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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權 바뀌자 流配 떠난 外交部 탈레반 - 民衆의소리

政權 바뀌자 流配 떠난 '外交部 탈레반'

[月刊 말]

[寫眞:208968]
“우리나라는 官僚國家野.”
6月 退任을 앞둔 한 政府 傘下機關 團體長은 記者와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의 經驗을 土臺로 우리나라는 ‘官僚國家’라고 定義내렸다. 官僚들이 모든 行政과 業務를 左之右之한다는 뜻이다. 政治人 出身이나 專門家들도 官僚들과 妥協을 하지 않는 以上 버텨내기가 어렵다는 說明도 곁들였다.
周知의 事實이지만 이런 官僚社會에서 한 番 ‘背信者’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當事者로서는 무시무시한 結果를 招來한다. 때문에 그들에게 協力하거나 또는 退出당할 覺悟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自身을 지켜 줄 든든한 ‘빽’이 있어야 한다.
外交通商部, 그中에서도 北美國 出身은 代表的인 官僚社會로 꼽힌다. ‘마피아’란 무시무시한 別稱을 달고 있을 程度이니 그 威勢를 어림짐작해볼 만하다. 마피아란 別稱이 괜히 붙은 게 아니란 것은 그들의 行步를 보면 充分히 알 수 있다. 그들의 最大 關心事는 ‘國益’이 아니다. 自己 組織의 利益이다.
그리고, 背信은 곧 죽음이다. 背信의 範疇는 自己 組織의 祕密을 누군가에게 漏泄하거나 利益에 反하는 行動 모두를 包括한다. 組織의 權威에 挑戰하는 行爲는 徹底한 報復과 膺懲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찍히면’ 죽는다.

2004年, ‘外交部 投書 波紋’
지난 4月 23日 이명박 政權과 親密한 한 中央日刊紙에서 “사고 친 ‘親盧 外交官’ 2名 懲罰性 人事”라는 題目의 짤막한 記事를 내보냈다. “노무현 政府 時節 大統領 貶下 發言 投書事件과 文書流出 波紋 等을 일으켰던 親盧(親 盧武鉉) 性向 外交官 2名이 今明間 있을 在外公館 人事에서 最下位 等級에 該當하는 公館으로 轉補될 것으로 23日 알려졌다”는 것. 이 新聞은 “對象者는 이른바 ‘外交部 탈레반’으로 불렸던 이종헌 前 條約課長과 金某 書記官 等 2名”이라고 紹介했다. 外交部 關係者가 “두 사람은 18日 열린 人事委員會에서 勤務與件이 가장 劣惡한 ‘特殊地’ 公館 發令이 內定된 狀態”라며 “勤務 紀綱을 흩뜨리는 事件의 再發을 막는 次元의 懲罰性 左遷人事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고도 報道했다.
特殊地는 生活環境이 劣惡하고 治安이 不安해 外交官의 身邊에 危險이 加해질 수 있는 地域을 뜻한다.
金 書記官은 2004年 初 政局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外交部 投書 波紋’의 主人公이고, 이 前 條約課長은 2006年 初 駐韓美軍 戰略的 柔軟性 問題와 關聯한 NSC 文件 流出의 當事者다.
그런데 짧게는 2年, 길게는 4年이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내어 ‘懲罰性 左遷人事’라니 언뜻 理解가 가지 않는다. 都大體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當時로 時間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노무현 政權이 出帆한 지 채 1年도 지나지 않았던 2003年 12月末, 外交部 中에서도 核心인 北美國 라인 人士들이 會食 途中 盧武鉉 大統領을 露骨的으로 卑下하는 發言을 했다. 波紋의 主人公은 조현동 外交部 北美 3課長. 그는 外交部 職員들에게 盧 大統領과 이종석 國家安全保障會議(NSC) 事務次長, 靑瓦臺 內 386世代 保佐陣들을 일컬어 “英語도 못하고 美國에도 안 가본 사람들이 對美外交를 제대로 하겠느냐”, “NSC의 386들이 世上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韓美關係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선 “김정일 好感勢力이 盧武鉉 大統領 支持層이라는 한나라당 홍사덕 總務의 最近 發言이 있었는데 맞는 말 아니냐”, “總選에서 한나라당이 이기면 大統領은 해양부와 科技部만 맡으면 된다”는 等의 말도 오고 갔다.
자칫 묻힐 뻔한 이런 事實은 한 外交部 職員이 靑瓦臺에 投書를 넣으면서 世上에 알려지게 됐다. 발끈한 靑瓦臺는 民政首席室을 통해 眞相調査를 强度높게 벌였다. 靑瓦臺 關係者는 “問題가 된 發言 가운데는 ‘4月 總選에서 한나라당이 이기면 노무현 政權은 다 끝날 것이며, 外交部는 한나라당의 指示를 받아서 일을 하면 된다’는 趣旨의 深刻한 發言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다른 關係者는 “調査 結果 여러 名의 外交部 關係者가 會議席上, 事務室, 會食자리 等 功·私席에서 反復的으로 問題 發言을 한 것으로 確認됐다”고 밝혔다. 이 關係者는 “民政首席室은 調査 結果와 함께 問題 發言을 한 조현동 誇張 1名 以上의 外交部 關聯者에 對해 適切한 懲戒措處가 必要하다는 意見을 盧 大統領에게 報告했다”고 말했다.
이 事件의 餘波로 이들을 斗頓했던 윤영관 外交部 長官과 위성락 北美局長이 事實上 更迭됐고, 波紋의 主人公 조현동 課長은 물러나야 했다.
投書를 넣은 當事者가 바로 金아무개 書記官이었다. 保守言論들은 이 事件을 靑瓦臺 內 ‘自主派’와 外交部 內 ‘同盟派’의 葛藤으로 規定하면서 大大的으로 報道했다.

2006年, ‘NSC 文件 流出’
2006年 2月初, 當時 최재천 열린우리당 國會議員이 戰略的 柔軟性 合意를 둘러싼 NSC 內部 文件을 公開했다. 2005年 4月 5日에 作成된 ‘國政狀況室 問題提起에 對한 NSC 立場’이라는 11쪽짜리 文件은 靑瓦臺 國政狀況室이 盧 大統領에게 提出한 報告書에 對한 NSC의 解明 資料다.
國政狀況室 報告書는 ‘外交部와 NSC가 駐韓美軍의 戰略的 柔軟性을 認定하는 內容의 覺書를 交換하고도 大統領에게 報告하지 않았다’는 內容을 담고 있었다.
NSC는 이 文件에서 “2003年 10月 未來韓美同盟政策構想(FOTA) 5次 會議를 契機로 魏聖洛 當時 北美局長이 美國 側에 交換覺書 草案을 傳達한 것을 盧 大統領과 NSC에 報告하지 않고 推進했다”고 밝혔다.
이 文件은 이어 “NSC는 覺書 交換 事實을 2004年 3月 後任 김숙 北美局長에게서 報告받고 認知했다”며 “NSC가 제대로 統制하지 못한 責任은 認定하지만 이는 外交部의 報告 漏落이 1次的 原因”이라고 强調했다.
NSC의 表現대로라면 戰略的 柔軟性을 原則的으로 받아들인다는 覺書 草案을 交換하고도 大統領에게 5個月 동안이나 報告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當時 國政狀況室 報告書는 外交部와 NSC가 제대로 報告하지 않는 바람에 2005年 3月 空軍士官學校 卒業式에서 盧 大統領이 “우리의 意志에 關係없이 東北亞 紛爭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發言한 것을 美國 側이 旣存 合意를 全面的으로 否認하는 것으로 解釋했다고 指摘했다.
崔 議員이 NSC 內部 文件을 公開하면서 靑瓦臺는 다시 한 番 발칵 뒤집혔다.
保守言論들은 이 事件을 이종석 NSC 事務處長을 中心으로 한 ‘穩健自主派’와 ‘强勁反美自主派’의 對決로 規定하면서 文件 流出 責任者를 索出해 嚴重히 問責하라고 壓力을 加했다. 文件에서 드러난 戰略的 柔軟性 協商의 問題點은 아예 사라졌다.
이 文件을 崔 議員에게 보여준 것이 이종헌 NSC 行政官이었다. 이 行政官은 그해 1月 23日 서울市內 한 호텔에서 平素 親分이 있던 前 靑瓦臺 行政官과 崔 議員을 만난 자리에서 自身이 所持하고 있던 文件인 NSC 常任委 會議資料를 보여줬고, 崔 議員은 現場에서 必死를 했다. 이 行政官은 靑瓦臺 調査에서 “崔 議員이 發表를 하기 위해 必死를 하는 것이 아니고 參考資料로 쓰기 위한 것으로 認識하고 制止하지 않았다”고 陳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行政官에게 文件을 複寫해준 靑瓦臺 第1附屬室 이성환 行政官은 공교롭게도 이태식 駐美大使의 아들이었다. 代表的인 北美國 出身 人士인 이 臺詞의 後光을 입은 탓인지 그는 英語通譯職에서 交替된 것과 ‘口頭 警告’를 받은 것 外에는 별다른 懲戒를 받지 않았다.
反面, 이 行政官은 停職 3個月이라는 重懲戒를 받았다. 미운털이 박히자 人事上 不利益은 쉽게 解消되지 않았다. 이 行政官은 停職 3個月이 끝났음에도 2個月餘間 아무런 補職도 받지 못한 채 待機하고 있어야 했다. 그 뒤에도 그는 特別한 職制 없이 外交力量評價開發센터(ADC)에서 業務支援 形式의 任務를 받아 勤務하다 2007年 1月 9日 뉴욕總領事로 發令됐다. 말이 發令이지, 實際로는 明白한 左遷이었다. 副理事官級이던 職級이 課長級으로 激減됐고, 俸給도 깎였다. 이같은 措置는 外交公務員으로서는 致命的인 것이었다. 한마디로 ‘옷을 벗으라’는 壓力이었다.
이 두 事件이 일어난 時期는 2年의 差異를 두고 있지만 共通點을 갖고 있다. 參與政府 出帆初期人 2003年과 2004年에 벌어진 美國과의 主要한 協商을 둘러싼 靑瓦臺와 外交部 內의 葛藤이 表面化됐다는 點이다. 이라크 派兵과 용산미군기지以前協商, 戰略的柔軟性 合意가 그때 集中的으로 이뤄졌다. 勿論, 美國과의 모든 協商을 總括한 것은 北美國 라인이었다.
용산基地 以前協商은 2003年 무렵 實務라인에서 마무리段階에 이르렀는데, 美國과의 協商을 主導했던 外交部 北美國 라인에서는 이를 ‘소파(SOFA)文書’로 處理하려고 했다. ‘協定’이 아닌 소파文書로 處理할 境遇 國會 批准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戰略的柔軟性, 卽 駐韓美軍 役割變更과 關聯해서도 北美國 라인은 盧武鉉 大統領에게 報告하지 않은 채 美國側에 ‘諒解覺書’를 傳達하기도 했다. 戰略的 柔軟性 合意는 韓半島 安保地形을 뒤바꾸는 重且大한 事件이기도 했다. 이런 密室 協商에 對한 內部 問題提起는 事事件件 遮斷 當했다.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던 이 行政官이 이런 事實을 담은 2005年 4月 靑瓦臺 NSC 文件을 崔 議員에게 流出하기에 이른 것이다.
投書 波紋도 같은 脈絡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自身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現職 大統領마저도 認定하지 않는, 北美國 라인의 잘못된 行態를 告發한 것이기 때문이다.

2008年, 華麗한 復歸와 ‘悽絶한 膺懲’
2008年, 政權이 바뀌자 北美國 出身 人士들은 續續 ‘華麗한 復歸’를 했다.
投書波紋 事件으로 更迭된 以後 國防大學院 硏修를 거쳐 駐 인도네시아 大使館 參事官으로 일해오던 조현동 前 課長은 靑瓦臺 外交安保祕書室 3級 行政官으로 돌아왔다. 當時 更迭된 위성락 北美局長의 後任으로 戰略的 柔軟性 合意를 이끌었던 김숙 前 北美局長은 韓半島平和交涉本部長으로 돌아왔다. 이 行政官의 懲戒 當時 懲戒委員會를 主宰했던 有名환 1次官은 外交部 長官이 됐다. 이태식 前 大使도 駐美大使로 復歸했다.
이들의 華麗한 復歸는 ‘悽絶한 膺懲’을 알리는 信號彈이었다.
外交部는 4月 18日 人事委員會를 열어 ‘組織’의 安危를 威脅했던 ‘背信者’들에 對한 復讐를 計劃했다. 그 結果, 金아무개 書記官은 아프리카 手段으로, 이 行政官은 앙골라 大使館으로 發令을 내기로 決定했다.
그러자 反撥이 일었다. 金아무개 書記官이 勤務하고 있는 州 우크라이나 大使館 職員들이 ‘報復性 人士’라며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週 우크라이나 大使는 直接 박준우 外交部 企劃管理室長 앞으로 業務連絡을 통해 “人事 發令 試圖는 資源外交 人員再配置를 表面에 내세운 報復性 人士이고, 窮極的으로는 本人이 自發的으로 外交部를 떠나게 하려는 試圖인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며 “過去를 問題 삼아 不當한 人事措置를 하려면 外交部 內에 過去事 整理委員會를 만들어 問題가 있었던 職員 全員을 出付시키기 바란다”고 剛하게 抗議했다. 그는 “이番 人事에 人事라인 以外의 外部입김이 깊이 關與하고 있는 것으로 把握”되고 있다고도 했다.
外交部의 人事措置는 엉뚱한 곳에서 큰 波紋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金아무개 書記官의 아내가 現 政權 最高位層 子女와 두터운 親分關係에 있었던 것이다. 自然히 政權 最高位層으로부터 壓迫이 들어갔고, 外交部는 발칵 뒤집혔다. 結局, 金아무개 書記官의 아프리카 手段 發令은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이 行政官은 株 앙골라大使館 參事官으로 發令이 確定됐다. 停職3個月과 2個月 未發令 待機, 뉴욕總領事館으로의 左遷에 이은 세 番째 ‘重懲戒’다. 그 사이 大統領은 바뀌었지만 ‘官僚’는 바뀌지 않았다.
‘親盧’도 ‘强勁탈레반’도 아니었던 이 行政官이 잘못한 게 있다면, 外交官으로서 ‘國益’을 위해 巨大한 官僚集團에 맞서 싸웠다는 것 뿐이었다. 이게 ‘官僚國家’의 現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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