이 上兵과 面談했지만 별다른 措置는 없었다. 上兵이 된 뒤 精神 狀態는 더욱 惡化됐다. “自殺하고 싶다” “마지막이네, 아쉽네”라는 等 自殺 徵候가 보이는 말들을 隨時로 했다.

“上兵 2號俸이 되면서부터는 ‘우리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죽였어’ ‘小隊長이 내 女子親舊를 性暴行하려고 했어’ 같은 말을 자주 했어요.”

同期들은 當時 이 上兵의 狀態를 이렇게 證言했다. 誇大妄想症이 始作된 것. 이 上兵은 想像을 現實이라고 믿고 혼자 으슥한 곳에 있는 것을 즐겼다. 혼자 뜬금없이 웃다가 갑자기 虛空을 向해 火를 내기도 했다. 動機兵들은 “負袋 次元에서 이 上兵을 病院으로 보내 檢査를 받게 해야 한다”며 小隊長을 비롯한 幹部들에게 報告했다.

그럼에도 部隊 側은 ‘전우조’를 붙일 뿐이었다. 전우조는 問題가 있는 兵士가 脫營이나 極端的인 選擇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같은 部隊院 2∼3名이 24時間 該當 兵士와 함께 行動하는 것을 말한다. 化粧室도 붙어 다닌다.

積極的으로 病院에서 治療를 받도록 해야 했지만 部隊는 幹部 및 軍牧과 面談하도록 했을 뿐이었다. 軍 苛酷行爲 關聯 事件을 많이 다뤘던 김태운 辯護士(法務法人 幸福)는 “精神的 問題는 部隊 內에서 ‘꾀病’으로 看做되는 境遇가 많고, 部隊 側은 人力 運用 問題를 理由로 外部 通院 治療 許可를 잘 내주지 않는다”고 指摘했다.


異常行動에 病院 代身 營倉… 症勢 더 惡化 ▼

“上兵이 된 뒤에는 대놓고 旗手 列外를 當했어요.”

動機들은 이 上兵이 後任兵과 2人 1組로 步哨를 설 때 勤務 諸般 事項을 指示하는 ‘死守’가 아니라 指示를 받는 ‘副射手’로 일하도록 命令을 받았다고 證言했다. 勤務 時 射手는 先任兵이, 副射手는 後任兵이 되는 게 規定이고 常識이다.

父母는 이 上兵이 걱정됐다. 하지만 中隊長은 電話 通話를 하면 “이 上兵이 엉뚱한 行動을 많이 해 休暇를 統制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아버지 이 氏는 最近까지 아들의 異常 行動을 全혀 알 수 없었다.

後任兵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 映窓에 다녀온 뒤 이 上兵의 異常 行動은 더욱 심해졌다. 部隊 內 콘크리트 壁에 머리를 隨時로 들이받기도 하고 自殺하겠다며 生活館 2層 窓門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 國軍大邱病院에서의 한 달


올해 2月 19日 한창 酷寒期 訓鍊 中이던 이 上兵은 檢問所 警備 勤務를 서며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服務規程 違反이다. 小隊長이 이를 指摘하자 이 上兵은 “階級章 떼고 ‘맞짱’을 뜨자”며 덤볐다. 部隊는 이때서야 이 上兵의 精神 健康에 異常이 생겼다고 보고 國軍大邱病院 精神健康醫學科에 보낸다. 이 上兵은 그동안의 일로 兵長 進級도 漏落됐다.

2月 21日∼3月 20日 이 上兵이 入院해 있던 國軍大邱病院의 看護記錄紙에는 部隊 幹部들과 兵士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가득했다.

“제가 先任兵들에게 맞고 辱 들었던 것을 幹部들한테 얘기했더니 제 말은 들어주지도 않고 無視했습니다. 紫帶에서 ‘내 便은 아무도 없다’라고 느꼈습니다.”(2월 22日)

“兵士들 사이에 ‘肺級’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 못하는 兵士를 이야기하는 건데 저는 隨時로 ‘肺級’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 소릴 들으니까 軍隊 와서 사람을 避하게 됐습니다.”(3월 2日)

“(自隊로 돌아)가기 싫습니다. 不條理에 對해 말해도 안 되고, 두세 番씩이나 말했는데… 저는 紫帶 가면 거의 죽을 겁니다.”(2월 22, 23日)

病院에서는 藥物 治療를 한 뒤 ‘自害 및 他해의 憂慮가 있으므로 近接 觀察할 것. 症狀 惡化 詩 再訪問할 것’이라는 所見을 냈다. 그러나 現役 服務 適合 與否와 關聯된 言及은 없었다.

部隊로 復歸한 李 上兵은 다른 中隊로 配置 받았다. 새 中隊에서 2週가 지났을 때 이 上兵은 大田의 ‘그린캠프’로 보내진다. 그린캠프는 主로 問題를 일으킨 士兵들이 가는 곳으로 宗敎 活動 等의 프로그램이 進行된다. 아버지 이 氏는 面會를 갔을 때 아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손발을 비비고 꼬았으며, 아버지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려 했다고 回想했다. 이 上兵은 4月 26日 警 轉役을 한 달假量 남겨두고 部隊로 復歸했다.

軍은 이 上兵을 5月 16日부터 다시 營倉으로 보내기로 決定한다. 2月의 小隊長 侮辱 件 때문이었다.

“5月 16日 午前 7時 45分쯤 電話가 왔는데 ‘아드님이 無斷 脫營했다, 兵士 100餘 名이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 上兵의 어머니(51)는 이 上兵이 營倉行을 앞두고 脫營했다는 電話를 받는다. 이 上兵은 2時間 半 만에 部隊 近處에서 붙잡혔다. 영창에서도 그는 憲兵의 棍棒을 뺏으려 덤벼들고 調書를 찢어버리는 等의 異常 行動을 보였다. 열흘 동안 하루에 2時間 程度만 자고 밤낮없이 營倉 안을 걸어 다니다가 獨房에 보내졌다.

이 上兵은 6月 5日 部隊로 復歸했다. 6月 11日까지 休暇를 다녀온 뒤 12日 除隊할 豫定이었다. 하지만 이 上兵은 部隊에 到着한 뒤 中隊長의 코를 머리로 들이받는다. 바로 休暇 다녀오고, 全域인데 營倉行이 뻔한 짓을 저지른 것. 이 上兵의 父母는 바로 部隊로 달려갔고 中隊長에게 손이 닳도록 밀었다.

“中隊長님, 딱 한 番만 容恕해 주십시오. 누가 全域을 앞두고 相關을 들이받겠습니까? ‘精神病者’니 한 番만 넘어가 주시면 이 恩惠를 잊지 않겠습니다.”

中隊長은 “많은 兵士가 보는 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軍 刑法대로 處理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上兵은 全域을 앞두고 다시 營倉으로 보내졌다.

이 上兵은 7月 10日까지 軍 憲兵隊 獨房에 收監됐다. 10日 軍事 裁判을 통해 懲役 2年, 執行猶豫 4年을 宣告받고 上兵으로 轉役을 ‘名’받았다.


○ 마지막 날 끝내…

軍事 裁判이 끝난 10日 午後 5時 30分頃 大邱에 있는 軍 師團 營倉 앞에서 이 上兵의 親兄은 除隊하는 이 上兵을 自身의 車에 태웠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兄, 우리 죽어버리자… 앞車를 들이받아!”

京畿 의정부시의 집까지 오는 3時間 半 동안 이 上兵은 繼續 헛소리를 했다. 運轉하는 兄의 머리를 助手席에서 때리거나 走行 中에 자꾸만 車門을 열고 道路로 뛰어들려 했다.

當日 午後 9時頃 아버지와 어머니는 玄關門에 들어서는 이 上兵을 품에 안으며 반겼다. 하지만 아무런 反應이 없었다. 父母는 어쨌든 轉役을 했으니 病院에서 治療를 받으면 狀態가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아들, 맛있니?” “네….”

어머니는 아들에게 三겹살을 먹여주며 對話를 誘導했지만 아들은 짧게 ‘네’ 할 뿐 별다른 反應이 없었다. 이 上兵의 狀態가 걱정된 家族들은 그에게서 暫時도 눈을 떼지 않았다.

午後 10時 40分. 이 上兵과 함께 컴퓨터를 하던 兄이 暫時 居室로 나왔다. 아버지는 TV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했다.

“아빠, 얘가 房에 없어!”

房에 다시 들어간 兄이 悲鳴을 질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로 이 上兵의 房으로 뛰어들어 갔다. 寢臺 밑이나 欌籠 속에 숨지 않았을까 뒤졌지만 痕跡이 없었다.

窓門이 활짝 열려 있었다. 窓門 아래에는 여러 臺의 警察車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버지는 18層에서 뛰어내려 갔지만 이미 피투성이가 된 아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백연상 記者 baek@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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