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에서 338競技를 뛰었던 鐵人 김경범 ⓒ李相憲
살아있는 記錄의 사나이 金秉址(40, 慶南)가 連日 K-리그 最多出戰記錄을 갈아치우고 있다. 이미 500競技를 훌쩍 뛰어넘은 김병지의 記錄은 斷然 경이로울 程度. 그의 꾸준한 活躍은 徹底한 自己管理와 發達된 現代 醫學의 結果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蹴球가 醫學과 椄木되기 前, 團地 꾸준한 努力만으로 K-리그 最多出場記錄을 세운 사나이가 있었다. 1985年 유공에 入團해 13年間 338競技를 뛰었던 김경범(45)이 그 主人公이다.

2006年까지 江陵市廳 監督을 맡았던 김경범은 90年代에 감춰진 眞珠 같은 守備手였다. 城南(前 逸話)의 創團멤버이기도 한 김경범은 相對 攻擊手를 守備手로 만들어버리는 攻擊型 守備手. 그는 守備手임에도 不拘하고 通算 9골-33도움이라는 놀라운 攻擊포인트를 記錄하기도 했다. 1993年부터 95年까지 城南의 리그 3連霸를 도왔지만 當時에는 守備手를 비춰줄 스포트라이트가 없었다. 結局 338競技라는 K리그 最多出場記錄을 뒤로 하고 김경범은 조용히 K-리그를 떠났다.

高卒 K-離居度 元祖, 고3때 유공과 契約한 김경범
흔히 高卒 K-離居라하면 ‘앙팡테러블’ 高宗秀(32)를 떠올리게 된다. 高宗秀 以前의 高卒 K-離居로는 최문식(39, 浦項 코치)李 代表的이다. 그러나 최문식이 K-리그에 入城하기 5年 前 김경범은 이미 高校生으로 K-리그에 入城했다. 그는 驪州商高 在學 時節, 故3의 어린 나이로 유공과 契約했다. 여기에는 남다른 事情도 숨어있었다.

“제가 中學校를 一年 더 다녔어요.(웃음) 當時에는 高校大會 出戰에 나이制限이 있었는데, 江陵商高에서 2學年까지 마치니까 3學年 때는 게임을 못 뛰는 거에요. 그때 유공에서 오라고 해서 3學年 때 驪州商高로 옮겨서 卒業을 했죠. 그때는 驪州商高에 籍만 두고 유공에서 選手 生活을 했죠.”

結局 그는 高校 2學年을 마치고 유공에 入團한 셈. 고3때는 所屬만 驪州商高에 두고 유공에서 프로 大先輩들과 함께 공을 찼다. 그리고 高等學校를 卒業한 이듬해부터 本格的으로 競技에 投入되기 始作했다. 우리나라 K-리그가 1983年에 始作됐으니 實質的으로 最初의 高卒 K-離居라 봐도 無妨하다.

1985年부터 유공에서 자리잡기 始作한 어린 김경범은 데뷔 첫 해부터 主戰으로 跳躍했다. 當時 K-리그에는 다섯 個 팀(할렐루야, 待遇, 有功, 浦項, 國民銀行)李 全部였기 때문에 各 팀 選手들의 面面은 只今보다 華麗했다. 大部分이 國家代表 出身들로 이뤄졌거나 最小限 國家代表 常備軍에 包含된 選手들이 K-리그에서 뛰던 時期였다. 高卒의 김경범이 競爭하기에는 多少 벅찬 相對들이었지만 그는 精神力으로 競爭에서 살아남았다.

“그때는 팀 數가 적다 보니 各 팀마다 좋은 選手들이 많았어요. 當時 저는 大學校까지 抛棄하고 올라왔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마음에 運動을 正말 많이 했어요. 技術的인 것보다는 뛰는 것 爲主로 訓鍊했죠. 競技에 投入되면 많이 뛰기 위해서 每日 아침마다 山을 뛰고 그랬어요.”

프로데뷔 첫 해 16競技에 出戰했던 김경범은 이듬해 32競技에 出戰하며 유공의 主軸 守備手로 確固한 立地를 構築했다. 그러나 이듬해 김경범은 상무에 入隊했고 K-리그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1988年 軍 除隊와 同時에 當時 창단팀이던 逸話(現 城南)에 創團멤버로 選拔된다.
1995年 逸話에서 뛸 當時의 김경범 ⓒKFA 홍석균
名門의 始初, 일화의 攻擊的인 守備手
現在 城南 일화는 K-리그를 7番이나 制霸한 名門 中의 名門이다. 성남에서 選手 生活을 했던 신태용 監督(40)은 지난 시즌부터 城南을 맡아 城南의 名聲을 成功的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城南도 創團팀 時節이 있었다. 1989年 처음으로 K리그에 모습을 보인 逸話는 昨年 創團한 江原FC가 苦戰을 면치 못하는 것처럼 創團 初期에는 그다지 强力한 모습이 아니었다. 다만 攻擊的인 蹴球로 재미를 주는 팀이었다.

創團 初期 일화의 問題點은 攻擊과 守備의 不均衡이었다. 화끈한 攻擊蹴球는 일화의 트레이드 마크로 代辯됐지만 그에 反해 貧弱한 守備力은 恒常 일화의 발목을 잡았다. 創團 첫 해 逸話는 6個 팀 中 5位에 그쳤고, 이듬해는 꼴찌를 免치 못했다. 1991年에도 일화는 5位에 그쳤다. 每 시즌 逸話는 最多失點의 멍에를 벗지 못했다.

“스리백(Back 3) 守備를 서는 3-5-2 形態를 했는데, 첫 해에는 게임을 正말 잘 했어요. 젊은 選手들이 大部分이어서 熱心히 뛰고 하다 보니까 좋은 게임을 할 수 있었죠. 그런데 守備쪽 選手들이 어리니까 唐慌하는 境遇가 많았어요. 어떤 게임은 3-0으로 이기다가도 3-3으로 비기는 境遇도 있었고요. 經驗 있는 選手들이 없다 보니까 失點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當時 逸話는 ‘벌떼蹴球’라는 別名으로 全員守備, 全員攻擊의 戰術을 보였다. 젊고 많이 뛰는 選手들이 主軸이었기 때문에 可能한 戰術이었는데, 김경범 亦是 이 戰術에 積極 加擔했다. 그는 自身이 막아야 되는 攻擊手에게 오히려 自身의 守備를 强要하는 부지런함으로 일화의 攻擊과 守備를 도왔다.

“제가 守備手지만 攻擊手가 오면 그 사람을 물리치고 攻擊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 攻擊수도 나를 막아야 되는 責任感이 있으니까 나를 따라다니게 되죠. 그런 部分에서 제가 體力的으로 좋으니까 攻擊的으로 했던 거에요. 제가 攻擊手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이런 方法밖에 없어요. 그러다보니 제 쪽으로 오는 것을 꺼려했던 攻擊手들도 있었어요.(웃음)”

김경범은 일화의 草創期를 떠올리며 當時 監督을 맡았던 박종환 監督이 審判 判定에 抗議하다 1年間 競技場을 떠나기도 했다며 빛 바랜 追憶을 들려주기도 했다. 實際로 박종환 監督은 1989年 審判 判定에 抗議하다 退場 當하기 日數였고, 退場 命令에 不服하며 競技 進行을 妨害해 18競技 出場停止를 當했다. 그러나 또 다시 벤치에 나선 朴 監督은 이番에는 競技場에서 審判을 발로 걷어차 1年間 資格停止를 當하기도 했다. 只今은 想像도 할 수 없는 오래된 追憶이다.
인터뷰 中인 김경범 ⓒKFA 홍석균
城南의 리그 3連霸, 그리고 K-리그 最高의 明鏡機
1989年 첫 番째 리그 參加, 그리고 이어진 박종환 監督의 資格停止 事件으로 逸話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成跡도 下位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創團 4年次인 1992年 일화는 安定을 찾기 始作했다. 일화는 1992年 발레리 사리체프(신의손, 50)를 迎入해 守備陣을 補强했고, 이는 大成功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때는 選手가 크게 補强되지 않았어요. 사리체프와 신태용이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守備에 對한 不安感을 털어버렸던 것 같아요. 守備를 하면서도 ‘이게 골이다’라고 생각을 하는데도 사리체프가 다 막아내는 거에요.(웃음) 뒤에서 그러다 보니까 앞에 있는 사람들도 不安感이 없어지는 거에요. 그걸로 인해서 팀이 180度 바뀌었고 좋은 成跡을 낼 수 있었죠. 사리체프가 와서 모든 팀 골키퍼가 다 外國人 選手로 바뀌게 됐어요.(웃음)”

“골을 안 먹는 것도 있었지만 그때는 골을 넣을 수 있는 選手들도 많았어요. 빠르게 갈 수 있는 고정운 같은 選手들이 攻擊쪽에 있었으니까, 우리는 一旦 골만 넣으면 이긴다는 自信感이 생긴 거에요. 뒤에서 받쳐줄 수 있는 選手가 있으니까요.”

當時 逸話에는 大韓民國 最高의 攻擊手라 할 수 있는 ‘赤兎馬’ 고정운(44)李 버티고 있었고, 國家代表였던 이상윤(41), 김이주(44), 신태용 等이 攻擊에 힘을 보탰다. 또한 1995年에는 長身 攻擊手 黃鉛石(37)李 加勢해 莫强攻擊陣을 構築했다.

사리체프 골키퍼의 加勢로 安定을 찾은 逸話는 無敵의 氣勢를 뽐내며 1993年 처음으로 K-리그 優勝컵을 들어올렸다. 94年 優勝으로 리그 2連霸를 차지한 逸話는 95年 浦項과 K-리그 最高의 明經기를 펼친다. 1995年 11月 11日 浦項 스틸야드에서 열린 챔피언決定戰 2次戰이다.

“그때의 競技를 뛰었던 選手들이라면 絶對로 안 잊어버릴 거에요. 그런 競技를 한다는 것 自體를 잊을 수 없어요. 그때 電力으로 따지고 보면 浦項이 좋았어요. 라데(40,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몸이 第一 좋을 때였고, (皇)선홍이랑 (洪)名報道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다 저희가 浦項(스틸야드)에 가면 恒常 안 좋은 雰圍氣로 왔었거든요.”

“前半戰에 0-2로 뒤지고 나서 選手들이 거의 졌다고 생각했어요. 朴 監督님도 라커룸에서 크게 혼내시지도 않으셨고요. 그때는 無條件 攻擊만 생각했어요. 後半戰에 (新)태용이와 란코備置가 들어왔는데, 浦項이 포백(back-4)를 쓰다가 後半戰에 스리백으로 바꿨어요. 전 이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웃음)”

“前半戰에 自己들이 월등했는데 後半戰에 굳히겠다는 생각으로 守備的으로 한 거죠. 그러다가 태용이한테 한 골 먹고, 란코備置가 페널티킥을 얻었어요. 그런데事實 페널티킥이 아니었어요. 시뮬레이션 액션이었죠.(웃음) 그래서 2-2街 됐고, 競技 終了 5分前에 (高)정운이가 세 番째 골을 넣어서 逆轉했어요. 그런데 우리도 지키려고 하다 보니까 라데한테 골을 먹어서 3-3이 된 거에요.”

K-리그 27年 歷史上 最高의 明鏡基로 꼽히는 일화와 浦項의 챔피언決定戰 2次戰은 3-3이었다. 以後 逸話는 챔피언決定戰 3次戰에서 이상윤의 決勝골로 리그 3連霸를 達成했다. 浦項은 2次戰에서 警告를 받은 황선홍이 警告累積으로 3次戰에 缺場해 結局 무릎을 꿇어야 했다.
98年 富川 時節의 김경범이 이동국과 볼競合을 벌이고 있다. ⓒKFA 홍석균
꿀벌이 꿀을 쫓듯, 蹴球를 찾아 떠난 김경범
박종환 監督은 逸話가 리그 3連霸를 達成하자 팀을 떠났다. 새로운 監督(이장수-레네)李 誤字 變化에 익숙하지 않은 逸話 選手團은 凝集力을 잃고 리그 꼴찌로 내려앉았다. 2年 連續 下位圈에 맴돌자 逸話에는 大大的인 改編이 이뤄졌고 當時 主張이던 김경범에게 코치職을 提案했다. 그러나 김경범은 코치職 代身 더 뛸 수 있는 夷狄을 選擇했고, 富川SK(現 濟州)로 移籍한다.

“選手 生活을 더 하고 싶었어요. 그만한 體力도 됐고 모든 條件이 됐으니까요. 그때 富川에서 조윤환(49) 監督이 오라고 해서 갔죠. 처음에는 候補였는데 몇 게임 지나고 나니까 주전이 됐죠. 그때도 體力的으로 좋았으니까 제가 攻擊手를 끌고 다녔죠.(웃음)”

조윤환 監督은 김경범과 유공에서 같이 選手 生活을 했던 同僚였다. 한때의 同僚가 이제는 監督과 코치의 關係가 된 것. 그러나 富川에서 成功的인 1年을 보낸 김경범은 갑작스러운 放出 通報를 받게 됐다. K-리그에서 팀을 求할 수 없게 된 김경범은 中國-日本-濠洲 等을 돌아다니며 팀을 求했다. 그러나 專門 에이전트도 없는 狀況에서 選手가 스스로 팀을 求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03年 江陵市廳 監督 時節의 김경범 ⓒKFA 홍석균
“2000年度에 江陵市廳에서 코치職을 提議해서 받아들였죠. 江陵市廳에서 플레잉코치로 다시 始作했어요. 아마 江陵市廳에서 뛴 競技도 엄청 많은 거에요. (웃음)”

江陵市廳에서 選手 生活을 마지막을 불태운 김경범은 2006年까지 江陵市廳의 監督으로 在職했다. 2006年 外部의 要因으로 시즌 中 監督職을 내놨지만 그는 如前히 蹴球에 對한 熱情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工夫하는 指導者로 거듭나기 위해 P級 코스를 受講하고 있으며, 指導者 敎育 補助講師로 나서 理論 授業에 熱中하고 있다.

“後悔 없이 選手 生活을 한 것 같아요. 남들이 해보지 못한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에 고맙게 생각하고, 내 自身이 熱心히 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에요. 하고자 하는 意志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끈氣가 있었기에 제가 338競技나 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터뷰=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技術政策 報告書인 'KFA 리포트' 2010年 5月號 '나의 選手時節' 코너에 실린 인터뷰 記事입니다.
出處 : 大韓蹴球協會 웹사이트
Posted by 韓國蹴球歷史統計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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