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活動量과 성실한 플레이로 70年代 큰 사랑을 받았던 이영무 ⓒ스포탈코리아
‘2個의 心臟을 가진 사나이’라는 別名은 韓國 蹴球팬들 사이에서는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을 뜻하는 固有名詞가 되었다. 그러나 박지성에 앞서 이미 2個의 心臟을 가진 選手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영무다.
이영무는 1970年代 韓國 代表팀의 中心 미드필더로 活躍하면서 엄청난 活動量을 바탕으로 한 성실한 플레이로 사랑을 받았다. 그는 ‘天才’의 이미지는 아니었고 몸집 또한 矮小했다. 그러나 競技場에서 暫時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끝까지 勝負를 抛棄하지 않고 自身의 100%를 모두 發揮하는 强靭함으로 蹴球팬들을 감동시켰다.

勿論 이영무가 單純히 活動量과 성실함만으로 1970年代 韓國 代表팀의 主戰 미드필더로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다. 이영무는 獨特한 훼이크 動作에 이은 드리블과 才致있는 플레이로 相對를 籠絡했다. 또한 側面에서 크로스를 올리기 힘든 狀況에서도 柔軟하게 몸을 돌려 크로스를 올려 感歎을 자아내게 만들기도 했다.

蹴球를 위해 2年間의 再修도 마다하지 않았던 어린 時節

京畿道 능곡초등학교를 卒業한 이영무는 처음부터 蹴球에만 專念했던 것은 아니었다. 陵谷初 5學年 時節, 反對抗 蹴球大會에서 頭角을 나타낸 그는 蹴球部 코치의 勸誘로 陵谷初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當時 陵谷初 蹴球部는 本格的인 蹴球팀이라기보다는 클럽에 가까웠다.

“5學年 때 反對項 蹴球大會에서 잘했던 아이들을 모아서 蹴球部와 競技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코치님이 보고 蹴球部를 勸誘했고, 저도 蹴球를 좋아했기에 加入했죠. 그런데 6學年에 올라간 다음에는 어머니의 反對가 甚해서 蹴球部를 그만둬야했어요.”

“그래도 蹴球를 너무 좋아해서 敎室 窓가에서 蹴球하는 親舊들만 바라봤고, 그 때문에 先生님이 제 자리를 複道 쪽으로 옮기는 일도 있었죠. 마음은 蹴球部에 있어서 몰래 授業時間에 窓門 열고 나가서 같이 築構하다가 들어오곤 하다가 昏倒 많이 났습니다.(웃음) 結局 先生님이 父母님을 만나시더니 얘는 아무래도 蹴球를 시켜야겠다고 말씀하셔서 工夫와 蹴球를 같이 하게 됐습니다.”

現役 時節 줄곧 미드필더로 活躍했던 이영무는 初等學校 때도 미드필더였다. 그 當時에도 키가 작아서 ‘라이터돌 같다’는 놀림도 들었던 그는 많이 뛰고, 熱心히, 鬪志있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蹴球選手 이영무’의 特徵이 이때부터 드러난 것이었다.

능곡중에 進學한 以後에도 工夫하면서 蹴球를 하는 生活이 繼續됐다. 陵谷初와 마찬가지로 本格的인 蹴球部가 아니었던 능곡중은 當時 경희대 體育學科에 다니던 이중구 氏(現 高陽市 生活體育協議會 專務)가 基本技 爲主로 指導를 해주는 程度였다. 그런데 그렇게 蹴球를 클럽活動 程度로 생각하면서 滿足하고 있었던 이영무에게 새로운 길이 열렸다. 周圍의 勸誘로 경희중 蹴球部에 立部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능곡중 時節에는 每日 訓鍊하지는 않고, 基本技 訓鍊에만 忠實했어요. 리프팅을 떨어트리지 않고 500個 以上 하고 그랬죠. 그 때만 해도 서울에 가서 本格的으로 蹴球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當時 경희중 蹴球部에 계시던 房戒學 先輩님이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게 機會를 주셨죠. 이 때부터 本格的으로 蹴球選手 生活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本格的인 蹴球選手로의 길이 順坦한 것은 아니었다. 高等學校에 들어가기에는 實力이 不足하다고 評價받은 이영무는 2年間 경희중에서 再修를 하며 切齒腐心했다.

“그 무렵 저는 體軀 自體가 너무 작았고 體力도 弱했어요. 곧바로 高等學校로 가기는 힘들다는 評價가 내려져서 2年을 더 경희중에 있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學校를 1年 일찍 들어가 事實上 1年 再修한 셈이 됐지만 말이죠. 2年째 再修하게 됐을 때는 집에 이야기도 못했어요. 저야 蹴球를 너무 좋아하기에 甘受할 수 있었지만, 집에 이야기하면 當場 蹴球 그만두라는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요.”

“結局 집에는 高等學校 進學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걸리겠어요? 父母님이 高校 試合을 보러가셨는데 제가 없었던 거예요. 딱 걸렸죠.(웃음) 父母님은 運動하려면 잘 먹고 잘 해줘야 하는데 집안 形便이 그렇지 못하니까 그만뒀으면 하셨는데, 제가 끝까지 固執을 부렸어요.”
경희대 時節 볼 트래핑 訓鍊을 하고 있는 이영무
基礎를 다질 수 있었던 初重 時節, 오히려 큰 도움

다른 選手들에 비해 本格的으로 蹴球 選手의 길로 들어선 것은 늦었지만, 陵谷初-中 時節의 基本技 爲主 訓鍊은 이영무의 蹴球人生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當時에는 訓鍊量 不足으로 힘든 時期도 보냈지만, 오히려 어린 時節에 基本에 忠實할 수 있었던 것은 成人이 된 以後 이영무에게 플러스로 作用했다.

“제가 蹴球選手로서 繼續 發展할 수 있었던 것은 基本技가 탄탄했기 때문입니다. 一般的으로 超-中-고를 지나면서 發展에는 限界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뛰어넘는 마지막이 바로 基礎에 있어요.”

“그 時節에는 大會에 나갔던 것이 아니라 基礎만 닦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나중에 경희중, 경희고에 가서 體格이 矮小한데도 버틸 수 있었던 거죠. 제가 나중에 힘이 붙으니까 繼續 發展할 수 있었던 거고요. 只今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일이죠.”

“저는 그 무렵에 하루에 볼 리프팅을 千個씩 하곤 했습니다. 무릎, 머리, 인사이드, 아웃사이드로...계속했죠. 익숙해지다보니까 失手가 없어지더군요. 저에게 볼이 올 境遇 1m 밖으로 나가지 않고 컨트롤이 됐어요. 結局 危機 對處能力과 볼 키핑 能力이 向上된 거죠. 그런 基本에 忠實하다보니 代表 選手로도 오래 活躍할 수 있었습니다.”

“이영표나 박지성, 김두현, 박주영 같은 選手들도 마찬가지에요. 特히 이영표와 박지성은 初等學校 때 김철수라는 先生을 만난 것이 幸運이었죠. 이 분은 當時 아약스에서 만든 幼少年 訓鍊 프로그램 비디오를 보고 아이들에게 椄木했었어요. 1番부터 40番까지 페인팅 技術을, 드리블 패턴만 20가지를 만들어서 繼續 反復해 가르쳤죠. 이영표가 있던 安養初 時節에는 番號만 이야기하면 거기에 맞춰 아이들이 드리블하고, 冬季訓鍊에도 그런 基本技만 가르쳤어요. 그 先生이 水原 세류初에 가서는 박지성을 또 그렇게 가르쳤고요. 이영표가 이야기하길 大會에 나가면 봄-여름 大會에서는 지기만 하는데, 가을大會쯤 되면 全國을 席卷할 程度로 成長해버린다고 하더군요. 結局 基本技, 技術이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 例입니다.”

努力, 努力, 끊임없는 努力

무엇보다 이영무의 成功要因은 斷然 끊임없는 努力이다. 그는 蹴球選手가 된 以後, 오직 ‘努力’이라는 單語 하나만을 믿고 前進했다. 寄宿舍에서 지낼만한 形便이 되지 못해 집에서 通學하던 경희중-高 時節에는 새벽 6時에 高陽에서 서울로 가는 첫 汽車를 타고 學校로 가서 저녁 9時 막車를 타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서도 팀 訓鍊 뿐 아니라 個人訓鍊을 꼬박꼬박 하는 성실함은 如前했다.

“事實 通學하면서 運動하는 것이 너무 疲困하고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父母님이 繼續 反對를 하셨기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고, 새 유니폼이나 트레이닝服을 사달라는 이야기도 못하고 先輩들이 입고 떨어지는 옷을 물려받아서 꿰매입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信仰에 더 依支하게 되었고, 祈禱를 하면서 남들보다 더 많이 努力하고 忍耐해야겠다는 覺悟를 하게 됐습니다. 경희대에 進學해서 寄宿舍 生活을 할 때에도 새벽마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서 山을 뛰고, 밤 10時에 남들 잘 때 化粧室 가는 척 나와서 階段도 뛰고, 줄넘기도 하고,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드리블 訓鍊하고 그랬어요. 팀에서 1週日이나 2週日 休暇를 줄 때도 혼자 도시락 두 個 싸서 學校에 와서 午前-午後로 訓鍊을 했습니다. 저라고 놀고 싶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늘 제 마음에는 남들 놀 때 같이 놀아서는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죠.”

“蹴球일지도 꼬박꼬박 썼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訓鍊했고, 내가 잘한 것과 不足했던 것, 稱讚받은 것과 指摘받은 것을 詳細하게 쓰면서 제 自身을 돌아보곤 했어요. 그 때부터 指導者에 對한 準備도 했던 것 같습니다. 萬若 나중에 내가 指導者가 되면 이런 部分에서는 이렇게 하고 싶다는 것을 메모하곤 했었죠. 그리고 술,담배를 비롯해 運動하는데 해로운 것은 絶對 하지 않았죠. 只今까지도 지켜오고 있고, 커피나 인스턴트 飮食, 콜라 等도 絶對 먹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蹴球를 잘할 수 있는 길이라면 뭐든지 하려고 했었어요.”

他의 追從을 不許했던 이영무의 엄청난 活動量 亦是 같은 脈絡이다.
지난 UEFA 챔피언스리그 4强 2次戰 바르셀로나와의 競技에서 박지성이 約 12km를 뛰어 兩 팀 통틀어 가장 많이 뛰면서 言論과 팬들의 讚辭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영무는 非公式的으로 한 競技에 20km 가까이 뛴 적도 있다고 한다. 70年代 韓國에게 每番 敗하던 日本에서 韓國 打倒를 위해 各 選手別로 分析을 했고, 그 中 이영무에 對한 分析에서 이러한 數値가 나와 驚愕을 禁치 못했다는 後聞.

그리고 이러한 鋼鐵體力에 對해 이영무는 어린 時節부터 다져온 悽絶할 程度의 努力, 그리고 信仰心에 基盤한 精神力을 理由로 꼽았다.

“只今은 J리그 우라와 레즈의 스카우터로 活動하는 오치아이라는 選手가 現役 時節 第 專擔 마크맨이었습니다. 最近에 만날 機會가 있었는데, ‘當身이 하도 많이 뛰어다녀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더군요. 實際로 全般 끝나고 第 마크맨이 힘들어서 交替되는 境遇도 있었죠.(웃음) 저는 90分을 뛰면서 제 자리에 서 있는 境遇가 거의 없었습니다. 恒常 움직였어요.”

“事實 제가 오래달리기를 남들보다 잘하긴 했지만, 肺活量 自體는 다른 選手들과 비슷했어요. 一旦 엄청나게 訓鍊을 많이 했습니다. 訓鍊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뛸 수 있었겠어요? 高校 때나 大學 때 山에 올라가서 인터벌 訓鍊을 혼자 했습니다. 한番 그렇게 山을 타면 脈搏이 200에서 240까지 올라가죠. 脈搏이 200萬 넘어가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그런 訓鍊을 새벽이고 저녁이고 繼續 했습니다. 올라갈 때는 筋肉訓鍊도 되고, 내려올 때는 스텝을 盞발로 만드는데 적합하죠. 그랬더니 어느 瞬間 競技場에서 웃으면서 뛸 수 있었어요.”

“國家代表팀에서 뛸 때는 이런 일도 있었죠. 저나 차범근 先輩나 막 國家代表에 뽑힐 무렵이었는데, 둘다 팀 訓鍊이 끝나고나면 個人訓鍊을 하곤 했어요. 저도 그렇지만 茶 先輩도 恒常 自身은 不足하다면서 아침 저녁으로 個人訓鍊을 했죠. 어느날 팀 訓鍊이 끝나고 둘다 不足하다면서 個人訓鍊을 하는데, 저는 이쪽 골대에서, 車 先輩는 저쪽 골대에서 訓鍊에 熱中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하고 나서 서로 ‘저쪽에서 訓鍊마치고 들어가면 가야지’하고 마음을 먹었던 거예요. 서로 눈치만 보면서 繼續 訓鍊을 했죠. 結局 한참 지났는데도 우리 둘이 宿所에 안오니까 當時 監督이셨던 함흥철 先生님이 오셔서 빨리 들어오라고 하셨던 記憶이 납니다.(웃음)”

“또 하나는 信仰의 힘이에요. 저도 體力의 限界는 分明 있고, 京畿 終了 10分을 남기면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祈禱를 드리는 거죠. 第 無限한 可能性을 믿고, 하나님께 祈禱하고, 恒常 挑戰했습니다. 限界를 超越할 수 있었던 要因이죠. 어떤 競技에서는 後半 끝나고도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어요. 그럴 때는 運動場이 正말 작게 느껴지죠. 縱橫無盡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았어요.(웃음)”
1979年 한일 定期戰에서 이영무의 競技 모습
高校 2學年때 처음 太極마크의 기쁨을 맛보다.

이영무가 처음 代表팀 유니폼을 입은 것은 경희고 2學年 말이었다. 그리고 3學年에 올라가서는 1972年 泰國에서 열린 U-20 아시아選手權에 參加하는 기쁨도 맛봤다. 이 大會에서 韓國은 이스라엘에 이어 2位를 차지했다. 이영무는 이듬 해인 73年 이란 大會에도 參加해 3位를 記錄했다.

“2學年 末에 4次 先發까지 거쳐서 最終 25名에 뽑혀 合宿訓鍊을 했고, 이듬 해에 아시아選手權에 나갈 最終 18名에 選拔됐죠. 當時 차범근 先輩와 황재만 先輩가 계셨고, 저와 신현호, 유동춘 이 세 名이 高3으로 뽑혔어요. 代表에 選拔됐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感激해서 엉엉 울면서 祈禱했어요. 蹴球하는 걸 反對하시던 父母님들도 正말 좋아하셨고요. 當時 代表팀 發表 뉴스를 라디오에서 해줬는데,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은 처음 봤던 것 같아요.”

그리고 뒤늦게 急浮上한 이영무를 두고 여러 大學에서 爭奪戰을 벌였고, 勝者는 慶熙大였다. 이영무는 工夫를 함께 할 수 있다는 點에 魅力을 느껴 慶熙大行을 選擇했다.

“學窓 時節에 體育敎師를 하면서 監督을 하는 분들이 너무 보기 좋더군요. 저도 工夫하면서 蹴球를 하고 싶었고, 當時 경희대가 그런 點을 强調했었어요. 午前에 授業받고, 午後에 訓鍊하고 그랬죠. 勿論 個人的으로 새벽訓鍊과 저녁訓鍊을 하면서 蹴球에 不足함이 없도록 努力했습니다. 結局 大學 마치고 大學院 工夫를 繼續한 것도 그런 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慶熙大 4年 동안 이영무는 11番이나 優勝을 차지했다. 當時 고려대와 延世大, 한양대 等에 비해 戰力上 떨어지는 慶熙大였지만, 이영무를 筆頭로 한 健實한 蹴球는 華麗한 蹴球를 制壓했고, 그 무렵 가장 많이 優勝을 차지하며 最强팀으로 君臨했다.

最初로 祈禱 세러머니를 펼치다.

박주영을 비롯해 여러 選手들이 골을 넣은 뒤 펼치는 祈禱 세러머니. 이것의 援助도 이영무이다. 靑少年代表를 거쳐 1974年에 國家代表팀에 拔擢된 이영무는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參加하며 國家代表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1975年,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杯에 參加한 이영무는 韓國 最初의 祈禱 세러머니를 펼쳤다. 心理學 博士 兼 牧使였던 조셉 머피가 쓴 ‘勝利의 길은 열린다’라는 冊을 感銘깊게 읽은 이영무는 每 競技 祈禱를 하면서 競技에 나섰고, 韓國은 優勝을 차지했다. 그리고 홈팀 말레이시아를 相對로 한 決勝戰에서 이영무는 劇的인 決勝골을 터트린 뒤, 歷史的인 첫 祈禱 세러머니를 펼쳤다.

“그 冊을 읽으면서 肯定的인 마음, 想像力이 世界를 支配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는 蹴球에 適用했죠. 제가 골을 넣고 팀이 이기는 場面을 생각하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습니다.”

“決定的인 것은 決勝戰 前날 밤이었어요. 緊張하다보니까 잠이 잘 오지 않아서 聖經 句節을 읽었는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하는 句節이 瞬間的으로 가슴 깊숙히 들어왔습니다. 事實 저는 體格이 작기 때문에 빠르고 身體條件이 좋은 選手들을 만나면 萎縮되었고, 性格이 小心해서 제 實力을 제대로 發揮하지 못하는 境遇가 많았었죠. 그런데 그 句節을 읽으면서 마음의 平安을 느꼈고, 競技 當日에도 몸이 가볍더군요.”

“決勝戰에서 異常할 程度로 失手도 없이 잘 뛰었고, 全般이 끝날 무렵에 몸을 돌면서 터닝슛을 한 것이 그대로 골로 連結되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골 넣으면 기쁨에 陶醉되어 손들고 그랬을 텐데, 그날은 골을 넣고 신현호에게 붙잡혀서 넘어진 뒤에 同僚들이 올라타는 바람에 숨도 쉬기 어려우면서도 하나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以後부터는 골을 넣을 때마다 祈禱 세러머니를 하게 됐죠.”

이 競技를 始初로 해서 이영무는 다음 A매치였던 韓日定期戰(1975年 9月)에서도 팀의 세番째 골을 성공시키며 무릎 꿇고 祈禱를 했다. 그리고 以後부터 이영무는 自信感 넘치는 플레이로 絶頂의 技倆을 뽐냈다. 미드필더임에도 골을 많이 넣었고, 그 때마다 祈禱 세러머니는 어김없이 이뤄졌다.

“기도 세러머니 때문에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죠. 特히 中東 遠征을 갔을 때가 問題였어요. 한番은 사우디 遠征으로 記憶하는데, 그 무렵에는 石油 需給 問題로 인해 우리가 中東圈의 눈치를 많이 봤었습니다. 外交를 위해서도 축구팀이 遠征을 많이 갔는데, 그럴 때마다 政府에서는 ‘비겨도 좋고, 이기더라도 1골 差 以內로 아슬아슬하게 이겨야 한다’고 注文하곤 했어요.”

“그러면서 政府가 念慮했던 것이 제가 祈禱 세러머니를 하는데, 그 쪽이 이슬람圈이라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競技 前에 저에게 와서 祈禱를 하지 말아 달라고 付託하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알겠습니다’ 하고만 對答했죠. 祈禱하겠다고 하면 競技를 못 뛰게 할 것 같아서 曖昧하게 이야기한 것이었어요.(웃음)”

“그런 뒤에 競技場에 들어서 同僚들끼리 파이팅을 외친 다음에 저는 무릎 꿇고 祈禱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同僚들이 觀衆席, 特히 사우디 王子가 보지 못하게 제 周圍를 둘러싸서 가려줬죠.(웃음) 別 일은 없었습니다. 政府에서 너무 敏感하게 對處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궁금한 點. 70年代에는 이스라엘이 아시아에 所屬되어 있어 함께 競技를 치르곤 했다. 果然 이영무의 祈禱는 하나님이 選擇한 民族이라는 이스라엘을 相對로도 통했을까.

“하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選擇한 民族이긴 합니다. 그러나 只今 이스라엘 사람 中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別로 없어요. 그들은 舊約聖書만을 믿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戰에서 제가 골 넣고 祈禱드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웃음)”
젊은 時節의 이영무
내 生涯 最高의 競技

1981年까지 國家代表로, 그리고 86年까지 選手 兼 코치로 活躍한 이영무는 수많은 名勝負를 演出했다. 그 中에서도 그가 가장 記憶에 남는 競技로 꼽는 것은 1977年 11月 11日 이란에서 열렸던 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豫選 이란과의 競技였다. 遠征팀에게는 地獄과도 같은 場所인 이란 테헤란의 아지디 스타디움에는 11萬名의 觀衆이 들어찼고, 韓國으로서는 반드시 이겨야만 월드컵에 對한 希望이 있는 競技였다. 이 競技에서 이영무는 선제골을 비롯해 2골을 뽑아내며 最高의 活躍을 펼쳤다. 그러나 結局 韓國은 이란과 2-2로 비겼고, 월드컵 티켓은 이란의 몫이 되었다.

“競技 前부터 이란은 우리한테 2골 差 以上으로 이긴다고 豪言壯談을 했었어요. 우리도 傲氣가 생겼죠. 當時 저는 몸 狀態가 썩 좋은 便은 아니었는데, 全般에 제 앞으로 볼이 屈折되어 왔어요. 30m 程度 되는 距離였는데, 그대로 슛을 試圖했고, 得點에 成功했죠. 제 生涯에 그런 中距離슛 골이 別로 없었는데 重要할 때 하나 터트렸어요.”

“얼마 前에 外國 인터넷 사이트에 가봤더니 이 競技 動映像이 있었습니다. 봤더니 골 넣고 祈禱 세러머니하는 것까지 나오더군요.(웃음) 그 골이 들어간 瞬間 이란 觀衆 11萬名이 一瞬間에 조용해졌어요. 잊을 수 없는 記憶이죠. 그러나 後半에 2골을 내주면서 逆轉을 許容했고, 나중에 조광래가 올려준 크로스를 김재한 先輩가 헤딩으로 떨궈주자 제가 殺到하며 골로 連結시켜 2-2로 競技를 마쳤습니다.”

-> 이란戰 骨 動映像 보러가기

1975年 킹스컵 亦是 이영무에게는 잊을 수 없는 大會였다. 이 大會에서 이영무는 해트트릭을 비롯해 6골을 폭발시키며 大會 MVP에도 뽑혔다. 歸國하자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이영무에게 集中되었고, TV에도 出演하는 等 最高의 人氣를 謳歌했다.

“6골을 넣으면서 MVP를 받고 歸國하니까 모든 記者 분들이 저에게 오더군요. 그 前에는 차범근, 김재한, 김호곤 先輩 等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갔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어요. 자고나니 스타가 됐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實感했던 瞬間이었죠. 當時 MBC에서 ‘스타쇼’라는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거기에도 나가게 됐어요. 人氣가 높은 프로그램이었는데, 蹴球人으로는 이회택 先輩님에 이어 두番째였습니다. 새로운 經驗이었죠.”
1975年 朴大統領倍(박스컵)에서 優勝한 後 韓國代表팀(아랫줄 왼쪽 두番째가 이영무)
幻想呼吸을 자랑했던 同僚들

8年餘에 걸친 代表팀 生活 동안 이영무와 幻想呼吸을 자랑했던 選手들은 여럿 있다. 基本的으로 이영무는 워낙 많이 뛰어다니며 同僚들을 爲해 獻身했던 選手이기 때문에 그 누구와도 呼吸에 問題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中에서도 이영무 本人이 最高의 파트너로 꼽았던 選手는 신현호와 車範根, 김재한 等이었다.

“一旦 신현호 監督과는 國家代表 時節 줄곧 한房을 쓰면서 가장 가깝게 지냈습니다. 只今도 가장 가까운 親舊이고요. 事實 저는 경희중-高, 신현호 監督은 한양중-고를 나왔기 때문에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國家代表에서 繼續 함께 지내면서 切親한 사이가 됐죠.”

“競技場 안에서는 차범근 先輩와 김재한 先輩, 김진국 先輩, 허정무 監督 等을 꼽을 수 있어요. 一旦 차범근 先輩가 突破해서 連結해주면 제가 殺到해서 골을 넣곤 했습니다. 또 김재한 先輩가 헤딩으로 떨궈주는 볼을 제가 잘 주워먹기도 했고..(웃음) 왼쪽의 김진국 先輩, 허정무 監督과도 呼吸이 잘 이뤄졌던 걸로 記憶합니다.”
1980年代 初盤 할렐루야에서 뛸 當時의 이영무
할렐루야 축구팀에 蹴球人生을 걸다.

1980年 以後 이영무의 삶에는 오직 할렐루야 蹴球팀만이 存在한다. 慶熙大 卒業 後 한홍기 監督의 가르침을 받고자 포항제철에 入團한 이영무는 77年과 78年, 2年 동안 抛撤에서 活躍한 뒤 軍 服務를 위해 陸軍 忠義팀에서 뛰게 됐다. 80年 除隊한 이영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롭게 創團한 할렐루야였다. 韓國蹴球의 傳說인 故김용식 先生을 初代 監督으로 모신 할렐루야에서 그는 選手兼 트레이너로 活躍했다.

“김용식 先生님을 모시면서 蹴球에 對한 새로운 世界에 눈을 떴습니다. 그 분은 恒常 技術만이 韓國蹴球가 世界를 制霸할 수 있는 길이라고 力說하셨어요. 그리고 年歲가 있으신데도 每日 새벽마다 나가셔서 볼 리프팅 訓鍊을 하시는 等 每事에 模範이 되셨죠. 또 英語를 홀로 獨學하셔서 機會될 때마다 海外에 나가셔서 先進技術을 배워오곤 하셨고요. 第 모델이 되었던 분이십니다.”

이영무는 할렐루야 축구팀을 프로로 전환시켜 1983年 元年 슈퍼리그에 참가시키는데도 많은 役割을 했다. 韓國 最初의 프로팀이 만들어지는데 産婆 役割을 한 것이다.

“김용식 先生님도 恒常 ‘아마추어는 限界가 있다. 프로化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비록 宣敎 目的이 있는 팀이지만, 當時 崔順永 KFA 會長님께서 許諾해주시고, 스폰서를 받아서 韓國 最初의 프로팀으로 出帆할 수 있었죠.”

비록 財政的인 問題로 인해 할렐루야가 解體의 아픔을 겪었지만, 以後에도 이영무는 임마누엘과 이랜드 축구팀에서 蹴球와 宣敎活動을 繼續 이어갔다. 그리고 할렐루야가 再創團하는데 온갖 努力을 기울여 結局 1998年에 그 目標를 達成했다.

“現在 내셔널리그에 所屬되어 있는데, 2年 後에는 할렐루야 축구팀이 생긴 지 30周年이 됩니다. 그 때를 즈음해서 다시 할렐루야가 K-리그에 復歸할 수 있도록 努力하는 것이 마지막 目標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영무는 自身의 蹴球人生이 後代에 어떻게 記憶되었으면 하는지에 對한 質問에 이렇게 答했다.

“事實 제 祈禱 세러머니 때문에 저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고,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信仰的인 面을 떠나서 그 누구에게도 ‘이영무는 正말 熱心히 한다. 決코 抛棄할 줄 모르고 最善을 다한다’는 評價를 들었습니다. 저도 그런 評價가 좋습니다. 볼을 잘 찬다, 才能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어느 瞬間에도 抛棄하지 않고 最善을 다하는 이영무의 모습으로 記憶되었으면 했고, 또 그렇게 했다고 自負합니다.”

“제 別名도 다 그런 것들이었어요. 相對가 볼을 잡으면 어떻게든 빼앗으려고 뛰어다닌다고 해서 ‘악바리’라는 別名을, 엄청나게 뛴다고 해서 ‘3個의 弊를 가진 사나이’, ‘달리는 機關車’, ‘발바리’라는 別名을, 猛獸와 같이 달려든다고 해서 ‘그라운드의 獅子’라는 別名을 얻었죠. 勿論 競技하다보면 抛棄하는 境遇도 생기지만, 그런 境遇라도 最善을 다하는 것이 選手의 道理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매너를 가진 選手로도 記憶되고 싶네요. 골 넣고 拍手받는 것보다 나에게 거칠게 태클이 들어온 選手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는 모습이 더 拍手를 받을 수도 있거든요. 좋은 매너로 最善을 다하는 選手로 記憶되었으면 합니다.”


인터뷰=李相憲

* 대한축구협회 技術政策 報告書인 'KFA 리포트' 2008年 12月號 '나의 選手 時節' 코너에 실린 인터뷰 記事입니다.
出處 : 大韓蹴球協會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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