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같은 守備力을 자랑했던 신홍기 ⓒ스포탈코리아
신홍기.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왼쪽의 支配者’다. 1990年代 K-리그의 수많은 골잡이는 東에 번쩍 西에 번쩍하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의 뒷모습에서 ‘신홍기’라는 이름 석 字를 반드시 읽어야만 했다. 一擊 必殺의 날카로운 태클과 他의 追從을 不許했던 엄청난 活動量을 자랑하는 그의 能力 앞에 相對 攻擊手들은 苦戰했다.

K-리그 個人 通算 336競技 出戰에 35골-42도움을 記錄한 신홍기. 1999年 신홍기와 함께 K-리그 全冠王의 偉業을 達成한 ‘名匠’ 김호 監督이 그를 두고 “내가 본 最高의 選手 中 하나”라고 말한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蹴球를 사랑한 아이 신홍기

幼年 時節 신홍기는 平凡한 아이였다. 어느 날 偶然히 洞네 運動場을 찾은 그는 蹴球를 하는 큰 兄의 모습에 暫時 넋을 잃고 만다. 自然스레 신홍기는 큰 兄의 뒤를 쫓았고, 금새 蹴球의 魅力에 흠뻑 빠지기 始作했다.

"우리 家族이 三兄弟이고 제가 막내인데 當時 큰 兄부터 저까지 모두 運動에 素質을 보였어요. 特히, 큰 兄이 蹴球를 正말 잘했어요. 먼 발치에서 멋지게 守備手를 제치고 골을 넣는 큰 兄을 지켜보면서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공을 빼앗기기 싫어 한 발짝 더 뛰었어요. 그 氣分을 잊을 수 없어 蹴球의 魅力에 더 빠져 들어갔죠."

그때부터 신홍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蹴球공과 함께 했다. 누구에게나 하늘이 내려준 天職이 있다면 蹴球는 신홍기에게 있어 하늘이 준 最高의 膳物이었다. 그는 結局 父母님의 反對를 무릅쓰고 蹴球選手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初等學校 5學年 때 馬山에 있는 한 蹴球部 監督님이 저를 눈여겨보고 스카우트를 했어요. 그리고 나서 다른 學校랑 試合을 했는데 졌어요. 그런데 이긴 學校에서 저를 또 스카우트하더라고요.(웃음) 그렇게 한동안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면서 蹴球를 했어요."

"얼마 가지 않아 全國 初等學校 市道對抗 大會가 復活했어요. 그때 暫時 몸을 담았던 學校가 慶南地域에서 優勝을 차지해 全國大會에 나가게 됐어요. 거기에 親한 親舊가 있었는데 함께 뛰자고 說得하는데 苦悶을 많이 했죠. 왜냐하면 제가 學窓時節에 工夫를 곧잘 했거든요.(웃음) 父母님은 蹴球를 하지 말라고 挽留하셨지만, 어디 子息 이길 父母가 있나요? 큰 兄의 說得도 큰 도움이 됐죠."

"世上에 空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結局, 아버지와 約束을 했어요. 全國大會에 나가서 골을 넣으면 繼續 蹴球를 하는 것이고, 못 넣으면 工夫를 하는 것으로요. 하지만 하늘이 도와주셨는지 試合에 나가서 決勝골을 넣었죠. 그래서 只今까지 蹴球를 하게 됐어요.”

미운 오리, 白鳥 되어 날다.

1986年 마산공고 3學年 在學 當時 신홍기는 靑龍旗 全國 高校大會 베스트 11에 選定될 程度로 頭角을 나타낸 前途 有望한 攻擊手였다. 그러나 反抗兒的인 氣質을 억누르지 못했던 그는 自身의 꿈을 쫓아 彷徨하는 아이祈禱 했다.

"蹴球를 始作할 때의 포지션은 센터포워드였어요. 中學校 3學年 때 6個月 만에 키가 30cm나 자라서 自然스레 攻擊手를 맡게 됐죠. 攻擊은 저의 性向과 맞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짜릿한 골을 넣을 수 있어서 正말 좋았죠. 只今 생각해보면 評判도 나쁘지 않았어요.”

"高等學校에 오면서 思春期를 겪었나 봐요. 한마디로 말해 말썽꾸러기였죠.(웃음) 아무런 생각 없이 訓鍊만 해오다 그 때부터 周圍의 視線이 의식되기 始作한 것 같아요. 한 番은 이흥실 코치(現 全北 首席코치)와 家出한 적이 있어요. 뭐 結果야 뻔하지만 한 番쯤 拘束에서 脫出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것 같아요."

不確實한 未來에 對해 조바심이 났지만, '但只 蹴球를 하고 싶다’라는 熱情이 다시 신홍기를 그라운드로 이끌었다. 心機一轉한 그는 限界를 뛰어넘어 새로운 挑戰을 하고 싶었다. 그는 周圍의 挽留를 뿌리치고, 當時 超豪華 軍團으로 불리던 蹴球 名文 한양대에 入學한다.

"한양대로 進學 했는데 當時 戰力이 正말 좋았어요. 저는 제 자리로 잡지 못한 채 酒煎子나 나르고 있었죠. 그 때 故鄕 親舊가 명지대에 갔는데 그 녀석이 大統領杯에 나가서 決勝골을 넣은 거예요. 저랑 高等學校 때 라이벌이었는데 그 親舊가 大學校에 가서 잘하니까 여기저기에서 말들이 많아서 正말 힘들었어요."

機會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主戰 자리를 꿰차지 못했던 새내기 신홍기는 看板選手의 負傷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出戰 機會를 잡는다. 春季 大學聯盟戰에서 主戰 攻擊手로 出戰한 신홍기는 4競技에서 總 5골을 넣는 氣焰을 吐하며 감투賞을 받는다. 마침내 自身의 이름 석 者가 드디어 世上에 알려지기 始作한 瞬間이었다.

“春季聯盟戰을 앞두고 한 先輩가 負傷을 當했어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제가 競技를 뛰게 되었죠. 이것이 제 삶의 轉換點이었죠. 그 試合에 나가서 4게임 連續골로 總 5골을 넣었어요. 비록 4强에서 떨어졌지만 1學年에 不過한 풋내기 攻擊手가 감투賞을 받았어요. 저의 潛在力을 한 段階 끌어올릴 수 있었던 所重한 時間이었다고 생각합니다."
代表팀에서의 신홍기(오른쪽에서 4番째) ⓒ月刊蹴球
變化는 機會를 만든다.

1991年 世間의 期待 속에 蔚山 현대에 入團하며 프로 生活을 始作한 신홍기.
그러나 새로운 挑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포지션의 變化였다. 그 동안 攻擊手로 活躍했던 그는 當時 蔚山의 차범근 監督의 勸誘에 따라 왼쪽 守備手로 補職을 變更한다. 그리고 맞이한 첫 相對는 다름아닌 國內 最高의 골잡이 최순호(現 江原 FC 監督). 그의 蹴球人生에 있어 最高의 賭博이 始作됐다.

“K-리그에 처음 와서 차범근 監督님(現 水原 三星 監督)을 만나고 포지션이 바뀌었어요. 持久力이랑 技術이 좋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當時 최강희(現 全北 현대 監督), 변병주(現 大邱 FC 監督) 等 先發 라인업이 只今 생각해도 正말 좋았어요. 시즌 開幕을 앞두고 車 監督님이 한番 사이드 守備를 해보라고 했는데 그 때 제가 조금 잘 했나 봐요."

"浦項과의 開幕展인데 왼쪽 守備手로 프로 데뷔戰을 치르게 됐어요. 게다가 當時 마크맨이 최순호 先輩였어요. 正말 가슴이 떨리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제 옆에 다가온 車 監督님이 ‘너는 최순호만 꼭 잡아’라고 注文했죠. 只今도 記憶이 생생해요. 正말 아무것도 모르고 無條件 최순호 先輩의 뒤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죠. 그 後 車 監督님이 제가 마음에 드셨는지 繼續 왼쪽 사이드 守備手로 출전시키더라고요.”

入團 첫 해부터 總 39競技에 出戰하며 蔚山의 看板守備手로 자리매김한 신홍기. 面刀날 같은 날카로운 태클과 마라톤 選手 못지 않은 엄청난 持久力을 자랑했던 그의 이름은 當時 K-리그 攻擊手들 사이에서는 一名 ‘저승使者’로 통할 程度였다.

“守備手로 變身한 것에 對해서 큰 不滿은 없어요. 예전부터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相對를 制壓하는 守備는 이런 제 性向에도 오히려 잘 맞았던 것 같아요. 率直히 攻擊手를 制壓하기 위해 거친 플레이도 不辭했죠. 그 때문에 毒種, 악바리라는 否定的인 꼬리票도 붙었지만 後悔는 없습니다. 實際 現役 時節 때 主로 제 맞相對였던 (李)상윤이는 아직도 저를 보면 손사래를 칠 程度랍니다.(웃음)”

成功的인 포지션 變更을 마친 신홍기의 蹴球人生은 以後 坦坦大路를 달렸다. 1991年 太極마크를 가슴에 단 그는 漸次 世界 舞臺를 노크하기 始作했다. 1993年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世界 올스타戰에 出戰하기도 했다. 홍명보의 負傷으로 代身 出戰한 그는 비록 得點을 記錄하지 못했지만, 世界的인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것일까요?(웃음) 왼쪽 사이드 守備手로 補職을 變更한 後 잇따른 幸運이 찾아왔어요. 當時 國家代表팀은 1990年 이탈리아 월드컵 以後 世代交替 中이었고, 저를 비롯해 정재권, 최문식, 조진호 같은 新銳들에게 機會가 많이 주어졌어요. 正말 技術과 精神力 모두 뛰어난 選手들이었죠. 같이 그라운드에 서면 正말 거칠게 없었어요."

"그래도 가장 記憶에 남는 瞬間은 아마 1993年 世界 올스타戰에 參加했을 때가 아닌가 싶어요. 홍명보 選手의 갑작스러운 負傷으로 出戰하게 됐는데 世界 最高의 스타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事實 自體가 제게는 커다란 幸福이었죠."
94월드컵에 參加했던 韓國代表팀. (맨 아랫줄 오른쪽에서 3番째 8番 유니폼이 신홍기) ⓒ月刊蹴球
94 美國 월드컵, 꿈의 實現 或은 試鍊의 始作

마침내 신홍기는 그토록 꿈꾸던 월드컵 舞臺에 오른다. K-리그에서의 꾸준한 活躍像을 발板 삼아 그는 1994年 美國 월드컵을 準備하는 팀의 一員이 됐다. 當時 韓國의 첫 相對는 無敵艦隊 스페인. 이 競技는 그의 腦裏 속에 아직도 鮮明하게 남아있는 場面이기도 하다.

“1994年 美國 월드컵은 아마도 내 蹴球人生에 찾아온 가장 決定的인 機會 中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代表팀의 電力은 제 個人的인 見解로 볼 때 2002年 월드컵代表팀과 比肩될 만한 水準이라고 생각해요. 스페인戰에 先發 出戰했는데 저의 失手로 선제골을 내줬어요. 只今 생각하면 너무 虛無해요. 제 心情을 잘 모르겠다고요? 음..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 거친 태클로 退場 當한 하석주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한 番 쏟아진 물은 絶對 주워담을 수 없는 法. 內心 自尊心 挽回를 노리던 신홍기는 以後 볼리비아와 獨逸과의 競技에 出戰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以後 그는 自身이 맡은 바 役割을 消化해내지 못해 팀이 敗한 것이 아닌가 하는 自責感에 한동안 괴로워했다.

“率直히 볼리비아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 亦是 앞서 失手를 挽回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죠. 그러나 幸運이 따르지 않았어요. 마지막 相對였던 獨逸과의 맞對決에서도 宣傳을 펼쳤지만, 돌아오는 結果는 敗北였어요. 그 뒤로 많은 自責感과 後悔 속에 살아가야 했죠.”

試鍊은 繼續 찾아왔다. 1996年 水原 三星이 創團하는 過程에서 選手 需給을 위해 蔚山의 베스트 11이었던 신홍기를 指目했다. 이로 인해 그는 뜻하지 않게 所屬팀 蔚山과 不和를 겪었다. 以後 極甚한 슬럼프에 빠진 그는 1998年 프랑스월드컵 代表팀 名單에도 除外되는 等 끝없는 墜落을 이어갔다.

“1996年에 水原이 創團을 하면서 選手需給을 위해서 旣存 팀에서 베스트11을 빼고 指名을 하면 보내주게 되었어요. 水原이 創團을 하면서 選手를 뽑아 가는데 當時 水原 司令塔으로 就任한 김호 監督님이 저를 指目하신 거예요. 베스트를 指名하면 안 되는데 저를 指名해서 結局 成事는 안되었죠. 이 일로 인해 所屬팀과 摩擦이 생겼어요.”

“엎친 데 덮친 格으로 슬럼프까지 찾아왔어요. 正말 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더라고요.(웃음) 그래도 1998年 프랑스월드컵 出戰을 위해 마음을 다 잡고 熱心히 뛰었는데 아쉽게도 여러 惡材들이 겹치며 最終 名單에 오르지 못했어요. 只今 생각해보면 너무 아쉬워요. 제게 있어 마지막 世界 舞臺가 될 수 있었던 機會였기 때문이죠.”
水原 主張 時節의 신홍기 ⓒ수원삼성
無敵 水原 이끈 신홍기, 第2의 全盛期 누리다.

結局 蔚山에서 마음이 떠난 신홍기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1998年 水原 三星에 入城한다. 그의 入團은 新興 名門 水原의 全盛時代를 알리는 前奏曲이었다. 水原은 1998年 正規리그 優勝을 始作으로 이듬해 수퍼컵, 대한화재컵, 아디다스코리아컵, 바이코리아컵, K-리그까지 모든 大會에서 優勝을 차지하는 前代未聞의 事件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隊列의 中心에는 水原의 캡틴 신홍기가 있었다. 그는 水原에서는 唯一하게 2年 連續 主張을 맡으며 歷代 最强 水原의 求心點 役割을 도맡았다.

“當時 水原처럼 갓 創團하는 팀의 特徵은 融和가 잘 안 되는 거예요. 김호 監督님도 그런 部分을 많이 생각하셨어요. 누군가 와서 잡아줘야 할 狀況이었죠. 水原에서 저를 꼭 데려가고 싶었던 理由가 바로 이련 面이었던 것 같아요. 水原 入團과 同時에 팀 體系를 잡으려고 努力했어요. 同僚나 後輩들에게 辱은 들었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位階가 잡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보람을 느꼈어요.”

“1998시즌 챔피언 決定戰에서 蔚山과 만났어요. 蔚山이 먼저 遠征을 왔는데 그 競技에서 우연찮게 프리킥을 차게 됐죠. 元來 當時 키커는 只今도 有名한 왼발의 達人 高宗秀였죠. 그런데 異常하게 제가 차면 넣을 거 같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종수에게 諒解를 求하고 제가 찼는데 多幸히도 멋지게 들어갔어요. 結局, 決勝골이 돼서 水原이 優勝을 차지했죠.”

“1999年에는 選手團 構成도 좋았어요. 무엇보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特히 어느 때보다 團合이 잘 되었어요. 김호 監督님 亦是 選手들에게 自律을 주고, 믿음을 確認하면서 서로間의 剛한 紐帶感이 생겼다고 할까요? 點差 승리에 對한 自信感도 생기고, 自然스레 좋은 成跡도 나왔던 것 같아요. 그때가 第2의 蹴球人生이었다고 생각해요. 正말 蹴球를 좀 알고 미쳐보자는 마음으로 뛰던 時節이었죠.”

갑작스러운 負傷, 그라운드의 별이 지다.

1999年 水原 無敵神話의 榮光도 暫時. 신홍기는 2001시즌 致命的인 다리 負傷을 입고 그라운드에 쓰러진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올라오고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K-리그 個人 通算 336競技 出戰에 35골 42도움. 華麗했기에 더욱 아쉬웠던 그의 選手生活은 그 해를 끝으로 마침標를 찍었다.

“負傷 部位의 바깥쪽은 부러지고 안쪽은 靭帶가 다 나갔어요. 手術을 마치고 醫師 先生님을 만났는데 얼굴이 어둡더라고요. 瞬間 더 以上 蹴球를 할 수 없겠구나 생각했어요. 正말 슬펐지만, 拍手 칠 때 떠나자는 마음가짐으로 隱退를 宣言했어요.”

“한 가지 아쉬운 點이 있다면 當時에 最多出場記錄이 김경범 選手(前 富川)가 가지고 있었던 338京畿이었어요. 平素 그 記錄을 깨는 것을 目標로 삼았어요. 守備手니까 골에 對한 欲心보다 最多出場記錄에 欲心이 있었는데 2競技를 남기고 負傷을 當해서 正말 아쉬운 마음에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指導者로 새로운 挑戰에 나선 신홍기 ⓒ스포탈코리아
指導者로 變身한 신홍기, 蹴球人生의 後半戰이 始作

隱退는 또 다른 始作이라고 했던가.
그라운드를 號令했던 蹴球選手 신홍기는 어느덧 指導者로 變身해 蹴球人生의 後半戰을 華麗하게 꽃피우고 있다. 2004年 삼일공고 蹴球部 監督으로 指導者의 첫 걸음을 뗀 신홍기. 2006年 自身의 恩師 최강희 監督의 부름을 받고 全北 현대 코치로 本格的인 指導者의 길로 들어선 그는 올해 AFC(아시아축구연맹) P級 指導者 코스를 履修하며 準備된 指導者로서 立地를 다지고 있다.

“正말 좋은 指導者가 되고 싶어요. 저 사람에게 배우면 蹴球도 잘 할 수 있고 人間的인 面으로도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러나 아직 멀었죠. 現在 최강희 監督님 밑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있어요. 特히 監督님의 年輪과 包容力을 배우고 있어요. 勿論 火를 내실 때는 내시지만 恒常 選手들의 立場을 理解하고 人格을 尊重해 주시는 것을 보면 그런 點들을 많이 배워요.

“最近 城南 司令塔에 오른 신태용처럼 빨리 監督이 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죠. 그래도 絶對 서두르지 않고 잘 準備하고 싶어요. P級 指導者 코스를 밟는 理由도 그 中 하나에요. 永遠히 코치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欲心을 부린다고 해서 監督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 位置에서 最善을 다해 잘 準備하고 싶어요. 제 아내도 指導者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驅迫을 할 程度에요.(웃음) 아직도 이렇게 不足한데 어떻게 監督이 되겠어요. 차분히 準備를 잘 하고 싶어요.”


인터뷰=이경헌

* 대한축구협회 技術政策 報告書인 'KFA 리포트' 2009年 1月號 '나의 選手 時節' 코너에 실린 인터뷰 記事입니다.
出處 : 大韓蹴球協會 웹사이트
Posted by 韓國蹴球歷史統計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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