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役 時節 박태하(42)를 象徵하는 말은 '浦項맨'이었다. 대구대를 卒業하고 1991年에 浦項에 入團한 그는 2001年을 마지막으로 隱退할 때까지 浦項에서만 選手 生活을 했다. K리그 通算 261競技를 모두 浦項 유니폼을 입고 나섰고, 46골-37도움을 記錄하면서 '浦項의 傳說'로서 팬들의 推仰을 받았다.
그 누구보다 誠實하고,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그는 人格的으로도 最高의 選手였다. 그렇기에 박태하는 同僚 및 팬들의 尊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盈德의 漁村 少年, 白沙場에서 蹴球를 始作하다
慶北 盈德의 작은 漁村 마을에서 자란 박태하는 어린 時節, 洞네 親舊들과 白沙場에서 蹴球를 하면서 感覺을 키웠다. 그리고 蹴球部가 있었던 講究秒에 入學하면서 自然스럽게 蹴球의 길로 들어섰다.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이 盈德의 漁村이었는데, 白沙場에 蹴球할 수 있는 空間이 있었어요. 거기서 어렸을 때부터 洞네 親舊들과 自然스럽게 공놀이를 했죠.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正式 蹴球部에도 加入했고요. 當時에는 蹴球 選手를 한다고 하면 父母님들의 反對가 甚했어요. 우리 父母님도 마찬가지였죠."
結局 박태하는 講究中에 進學한 以後에는 2年間 蹴球를 쉬어야 했다. 그러나 蹴球에 對한 熱情은 식지 않았고, 結局 3學年 때 다시 蹴球의 길로 들어섰다. 以後 慶州종고와 대구대를 거치며 大器晩成型 選手로서 成長했다. 포지션은 蹴球를 처음 始作할 때 暫時 스트라이커를 봤지만, 以後에는 줄곧 미드필더, 特히 側面 미드필더로 活動했다.
"初等學校 때는 授業을 모두 하고 蹴球를 했기 때문에 反對가 甚하지 않았는데, 中學校 올라가서는 授業에는 거의 못 들어가고 蹴球에만 매달리는 形態이다 보니 父母님 反對가 甚했죠. 그래서 蹴球를 접어야 했어요. 그런데 3學年이 되면서 正말 蹴球를 하고 싶어 축구부에 들어갔어요. 몇 달間은 父母님 몰래 가방에 蹴球靴를 숨겨서 다녔던 記憶도 납니다.(웃음)"
無名이었던 아마추어 時節, 끊임없는 努力으로 浦項 入團
慶州종고와 대구대를 거치면서 박태하는 큰 名聲을 얻지는 못했다. 스타級 選手들이라면 거치는 靑少年代表 經歷도 全無했다. 더군다나 대구대는 그가 入學할 當時 創團 2年째를 맞이하는 新生팀이었다. 그러나 박태하는 이런 것에 介意치 않고 自身만의 길을 걸었다. 꾸준히 努力하고, 蹴球에 專念하면서 조금씩 自身의 技倆을 늘려나갔다.
"漁村에서 자라서 그런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習慣이 있었어요. 恒常 9時頃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5時 30分쯤, 늦어도 6時에는 새벽訓鍊을 나갔죠. 當時에는 專門的 知識도 없고, 피지컬 코치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先輩들이 하는 것을 눈여겨봤다가 個人訓鍊을 하곤 했습니다. 러닝度 하고, 스피드 訓鍊, 볼 컨트롤 訓鍊, 技術 訓鍊 等을 個人的으로 했어요. 날씨와 相關없이, 休暇 中이라도 每日 꾸준히 했죠. 그런 習慣이 選手로서 長壽할 수 있었던 原動力이었던 것 같아요."
"事實 프로에서 成功하고 代表팀에도 이름을 올린 選手치고 靑少年代表 한番 안 해본 選手는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한 番도 없었어요.(웃음) 대구대 時節에는 創團팀이다보니 팀이 剛하지 않아 注目을 받지 못했던 部分도 있었고요."
大學을 卒業할 무렵, 박태하는 프로가 아닌 銀行圈 팀을 생각하고 있었다. 實際로 대구대가 新生팀이긴 하지만, 全國大會에서 어느 程度 成跡을 내면서 關心을 받기도 했고, 그로 인해 여러 銀行圈 팀들이 스카우트 提議를 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K리그의 名文 浦項(當時 抛撤)은 같은 地役權에 있는 大邱大와 자주 演習게임을 가졌고, 그 過程에서 박태하의 可能性을 눈여겨봤다. 結局 박태하는 劇的으로 浦項에 入團하면서 새로운 挑戰에 나서게 됐다.
"大學 2~3學年 時節만 해도 제 能力으로 K리그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거기에 銀行圈 팀들과 할렐루야 等에서 提議가 와서 그 쪽으로 기울었었죠. 隱退 後에도 安定的인 生活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4學年 막판, 드래프트를 2~3個月 앞두고 大邱大 손종석 監督님이 浦項으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當時에 浦項이 가까운 우리와 演習게임을 자주하면서 저를 좋게 評價했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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