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蹴球人 인터뷰/나의 選手 時節'에 該當되는 글 39件

  1. 2010/08/18 [나의 選手時節 39] 박태하, 그 누구보다 성실했던 浦項의 傳說

恒常 꾸준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줬던 浦項의 傳說 박태하 ⓒ李相憲
現役 時節 박태하(42)를 象徵하는 말은 '浦項맨'이었다. 대구대를 卒業하고 1991年에 浦項에 入團한 그는 2001年을 마지막으로 隱退할 때까지 浦項에서만 選手 生活을 했다. K리그 通算 261競技를 모두 浦項 유니폼을 입고 나섰고, 46골-37도움을 記錄하면서 '浦項의 傳說'로서 팬들의 推仰을 받았다.

그 누구보다 誠實하고,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그는 人格的으로도 最高의 選手였다. 그렇기에 박태하는 同僚 및 팬들의 尊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盈德의 漁村 少年, 白沙場에서 蹴球를 始作하다

慶北 盈德의 작은 漁村 마을에서 자란 박태하는 어린 時節, 洞네 親舊들과 白沙場에서 蹴球를 하면서 感覺을 키웠다. 그리고 蹴球部가 있었던 講究秒에 入學하면서 自然스럽게 蹴球의 길로 들어섰다.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이 盈德의 漁村이었는데, 白沙場에 蹴球할 수 있는 空間이 있었어요. 거기서 어렸을 때부터 洞네 親舊들과 自然스럽게 공놀이를 했죠.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正式 蹴球部에도 加入했고요. 當時에는 蹴球 選手를 한다고 하면 父母님들의 反對가 甚했어요. 우리 父母님도 마찬가지였죠."

結局 박태하는 講究中에 進學한 以後에는 2年間 蹴球를 쉬어야 했다. 그러나 蹴球에 對한 熱情은 식지 않았고, 結局 3學年 때 다시 蹴球의 길로 들어섰다. 以後 慶州종고와 대구대를 거치며 大器晩成型 選手로서 成長했다. 포지션은 蹴球를 처음 始作할 때 暫時 스트라이커를 봤지만, 以後에는 줄곧 미드필더, 特히 側面 미드필더로 活動했다.

"初等學校 때는 授業을 모두 하고 蹴球를 했기 때문에 反對가 甚하지 않았는데, 中學校 올라가서는 授業에는 거의 못 들어가고 蹴球에만 매달리는 形態이다 보니 父母님 反對가 甚했죠. 그래서 蹴球를 접어야 했어요. 그런데 3學年이 되면서 正말 蹴球를 하고 싶어 축구부에 들어갔어요. 몇 달間은 父母님 몰래 가방에 蹴球靴를 숨겨서 다녔던 記憶도 납니다.(웃음)"

無名이었던 아마추어 時節, 끊임없는 努力으로 浦項 入團

慶州종고와 대구대를 거치면서 박태하는 큰 名聲을 얻지는 못했다. 스타級 選手들이라면 거치는 靑少年代表 經歷도 全無했다. 더군다나 대구대는 그가 入學할 當時 創團 2年째를 맞이하는 新生팀이었다. 그러나 박태하는 이런 것에 介意치 않고 自身만의 길을 걸었다. 꾸준히 努力하고, 蹴球에 專念하면서 조금씩 自身의 技倆을 늘려나갔다.

"漁村에서 자라서 그런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習慣이 있었어요. 恒常 9時頃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5時 30分쯤, 늦어도 6時에는 새벽訓鍊을 나갔죠. 當時에는 專門的 知識도 없고, 피지컬 코치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先輩들이 하는 것을 눈여겨봤다가 個人訓鍊을 하곤 했습니다. 러닝度 하고, 스피드 訓鍊, 볼 컨트롤 訓鍊, 技術 訓鍊 等을 個人的으로 했어요. 날씨와 相關없이, 休暇 中이라도 每日 꾸준히 했죠. 그런 習慣이 選手로서 長壽할 수 있었던 原動力이었던 것 같아요."

"事實 프로에서 成功하고 代表팀에도 이름을 올린 選手치고 靑少年代表 한番 안 해본 選手는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한 番도 없었어요.(웃음) 대구대 時節에는 創團팀이다보니 팀이 剛하지 않아 注目을 받지 못했던 部分도 있었고요."

大學을 卒業할 무렵, 박태하는 프로가 아닌 銀行圈 팀을 생각하고 있었다. 實際로 대구대가 新生팀이긴 하지만, 全國大會에서 어느 程度 成跡을 내면서 關心을 받기도 했고, 그로 인해 여러 銀行圈 팀들이 스카우트 提議를 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K리그의 名文 浦項(當時 抛撤)은 같은 地役權에 있는 大邱大와 자주 演習게임을 가졌고, 그 過程에서 박태하의 可能性을 눈여겨봤다. 結局 박태하는 劇的으로 浦項에 入團하면서 새로운 挑戰에 나서게 됐다.

"大學 2~3學年 時節만 해도 제 能力으로 K리그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거기에 銀行圈 팀들과 할렐루야 等에서 提議가 와서 그 쪽으로 기울었었죠. 隱退 後에도 安定的인 生活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4學年 막판, 드래프트를 2~3個月 앞두고 大邱大 손종석 監督님이 浦項으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當時에 浦項이 가까운 우리와 演習게임을 자주하면서 저를 좋게 評價했었나봐요."
92年 浦項에서 優勝을 차지할 當時의 박태하(왼쪽에서 3番째) ⓒ베스트일레븐
'浦項맨'으로서의 始作

1991年 浦項에 入團한 박태하는 超豪華멤버 속에서도 自身의 立地를 굳히는데 成功했다. 그는 프로 첫 해에 31競技에 出場해 3골을 記錄했다. 當時 浦項은 최순호, 최상국, 최문식, 이흥실, 이기근, 박경훈, 나승화, 공문배, 김상호, 조긍연 等 韓國蹴球를 代表할 만한 스타들이 櫛比했다. 그 속에서 無名의 新人 박태하가 主戰級으로 活躍을 펼쳤던 것.

"當時 浦項은 代表級 選手들로 가득 찼던 팀이었어요. 冬季訓鍊을 할 때에도 제가 景氣에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南海로 合宿을 갔을 때는 발목을 若干 다친 적이 있었는데, 事實 2~3日만 治療하면 나을 수 있을 程度였어요. 그런데 競爭이 무서워서 休暇를 내고 집에서 1週日 程度 쉬었습니다. 집에서 쉬는데,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充分히 挑戰할 價値가 있다는 생각을 했고, 다시 心機一轉해서 挑戰했던 記憶이 납니다."

"제가 不足한 것이 많다보니 初盤에는 挫折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도 當時 허정무 監督님이 繼續 믿고 出戰을 시켜주셨죠. 그러면서 좋은 先輩들과 呼吸을 맞추다보니 저도 漸漸 좋아지더라고요. 몇 競技 지나니까 向上되는 느낌이 들고 할 수 있다는 自信感이 생겼죠."

"제가 技術이 그렇게 뛰어난 選手는 아니지만, 다른 選手들이 가지지 못한 部分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一旦 周圍에서는 제가 正말 많이 뛴다고들 하더군요. 제 스스로는 잘 모르겠는데, 공을 따라 다니다보니 많이 뛰었나봐요.(웃음) 무엇보다 제가 좋아서 하니까 모든 것이 즐거웠어요. 練習할 때도 즐겁고, 기다려지고 그랬죠.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意欲도 充滿하고 스스로 많이 向上될 수 있었습니다."

프로에서의 첫 시즌을 成功的으로 마친 박태하는 두 番째 시즌에는 더욱 日就月將한 技倆을 뽐냈다. 35競技에 나선 박태하는 5골-7도움을 記錄하면서 浦項을 리그 優勝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K리그 베스트11에 選定되는 기쁨도 누렸다.

"시즌 終了 2競技를 놔두고 先頭를 달리던 逸話(現 城南)와 맞對決을 펼쳤는데, 우리가 3-1로 이겼죠. 最終戰에서는 두 팀 모두 이기면서 結局 우리가 優勝을 차지할 수 있었어요. 막판에 3連勝을 거둔데 反해 逸話는 不振했고, 劇的으로 逆轉 優勝을 할 수 있었습니다.(웃음)"

"當時 우리 팀은 베테랑 先輩들에게서 新進 選手들에게로 조금씩 世代交替를 꾀하는 時點이었어요. 그러면서 팀이 活力이 넘쳤고, 要所要所에 좋은 選手들이 配置되어 있었죠. 個人的으로도 2年次 징크스는 全혀 없었어요. 좋은 同僚들과 같이 蹴球를 하면서 제가 成長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2年次에는 더 큰 自信感을 얻을 수 있었죠."
96年 代表팀에서 活躍할 當時의 박태하 ⓒ베스트일레븐
상무 入隊, 그리고 A매치 데뷔

프로 3年次인 1993年, 박태하는 무릎 靭帶 負傷으로 冬季訓鍊을 제대로 消化하지 못했고, 리그 初盤에도 競技에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5競技만을 消化한 채 상무에 入隊하게 됐다. 한창 프로에서 자리를 잡고 活躍하던 時期였기 때문에 아쉬움은 남았지만, 더 以上 미룰 수 없는 狀況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常務에서의 2年은 그에게 큰 意味가 있는 時間이었다. 常務 服務 途中에 結婚을 했으며, 代表팀에 選拔되어 A매치도 치렀다.

"생각해보면 常務는 제 人生에서 큰 意味가 있는 時期였어요. 一旦 상무 入隊 4個月 後에 結婚을 했죠. 아내는 浦項 地域 국민은행에 勤務하고 있었는데, 그 地點이 浦項 宿所 앞이었어요. 우리 給與 擔當이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웃음) 事實 아내가 人氣가 좋아서 다른 選手들과 競爭을 펼쳐야 했는데, 제가 이겼어요. 처음에 커피 한 盞 하자고 했더니 時間 없다며 反應이 없더니 나중에는 結局 만나게 됐고, 結局 상무 入隊 後 結婚까지 하게 됐죠."

"當時 常務는 土曜日마다 外泊을 줬었는데, 萬若 제가 總角이었다면 親舊들과 놀면서 흥청망청 보냈을 수 있죠. 그런데 結婚하니까 外泊 주면 無條件 浦項 내려가서 아내와 보내고 올라오곤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時間이 今方 지나가더군요.(웃음)"

常務에 있는 동안 박태하는 A매치 데뷔戰을 치르는 感激을 맛봤다. 그는 1994年 2月 16日 루마니아戰을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代表팀에는 91年에도 選拔된 적이 있었지만, 當時에는 2軍 性格이었던 百號였고, 따라서 公式 A매치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感懷가 새로웠죠. 91年에 白虎로 大統領杯에 나가긴 했지만, A매치로 인정받지는 못했거든요. 事實 요즘은 選手들의 技倆이 平準化되어 다양하게 選手들이 選拔되지만, 當時만 해도 한番 代表 選手가 되면 바뀌지 않고 오래 갔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뽑혔다는 消息을 듣고는 正말 기뻤죠. '내가 잘하고 있구나.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勿論 저는 제 能力이 어느 程度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代表팀 競爭에 對한 負擔感은 적었어요. 競技 出戰 與否에 크게 介意치 않았죠. 機會가 오면 熱心히 하겠다는 생각이었고, 實際로 最善을 다해 訓鍊에 임했어요. 그런 過程 속에서 저보다 더 나은 選手가 있다면 當然히 그 選手가 뛰어야 한다는 마인드였었죠."

"생각해보면 제가 A매치 11競技에 나가서 7골을 넣었어요. 平均 得點으로 봤을 때는 대단한 數値 아닌가요?(웃음)"

돌이켜보면 박태하는 代表팀에 合流했다가 월드컵 本選을 앞두고 恒常 落馬하고 말았다. 94年 美國 월드컵 때도, 98年 프랑스 월드컵 때도 그랬다. 그러나 이런 部分까지도 박태하는 淡淡한 反應이었다.

"勿論 아쉬움이야 있죠.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제 能力을 알기 때문에 肯定的으로 생각해요. 제 나름대로 代表팀에 들어갔을 때 많은 努力을 했고, 正말 熱心히 했지만, 제 能力이 거기까지였거든요. 代表팀이 아니더라도 所屬팀에서 오랜 期間 活躍하면서 팬들의 記憶 속에 남는 選手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滿足합니다."
2000年 4月 蠶室에서 열린 韓日戰에서의 박태하(뒷줄 17番) ⓒ피치포토
浦項으로의 復歸, 잊지 못할 95年 K리그 챔피언決定戰

常務 除隊를 눈앞에 둔 95年 末, 所屬팀 浦項은 K리그 챔피언을 놓고 일화와 勝負를 펼치게 됐다. 10月 30日에 除隊한 박태하는 곧바로 11月 4日 東大門運動場에서 열린 챔피언決定戰에 交替로 出戰했다. 그리고 K리그 最高의 名勝負로 아직까지도 膾炙되고 있는 浦項에서의 2次戰에서는 풀타임 出場했다. 勝負를 가리지 못해 치러진 3次戰에서도 박태하는 選拔 出場했고, 決定的인 패스까지 만들어주며 活躍했으나 팀은 敗하고 말았다.

"除隊 날짜가 10月 30日이었어요. 그 前부터 浦項 허정무 監督님이 電話가 오셔서 몸을 만들어놓으라고 하시더군요. 末年 休暇 나가서도 浦項에 合流해 訓鍊하고 그랬어요. 그렇다고 해도 2年間 常務에 있다가 갓 合流해서 챔피언決定戰 같은 큰 競技에 나가는 것이라 負擔은 컸죠."

"東大門에서의 1次戰에서는 後半 15分頃에 投入되어 雰圍氣를 익혔고, 浦項에서의 2次戰 때부터 先發로 나갔죠. 特히 2次戰은 아직까지도 記憶이 鮮明해요. 當時 浦項팬들의 熱氣는 대단했어요. 스틸야드가 階段까지 다 꽉 차서 서서 구경하시고 그랬습니다. 前半에 선홍이가 2골을 넣어 2-0으로 이기면서 祝祭 雰圍氣였다가 後半 들어 3골을 내리 내주면서 무너지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라데가 同點골을 터뜨려 3-3으로 마쳤죠. 正말 最高로 다이내믹했던 競技였어요."

"結局 두 競技 모두 無勝負여서 安養에서 3次戰을 치르게 됐죠. 제 蹴球 人生에서 가장 아쉬웠던 競技 中 하나인데, 제가 페널티 에어리어로 浸透하는 장영훈에게 決定的인 浸透패스를 했어요. 그 過程에서 파울이 있었는데, 判定이 미숙했어요. 優勝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瞬間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죠. 結局 延長 막판에 이상윤에게 決勝골을 내주면서 敗하고 말았어요."
98年 蔚山戰에서의 박태하 ⓒ베스트일레븐
또 한 番의 아쉬운 瞬間, 98年을 맞이하다

浦項에 正式으로 復歸한 박태하는 96年과 97年에도 꾸준한 活躍을 펼쳤다. 96年에는 36競技에 나서 9골-4도움을 記錄했고, 97시즌에는 18競技에 나서 6골-4도움을 올렸다. 그리고 맞이한 98시즌은 박태하에게 잊을 수 없는 시즌이었다. 當時 浦項은 '最强 트리오'로 불리웠던 洪明甫-황선홍-라데가 모두 팀을 떠난 狀態였다. 96시즌을 끝으로 라데가 팀을 떠난 데 이어 홍명보도 97年 中盤에, 그리고 황선홍도 98年 시즌 中盤에 日本으로 移籍했다.

박태하는 이런 어려운 時期에 主將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98시즌에 總 38競技에 나서 9골-10도움의 猛活躍을 펼쳤다. 浦項은 끈끈한 組織力을 바탕으로 宣傳을 펼쳤고, 새내기 이동국과 백승철, 베테랑 고정운 等의 加勢도 큰 힘이 되었다. 이렇게 新舊調和 속에서 氣勢를 탄 浦項은 正規리그를 한 競技 남겨놓은 時點에서 리그 先頭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10月 14日, 安養(現 서울)과의 리그 最終戰이 浦項을 那落으로 떨어뜨렸다. 後半 終了 直前까지 2-1로 앞서고 있었던 浦項은 後半 45分에 安養 무탐바에게 코너킥 헤딩골을 내주면서 2-2 同點을 許容했고, 結局 勝負차기에서 敗하면서 最終戰에서 勝利한 水原과 蔚山에게 1-2位를 내주고 말았다. 챔피언決定戰에 直行할 수 있었던 浦項은 全南과 準플레이오프부터 치르면서 올라가야 했다.

"當時 홍명보, 황선홍이 모두 日本으로 進出한 狀況에서 主張을 맡았는데, 저도 30줄에 접어든 後였지만 골도 많이 넣고, 도움도 많이 記錄했죠. 저의 새로운 全盛期였다고 할 수 있어요.

"팀 自體가 탄탄했어요. 選手들이 華麗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融和하는 雰圍氣가 造成됐고, 當時 박성화 監督님의 戰術을 選手들이 잘 理解했죠. 이런 部分이 팀으로 昇華되면서 좋은 競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安養과의 正規리그 마지막 競技는 아직도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事實 그 競技에서 저에게 1:1 찬스가 세 番 程度 왔었거든요. 個人的으로는 1골만 더 넣으면 '10-10 클럽'에도 加入하는 것이었으니까 아쉬움이 더 컸죠. 그 中에 하나만 넣었어도 리그 1位로 마칠 수 있었는데, 異常하게 안 되더군요. 그리고 後半 終了 直前에 무탐바에게 헤딩 同點골을 許容하는 瞬間은 記憶하기도 싫고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氣分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어요. 萬若 그 때 1位로 올라갔다면 浦項이 充分히 優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競技力도 좋았고 雰圍氣도 最高조였으니까요."

結局 1位에서 3位로 내려앉은 浦項은 全南과의 準플레이오프에서 艱辛히 勝負차기로 플레이오프에 進出했다. 그리고 蔚山과의 플레이오프 1-2次戰 亦是 95年 못지않은 名勝負였다. 浦項에서의 1次戰에서는 0-1에서, 後半 44分에 2-1로 逆轉시켰고, 後半 48分에 2-2로 따라붙자 後半 51分에 아직도 膾炙되고 있는 백승철의 大砲알 中距離 슛으로 3-2를 만들었다.

蔚山에서의 2次戰에서도 0-1로 끌려가던 後半 40分에 박태하가 同點골을 터뜨리며 챔피언決定戰을 確定짓는 듯 보였으나 後半 45分에 CNN에서도 話題의 映像으로 紹介되었던 골키퍼 김병지의 헤딩 決勝골로 1-2로 敗하면서 챔피언決定戰行이 挫折됐다.

"正말 드라마틱한 플레이오프였죠. 浦項에서 劇的으로 이기고, 蔚山에서도 終了 直前까지 1-1 無勝負를 記錄하면서 올라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끝나기 直前에 프리킥 狀況을 내줬는데, 病誌가 올라와서 골을 넣었죠."

"그 때 病誌와 헤딩競合을 했던 사람이 접니다.(웃음) 제가 元來 헤딩에 强한데, 그 때는 時間도 다 지났고, 瞬間的으로 病誌가 올라오니까 누가 막을지 瞬間的으로 唐慌한 狀態였고, 얼떨결에 볼이 오길래 같이 떴는데 兵志 머리에 맞고 말았죠. 正말 虛脫한 瞬間이었어요."
浦項의 永遠한 傳說 박태하 ⓒ베스트일레븐
浦項의 黃金기와 衰落氣를 經驗하며

98年, 다시 한番 優勝할 수 있었던 絶好의 機會를 놓친 浦項은 조금씩 衰落의 길을 걷기 始作했다. 98年을 끝으로 베테랑 守備手 안익수, 공문배가 現役에서 隱退했고, 살림꾼이었던 守備型 미드필더 서효원度 中國으로 進出했다. 젊은 選手들은 이제 '傳統의 名門 浦項'보다는 首都圈 팀을 더 選好하면서 選手 需給도 어려워졌다. 그 渦中에도 박태하는 特有의 근면함으로 팀의 中心 役割을 遂行했다.

"主軸 選手들이 빠져나가는 자리를 새로운 選手들이 채워야하는데, 여러 與件上 그렇지 못했어요. 浦項은 蹴球팬들에게 恒常 名門으로 認識되었는데, 2000年代 접어들면서 그런 部分이 退色되기 始作했죠."

"正말 華麗했던 90年代 中後半을 돌이켜보면 競技에 나가서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지고 있어도 逆轉할 수 있을 것 같은 自信感이 있었죠. 멤버들 하나 하나가 正말 뛰어났거든요. 저로서는 그들과 함께 했던 것 自體가 幸福했었습니다."

"個人的으로는 라데가 생각나요. 只今도 가끔씩 通話를 하는데, 如前히 韓國에 對한 愛情이 크더군요. 這番에 代表팀이 벨라루스戰을 할 때에도 왔었어요. 宿所로 찾아와서 2時間 程度 이야기를 나눴죠. 아직까지도 浦項에서의 生活을 仔細히 記憶하고 있더군요. 宿所 가는 길을 回想하기도 하고, 큰 딸을 聖母病院에서 낳았던 일도 이야기하고...(웃음) 只今은 에이전트 일도 하면서 指導者하려고 資格證을 取得했다고 하더군요."

現役 隱退, 浦項맨으로서 남다

박태하는 2001年을 끝으로 現役에서 隱退했다. 2001年에도 그는 32競技에 나서 1골-6도움을 記錄하면서 自己 몫을 해냈기에 팬들의 아쉬움은 컸다. 그의 技倆과 經驗을 탐낸 다른 球團들이 入團 提議를 했지만, 박태하는 '浦項맨'으로서의 隱退를 擇했다. 박태하는 프로 生活 내내 浦項의 유니폼만 입었으며, 浦項의 17番은 當然히 박태하의 것이었다. 浦項팬들 亦是 '浦項 最高의 레전드'로 홍명보도, 황선홍도 아닌 박태하를 꼽았다.

"그 當時 나이가 34歲였어요. 事實 充分히 더 뛸 수 있었고, 다른 팀에서도 提議는 많이 들어왔죠. 그런데 제 나름대로 苦悶해본 結果 浦項에서 뛰지 못할 바에는 隱退하자는 結論을 내렸어요. 그만큼 浦項이란 팀은 저에게 특별한 팀이었고, 이 팀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剛했던 것이죠."

"浦項에서 줄곧 選手 生活을 하고, 隱退 以後에도 浦項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意味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果敢하게 決定했고, 後悔는 없습니다. 結局 나중에 파리아스 監督을 도와 指導者로서도 優勝을 하면서 浦項에서 選手와 指導者로서 모두 優勝하는 기쁨도 누리게 됐죠.(웃음)"

"17番이라는 番號는 저에게 正말 특별해요. 96年에 CF도 찍었는데, 등番號 때문이었죠.(웃음) 처음 浦項에 왔을 때는 20番이었다가 92年부터 17番을 달았는데, 특별한 意味는 없었어요. 그런데 繼續 달다보니까 愛情이 생기고, 거기에다 CF까지 찍으니까 愛情이 執着으로 바뀌었죠.(웃음) 只今은 제 人生에서 가장 重要한 番號가 되었어요."
指導者의 길을 忠實히 걷고 있는 박태하 코치 ⓒ李相憲
努力하는 指導者가 되고 싶어

現役 隱退 後 박태하는 指導者로서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하게 밟아나가고 있다. 浦項에서 스카우터를 거쳐 코치로 活動했던 그는 파리아스 監督과 함께 2007年 K리그 챔피언의 기쁨을 맛봤으며, 以後에는 허정무 監督을 補佐해 代表팀의 코치로서 活動했다. 그는 選手와 코칭스태프의 架橋 役割을 忠實히 해내며, 이番 남아공 월드컵 16强 進出에 있어서도 제 몫을 했다.

이제 조광래 監督과 함께 代表팀에서 새로운 挑戰에 나설 박태하. 恒常 硏究하고 努力하는 그의 모습은 앞으로도 繼續될 것이다.

"파리아스 監督님과 허정무 監督님을 모시면서 指導者의 노하우를 많이 느끼고 배웠습니다. 이제 조광래 監督님도 잘 補佐하면서 많은 것을 배워야죠.(웃음)"

"指導者를 하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은 유럽에서 뛰는 選手들도 많잖아요. 指導者가 選手보다 아는 것이 없으면 팀을 掌握할 수가 없어요. 더 많이 배우고 努力할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熱情을 가진 指導者가 되고 싶어요. 어떤 일이든 熱情과 興味를 갖고 일한다면 좋은 結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어요. 選手들과의 關係에서도 그들의 熱情을 運動場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重要하고요. 앞으로 조금씩 努力하면서 完成된 指導者가 되기 위해 나아갈 겁니다."


인터뷰=李相憲

* 대한축구협회 技術政策 報告書인 'KFA 리포트' 2010年 8月號 '나의 選手時節' 코너에 실린 인터뷰 記事입니다.

出處 : 大韓蹴球協會 웹사이트
Posted by 韓國蹴球歷史統計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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