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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家의 視線으로 뒤집어보기|신동아

藝術家의 視線으로 뒤집어보기

  • 정수복│社會學者·作家

    入力 2012-09-20 17: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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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現實을 批判하고 否定하고 超越해 새로운 現實을 創造하려는 藝術家의 視線으로 서울을 바라본다.
    • 서울은 活氣 있고 物質的으로 풍요로운 곳이지만 精神的으로는 如前히 가난한 都市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뒤집어보기

    파리 6區에 있는 한 카페의 午後 風景. 作家 필립 솔레르스가 가끔씩 이 카페에 나타난다.



    2002年 파리로 떠났다 서울로 돌아온 지 10個月을 맞이했다. 처음 서울에 到着했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더니 이제 漸漸 모든 것이 當然하게 보인다. 큰일이다. 이러다가는 異邦의 都市에 살다 돌아온 사람의 視線으로 서울의 낯선 場面 101個를 提示하겠다던 目標를 達成할 수 없을 것 같은 걱정이 앞선다.

    서울 風景을 繼續 새로운 눈으로 보기 위해서 나는 藝術家의 視線을 가지려고 애쓴다. 시든, 그림이든, 音樂이든, 舞踊이든, 藝術은 只今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사는 世上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새로운 視線을 提供한다. 藝術作品을 만들기 위해 藝術家는 現實에 溶解되어 그 一部가 되기를 기꺼이 拒否한다. 藝術家의 精神, 詩人의 魂은 現實을 批判하고 否定하고 超越해 새로운 現實을 創造하려는 志向性이다.

    1990年代 初에 나온 하일지의 小說 ‘競馬場 가는 길’에는 말(馬)은 한 番도 나오지 않고 프랑스에서 留學生活을 마치고 歸國한 R이라는 男子가 登場한다. 그는 서울 生活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生活을 하다가 이렇게 自身의 心境을 吐露한다.

    “나는 이 서울이야말로 송두리째 하나의 小說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恰似 내가 虛構의 世界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바로 이런 思考方式이야말로 남과 다르게 現實을 批判的으로 觀察하며 當然한 것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精神 狀態다. 作家들만이 아니라 畫家들도 現實을 다르게 表現하기 위해 常套的인 視角을 벗어나려고 애쓴다. 파리의 罪드폼(Jeu de Pomme), 뉴욕현대미술관(MoMA) 等 世界的인 美術館에서 個人展을 연 抽象化가 李禹煥이 1年에 6個月씩 도쿄와 파리를 오가는 生活을 하는 理由도 ‘當然의 世界’에 빠지지 않고 現實과 緊張感을 維持하기 위한 方便일 것이다.

    風景 #46 사라진 옛 追憶의 그림자

    靜中動(靜中動)이라는 말이 있다. 大勢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는 狀態를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都市 生活에서 靜中動의 狀態를 期待하기는 힘들다. 동중정(動中靜)의 狀態,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閑暇한 구석이 있다면 그나마 多幸이다.

    파리에서는 그게 可能하다. 都心은 複雜하지만 센 江 量案을 이어주는 生루이섬의 强辯이나 시테 섬의 도핀 廣場에 들어서면 고요하고 閑寂한 雰圍氣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서울 都心에선 그런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은 그야말로 동중동(動中動)의 狀態에 있다.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서울을 ‘怪物都市’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서울이 너무 빨리 變하기 때문이다. 怪物은 자주 그 모습을 바꾸어 相對方을 混亂에 빠뜨린다. 빠른 變化는 마치 記憶과 追憶을 巨大한 쇠뭉치로 깨부수고 그 조각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듯하다.

    서울에 내가 즐겨 다니던 카페나 食堂이 몇 곳 있었다. 鳴動과 鍾路 2街에 있던 ‘韓一館’은 내가 파리에 살다가도 서울에 오면 꼭 들르는 食堂이었다. 그런데 이 食堂이 어느새 사라졌다. 얼마 前 江南에 새로 생긴 韓一館에 가서 갈비湯을 먹었다. 돌로 지은 새 建物에서 옛 雰圍氣를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主人이 鍾路 韓一館의 옛 主人이어서 飮食 맛을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點心時間이면 長蛇陣을 이루는 삼청동 수제비집이나 市廳 뒤의 북어국 집은 옛날 그대로다. 그런데 이런 境遇는 아주 例外에 屬한다.

    서울을 떠나 外國에 몇 年 살다 돌아오면 예전에 다니던 食堂이나 茶집은 사라지고 다른 業所가 들어와 있는 境遇가 茶飯事다. 같은 茶집이나 食堂이라도 主人이 달라져있어 全體 雰圍氣를 그대로 維持하지 못한다. 이대 앞의 ‘가미’, 혜화동의 ‘마전터’ 等의 食堂은 아직 남아 있지만 主人이 바뀌어 飮食의 맛도 예전과 같지 않고 場所의 雰圍氣도 달라졌다. 煙臺 앞의 ‘禿수리茶房’과 ‘백양다방’, 동숭동 大學路의 ‘烏瞰圖’나 ‘마로니에’같은 輕洋食집, 이대 앞의 ‘미뇽다방’ ‘파리다방’, ‘아메리카’와 ‘멕시코’ 等의 輕洋食 집들은 只今 다 사라지고 이름도 없다. 大學路의 ‘學林茶房’만 겨우 命脈을 維持하고 있다.

    파리에는 내가 1980年代 留學生 時節에 다니던 카페들이 只今도 옛 雰圍氣를 그대로 維持하고 있다. 어떤 곳은 室內裝飾을 多少 바꾸었지만 如前히 낯익은 구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場所만이 지니고 있는 固有한 雰圍氣, 다시 말해 그 場所의 正體性을 잃지 않고 있다. 뤽상부르 公園 옆의 ‘로스탕’ 카페, 생쉴피스 廣場 앞의 ‘카페드라메리’, 生루이 섬의 ‘에스칼’, 뤼데制콜의 ‘르 소르봉’, 소르본 廣場 앞의 ‘에크리트와르’ 等의 카페는 같은 자리에서 옛 雰圍氣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내가 如前히 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서울이 아니라 파리에서 내가 나라는 느낌을 받는 게 異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風景 #47 陸橋를 건너며

    요즘 서울에선 陸橋가 大部分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 생기는 곳도 있다. 江南 高速터미널 南쪽에 있는 메리어트호텔과 가톨릭서울聖母病院 사이에 들어선 푸른色 아크릴 裝飾의 아름다운 陸橋가 代表的이다. 다리 이름은 ‘센트럴 시티 브리지’다. 落葉이 지던 지난해 늦은 가을의 어느 날 나는 메리어트호텔 쪽에서 聖母病院 쪽으로 陸橋를 건너고 있었다. 어느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陸橋 階段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 뒤를 따라오던 젊은 女性이 “할머니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니야, 괜찮아… 고마워!” 하면서 支持臺를 잡고 熱心히 階段을 걸어올라갔다.

    그날 내가 본 그 젊은 女性은 어린 時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지도 모른다. 어떤 動機에서건 잘 모르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민 그 젊은 女性의 마음이 傳達돼 나는 一瞬間 흐뭇함을 느꼈다.

    파리에서는 그런 光景을 볼 수 없다. 自己 일로 바쁜 파리 젊은이들의 눈에는 힘겹게 階段을 걸어 올라가는 老人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老人들도 獨立的이어서 젊은이들의 도움을 期待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老人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끝까지 獨立된 個人의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그들은 남의 도움을 받는 狀態를 羞恥로 여긴다. 그걸 모르는 어느 韓國 留學生이 地下鐵 階段에서 좋은 마음으로 프랑스 할머니의 무거운 旅行 가방을 들어주려고 했더니 異常한 눈으로 바라보며 도둑놈 取扱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風景 # 48 椅子 위의 跏趺坐

    서울에 와서 카페에 가보면 卓子 위에 冊을 펴놓고 工夫하는 사람이 많다. 카페를 事務室처럼 쓰는 사람들을 카페와 오피스라는 말을 합쳐 ‘카피스族’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참 異常한 일이다. 카피스族 가운데 신발을 벗고 椅子 위에 跏趺坐를 틀고 있는 女性들을 흔히 보게 된다.

    옛날 韓食집에서 坐式 生活을 할 때는 跏趺坐를 틀고 앉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아파트가 主要 住居 形態가 된 時代에 태어난 젊은 女性들이 椅子에 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은 내 눈에 매우 生疏해보였다.

    一次的으로는 男女平等을 내세운 女性運動의 影響으로 젊은 世代 女性들은 女子로서의 조신한 몸가짐을 해야 한다는 傳統的 굴레에서 벗어난 것으로 解釋할 수 있다. 그러나 왜 椅子 위에서 房바닥에 앉는 姿勢를 取하고 있는가? 그런 姿勢로 앉아 있는 女性들은 大體로 그 場所에서 相當한 時間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런 姿勢가 便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民族이 오랜 歲月 坐式生活을 해오면서 形成된 習慣이 요즘 世代 女性들에게까지 傳達되었단 말인가? 그런 姿勢가 DNA 속에 暗號로 들어 있다는 말인가?

    跏趺坐만이 아니다. 서울에서는 女性들이 食堂이나 카페에서 하이힐을 벗고 구두 위에 발을 걸치고 있는 모습도 가끔씩 눈에 들어온다. 苦生한 발에 暫時 休息을 주자는 配慮인 것 같다. 그런데 파리에서 살다온 나에게 그 風景은 매우 이채롭고 韓國的이다. 파리 사람들은 決코 公的 空間에서 신발을 벗지 않는다. 누구라도 公共場所에서 신발을 벗고 있다면 無禮한 野蠻人 取扱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番 여름 나는 신발을 벗는 것보다 더한 無禮도 여러 次例 보았다.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圖書館 로비에서 아예 신발을 벗은 채 周圍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便하게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의 風景을 보게 된 것이다. 冷房이 된 圖書館 로비에서 낮잠을 즐기는 아저씨도 있고 함께 누워 있는 젊은 男女도 있었다.

    나라마다, 世帶마다 몸가짐이 다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共有하는 公的 空間과 自己만의 私的 空間에서의 몸가짐은 區別돼야 한다. 禮節이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서로를 配慮하는 마음이다. 남의 視線이나 不便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 좋을 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式으로 行動하는 사람들을 두고 ‘槪念이 없다’는 表現을 쓰는데 그때 ‘槪念’이라는 말은 公的 場所에서 他人을 의식하고 配慮하는 最小限의 ‘禮儀’인 듯하다. 옛날에는 ‘槪念’이라는 말 代身 ‘公衆道德’이라는 말이 쓰였는데 그 말이 더 正確한 表現이 아닐까.

    風景 # 49 橫斷步道 信號燈 앞에서

    서울과 파리의 橫斷步道 앞 風磬에는 差異가 있다. 파리의 步行者들은 빨간불일 때도 車가 없으면 그냥 길을 건넌다. 警察이 바라보고 있어도 버젓이 길을 건넌다. 警察도 아무 말 안 한다. 自動車 運轉者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橫斷步道 앞에서는 速度를 줄인다. 無秩序 속에 秩序가 있는 셈이다. 1980年代 初 留學生 時節 그런 모습을 보면서 混沌感에 빠지곤 했다. 先進國 사람들은 交通秩序를 잘 지킨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先進國이라고 생각되는 프랑스 파리 사람들이 交通信號를 안 지키는 게 너무 異常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指導敎授와 함께 橫斷步道를 건너게 되었다. 빨간불이었다. 그런데 世界的인 學者가 무턱대고 길을 건너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저쪽에서 트럭 한 臺가 조금 빠른 速度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걸 본 指導敎授는 “멈춰! XX야!(Arrete! Merde!)”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것이 아닌가? 敎授의 머릿속에는 빨간불 파란불이 問題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고 自動車가 나중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는 듯했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뒤집어보기

    서울 都心의 쌈지公園 點心時間 風景.

    내가 살던 洞네 波市에선 그보다 더한 場面도 보았다. 빨간불일 때 한 사나이가 橫斷步道를 건너고 있었는데, 길 저便에서 멋진 스포츠카가 警笛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사나이는 悠悠히 길을 건넜다. 自動車는 橫斷步道 앞에서 急停車하지 않을 수 없었다. 自動車 안의 運轉者가 窓門을 내리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瞬間, 그보다 먼저 길을 건너던 사나이가 抗議의 말을 내뱉었다. “야! 너 나 죽이려고 그래? 죽여봐!”사나이는 運轉者와 한참 昇降이를 벌이더니 길 저便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서울 사람들은 信號燈을 徹底하게 잘 따른다. 車가 없어도 빨간불이면 沈着하게 기다린다. 洞네 2車線 道路의 橫斷步道에서 빨간불인데 車가 없었다. 나는 파리에서의 習慣대로 그냥 길을 건넜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다들 나를 外界人 쳐다보듯 했다. 파리는 四철 世界 各國에서 온 觀光客들로 붐빈다. 그 가운데 橫斷步道 信號燈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은 日本사람들이다. 내가 어린 時節 “先進國 사람들은 交通信號를 잘 지킨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先進國은 바로 日本이었던 것 같다. 도쿄에 가보면 日本사람들은 正말 交通秩序를 잘 지킨다.

    그런데 中國 觀光客들은 2000年代 初盤만 해도 파리사람들 뺨치게 交通信號를 안 지켰다. 아무 때나 莫無可奈로 길을 건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2008年 올림픽이 끝나고 난 後 파리의 中國 觀光客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옷차림이나 行色만 달라진 게 아니라 交通信號도 꼬박꼬박 잘 지키게 된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해 中國에서도 “先進國이 되려면 公衆道德을 잘 지켜야 한다”는 캠페인이 搖亂하게 進行되었던 模樣이다. 이제 파리에서 無斷橫斷, 가래침 뱉기, 쓰레기 버리기, 路上放尿 等 公衆道德을 違反하는 中國人은 거의 없다. 그런 面에서 韓中日 세 나라는 ‘先進國’이 되었다. 그러나 파리지앵은 如前히 빨간불에도 길을 건너고 아무 데나 담배꽁초를 버리고 飮酒運轉을 하고 不法駐車를 한다. 프랑스는 그런 點에서 先進國이 아닌지 몰라도 그런 작은 違反을 罰金으로 處罰하지 않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國家의 强制力을 最少化하고 市民의 權利를 最大化하려는 프랑스 革命 以後 社會 運營의 法則이 아직도 健在하다.

    風景 #50 샴푸와 첫사랑

    내가 ‘파리의 밤 生活’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밤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華麗한 네온사인 看板을 단 遊興業所들이 密集한 ‘피갈(Pigalle)’이라는 洞네를 除外한다면 파리의 밤은 무척 고요한 便이다. 서울의 밤이 파리의 밤보다 몇 十 倍 華麗하다. 서울에선 어둠이 내리면 建物 外壁을 華麗한 照明 裝置로 裝飾하는 建物이 늘어나고 있다. 압구정동의 어느 百貨店 建物은 밤이 되면 建物 自體가 마치 하나의 藝術作品처럼 반짝인다. 서울의 밤은 世界 어느 大都市의 밤 못지않게 밝고 華麗하다. 大路邊 建物 壁이나 屋上에 設置된 커다란 電光板들이야말로 서울의 밤을 不夜城으로 만드는 照明 裝置다. 電光板 위를 흐르는 華麗한 이미지와 文章들은 빠르게 變하는 世上보다 더 빠르게 바뀌면서 사람들의 視線을 끌어당긴다. 電光板과 더불어 네온사인 看板도 서울의 밤을 들뜨게 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서로 補色을 이루는 붉은色과 草綠色 글字들이 반짝이고 깜빡이며 運轉者나 步行者의 눈길을 빼앗는다.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늦게 택시를 타고 歸家하던 中이었다. 택시가 漢南大橋를 넘자 어느 나이트클럽의 네온사인 看板이 눈앞에 明滅했다.

    ‘첫사랑.’

    핑크빛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그때 나는 내가 如前히 한글共同體에 屬하는 사람임을 直感했다. 나이트클럽의 이름으로 ‘첫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 같았다. 요즈음은 英語를 쓴 看板도 많이 생기고 있지만 萬若에 ‘첫사랑’ 代身 ‘First Love’라고 써 있었다면 看板이 갖는 吸引力은 한참 줄어들었을 것이다. 나이트클럽 안에서는 善男善女들이 輝煌燦爛한 불빛 아래서 서로 몸을 맞대고 音樂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의 아련한 記憶을 되새기면서….

    택시는 高速터미널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나이트클럽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샴푸.’

    이番에는 네온사인이 아니라 電光板 위에서 ‘샴푸’라는 글씨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 電光板을 보자 옛날에 보았던 映畫 한 場面이 떠올랐다. 安聖基가 主人公으로 나왔던 그 映畫에서 칠수와 만수라는 이름의 두 젊은 勞動者가 電光板을 設置하고 있는 場面이었다. ‘첫사랑’에 뒤이어 나온 ‘샴푸’라는 나이트클럽의 이름은 新鮮함, 개운함, 깨끗함, 淸潔함, 香氣, 설렘이라는 느낌을 喚起시킨다. 萬若에 한글專用論者의 主張에 따라 나이트클럽의 看板에 ‘샴푸’라는 말 代身 ‘물비누’라는 말을 썼다면 幻想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훨씬 弱해졌을 것이다.

    이제 西洋에서 물 건너온 製品과 그것을 일컫는 單語들은 우리 生活 속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 샴푸라는 英語는 이제 우리말처럼 되어버렸다. 아무튼 서울의 밤이 파리는 말할 것도 없고 世界 그 어느 大都市보다도 强烈한 밤의 雰圍氣를 演出한다면 그건 빠르게 움직이는 電光板의 이미지들과 네온사인 글字들의 끊임없는 明滅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게 내 생각이다.

    風景 # 51 숲속의 結婚仲媒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시원한 바람이 반갑다. 서초구 瑞來마을에는 프랑스 사람들이 모여살고 프랑스 學校도 있다. 서초구는 파리시와 姊妹結緣해 每年 文化行事를 벌이기도 한다. 國立中央圖書館 위에 새로 造成한 公園에 ‘몽마르트 公園’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午後 6時 圖書館 閱覽室을 나와 이 公園에 올라가면 프랑스 父母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間間이 프랑스語로 말하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이 公園을 한 바퀴 돈 다음 瑞草대로 위에 設置된 ‘누에다리’를 건넌다. 해가 지면 이 다리에도 華麗한 照明이 들어온다. 다리를 건너면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서리풀近隣公園’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山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간다. 요즈음은 가을 풀벌레 소리가 한창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山길을 걸으며 풀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은 나에게 커다란 慰安이자 기쁨이다.

    그런데 이게 또 웬 일인가? 어느 날 저녁 山길을 걷는데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커다란 懸垂幕이 걸렸다. 고요한 山길의 雰圍氣를 깨는 그 플래카드는 어느 結婚仲介會社의 廣告였다. ‘빠른 成事! 仲媒 잘한다! 成事 잘한다! 所聞!’ 懸垂幕 위에는 招魂과 再婚으로 區別된 男女의 職業과 나이가 列擧되어 있다. “醫師, 辯護士, 藥師, 韓醫師, 男子 31~45歲, 女子 27~42歲….” 이 仲媒 會社의 社長은 서울대 法大를 나오고 公共機關에 多年間 在職했으며 KBS ‘아침마당’生放送에도 出演했다는 內容도 적혀 있다. 市內버스 옆구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인터넷 사이트들에서도 느닷없이 出沒하는 結婚仲介會社 廣告를 숲 속에서 맞닥뜨리다니 참 異常한 일이었다.

    이제 男女가 다양한 機會에 다양한 方法으로 자유롭게 만나 交際할 可能性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알게 모르게 조용한 性(性)解放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자유로운 戀愛가 保障된 時代에 結婚仲介業이 盛行하고 있음은 언뜻 矛盾的으로 보인다. 그러나 暫時 생각해보면 結婚仲介業이 盛行하는 理由를 斟酌할 만하다. 戀愛는 負擔 없는 相對를 만나 ‘쿨(cool)’하게 즐기고 結婚은 安全하고 未來가 保障되는 配偶者를 찾겠다는 時代의 要求를 反映하는 듯하다. 프랑스의 젊은 男女는 자유롭게 만나 자유롭게 즐긴다. 그리고 마음에 맞으면 쉽게 同居에 들어간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浪漫的 사랑의 脚本이 作動한다. 처음 만났을 때 ‘쿠 드 푸드르(Coup de foudre·천둥번개 或은 첫눈에 飯含을 뜻함)’ 現象이 없는 男女間의 結合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仲媒會社가 매긴 點數에 따라 配偶者를 찾아 結婚하는 것은 一生一大의 羞恥이며 侮辱이다.

    風景 # 52 初等學校 運動場에서

    서울에서는 運動場이 없는 學校를 想像할 수 없다. 學校 大門을 들어서면 一旦 커다란 運動場이 펼쳐진다. 그러나 파리의 學校에는 運動場이 없다. 授業 時間 사이나 放課 後에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마당이 있을 뿐이다. 勿論 그곳에서 簡單한 놀이를 하기도 한다. 파리의 初·中·高校 學生들은 體育時間이면 學校 附近에 있는 共用 運動場을 使用한다. 軍隊 練兵場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運動場을 갖춘 學校의 風景은 日帝强占期의 産物이다. 學校 運動場은 아침 일찍 일어나 運動을 하려는 洞네 사람들에게 開放되기도 한다. 어쩌다가 洞네에 있는 初等學校 運動場에 들어가보면 오래前 어린 時節의 童心으로 돌아가게 된다. 運動場 한구석에는 예전처럼 鐵棒帶와 모래밭, 미끄럼틀 等 運動과 놀이를 겸할 수 있는 施設들이 있다. 李舜臣 將軍이나 世宗大王의 銅像이 設置되어 있는 學校도 있다. 가을이 되면 學校 運動場에서 運動會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가을 逍風날에는 똑같은 學校 運動場에 아이들이 타고 갈 觀光버스가 들어올 것이다.

    學校 運動場 안쪽에는 國旗揭揚臺가 있다. 거기에는 검은 大理石 위에 ‘國旗에 對한 盟誓’가 적혀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太極旗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大韓民國의 無窮한 榮光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忠誠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光復 以後 생긴 民族主義 談論이 持續되고 있다. 勿論 프랑스 學校에도 프랑스 三色旗가 걸리는 날이 있고 抗毒(抗獨) 레지스탕스 運動의 歷史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 學校 敎育은 民族主義보다는 世界市民意識을 强調하는 普遍主義를 志向한다. 모든 프랑스 學校의 正門 위에 적혀 있는 ‘自由, 平等, 博愛’라는 價値는 프랑스라는 國家의 境界線을 넘어서는 普遍的 價値다. 그 세 가지 價値는 프랑스 帝國主義의 歷史를 안으로부터 批判하는 原則이 되기도 한다.

    風景 #53 拉北者와 民防空 訓鍊

    어느 날 午後 地下鐵에서의 일이다. 地下鐵 플랫폼과 電動車 안의 윗벽에 商品廣告가 아닌 색다른 廣告가 붙었다. ‘6·25戰爭 拉北被害/ 가슴에 묻은 歲月만큼/ 큰 希望을 얻었어요!/ 大韓民國 政府가 6·25戰爭 때 拉北者 申告를 받습니다./ 問議電話 1661-6250 國務總理室 6·25戰爭 拉北 眞相 糾明委員會.’ 拉北 當事者 家族들이 拉北 被害申告서, 家族關係證明書, 除籍謄本, 拉北經緯서 等을 作成해 提出하면 政府가 나서서 拉北者의 生死를 確認해주고, 살아 있으면 相逢을 周旋하고 나아가서는 送還을 위해 努力할 것이라는 案內文이었다. 그렇다. 우리나라는 同族相殘의 戰爭을 겪은 分斷國家이고 아직도 分斷은 持續되고 있으며 南北韓은 休戰線을 境界로 對峙하고 있다.

    地下鐵 出入口를 나오는데 民防空 訓鍊이 始作되었다. 모든 自動車가 길가에 靜止해 있고 步行客들은 다시 地下鐵 안으로 들어가 待避하라는 案內 放送이 나온다. 放送은 北韓의 假想 爆擊機가 서울 하늘 上空을 날아가고 있다는 場面을 想像하게 만든다. 이 世界的으로 安全하고 자유로운 서울이 北韓으로부터 얼마 안 되는 距離에 있음을 새삼 상기시킨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北韓 高位 官吏의 威脅 言辭도 생각난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뒤집어보기
    정수복

    연세대 政治外交學科

    프랑스 파리 ‘社會과학고等硏究員’ EHESS(社會學博士)

    社會運動硏究所 所長

    프랑스 파리 ‘社會과학고等硏究員’ 客員敎授

    韓國文化社會學會 理事(現)

    著書: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完全한 休息’ ‘韓國人의 文化的 文法’ ‘市民意識과 市民參與’ 等


    數次에 걸쳐 戰爭을 벌였던 프랑스와 獨逸은 이제 유럽聯合을 이끌어가는 雙頭馬車가 되었다. 戰爭 威脅이 없기에 民防空 訓鍊도 없다. 그런데 파리에도 戰爭의 記憶을 알리는 소리가 있다. 내 記憶이 틀릴 수도 있는데 每달 첫째 月曜日 正午에는 파리 곳곳의 消防署에서 ‘웨甇’하는 사이렌을 여러 次例 울린다. 그건 火災가 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라 戰爭이 없으니까 安心하라는 平和의 信號라고 한다. 원 참! 只今 이 世上에 戰爭이 없다는 消息을 그렇게 알리다니 우스운 일이다. 그래도 그건 프랑스의 오래된 傳統이라고 없애지 않고 繼續한다. 이제 파리지앵에게 그 사이렌 소리는 戰爭이 없다는 信號가 아니라 지나간 옛날을 상기시키는 追憶의 소리가 된 듯하다. 民防空 訓鍊이 없어지거나 追憶의 行事가 될 날은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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