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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魂은 언제 肉體를 떠나나|신동아

‘肝 移植 開拓者’ 이종수의 獨逸 便紙

靈魂은 언제 肉體를 떠나나

先祖의 墓와 手術室

  • 이종수 | 獨逸 本隊 醫大 終身職 敎授

    入力 2017-01-26 09: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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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獨逸로 留學해 58年間 醫術을 편 이종수 博士의 隨筆을 2月號부터 連載합니다. 李 博士는 獨逸에 살면서 느낀 桐·西洋 文化의 差異와 다양한 裏面을 구수한 입담으로 들려줄 計劃입니다. 유럽 大陸에서 最初로 간 移植에 成功한 先驅的 人物인 이 博士는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如前히 硏究 活動을 하고 있습니다. 國內에선 ‘새로 쓰는 間 다스리는 法’ 等 베스트셀러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내가 獨逸에서 살아온 날이 58年. 몸은 獨逸 땅에 있지만, 靈魂은 아직도 얼마間은 韓國人이다. 特히 韓國의 名節이나 記念日이 되면 옛일이 走馬燈처럼 떠오른다. 이番 설날에도 故鄕인 全南 靈巖 땅을 밟지는 못하겠지만, 親知들이 모여 家族의 情을 나누는 情景이 눈에 밟힌다.

    家族의 情뿐 아니다. 西洋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韓國의 傳統이나 習俗에 對해서도 如前히 나는 그 끈을 끊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 하나가 靈魂과 죽음에 對한 생각이다. 죽은 祖上을 땅에 묻고 섬기는 風水地理 風習에 對한 것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時事뉴스가 자주 放送되는 DLF放送에서 韓國의 묏자리 問題와 風水地理說을 다룬 적이 있다.

    “韓國에는 山勢, 地勢, 守歲 等을 判斷해 人間의 吉凶禍福과 連結시키는 風水說이 있습니다. 韓國人은 이것을 數百 年間 믿어와 只今도 日常生活에서 影響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特히 祖上의 묏자리가 名當이면 子孫이 福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안에 憂患이 있거나 事業에 失敗하면 祖上의 墓, 主로 自己 父母의 墓가 風水地理說로 判斷해 좋지 않은 자리에 있기 때문으로 여기고 묏자리를 옮긴다고 합니다. 우리 유럽人이 理解가 안 되는 것은 選擧에 出馬하는 사람마저 當選되기 위해 選擧 前에 地官의 助言을 듣고 父母의 墓를 이장하祈禱 한다는 것입니다.”



    屍體에 對한 東西洋의 다른 視線

    “한番 묏자리를 봐주는 데 經費를 얼마나 받습니까?”라는 獨逸 記者의 質問에 한 地官은 “우리는 일정한 費用을 받지 않고 묏자리를 求하려는 사람의 經濟 能力에 따라 事例를 받습니다”라고 對答했다. 獨逸 記者는 韓國을 車로 旅行해보면 길가의 언덕 위에 또는 山허리 中턱에 멜론 半쪽을 엎어놓은 模樣으로 흙을 쌓아놓은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韓國의 墓이며, 富者집 祖上의 墓는 그 周邊에 나무도 심고 碑石도 만들어놨다고 했다. 韓國人이 이렇게 祖上의 墓를 精誠 들여 管理하면 앞으로 몇 年 後에는 낮은 山이 全部 墓로 덮일 수도 있다고 그 記者는 말했다. 그리고 韓國人은 墓 앞에 飮食을 차려놓고 술盞을 올려 살아 있는 사람을 接待하는 것처럼 절을 하고 혼잣말로 祖上에게 속삭인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 放送을 들으면서 죽은 사람의 靈魂과 屍身(屍身)에 對한 東西洋의 서로 다른 見解가 내 머릿속에 婚材돼 있음을 새삼 느꼈다.

    먼저 韓國式 見解다. 이것은 어릴 때 받은 儒敎的 家庭敎育에 依해 洗腦된 것이다. 祖上의 屍身을 묻은 墓를 明堂에 잘 쓰고 가꿔야 後孫이 蕃盛해가고 집안에 慶事가 많다는 생각이 平生 내 머릿속 한구석에 숨어 있다가 韓國에만 가면 再次 蘇生한다. 獨逸에서 半世紀 以上 살았어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基督敎 敎理에 立脚한 유럽式 見解다. 사람은 죽는 瞬間 靈魂과 肉體가 分離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見解는 特히 유럽에서 臟器 移植을 해온 醫師로서의 職業意識과 密接한 關係가 있다.

    나는 韓國에 나가면 2~3年에 한 番 程度 故鄕에 있는 酸素에 省墓를 간다. 그곳에는 祖上의 墓가 모여 있는 先山이 있다. 元來 내가 자란 마을에는 一家親戚 大部分이 살며 農業에 從事했는데 이제는 그 마을에 親戚이 두 집만 남아 있다. 飛行機로 光州에 到着하면 나는 空港에 마중 나온 조카와 함께 가게에 가서 省墓할 때 차릴 飮食을 산다.

    “얘야, 여러 가지 좀 더 많이 사거라. 모처럼 故鄕에 왔으니 선영 床에 많이 놔드려야 하지 않겠니?”

    마치 살아 있는 분들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謙虛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特히 아버지 墓 앞에선 恒時 어릴 때 들은 說敎를 떠올린다.

    “師範學校 卒業하면 隣近 學校에 敎師로 赴任해서 祖上 모시고 農事도 겸해 살아가는 것이 가장 幸福한 生活이다. 그것 잊지 마라.”

    나는 墓 앞에서 “아버지가 願하셨던 대로 가까이 있지 못하고 먼 外國에 있으니 그 不孝를 容恕하세요”라고 빌며 절을 한다. 죽은 사람의 靈魂이 그 墓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墓, 祖父母의 墓에  절을 할 때도 마찬가지 對話를 하고 잘못을 容恕해달라고 빈다.


    解剖 實習生들의 悖倫

    韓國에서 이처럼 살아 있는 後孫이 先祖의 墓를 가꾸고 省墓를 하는 것은 自己 家門을 자랑하는 것인 同時에 自身도 祖上의 福을 받아 大成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結局 우리나라 風水地理說과 祖上 崇拜의 慣習은 後孫들이 福을 받기 바라는 데 그 目的이 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유럽 社會에 돌아오면 나는 이 祖上崇拜의 意識構造에서 完全히 벗어나 生活한다. 醫師인 나는, 特히 腦死者에게 臟器를 얻어 移植하면서 平生 사람의 屍身과 靈魂의 問題에 부딪혀왔다. 내가 醫學徒의 길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사람의 屍身과 靈魂의 問題에 맞닥뜨린 것은 解剖學 實習을 할 때였다. 當時 나는 포르말린 속에 長期間 保存돼 있는 屍身으로 解剖學 工夫를 했다.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와 解剖學 試驗에 合格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내게 配當된 屍身과 죽음, 靈魂 問題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죽은 者에 對한 弄談이 實習場 여기저기서 들리고 及其也 웃음바다가 되는 不遜한 場面도 間或 있었다. 自己 祖上이 아닌, 主人 없는 屍身에 對한 醫大生들의 悖倫을 責望해본다.

    患者의 死亡 原因을 分析하기 위해 처음으로 病理室에서 屍身을 解剖한 것은 1959年 겨울이다. 獨逸 留學 첫해 겨울에 내가 다니던 하인리히·하이네 大學病院에서 約 30km 떨어진, 獨逸 루르工業地帶의 核心部에 있는 에센 市의 携貳센스스티프퉁 病院의 內科로 實習을 나간 적이 있다. 男子病棟에 있었는데 어느 날 37歲 鑛夫가 허리가 아프다며 入院했다. 留學 온 지 1年도 안 돼 나는 獨逸語가 서툴렀는데도 그 患者가 나에게 相當히 依支해, 나는 각별한 關心을 갖고 보살폈다. 週末을 보내고 그다음 週 月曜日에 出勤했는데 그 患者가 보이지 않아 물어봤더니 死亡했다고 했다. 허리 痛症은 死亡할 病이 아닌데 하고 疑訝心이 생겼으나 아무도 說明해주지 않았다. 午前 11時가 넘어 病棟腸 스미트 博士가 나를 끌고 가며 말했다.

    “미스터 리, 이리 와요. 어제 그 患者가 死亡했는데 곧 病理室에서 그 患者의 屍身 解剖가 始作돼요. 같이 가보지요.”

    大學病院 病理學敎室의 屍身解剖室에 비하면 地方病院의 病理室은 청결하지 못했는데 그보다는 解剖臺 位 屍身의 얼굴을 보니 소름이 끼치고 生命의 虛無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皮膚에는 이미 검붉은색 斑點이 생겨 있고 屍身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저 患者의 靈魂은 어디 있을까 하고 周圍를 둘러봤다. 그의 靈魂이 어디선가 나를 쳐다보며 怨望하고 있지 않을까 不安했다.

    死亡 原因은 금세 밝혀졌다. 看護師가 筋肉注射를 놓았는데 注射器가 汚染돼 注射한 部位에 가스 壞疽(壞疽)가 생겼던 것이다. 믿고 治療받기 위해 入院한 病院에서 看護師의 잘못으로 貴重한 人間의 生命이 스러진 것이다. 屍身은 病理敎授에 依해 切開되고 腦를 비롯한 모든 臟器는 사인을 判明하기 爲해 積出돼 檢事室로 運搬됐다. 靈魂은 肉體를 떠났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葬禮式場으로 옮겨진 屍身은 一部 殘骸에 不過했다.

    그러던 나는 1969年 腦死者의 肝을 떼어 유럽大陸 最初로 간 移植을 했다. 卽 最初로 腦死者에게서 臟器를 떼어냈다. 肝을 提供한 이는 21歲 靑年이었는데 腦出血로 入院해 意識不明 狀態가 됐고 腦死 診斷을 받았다. 腦死는 1960年代에 콩팥, 心臟 等의 長期 移植이 始作되면서 생긴 用語다. 人工呼吸에 依해 身體의 모든 部位는 生物學的으로 살아 있어도 腦는 이미 死亡해 意識不明 狀態에 있는 사람에 對해 醫學界가 規定한 새로운 죽음의 定義다. 牢死한 그 靑年의 皮膚色은 蒼白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검붉은 斑點이 없어 屍體로 생각되지 않았다. 意識은 없으나 얼굴은 잠자고 있는 者와 같았다. 基督敎의 敎理대로 이 患者의 靈魂은 正말 이미 肉體를 떠난 걸까. 肉體를 떠났다면 어느 時點에서 떠났으며, 어느 구석에서 只今 自身의 肝을 떼내려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아니면 天堂에 가 있을까. 그런 疑問들이 내 머릿속에서 交叉했다.



    腦死 判斷과 宗敎

    1960年代 醫學界에서는 腦死의 여러 가지 診斷 基準을 發表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大學病院의 하이드 敎授는 昏睡狀態에 빠진 患者를 人工呼吸으로 生命을 維持시킬 때 여러 날이 지나도 回復이 안 된 境遇 그 患者가 언제 死亡했다고 봐야 하는지 當時 로마敎皇 비오 12世에게 물었다. 敎皇은 “그것은 醫學이 判斷해 決定할 일이지 宗敎가 關與할 問題가 아니다”라고 對答했다. 다시 말하면 醫學이 腦死者라고 診斷한 瞬間 宗敎的으로 볼 때 患者는 死亡한 것이고 그 瞬間 靈魂은 肉體를 떠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69年 間 移植에 成功했다는 事實이 言論에 連日 報道된 뒤 내가 勤務하는 病院에 肝移植手術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患者가 무척이나 많아졌다. 그러나 肝을 提供할 腦死者가 적어서 나는 周邊의 크고 작은 病院을 찾아다니며 交通事故 等으로 生存 可望이 없는 患者를 우리 病院에 보내줄 것을 付託했다. 臟器 移植을 통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는 죽어가는 患者나 腦死者가 된 屍身을 募集하는 醫師가 됐다. 奇奇妙妙한 運命 아닌가. 이런 機會가 있을 때마다 나는 醫師가 腦死의 診斷을 내리는 瞬間 靈魂은 肉體를 떠났다고 봐야 한다고 ‘說敎’했다. 나의 職業意識 탓이다.

    1972年 어느 날 나는 우리 病院에서 約 10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헨視 近處의 天主敎病院에서 腦死者의 肝 提供과 關聯된 講演을 했다. 그때 한 新婦가 이런 質問을 했다.

    “닥터 리, 意識不明인 患者를 對象으로 人工呼吸을 할 境遇가 있는데, 醫師가 腦死 診斷을 確定하지 않았다면 그 患者는 아직 靈魂이 肉體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까?”

    腦死 與否를 診斷할 때 肉體와 靈魂의 分離 時期를 正確히 決定하기는 어렵다. 때에 따라서는 아직 腦死 診斷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循環障礙를 일으켜 血壓이 내려가고 心臟이 停止된 境遇도 있다. 이런 境遇 心臟이 停止되기 直前에 臟器를 摘出할 수 있는가. 或은 아직 腦死 診斷이 確定되지 않았으니 靈魂이 아직도 그 患者에게서 떠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醫師가 아무리 努力해도 心臟 搏動이 느려지고 血壓이 내려갈 境遇엔 臟器를 떼어내도 좋은가 等等의 複雜한 問題들이 擡頭된다.


    헬기 타고 移植用 간 求하러 다녀

    1970年代 末부터는 腦死者 한 사람에게서 여러 臟器를 摘出하는 게 可能해졌다. 1980年 初에는 한 腦死者에게서 心臟, 肝, 膵臟, 콩팥, 骨格, 눈의 角膜 等을 摘出해 移植했다. 腦死者의 屍身에 남은 것이 거의 없을 地境이었다. 나는 小型 航空機를 대절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네덜란드 等地로 가서 腦死者의 肝을 떼어낸 뒤 다시 時間을 다퉈 獨逸로 돌아와 移植手術을 하곤 했다. 手術 後에는 移植받은 患者를 보살피는 데 晝夜로 全力을 다해야 했다. 그래서 臟器를 뗀 屍身의 靈魂에 對해 깊이 생각할 餘裕가 없었다. 結局 죽은 者의 靈魂 問題는 생각지도 않는 非道德的 醫師가 되고 말았다.

    1980年 中盤의 어느 날 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우리 病院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뮌헨대학病院으로 肝을 摘出하러 간 적이 있다. 病院 헬기 着陸場에 내리니 臟器를 摘出하러 온 다른 팀 헬리콥터 두 臺가 먼저 到着해 있었다. 이제는 長期뿐 아니라 骨格까지 移植하는 時代가 돼 人體의 모든 部分을 여러 病院에서 나눠 가져갔다. 着陸場에 이 病院 H 敎授가 直接 마중을 나와 있었다.

    “李 敎授, 安寧하셨어요? 오랜만입니다. 心臟 팀과 膵臟 팀은 벌써 到着했습니다. 自動車로 오는 두 팀이 아직 到着하지 않았으니 가서 좀 기다리시지요.”

    待機室에서 오스트리아 알프스 山 속에 있는 인스브루크 大學에서 온 心臟 팀이 눈에 띄었다. 뮌헨 南部에 있는 한 病院에서 骨格과 눈의 角膜을 必要로 하는데 아직 그 팀이 到着하지 않았다고 했다. 서로 人事를 나누고 조금 있으니 骨格 팀이 到着해서 곧바로 手術에 들어갔다. 心臟 팀이 먼저 心臟을 떼고 그다음 우리가 간醬을 떼어 保存額이 들어 있는 封紙에 담고 그 뒤에 膵臟과 身長, 角膜과 骨格을 各自 必要한 팀이 摘出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H 敎授가 나를 불렀다.

    “李 敎授, 손님께 어려운 付託을 하나 해야겠어요. 時間이 있으시면 腦死者의 胸廓과 腹部를 좀 縫合해 주시겠어요. 우리 病院 當直醫師는 重患者가 있어 바쁘고 다른 醫師들은 超過勤務手當 때문에 이미 집에 보내버렸습니다. 제가 하려고 했는데 얼마 前 손을 다친 것이 아직 안 좋군요. 오늘 縫合해놓지 않으면 來日 아침에 家族들이 屍體를 찾으러 올 텐데 좀 곤란할 것 같아서요.”

    “그러세요. 제가 縫合해놓고 가지요. 아직 時間도 좀 있고 또 이렇게 간醬을 摘出하게 해주셨으니 뒤處理를 해야지요. 아무 걱정 마세요. 家族들이 마음 아프지 않도록 깨끗하게 해놓겠습니다.”



    人間의 尊嚴性

    獨逸에서는 어디서나 勞動時間 問題가 複雜하다. 時間外勤務를 하면 반드시 많은 額數의 超過手當을 支給하거나 그 時間에 該當하는 만큼 休暇를 줘야 한다. 1960年代만 해도 病院에 勤務하는 醫師들은 時間外勤務니 超過勤務手當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特히 大學病院에서는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患者가 있으면 當然히 醫師가 옆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밤을 새워서라도 治療하고 硏究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젠 獨逸에서도 슈바벤(Schwaben, 獨逸 南部地域)的 勤勉精神과 프러시아(Preussen, 前 프로이센 公國地域)的인 責任意識을 자랑하던 時代는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骨格 팀의 젊은 醫師 두 사람이 最後로 남아 能熟한 솜씨로 腦死者에게서 大腿部 骨格을 빼내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들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左右의 大腿骨을 筋肉으로부터 벗겨내더니 消毒된 褓자기에 싸서 쏜살같이 사라졌다. 兩쪽 윗部分 다리뼈를 빼앗긴 腦死者의 두 다리는 筋肉이 收縮돼 아주 짧아졌다. 늘씬하던 몸이 瞬息間에 볼품없이 돼버렸다. 이것이 事故 現場에서 發見된 屍體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自身은 죽어가도 다른 사람을 救濟하겠다는 崇高한 目的으로 身體의 많은 部位를 남에게 준 寄贈者의 모습치고는 尊嚴性을 喪失한 外觀이어서 슬퍼졌다. 그때 젊은 看護師가 나를 도와주려고 나타났다.

    “安寧하세요. 오늘 當直 看護師인가 보죠? 우리 때문에 저녁 늦게 쉬지도 못하고 未安합니다. 오늘밤이나 來日 家族들이 屍體를 引受하러 온다는 데 저런 꼴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長期 寄贈을 한다고 故人의 몸을 形便없이 망가뜨려놓은 것을 보면 大驚失色할 것 아니오. 그들이 失望하지 않도록 우리 둘이서 잘 縫合해줍시다.”

    “敎授님도 病院에 돌아가지 못하고 苦生하시는군요.”

    腦死者의 몸은 心臟을 빼앗겨 胸廓이 텅 비어 있고 腹部는 肝臟, 膵臟, 腎臟이 없어지고 空氣가 빠진 胃와 長官(腸管)만 等에 癒着돼 있어서 마치 醫科大學 解剖學敎室에 學生指導用으로 備置된 屍身을 聯想케 했다.

    나는 胸廓과 腹部를 凶하지 않도록 操心해서 닫고 皮膚를 한 바늘 한 바늘 꿰매면서 옆에서 거들고 있는 看護師에게 말했다.

    “萬若 火傷 患者에게 이 皮膚마저 移植할 수 있게 되면 우리가 이렇게 屍身을 縫合할 必要도 없어질 거요. 앞으로 醫學이 더 發達하면 틀림없이 畫像이나 事故를 當한 患者에게 皮膚도 移植하게 될 겁니다. 어디 그뿐이겠어요. 只今 내 弟子 中 한 사람은 筋肉과 팔다리의 關節을 移植하는 硏究를 하고 있습니다. 그 結果가 좋아요. 그러면 머지않아 筋肉과 關節도 가져가게 되겠지요. 머리카락까지 移植하는 世上이 됐으니 앞으로 長期 寄贈者에게는 남는 게 없을 거예요.”


    葬禮는 왜 치르는 걸까

    “敎授님, 章은 남을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所長과 大腸을 移植할 날도 멀지 않았어요. 그동안 動物實驗을 繼續해왔는데 只今 많은 經驗을 쌓았어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葬禮는 무엇으로 치르지요?”

    맞다. 寄贈者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葬禮를 치르란 말인가! 그런 狀態로 果然 葬禮가 必要할까. 그 이야기를 듣는 瞬間 나는 看護師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醫學이 發展한다면 人間의 죽음에 對한 尊嚴性은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將棋와 身體의 모든 部位를 나눠주고 겨우 남은 것들을 끌어모아 葬禮를 지낼 때 故人의 靈魂이 穩全한 待接을 받을 수 있을지 東洋式 倫理觀에서 생각해보았다.

    周圍를 돌아보니 썰렁한 手術室의 차가운 불빛 아래서 나와 看護師만 남아 바삐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身體의 많은 部分을 남에게 줘버린 腦死者의 몸을 縫合하면서 그 몸의 主人公이었던 靈魂이 天堂의 하나님 곁에 便安히 가 있기를 祈禱했다. 본 大學으로 돌아오는 헬리콥터 안에서 나는 다시 한 番 看護師의 말을 떠올렸다. ‘앞으로 身體 寄贈者에게 남는 게 없게 된다면 무엇으로 葬禮를 치르지요?’

    그런데 葬禮는 무엇을 위해 치르는 것일까. 屍體를 위한 것일까. 靈魂을 위한 것일까. 그 靈魂을 담았던 몸이 여러 갈래로 찢겨도 靈魂은 便安하게 잠들 수 있을까. 이렇게 毁損된 屍體의 墓道 風水地理說에 따라 明堂자리에 써야 하는가. 이런 苦悶을 한다는 것은 내 머릿속에 儒敎的 倫理觀이 유럽文化의 거센 波濤에 밀려 退潮했음에도 아직 모두 없어지진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歲月이 흘러 2006年 9月 24日 日曜日 正午에 덴마크 로스킬데에 있는 皇后의 墓를 移葬한다는 TV뉴스를 봤다. 그 皇后는 러시아 10月革命 때 殺害된 帝政러시아 最後의 皇帝 니콜라이 2世의 어머니 마리아·호요도로우나였다. 이 덴마크王室의 公主는 19歲 때 러시아皇帝 알렉산더 3世와 結婚해 52年間 러시아에서 살았는데 러시아革命 때 덴마크로 避身해 1928年 死亡하고 그곳에 78年 동안 埋藏돼 있었다. 그러다 이날 그 遺骨이 러시아로 移送돼 9月 28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브로스크 聖堂에 묻혀 있는 男便 알렉산더 3歲의 墓 곁으로 移葬됐다.



    러시아 皇后의 墓

    言論은 皇后가 78年間 덴마크의 무덤 속에서 러시아 하늘을 바라보다 이제 男便 곁 安息處를 救하게 됐다고 報道했다. 이는 遺骨에 靈魂이 같이 있는 것처럼 認識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基督敎文化圈 亦是 傳統的 慣習에는 죽은 後 肉體와 靈魂이 完全히 分離된다는 槪念은 없는 것 같다.

    그뿐 아니다. 베트남戰爭, 6·25戰爭 中에 死亡한 美軍兵士의 屍體(遺骨)를 美國 政府가 찾아서 美國으로 가져간다. 이것은 非但 屍身의 尊嚴性만 考慮해 이루어진 것보다도 앞의 러시아 皇后의 境遇와 같이 ‘靈魂이여, 이제 故國에서 安息을 取하소서’라는 뜻으로 解釋된다. 그렇다면 遺骨이 靈魂과 같이 移動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

    2006年 9月 14日 獨逸 出身인 敎皇 베네딕토 16世도 獨逸 레겐스부르크 近處의 父母 墓를 찾아 동생과 같이 墓 앞에서 祈禱를 했다. 墓 안의 屍體에 父母의 靈魂이 있다고 생각하며 祈禱했을까, 아니면 그 屍體를 통해 하늘나라에 있는 靈魂에게 祈禱했을까. 나는 答을 얻지 못했다.

    腦死者의 臟器를 移植하기 위해 오랫동안 長期 摘出 手術을 해온 醫師에게는 ‘腦死者의 屍身은 尊嚴스럽게 다뤄야 하나 靈魂은 이미 肉體를 떠나 하늘나라에 가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便安한 結論이다.

    이런 生活을 여러 해 해온 나는 葬禮式에 잘 가지 않는다. 韓國式 葬禮式이든 유럽式 葬禮式이든 一般的으로 靈柩車에 실려 運搬되는 屍身에는 靈魂이 같이 있다고 믿고 家族과 親知가 슬퍼하며 墓地까지 같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移植用 臟器를 摘出하는 手術室에서 腦死者의 屍身, 또는 病理室에서 解剖된 屍身을 聯想하면 葬禮式의 尊嚴性이 없어진다.



    職業上 葬禮式 忌避 習慣

    내가 高齡이 돼가니 잘 알고 지내던 親舊들이 死亡했다는 消息을 種種 듣는다. 서울을 訪問했을 때 周邊의 親知들은 幽明을 달리한 親舊의 집에 찾아가 그 親舊의 影幀에 人事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내게 勸誘한다. 그러나 나는 親舊의 影幀을 찾지 않는다. 患者 死亡 直後 靈魂은 이미 肉體를 떠나 天國에 가 있다고 생각하며 屍身에서 移植用 臟器를 摘出하는 나를 影幀 속 親舊의 靈魂이 반기리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故國을 訪問해 故鄕에 가면 先山을 찾아가 술을 한盞 따라 올리며 돌아가신 父母, 祖父母와 對話를 나눈다. 유럽에서 醫師란 職業을 갖고 一生을 바친 내 머릿속에는 韓國的인 나와 유럽的인 내가 共存하고 있어 周邊 環境에 따라 1人2役을 하는 것이다. 참 矛盾的인 海外 同胞 1歲가 아닐 수 없다.



    이 種 數

    ● 1929年生
    ● 1964年 獨逸 뒤셀도르프臺 醫學博士
    ● 1969年 유럽大陸 最初 肝 移植 成功
    ● 1975年 本隊 醫大 移植과 課長
    ● 1994年 肝疾患硏究所長
    ● 著書 : ‘새로 쓰는 間 다스리는 法’ ‘間이 두 個인 男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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