努力하는 者 멈추지 않는다
-
K리그
100
號 골의 主人公
윤상철
경신중
-
경신고
-
건국대를 거쳐
1988
年 럭키금성
(
現
FC
서울
)
에 入團한
윤상철
은
1997
年 隱退할 때까지
10
年間 總
300
게임에 出場하여
, 101
骨
, 31
도움을 記錄하며
‘K
리그 最高 골잡이
’
로 名聲을 날렸다
.
特히
K
리그 最初의
300
競技 出張 및
100
號골 達成은
K
리그 歷史에서 絶對 잊혀지지 않을 大記錄으로 남아있다
.
1990
年과
94
年 두 次例에 걸쳐 得點王에 올랐으며
,
두 番의 得點王은
이기근
(
水原
)
과
김도훈
(
全北
)
의 記錄을 除外하고는 全無한 記錄이다
.
特히
1994
年 記錄한
24
골은
2003
年
김도훈
(
城南
, 28
骨
)
이 깨기 前까지 한 시즌 最多 골이기도 했다
. 1993
年에는
8
어시스트로 도움王에 오르기도 했다
.
윤상철
은 身體條件이나 스피드
,
活動範圍 等에서 決코 뛰어난 스트라이커는 아니었다
.
그러나 골 에어리어 안에서의 得點感覺과 슈팅 타이밍 等을 비롯한 골에 對한 센스에 있어서는 他의 追從을 不許하며 斷然 獨步的이라 할만 했다
.
마치 蹴球공과 하나가 된 듯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는 언제나 攻擊의 마무리는
윤상철
이었고
,
大砲알 같은 强力한 슈팅이 아닌 골키퍼의 虛를 찌르는 툭 차 넣는 슈팅은
윤상철
만의 魅力이었다
.
1997
年
100
號골 達成과
300
競技 出場을 끝으로
K
리그에서 隱退한 뒤 濠洲에서의
2
年間의 選手
生活을 마친
윤상철
은 現在 母校인 경신고 監督으로 在職하고 있다
.
이런 그와의 인터뷰는
90
年代의 榮光을 만난다는 事實에 설레임 그 自體였다
.
건국대의 復興의 序曲
“
事實 建國大 蹴球部가 以前에도
(
金
)
災旱 先輩나
(
金
)
진국 先輩 等 大스타들을 間間이 排出하긴 했지만
,
大學 强豪는 아니었죠
.
프로에 進出한 先輩들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
그런데 내가 入學한
80
年代 中盤부터 建國大 蹴球部의 成績이 많이 좋아졌어요
.
내가
2,3
學年이었을 때는
2
冠王度 하는 等 거의 每年 頂上圈에 進入했으니깐요
.
個人的으로 機會가 와서 在學 中에 代表選手도 해보는 榮光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
實際 當時 건국대는 大學選手權大會에서 優秀한 成績으로 大學圈 大會를 휩쓰는 突風의 主役으로 名聲을 떨치는 時期였다
.
“
이 時期에 내 바로 밑이었던
고정운
을 始作으로
이상윤
,
황선홍
이 次例로 들어왔고
,
모두 같은 房에 룸메이트로 있었어요
.
結局 그 房 出身들이 代表選手로서 活躍하고 이름을 떨쳐서 氣分이 좋았죠
.
그 밑으로는
柳想鐵
이 있었고
,
더 내려와서 박충균이니
李榮杓
,
현영민
같은 後輩들이 國家代表로 活動하면서 建國大 이미지를 높여주는 契機가 되었어요
.
特히
(
有
)
상철이는 나이差가 있어 大學에서 같이 뛰지는 못했지만
,
이름도 같고 경신중
-
경신고
-
건국대 後輩여서 印象이 깊어요
.”
柳想鐵
과
윤상철
이름이 비슷해서 일까 그 因緣이 궁금해졌다
.
“
제가 大學 다닐 때 상철이가 中學生이었는데
,
그 때 個人的으로 이것저것 가르쳐줬던 記憶이 나네요
.
當時만 해도 상철이는 個人 技倆은 좋았지만 身體條件이 宏壯히 矮小해서 상철이 父母님이 나에게 諮問을 求하기도 했답니다
.
어쨌든 우리가 只今도 꾸준히 大學蹴球에서 上位圈을 形成하는 것을 보면 뿌듯하죠
.
더욱이 그 出發點이 우리 同期들부터였다는 點이 더욱 기쁘고
,
自負心이 있어요
.“
建國大 時節 그는 어떤 選手였을까
.
“
後輩들을 나무라기보다는 같이 이야기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後輩들과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어요
.
問題點이 있으면 後輩들과 相議도 많이 하고
.
只今도 경신고를 맡으면서 아이들과 對話하고
,
아이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 努力하고 있답니다
.
그 當時에는
(
고
)
정운이가 무서운 先輩로 알려졌는데
,
팀 訓鍊이든 個人訓鍊이든 正말 熱心히 하는 選手인데다 自己 主張도 剛하다보니까 대충대충 하는 것을 못 봐줬었죠
.“
럭키금성
..
華麗한 選手로의 非常
“1987
年 大學
4
學年 때 무릎手術을 하면서 거의 競技를 뛰지 못했어요
.
쉬다가
1988
年 드래프트
에 參加했는데
,
全體
1
順位로 럭키금성에 指名되는 기쁨을 누렸죠
.”
當時 그는 무릎手術로 인해 運動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狀況인지라 그가 入團할 무렵에는 體重이
10kg
이 불어있었다
.
冬季訓鍊 期間 동안 體重減量하고
,
무릎治療 하는 바람에 팀 訓鍊에 제대로 參加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몸이 正常的이지 않았기 때문에 시즌 開幕展에 半 게임 程度 뛰고
,
몇 競技를 繼續 缺場해야만 했다
.
“5
月 末頃 에야 後半에 交替 投入되었는데
,
그때 내가 決勝골을 터트리면서
1-0
으로 勝利했고 以後 繼續 競技에 나서게 됐었죠
.
첫 시즌에 結局
4
골을 넣기는 했지만
,
내가 생각해도 몸狀態가 正常이 아니었기 때문에 宏壯히 苦生했던 記憶이 납니다
. ”
大學
4
學年때 다친 무릎으로 手術을 하고서 프로에 入團한 그에게 實際로 무릎은 選手生活 내내 그를 따라다녔었던 問題였다
.
이로 인해 每年 冬季訓鍊 때마다 無理한 訓鍊은 可及的 避했지만 끝까지 이를 악물고 따라갔다고 傳한다
.
그때까지만 해도 醫學水準이 只今보다 많이 낮았기 때문에 物理治療나 再活 等에 있어서 體系的 治療가 어려웠었던 것이 事實이었다
.
그러나 그는 그런 惡材를 이겨내고 프로 데뷔
2
年次였던
1989
年
17
골로 確實한 골잡이로 자리 잡았고
, 1990
年에는 첫 得點王까지 오르게 된다
.
“1989
年에는
17
골로 得點
2
위까지 했었죠
.
事實 팀도 優勝할 수 있었는데 勝點
2
漸次로 有功
(
現 濟州
)
에게 아깝게 밀려
2
位를 記錄했어요
.
저 亦是 得點王을 노려볼 수 있었는데 조긍연 先輩에게
2
골 差로
1
位를 내줬다는 點에서 아쉬움이 컸던 한해였었죠
. 1990
年은 제 蹴球人生에서 가장 幸福했고
,
記憶에 남는 시즌이었어요
.
팀도 優勝을 차지했고
,
得點王도 받고
,
各種 施賞式에서도 賞을 여러 個 받았었죠
.”
當時 같이 뛰었던 팀員들의 履歷도 華麗했다
.
當時 팀의 主軸을 이뤘던 選手들은 一旦 골키퍼에 차상광
,
守備陣에
조민국
,
구상범
,
미드필드陣에
최순호
,
이영진
,
최대식
,
최태진
等이 있었고
,
攻擊陣에는
최진한
,
강득수
等이 布陣했었다
.
“(
崔
)
津한 先輩가 特히 나에게 도움을 많이 줬어요
.
이밖에도
1990
年 도움王에 올랐던 최대식이나
이영진
先輩와도 呼吸이 잘 맞았었죠
. 1991
年과
92
年에 조금 좋지 않았어요
.
팀이 優勝하고 나서 조금 느슨해진 感도 있었고
,
優勝멤버들도 빠져나가는 等 멤버交替度 많았죠
.
그러다보니 팀이 弱해지고 제 個人的으로도 多少 沈滯된 感이 있었던 것 같아요
.
1993
年부터 팀이 安定되면서 저 亦是 페이스를 되찾았었죠
.
팀도 準優勝을 차지했고
,
저 亦是 도움王
(8
個
)
과 함께 得點
2
位
(9
骨
)
를 하는 等 만족스런 한해였어요
.
그 氣勢를 繼續 이어가
1994
年에는
24
골로 當時 한 시즌 最多 得點記錄을 세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이때도 고비가 있었는데
,
初盤
7
競技에서 得點을 記錄하지 못해 오랜만에 交替 멤버로 밀리기도 했었죠
.
傲氣가 생겨서 더 이를 악물고 뛰었고
,
結局 시즌 最多골을 達成할 수 있었어요
. “
1994
年 그는
24
골을 記錄하며 한 시즌 最多 得點記錄을 세우게 되고
93
年
8
도움으로 도움上
,
감투상
,
베스트
11 FW
等을 받고
, 94
年에는 得點賞과 베스트
11 FW
等에 이름을 올리는 快擧를 이룩한다
.
“97
年은 가장 힘들었어요
.
시즌 내내 負傷으로 인해서 苦生했고 팀 또한 沈滯에 빠졌었죠
.”
97
年 럭키금성은
19
連續 無勝이라는 榮譽롭지 못한 記錄을 세우며 곤두박질쳤고 同時에 負傷으로 그도
2
軍으로 떨어지게 된다
.
그러나
1
軍으로의 復活은 그리 오래지 않았고
97
年 8
月 13
日
全北과의 競技에서 두 골을 넣으며
293
京畿만
에
101
號 골을 記錄하는 大 歷史를 세우게 된다
.
“100
號골을 記錄했을 때 너무 感謝했어요
.
浮上인데다가
2
軍으로 처음 내려갔고 마음 苦生이 甚했었거든요
.
헤딩슛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을 때까지 눈을 못 땠었던 記憶이 나네요
.”
그날의 골을 마지막으로 그는 영예로운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選手 生活을 하는 동안 年平均
10.89
골을 記錄하였으며 아울러 競技當
0.35
골을 터뜨리는 得點砲를 선보였다
.
浦項은 가장 많은
24
골을 그에게 許容했고 水原은
1
골만을 그에게 許容했다
.
隱退以後 濠洲에서
2
年間 選手로 活躍을 하다가 指導者 授業을 받고서 華麗한 그의 人生의
2
막
?
그의 母校인 경신고에서 열어가게 된다
.
1997
年
300
게임 出場 記錄과 最初
100
號 골을 記錄하며 華麗한 履歷을 마감한
윤상철
은 隱退 以後 대한축구협회의 各種 指導者 授業과
AFC
의 指導者 授業을 받으며 指導者로서의 길을 選擇한다
.
그의 첫 選擇은 自身의 母校인 경신고였다
.
自身이 未來에 對해 꿈꿔왔던자신의 母校에 監督으로 赴任한 그에게서 現在의 모습과 그가 꿈꾸고 있는 未來의 모습에 對해 물어 보았다
.
또한 어느 새
10
年次가 된 指導者의 香氣가 나는 그에게 그가 꿈꿔오고 있는 自身의 모습과 未來의 自身의 모습에 對해 質問했다
.
學生으로서 꿈을 꿨던 母校에 다시 指導者로서 돌아왔다
.
그 느낌이 궁금하다
.
蹴球 指導者의 길로 나서겠다고 宣言했을 때 母校인 경신고에서 처음 提案이 왔었지만 그 提案을 拒絶했었어요
.
母校이기도 했고 蹴球名門 경신고의 이름을 먹漆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
하지만 이내 韓國 蹴球의 發展을 위해서는 高等敎育을 통해서 좋은 選手들을 發掘하는 것이 가장 必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
또한 프로에서 隱退한 제 自身에게도 懶怠해짐 없이 繼續해서 채찍질 할 수 있는 機會라고 생각했습니다
.
처음 赴任할 當時에 지난 大會에서 경신고의 成績이 좋지 않아서 負擔이 많이 되었던 것은 事實이었어요
.
그 當時에 좋은 選手들을 어떻게 活用할 것인가를 놓고 밤을 새며 苦悶했었고 어린 親舊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함께 땀 흘리며 練習했던 記憶이 아직도 생생히 납니다
.
무엇보다도 蹴球를 했던 내 立場에서 봤을 때 이 親舊들의 進路는 이것으로 決定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더욱 이들의 長點을 살려줄 方法들이 必要했었죠
.
結局 함께 生活하며 팀에 對해 알게 해주었고 蹴球協會 指導者 講習會 等에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蹴球界 指導者들의 모습을 直接 보여주며 꿈나무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인식시켜주었어요
.
結局 그 다음부터는 좋은 成跡들이 나오기 始作했구요
.
現在에는 後輩이자 弟子들을 指導할 수 있다는 것에 恒常 感謝하고 있습니다
.
어떤 指導者가 되고 싶은지
?
指導者 흔히 말하는 리더에는 여러 가지 類型이 있잖아요
.
假令 劉備와 같은 덕장
,
關羽나 裝備와 같은 猛將
,
諸葛孔明과 같은 支障이 있다면 조금은 欲心이지만 세 가지의 色깔 모두를 兼備한 指導者가 되고 싶어요
.
왜냐하면 選手生活을 해보고 指導者의 길을 걷다보니깐 選手들 個個人마다의 色깔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實感하게 되요
.
개인플레이를 잘하는 選手가 있는가 하면 팀을 아우를 수 있는 選手도 있고 激勵를 잘해주는 選手도 있어요
.
이들을 指導하기 위해서는 各自의 色깔에 맞게 監督이 곳곳에 適切하게 選手들을 活用할 줄 알아야 하고 이들을 各自가 갖고 있는 色깔을 最大限 키워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指導者 生活을 통해서 느꼈죠
.
이를 爲해서 蹴球協會와
AFC
等에서 實施하는 各種 指導者 세미나와 講習會 그리고 指導者 養成過程들을 빼놓지 않고 밟은 것이에요
.
왜냐하면 다양한 選手들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指導者의 立場에 서 있는 제가 더 많이 더 폭넓게 經驗해 봐야 했기 때문이었죠
.
指導者는 選手와 다른 領域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비록 運動場에 공을 만지지 않을 뿐 選手들과 함께 呼吸하며 더욱 더 많이 생각하고 뛰어야 하는 사람이 指導者라고 생각해요
.
그런 意味에서 앞서 말한 세 가지의 모든 色깔을 갖춘 指導者가 꼭 되고 싶어요
.
윤상철
監督에게 蹴球란 어떤 意味인지
蹴球 없이는 못사는 人生이지 않을까 싶어요
.
어렸을 때부터 只今까지 繼續하고 있는 것이 蹴球이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蹴球와 關聯된 일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
지난 人生을 돌이켜보면 蹴球를 하면서 後悔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 무엇보다도 보람 있었고 人生에 있어서 가장 즐거웠던 時期들 中 大部分을 蹴球와 關聯된 일을 통해서 였던 것 같아요
.
지난 날의 選手時節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300
競技와
100
골을 넣었는지 싶어요
.
途中에 負傷도 있었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蹴球를 사랑했고 蹴球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人生이었기에 可能했던 일이었던 것 같아요
.
그런 意味에서 蹴球는 人生의 活力素이자 나의 人生의 同伴者라고 말하고 싶어요
.
來日을 위한 自身만의 삶의 目標가 있다면
韓國蹴球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요
. AFC
에서 主管하는 指導者 세미나를 보고서 많이 느꼈던 것이 아시아地域의 蹴球에 對한 關心도 이렇게 높은데 이른 바 先進蹴球라고 不利 우는 유럽蹴球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長點을 우리나라에도 많이 椄木시켜서 長期的인 眼目으로 우리나라의 蹴球를 발전시켜야 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답니다
.
現在 경신고 監督을 맡으면서 大韓民國의 蹴球界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玉石을 골라내는 일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
좋은 玉石을 發掘해내고 玉石을 갈고 닦아서 프로나 大學에 보내고 있는 役割을 遂行하는 것이 제 位置에서 할 수 있는 일이죠
.
아직 많은 時間이 지나지 않았지만 조금씩 그런 玉石을 골라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있는 느낌이 조금씩 느껴져요
.
더욱 더 工夫하고 準備해서 그들에게 많은 知識을 물려주고 많은 經驗을 통해서 할 수 있다는 自信感을 길러주고 싶어요
.
또한 이런 經驗을 바탕으로 韓國蹴球의 先進化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
.
現在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恒常 꿈을 꾸고 그 꿈을 向해서 부지런히 努力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답니다
.
그래서 自身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제 人生은 아직도 進行 中 이라구요
.
마지막으로
K
리그 팬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2002
年을 起點으로 韓國蹴球는 量的으로나 質的으로 많은 成長을 해왔어요
. K
리그 또한 現在
14
個 팀으로 이루어져 좋은 競技와 좋은 競爭을 통해서 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膳賜하고 있죠
.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中心이 되는 것은 팬들의 힘인 것 같아요
.
제 人生에서 가장 즐거웠던 記憶은
100
號골을 넣은 것보다
100
號골에 拍手로 和答해주셨던 팬들의 歡呼와 激勵였어요
.
무엇보다도 팬들이 없으면
K
리그는 勿論 韓國蹴球는 發展할 수 없잖아요
.
비록 只今이 先進 蹴球로 跳躍하는 過渡期的인 時期인지라 팬들의 期待에 못 미치는 境遇도 많이 있을 것이지만 車가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 힘이 더 많이 必要하듯이
K
리그의 힘인 팬들의 聲援과 激勵가 무엇보다도 가장 必要한 時期인 것 같아요
.
恒常 希望을 가지고 愛情 어린 視角으로 建設的인 批判과 稱讚으로 함께
K
리그와 韓國蹴球의 發展을 이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아울러 恒常 關心 있게 지켜봐주셔서 感謝드리고 그 成員과 熱情에 不足함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恒常 最善을 다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
出處 : 한국프로축구연맹 舊웹사이트
編輯 : 韓國蹴球歷史統計硏究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