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礎를 다질 수 있었던 初重 時節, 오히려 큰 도움
다른 選手들에 비해 本格的으로 蹴球 選手의 길로 들어선 것은 늦었지만, 陵谷初-中 時節의 基本技 爲主 訓鍊은 이영무의 蹴球人生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當時에는 訓鍊量 不足으로 힘든 時期도 보냈지만, 오히려 어린 時節에 基本에 忠實할 수 있었던 것은 成人이 된 以後 이영무에게 플러스로 作用했다.
“제가 蹴球選手로서 繼續 發展할 수 있었던 것은 基本技가 탄탄했기 때문입니다. 一般的으로 超-中-고를 지나면서 發展에는 限界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뛰어넘는 마지막이 바로 基礎에 있어요.”
“그 時節에는 大會에 나갔던 것이 아니라 基礎만 닦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나중에 경희중, 경희고에 가서 體格이 矮小한데도 버틸 수 있었던 거죠. 제가 나중에 힘이 붙으니까 繼續 發展할 수 있었던 거고요. 只今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일이죠.”
“저는 그 무렵에 하루에 볼 리프팅을 千個씩 하곤 했습니다. 무릎, 머리, 인사이드, 아웃사이드로...계속했죠. 익숙해지다보니까 失手가 없어지더군요. 저에게 볼이 올 境遇 1m 밖으로 나가지 않고 컨트롤이 됐어요. 結局 危機 對處能力과 볼 키핑 能力이 向上된 거죠. 그런 基本에 忠實하다보니 代表 選手로도 오래 活躍할 수 있었습니다.”
“이영표나 박지성, 김두현, 박주영 같은 選手들도 마찬가지에요. 特히 이영표와 박지성은 初等學校 때 김철수라는 先生을 만난 것이 幸運이었죠. 이 분은 當時 아약스에서 만든 幼少年 訓鍊 프로그램 비디오를 보고 아이들에게 椄木했었어요. 1番부터 40番까지 페인팅 技術을, 드리블 패턴만 20가지를 만들어서 繼續 反復해 가르쳤죠. 이영표가 있던 安養初 時節에는 番號만 이야기하면 거기에 맞춰 아이들이 드리블하고, 冬季訓鍊에도 그런 基本技만 가르쳤어요. 그 先生이 水原 세류初에 가서는 박지성을 또 그렇게 가르쳤고요. 이영표가 이야기하길 大會에 나가면 봄-여름 大會에서는 지기만 하는데, 가을大會쯤 되면 全國을 席卷할 程度로 成長해버린다고 하더군요. 結局 基本技, 技術이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 例입니다.”
努力, 努力, 끊임없는 努力
무엇보다 이영무의 成功要因은 斷然 끊임없는 努力이다. 그는 蹴球選手가 된 以後, 오직 ‘努力’이라는 單語 하나만을 믿고 前進했다. 寄宿舍에서 지낼만한 形便이 되지 못해 집에서 通學하던 경희중-高 時節에는 새벽 6時에 高陽에서 서울로 가는 첫 汽車를 타고 學校로 가서 저녁 9時 막車를 타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서도 팀 訓鍊 뿐 아니라 個人訓鍊을 꼬박꼬박 하는 성실함은 如前했다.
“事實 通學하면서 運動하는 것이 너무 疲困하고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父母님이 繼續 反對를 하셨기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고, 새 유니폼이나 트레이닝服을 사달라는 이야기도 못하고 先輩들이 입고 떨어지는 옷을 물려받아서 꿰매입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信仰에 더 依支하게 되었고, 祈禱를 하면서 남들보다 더 많이 努力하고 忍耐해야겠다는 覺悟를 하게 됐습니다. 경희대에 進學해서 寄宿舍 生活을 할 때에도 새벽마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서 山을 뛰고, 밤 10時에 남들 잘 때 化粧室 가는 척 나와서 階段도 뛰고, 줄넘기도 하고,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드리블 訓鍊하고 그랬어요. 팀에서 1週日이나 2週日 休暇를 줄 때도 혼자 도시락 두 個 싸서 學校에 와서 午前-午後로 訓鍊을 했습니다. 저라고 놀고 싶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늘 제 마음에는 남들 놀 때 같이 놀아서는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죠.”
“蹴球일지도 꼬박꼬박 썼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訓鍊했고, 내가 잘한 것과 不足했던 것, 稱讚받은 것과 指摘받은 것을 詳細하게 쓰면서 제 自身을 돌아보곤 했어요. 그 때부터 指導者에 對한 準備도 했던 것 같습니다. 萬若 나중에 내가 指導者가 되면 이런 部分에서는 이렇게 하고 싶다는 것을 메모하곤 했었죠. 그리고 술,담배를 비롯해 運動하는데 해로운 것은 絶對 하지 않았죠. 只今까지도 지켜오고 있고, 커피나 인스턴트 飮食, 콜라 等도 絶對 먹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蹴球를 잘할 수 있는 길이라면 뭐든지 하려고 했었어요.”
他의 追從을 不許했던 이영무의 엄청난 活動量 亦是 같은 脈絡이다.
지난 UEFA 챔피언스리그 4强 2次戰 바르셀로나와의 競技에서 박지성이 約 12km를 뛰어 兩 팀 통틀어 가장 많이 뛰면서 言論과 팬들의 讚辭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영무는 非公式的으로 한 競技에 20km 가까이 뛴 적도 있다고 한다. 70年代 韓國에게 每番 敗하던 日本에서 韓國 打倒를 위해 各 選手別로 分析을 했고, 그 中 이영무에 對한 分析에서 이러한 數値가 나와 驚愕을 禁치 못했다는 後聞.
그리고 이러한 鋼鐵體力에 對해 이영무는 어린 時節부터 다져온 悽絶할 程度의 努力, 그리고 信仰心에 基盤한 精神力을 理由로 꼽았다.
“只今은 J리그 우라와 레즈의 스카우터로 活動하는 오치아이라는 選手가 現役 時節 第 專擔 마크맨이었습니다. 最近에 만날 機會가 있었는데, ‘當身이 하도 많이 뛰어다녀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더군요. 實際로 全般 끝나고 第 마크맨이 힘들어서 交替되는 境遇도 있었죠.(웃음) 저는 90分을 뛰면서 제 자리에 서 있는 境遇가 거의 없었습니다. 恒常 움직였어요.”
“事實 제가 오래달리기를 남들보다 잘하긴 했지만, 肺活量 自體는 다른 選手들과 비슷했어요. 一旦 엄청나게 訓鍊을 많이 했습니다. 訓鍊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뛸 수 있었겠어요? 高校 때나 大學 때 山에 올라가서 인터벌 訓鍊을 혼자 했습니다. 한番 그렇게 山을 타면 脈搏이 200에서 240까지 올라가죠. 脈搏이 200萬 넘어가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그런 訓鍊을 새벽이고 저녁이고 繼續 했습니다. 올라갈 때는 筋肉訓鍊도 되고, 내려올 때는 스텝을 盞발로 만드는데 적합하죠. 그랬더니 어느 瞬間 競技場에서 웃으면서 뛸 수 있었어요.”
“國家代表팀에서 뛸 때는 이런 일도 있었죠. 저나 차범근 先輩나 막 國家代表에 뽑힐 무렵이었는데, 둘다 팀 訓鍊이 끝나고나면 個人訓鍊을 하곤 했어요. 저도 그렇지만 茶 先輩도 恒常 自身은 不足하다면서 아침 저녁으로 個人訓鍊을 했죠. 어느날 팀 訓鍊이 끝나고 둘다 不足하다면서 個人訓鍊을 하는데, 저는 이쪽 골대에서, 車 先輩는 저쪽 골대에서 訓鍊에 熱中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하고 나서 서로 ‘저쪽에서 訓鍊마치고 들어가면 가야지’하고 마음을 먹었던 거예요. 서로 눈치만 보면서 繼續 訓鍊을 했죠. 結局 한참 지났는데도 우리 둘이 宿所에 안오니까 當時 監督이셨던 함흥철 先生님이 오셔서 빨리 들어오라고 하셨던 記憶이 납니다.(웃음)”
“또 하나는 信仰의 힘이에요. 저도 體力의 限界는 分明 있고, 京畿 終了 10分을 남기면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祈禱를 드리는 거죠. 第 無限한 可能性을 믿고, 하나님께 祈禱하고, 恒常 挑戰했습니다. 限界를 超越할 수 있었던 要因이죠. 어떤 競技에서는 後半 끝나고도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어요. 그럴 때는 運動場이 正말 작게 느껴지죠. 縱橫無盡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았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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