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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型 人間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신동아

아침型 人間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 김정운 명지대 敎授·餘暇經營學 entebrust@naver.com

    入力 2008-05-08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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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ECD 國家 中 韓國의 勞動時間이 가장 길다. 그럼에도 韓國은 왜 아직도 先進國 클럽에 加入하지 못할까. 創造的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잘 놀아야 創造的인 人間이 되고 成功하는 時代가 왔다. 재미와 幸福을 追求하는 이들이 韓國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고 있다. 참고 忍耐하는 勤勉·誠實의 價値가 21世紀 時代精神인 在美·幸福의 발목을 잡아선 안 된다.
    아침형 인간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OECD 國家들 中 韓國의 勞動時間이 가장 길다. 그러나 生産性은 꼴찌다. 都大體 原因이 뭘까. 韓國은 왜 아직도 先進國 클럽에 加入하지 못할까.

    三星을 비롯한 韓國의 代表的 企業들은 ‘創造經營’을 외치고, 서울市를 비롯한 地自體에서는 한결같이 ‘創意市政’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創造的 行爲를 위한 韓國社會의 액션플랜은 一絲不亂 그 自體다. 그저 ‘열씨美 瑕疵’다. 새로 當選된 大統領은 出勤時間을 앞당기며 모든 公務員에게 ‘아침型 人間’李 되라 한다. 아, 正말 이건 아니다.

    獨逸에서 13年을 산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라인江의 奇跡’과 ‘漢江의 奇跡’을 比較하는 일이다. 이건 韓國人에 對한 正말 참을 수 없는 冒瀆이다. 獨逸이 어떤 나라인가. 世界大戰을 두 番이나 일으킨 나라다. 潛水艦을 만들고, 탱크, 飛行機를 만들던 世界 最高의 技術力을 가진 나라다. 비록 戰爭에 敗했지만, 그 技術을 가진 사람들은 如前히 살아 있었다.

    韓國은 어떠했는가. 보릿고개도 스스로 못 넘던 民族이다. 海外 援助로 살아가다가 같은 民族끼리 戰爭을 치렀다. 그 戰爭도 다 남의 나라에서 빌린 武器로 했다. 그 後에도 한동안 굶주린 배 움켜잡고 나무껍질이나 벗겨 먹어야 했던 民族이다.

    이런 大韓民國과 獨逸은 그 出發點부터가 다르다. 勿論 이제 韓國과 獨逸은 많은 領域에서 對等하다. 한 級 아래로 내려보던 獨逸이 이제 내놓고 韓國을 시샘한다. 그럼에도 ‘토끼와 거북이 달리기’ 水準의 게임인데 누가 敢히 두 나라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歷史上 大韓民國 같은 境遇는 없다. 이렇게 짧은 期間에 우뚝 선 나라는 없다. 充分히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건 거기까지다. 빨리 興한 나라일수록 빨리 亡한다. 正말이다. 世界史 冊의 年譜만 살펴봐도 이는 分明하다.

    勤勉誠實韓 사람이 불쌍하다

    왜 그럴까. 한 時代를 발전시킨 動力은 그 다음 時代 發展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프랑크푸르트學派는 ‘歷史의 辨證法’이라고 했다. 近代性이 歷史的 發展을 可能케 했으나, 새로운 時代精神에 미치지 못한 유럽의 啓蒙主義는 結局 나치즘이라는 野蠻의 形態로 沒落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20世紀 後半, 歷史上 類例없는 大韓民國의 發展을 可能케 한 動力은 다음 時代의 발목을 잡게 되어 있다. 産業社會의 壓縮成長을 可能케 한 勤勉, 誠實이라는 價値가 새로운 時代로의 變化를 가로막는다는 이야기다. 勤勉, 성실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참고 忍耐하는 勤勉, 誠實은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다. 참고 忍耐하는 方式으로는 아무도 創造的이 될 수 없다.

    心理學的으로 재미와 創意性은 同義語다. 韓國社會가 創意的이지 못한 理由는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政治 問題가 아니다. 모여 앉으면 모두 政治 이야기뿐이다. 그 內容도 더 나은 社會의 信念과는 全혀 無關하다. 그저 政治人들에 對한 辱뿐이다. 우리는 보다 더 重要한 事實을 잊고 있다. 그 寒心한 政治人들을 모두 우리가 뽑았다는 事實이다. 이 過度한 政治的 關心의 理由는 아주 單純하다. 내 日常의 삶이 재미없어서다. 都大體 무슨 재미로 사는지 아무도 自身 있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韓國人에게 政治 이야기는 아주 重要한 餘暇 消費行動이 된다.

    幸福하면 罪意識을 느끼고, 재미있으면 不安해지는 各 個人이 韓國社會의 根本的인 問題다. 休日 暫時 낮잠만 자고 일어나도 뭔가 찝찝하다. ‘이렇게 쉬어도 되는 건가’ 싶은 것이다. 家族에 對한 責任感에 아이들과 함께 나선 놀이터에서도 손으로는 연신 携帶電話를 만지작거린다. 인터넷도 接續되는 新型 携帶電話로 業務 關聯 記事檢索까지 한다. 아, 이것도 正말 아니다.

    21世紀 가장 불쌍한 사람은 勤勉誠實하기만 한 사람이다. 왜? 勤勉誠實해서 되는 일들은 이제 機械가 다 代身해주기 때문이다. 企業에서 構造調整할 때, 가장 먼저 整理되는 部署는 勤勉誠實하기만 한 部署다. 그런 種類의 일들은 이제 아웃소싱으로 解決하는 便이 훨씬 經濟的이다. 우리가 1960, 70年代에 中東으로 달러를 벌기 위해 나갔던 것처럼, 우리보다 훨씬 勤勉誠實韓 外國人 勞動者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企業의 CEO들은 職員들에게 如前히 勤勉誠實하라고 한다. 高速成長의 産業化 時代에 成功을 經驗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忍耐가 쓰면 열매도 쓰다

    아침형 인간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잘 놀아야 創造的인 人間이 된다는 主張이 說得力을 얻고 있다.

    21世紀를 20世紀的으로 經營하는 韓國式 ‘언밸런스’의 壓卷은 ‘아침型 人間’이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면 成功한다는 이야기에 이 땅의 사내들은 興奮해 다시 허리띠를 부여잡는다. ‘그래. 우리는 새벽鐘이 울리면 너도 나도 일어났어. 맞아. 그래야만 해.’ 이제까지 참고 忍耐하는 삶을 살아온 사내들은 오래된 ‘새벽의 追憶’을 되살린다. 成功은 하고 싶은데, 아는 方式이라고는 勤勉誠實韓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方式이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方式으로는 絶對 成功하지 못한다. 그 方式이 옳다면 이미 成功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아침型 人間’이라는, 새마을運動 或은 千里馬運動의 再臨을 主張하는 어설픈 日本語 飜譯冊이 60萬部가 팔려나가는 동안, ‘노는 만큼 成功한다’는 내 力作은 고작 2萬部 팔렸다.

    사는 게 재미있으면, 일하는 게 재미있으면 勤勉誠實하지 말라고 해도 勤勉誠實해진다. 順序를 바꾸라는 이야기다. ‘忍耐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忍耐가 쓰면, 열매도 쓰다. 都大體 열매의 단맛을 봤어야 그 단맛을 즐길 것 아닌가. 21世紀엔, 只今 幸福한 사람이 나중에도 幸福하다. 只今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이 나중에도 재미있게 살 수 있다. 21世紀의 核心價値는 ‘재미’다. 勞動基盤社會의 核心原理가 勤勉, 誠實이라면 知識基盤社會를 構成하는 核心原理는 재미다. 創意的 知識은 재미있을 때만 생겨난다.

    요즘 나는 ‘創造經營’에 對한 企業의 講演要請으로 正말 精神없이 살아가고 있다. 足히 6個月 講演 日程은 앞서 채워지는 것 같다. 좀 멀다 싶은 곳은 헬기까지 타고 간다. 創意的이 되려면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잘 놀아야 한다고 講義하면서 정작 나 自身은 놀 時間이 全혀 없는 地境이 됐다. 아, 이 또한 正말 아니다.

    이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이 連載를 始作한다. 내 생각을 더 많은 사람과 共有하는 가장 效果的인 方法은 글을 쓰는 일이다. ‘신동아’는 이런 問題를 共有하기에 아주 훌륭한 媒體다. 더 重要한 것은 글쓰기가 내겐 매우 幸福한 놀이라는 事實이다. 나는 原稿를 쓰고 나면 數十番도 더 읽는다. 그리고 每番 스스로 感動한다. ‘아, 正말 이 글을 내가 썼단 말인가’ 하면서. 글의 客觀的 評價와는 아무 相關없다. 그저 이렇게 스스로 즐거울 따름이다. 삶이 괴로울 땐, 根據 없이 뻔뻔한 나르시시즘이 우릴 救援하기도 한다.

    連載할 內容은 創造經營의 文化心理學的 土臺에 關한 것이다. 이를 나는 ‘再美學(Funology)’이라고 이름 붙인다. 재미의 文化心理學的 分析은 네 가지 基本 槪念으로 構成된다. 이야기(storytelling), 觀點(perspective), 情緖(affect), 意識(ritual).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文化心理學的 메커니즘이다. 줄여서 재미의 ‘SPAR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文化心理學的 槪念들이 創造的 思考와 어떻게 關聯되는지를 可能한 限 쉽게 敍述하도록 애써보겠다. 나는 스스로는 理解하고 썼는가 싶은, 正말 難解하기 그지없는 글을 쓰는 敎授들을 아주 輕蔑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침형 인간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1989年 11月 東유럽 沒落의 分水嶺이 된 베를린 障壁의 崩壞를 祝賀하기 위해 모인 群衆.

    20世紀 내내 持續되던, 그 殘忍하던 이데올로기 鬪爭이 끝났음을 알린 獨逸 統一이라는 엄청난 事件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하고 싶다. 베를린 障壁이 무너지던 1989年 11月9日 밤, 서베를린으로 넘어온 東獨人들이 한결같이 줄지어 만나려 한 韓國人이 한 名 있었다. 이에 對해 韓國의 國精院도 全혀 아는 바 없고, 統一部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事實이다.

    베를린 障壁이 무너지자 東獨 住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베를린 슈판다우 外郭地域으로 몰려갔다. 그곳에는 그해 여름 東獨을 脫出한 그들의 家族들이 모여 살던 難民收容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難民收容所의 鐵門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저녁 7時 以後에는 夜間警備員의 許可를 받아야만 出入할 수 있었다. 그들은 難民收容所 밖으로 길게 줄을 섰다. 그러나 矮小한 體格의 東洋人으로 보이는 夜間警備員은 上部의 指示가 없기 때문에 出入을 許容할 수 없다고 頑剛하게 버텼다. 그 夜間警備員이 앞서 이야기한 바로 그 韓國人이다. 눈치 빠른 이는 或是나 했을 것이다. 그 警備員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아침형 인간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1989年 9月 헝가리에서 西獨으로 넘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東獨人들.

    當時 서베를린의 韓國 留學生들에게 가장 人氣 있던 아르바이트는 夜間警備員이었다. 週末마다 工場이나 官公署의 警備室에 앉아 工夫하고 오면 한 달値 生活費는 가뿐히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그 손쉬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 엄청난 歷史的 事件을 겪은 것이다. 無電機로 아무리 本部事務室에 指示를 要請해도 連絡이 되질 않았다. 難民收容所의 鐵門을 뒤로하고 버티는 내 앞으로 東獨의 트라비 自動車는 갈수록 길게 줄을 섰다. 2氣筒 엔진을 단 트라비 特有의 매캐한 煤煙을 참지 못할 地境이 됐다.

    갑자기 젊은 녀석 하나가 내 앞으로 왔다.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 보였다. 녀석은 느닷없이 拳銃을 꺼냈다. 허름해 보이는 東洋人이 自身들의 歷史的 家族相逢을 막고 서 있는 것을 도무지 못 참겠던 模樣이었다. 銃부리가 옆구리에 닿는 느낌은 正말 稀罕했다. 마치 面刀칼이 두꺼운 옷을 뚫고 들어오는 氣分이었다. 등에 식은땀이 죽 흘렀다.

    그 瞬間 나는 ‘民族中興의 歷史的 使命’을 떠올렸다. 暗記敎育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曺國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야 할 내가 地球 反對便에서 고작 夜間警備員 하다 銃 맞아 죽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녀석에게 鐵門의 열쇠뭉치를 던져줬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냅다 뛰었다. 어디에선가 본 記憶은 있어, 갈之字로 왔다갔다하며 뛰었다. 拳銃으로 사람을 맞히기는 正말 어려운 일인 것이다. 軍隊 時節, 우리 大隊長은 20m 앞의 과녁도 잘 못 맞혔다. 그 이튿날 나는 바로 해고당했다.

    ‘價値는 勞動에서만 나온다’

    獨逸 統一은 偶然히 다가왔다. 1989年 여름, 고르바초프의 改革路線에 따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쪽 國境을 開放한다. 東歐圈 國家로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問題는 아주 엉뚱한 方向으로 흘렀다. 헝가리로 여름休暇를 떠난 東獨 住民들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開放된 國境을 통해 아예 東獨을 脫出하려 한 것이다. 複雜한 外交的 協商過程을 통해 헝가리는 東獨 住民들의 脫出을 許可한다. 그때부터 東獨人의 脫出은 걷잡을 수 없게 돼버렸다.

    東獨 共産黨은 東獨 住民을 달래기 위해 旅行自由化 法案을 통과시킨다. 元來 이 法에 關한 內容은 11月10日 發表될 豫定이었다. 그러나 9日 저녁 東獨 共産黨을 代表해 言論 브리핑을 主管하던 귄터 샤보브스키라는 政治局員이 아주 엉뚱한 失手를 저지른다. 記者會見場에서 法案 通過에 關한 메모를 傳達받은 샤보브스키는 아무 생각없이 바로 旅行自由化를 宣言해버린다. 興奮한 記者들이 質問했다. 언제부터인가? 샤보브스키는 아주 자랑스럽게 對答했다. “只今부터다. 누구나 申請하면 西獨을 비롯한 西유럽을 마음대로 旅行할 수 있다.”

    라디오와 TV를 통해 이 消息을 들은 동베를린 住民들은 떼지어 베를린 障壁으로 몰려왔다. 베를린 障壁을 지키던 國境警備隊員들은 銃부리를 동베를린 住民들에게 겨누고 警備大將의 눈치만 봤다. 電話機를 들고 어쩔 줄 모르던 警備大將은 部下들에게 撤收를 命令했다. 동베를린 住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끼와 망치로 數十年間 버텨온 베를린 障壁을 부숴버렸다.

    歷史는 늘 이런 式이다. 샤보브스키의 엉뚱한 브리핑이 없었더라면 베를린 障壁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實際로 東獨地域에서 東獨 共産黨과 맞서 民主化 鬪爭을 主導하던 그룹은 더 人間的인 社會主義를 願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資本主義는 絶對 代案이 될 수 없었다. 實際로 獨逸 統一이 一方的인 資本主義로의 統合으로 進行되자 그들은 거세게 抵抗한다. 그러나 事態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方向으로 흘러가버린다. 이렇게 歷史는 必然的 因果關係보다는 아주 荒唐하고 偶然한 方式으로 變化한다. 韓半島도 分明 例外는 아니다.

    “知識人은 革命의 主體가 될 수 없다.” 只今은 南大門에서 眼鏡店을 하는 史學科 先輩는 確信에 차 이야기했다. 價値는 勞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知識勞動者는 價値를 生産하지 않는다. 價値가 資本에 依해 생겨나는 것이 아님에도 資本家가 主人처럼 行世하는 資本主義는 解體돼야 한다. 그 社會變革의 主體는 勿論 勞動者다. 그럼 大學生인 우리는 歷史變革의 主體가 될 수 없는 것인가. 熱情的인 그 先輩는 없다고 했다.

    1980年代 初, 안암동 병옥이네 自炊房 앞 좁은 골목의 차가운 겨울안개는 내 가슴만큼이나 무거웠다. 社會學科를 겨우 卒業하고 最近까지 經實聯 事務總長을 했던, 머리가 유난히 큰 데다 고수머리人 병옥이는 조심스럽게 이불 속에 숨겨둔 文件을 내왔다. 韓國社會 階級構造 分析圖였다. 우리는 高麗大 經營觀 뒷門의 複寫집에서 그 文件을 複寫해 나눠가졌다. 主人아저씨는 짐짓 모른 척하며 가게 한구석의 작은 房으로 들어갔다. 골목을 돌아나오며 나는 중얼거렸다. 價値는 오직 勞動에서만 나온다.

    새마을運動은 마르크스的

    아침형 인간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1984年 慶北 김천시 아포읍에서 住民들이 새마을 旗발을 꽂아두고 灌漑作業을 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옳았다. 産業社會에서 價値란 投與된 勞動時間에 比例해 나온다. 勤勉과 誠實만이 價値를 創出한다는 이야기다. 社會가 複雜해지면서 價値는 分化된다. 物件의 使用價値와 그 物件의 價値를 客觀的으로 規定하는 交換價値, 卽 貨幣로 나눠지는 것이다. 問題는 交換價値와 使用價値가 더 以上 一致하지 않는다는 點이다. 價値의 資本主義的 歪曲이다. 이는 곧바로 商品生産의 全 過程에서 勞動者가 疏外되는 人間疏外現象으로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價値가 마치 資本에 依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錯視現象이 일어난다는 게 마르크스 價値論의 核心內容이다.

    勞動의 基本哲學만 본다면 마르크스 理論은 産業社會를 說明하는 가장 훌륭한 理論이다. 大量生産 大量消費의 産業社會가 發展할 수 있는 動力은 쉬지 않고 일하는 勞動뿐이다. 資本 蓄積을 위한 勤勉, 성실한 勞動의 價値가 마르크스의 價値論에서만큼 確實하고 분명하게 說明된 境遇는 없다. 막스 베버가 說明하는 프로테스탄트 精神은 마르크스의 價値論에 비하면 한 級 아래다. 天國의 報償을 믿고 現實에서 참고 忍耐하며, 現實의 ‘職業(Beruf)’을 하늘의 ‘召命(Berufung)’으로 받아들이는 프로테스탄트的 理念이 剩餘價値의 蓄積을 可能케 했다는 베버의 主張은 아주 西歐 中心的이다. 東洋의 資本主義 發展이 늦었던 理由는 프로테스탄트 精神의 不在로 說明되기 때문이다.

    社會變革 이데올로기로서 마르크스의 後期 理論을 除하고 살펴보면, 朴正熙 時代의 새마을運動은 매우 마르크스的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勞動하는 時間만큼 價値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剩餘價値論, 朴正熙 時代의 새마을運動, 北韓의 새벽별보기운동, 千里馬運動 等은 産業社會의 同一한 哲學에 基盤을 둔 雙둥이들이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左派政權’을 終熄한다며 나타난 이명박 政權의 ‘아침型 人間’도 文化心理學的 觀點에서 보면 深刻한 左派政權이 되어버린다.

    20世紀 初, 러시아를 무너뜨리며 호기롭게 始作한 社會主義는 1989年 11月9日 베를린 障壁과 함께 崩壞되기 始作해 21世紀가 始作되기 直前, 痕跡도 없이 地球上에서 사라진다. 20世紀 初盤에 나타난 마르크스 理論이 21世紀가 始作하기 바로 直前에 사라진 것은 全혀 偶然이 아니다. 21世紀에는 勞動時間이 더 以上 價値를 創出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剩餘價値論은 勞動時間이 아닌, 知識이 價値를 創出하는 새로운 時代를 說明하기에는 턱없이 浪漫的인 理論이었다. 베를린 障壁이 무너진 背後에는 아주 巨大한 時代精神의 登場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차이트가이스트(Zeitgeist)’, 卽 時代精神이란 表現은 自由, 民主와 같은 嚴肅한 單語에만 該當되는 것이 아니다. 個人 삶의 具體的 內容을 결정짓는 또 다른 價値들이 21世紀에는 時代精神이 된다. 재미와 幸福은 21世紀의 ‘차이트가이스트’다. 獨逸 統一 事件은 이 時代精神의 變化를 아주 斷乎하고도 분명하게 說明해준다.

    獨逸 統一은 言論擔當 政治局員의 ‘오버’에서 비롯된 偶然的이고도 枝葉的인 事件이었다. 그러나 더 큰 틀에서 본다면 勤勉, 誠實이라는 20世紀的 價値의 沒落을 의미한다. 그리고 ‘재미’와 ‘幸福’이라는 21世紀奇跡 價値의 登場을 의미한다. 文化心理學的 視角에서 본다면 社會主義가 亡한 理由는 單純하다. 재미가 없어서다. 더 재미있는 社會를 可能케 하는 政治시스템에 對한 憧憬이 東獨의 沒落을 가져왔다. 다른 社會主義 國家들과는 달리, 東獨은 絶對 가난한 나라가 아니었다. 1989年 東獨의 1人當 國民所得은 1萬달러 以上이었다. 當時 韓國의 두 倍를 넘는 水準이었다.

    車와 섹스에 무릎 꿇은 社會主義

    東獨 사람들이 正말 願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統一 後 그들이 第一 먼저 한 일들을 살펴보면 된다. 障壁을 뚫고 西獨으로 넘어온 다음날부터, 西獨 市內의 섹스숍은 東獨 사람들로 人山人海를 이뤘다. 붉어진 얼굴로 섹스숍을 나서는 그들에게 記者들이 느낌을 묻자, 그들은 그랬다. 亡해야 하는 것은 資本主義인데, 오히려 社會主義가 亡했다고. 人間의 섹슈얼리티를 但只 勞動力 再生産의 手段으로만 생각했던 東獨의 現實 社會主義는 人間 欲求의 가장 重要한 部分을 看過했다. 왜 人間에게 發情期가 없는지를. 人間은 每日이 發情期이고, 섹스는 幸福과 재미를 保障해주는 가장 즐거운 놀이라는 事實을 看破한 資本主義는 아주 巧妙하게 이를 商品化한다.

    아침형 인간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1989年 東獨 沒落 直後 수많은 東獨人이 섹스숍으로 몰려갔다. 寫眞은 2006年 獨逸월드컵 때 ‘월드컵은 女子親舊를 만드는 機會’라는 文句가 내걸린 쾰른의 한 工廠業所.

    障壁 崩壞 1年 後 東獨과 西獨은 法과 制度的으로 하나의 나라가 된다. 以後 東獨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西獨 自動車를 購入한다. 오직 車를 사기 위해 障壁을 무너뜨린 것처럼 보였다. 東獨 사람들은 모이면 새로 산 車 이야기로 熱을 올렸다. 한때 東獨에도 世界 最高 水準의 自動車가 있었다. 트라반트, 愛稱으로 트라비라고 불리는 自動車다. 1957年에 開發된 이 自動車는 當時로서는 劃期的인 技術로 開發됐다. 2氣筒이지만 時速 120km를 달렸다. 效果的인 燃費는 勿論이고, 强化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車體 亦是 世界的인 話題거리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東獨 共産黨은 더 以上 빠른 車는 資本主義의 奢侈라고 했다. 社會主義的 人間에게 더 예쁜 次는 必要없다고 했다. 베를린 障壁이 무너질 때까지, 트라비의 디자인은 한 番도 바뀌지 않았다. 더 빠른 速度를 爲한 技術開發도 없었다. 그 사이, 西獨의 메르세데스 벤츠, 베엠베, 폴크스바겐은 每年 새로운 車를 만들어낸다. 그 車들은 時速 200, 300km까지 달린다. 서베를린과 西獨 本土를 잇는, 東獨 한가운데를 貫通하는 아우토반에서 바람처럼 달리는 西獨의 車들을 트라비를 탄 東獨 住民들은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따름이었다. 統一이 되자, 그들은 트라비를 農場 한구석에 처박아버린다. 그리고 西獨의 번쩍이는 車를 사서 西유럽으로 限없이 달려 나아갔다.

    나는 只今도 時速 200km 以上 달리는 自動車를 사는 짓은 正말 無意味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速度 無制限의 아우토반에서 時速 200km 以上으로 달려본 사람은 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 재미를, 그 感動을. 그래서 나는 只今도 언제든 그 無意味한 짓을 할 準備가 돼 있다. 社會主義가 沒落한 心理學的 理由는 이렇게 單純하다. 재미와 幸福이라는 21世紀의 時代精神에 抵抗했기 때문이다.

    섹스숍과 더 빠른 自動車를 만들어내지 못해 社會主義가 亡했다면 ‘나름 知識人’들은 입을 삐죽거린다. 그렇지 않다. 人間의 經驗은 아주 具體的인 感覺의 經驗에서 始作된다. 感覺의 變化는 意識의 變化로 이어진다. 人間의 意識은 具體的 經驗에서 分離되지 않기 때문이다. 社會主義의 沒落은 具體的인 感覺으로 느껴지는 재미와 幸福을 生産하는 데 失敗했기 때문이다. 資本主義는 사람의 입맛까지 바꿔버린다. 以北 出身 어르신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오리지널’ 平壤冷麵은 이제 서울 邊두리 冷麵집 맛보다 못하다.

    재미와 幸福의 商品化에 한番 成功한 資本主義는 그 끝을 모르고 人間의 感覺을 歪曲下 祈禱 한다. 그러나 어쩌랴, 社會主義는 亡했고 資本主義는 如前히 멀쩡하다. 當分間 더 나은 代案도 없어 보인다. 나는 韓國社會의 未來에 關해 어설픈 이데올로기的 代案을 主張할 생각은 全혀 없다. 왜 韓國 사람들이 이토록 憤怒와 敵愾心에 가득 차, 재미라고는 하나 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對한 心理學的 說明이 內 一次的 關心이다. 더 나은 社會에 對한 展望은, 왜 우리는 이토록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具體的 說明이 이뤄진 後에나 可能한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 前까지, 지나가다가 자빠지기만 해도 사람들은 그랬다. “다 盧武鉉 때문이야.” 그렇다 다 盧武鉉 때문이다. 노무현 政府는 재미라는 時代精神의 産物이었지만, 그 재미를 아주 許接한 社會葛藤論으로 解體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도 이제야 말할 수 있다.

    21世紀 初, 韓國社會에서 가장 굵직했던 社會的 事件을 펼쳐보자. 바로 나온다. 2002年 월드컵과 붉은 惡魔. 노무현 政府는 바로 이 2002年 월드컵이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다. 2002年 월드컵의 붉은 惡魔, 그리고 盧武鉉 大統領 彈劾 當時 登場한 촛불示威의 心理學的 共通點이 있다. 재미다.

    檀君 以來 最初, 最高의 재미

    2002年 월드컵은 韓國 사람들이 經驗한 檀君 以來 最初, 最高의 재미였다. 붉은 옷을 입고 밤새 ‘大韓民國’을 외치는 붉은 惡魔들을 보고, 참새 가슴의 獨逸 留學派 學者들은 나치즘의 韓國的 復活, 國粹主義 妄靈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오버’다. 그들이 외치던 ‘大韓民國’은 모든 蹴球對抗戰에는 어쩔 수 없이 登場할 수밖에 없는 意味 없는 應援用語일 따름이다. 國家對抗戰에서 ‘大韓民國’을 외치지 않으면, 都大體 어떤 單語를 외쳐야 하나.

    當時의 기쁨과 즐거움을 表現할 수 있는 單語라면 무슨 單語라도 상관없었다. 實際로 아들이 둘이나 拘束되고, 任期 末 레임덕에 시달리던 김대중 大統領이 畵面에 나오자 붉은 惡魔들은 ‘金大中’을 歡呼했다. 김대중 大統領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 재미를 媒介할 수 있는 口號라면 ‘짜장면(자장면)’이라도 외칠 수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바라봐야만 하는 太極旗도 젊은 處子의 치마가 되고, ‘난닝구(러닝셔츠)’가 되고, 머리띠가 됐다.

    아침형 인간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2002年 6月 서울 光化門 거리에서 월드컵競技를 즐기고 있는 붉은 惡魔들.

    그들이 發見한 것은 삶의 재미였다. 이렇게 내놓고 즐거워해도 된다는 느낌은 正말 처음이었다. 삶은 그렇게 즐겁자고 사는 것이다. 이제까지 無意識 깊은 곳에서 억눌려온 삶의 기쁨과 재미가 눈에 보이고, 皮膚로 느껴지는 現象으로 드러난 것이다. 壓縮成長의 近代化過程에서 省略돼버린 삶의 기쁨과 재미를 近代化世代의 아들, 孫子들이 이제야 다시 發見한 것이다. 20世紀 後半, 民主化의 過程에서 ‘프티 부르주아’的 屬性으로 낙인찍혔던 펄떡거리는 삶의 具體性을 386世代의 後輩들이 제대로 具現해낸 것이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어렵게 發見한, 皮膚 끝으로 느껴지는 재미는 正말 갖가지 즐거운 삶의 方式으로 이어져야 했다. 이를 或者는 文化的 多樣性이라 한다. 社會 곳곳에서 다양한 方式으로 經驗되는 재미가 文化的 具體性으로 連結됐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市廳 앞 廣場에서 經驗한 集團的 재미의 强烈함은 너무도 컸다. 그 追憶은 正말 强烈했다. 붉은 惡魔는 이제 떼를 지어야만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자, 或은 小小하게 모여 나누는 재미는 더 以上 재미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리를 지어 만들어낼 수 있는 재미는 別로 없다. 率直히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월드컵 4强도 서울에서 했으니 可能했던 것이다. 아닌가? 그 後로 붉은 惡魔들은 國家對抗 蹴球試合만 있으면 떼로 모여, ‘大韓民國’을 외쳐댔지만, 그때 그 氣分은 아니었다.

    正말 다 盧武鉉 때문이야!

    虛脫해 하던 붉은 惡魔들에게 또 다른 재미가 나타났다. 노사모다. 人的 構成을 살펴보면, 붉은 惡魔와 노사모는 相當部分 겹친다. 게다가 노사모는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새로운 장르까지 끌어들인다. 붉은 惡魔의 ‘大韓民國’은 ‘盧武鉉’으로 바뀐다. 기타 치며 눈물 흘리고, 市場 商人들의 막말도 거침없이 使用하는 노무현은 그들이 願하는 재미의 코드가 되기에 充分했다.

    드라마틱한 演出도 있었다. 彈劾이다. TV에 連日 비치던 國會議員들의 悽絶한 몸싸움, 그리고 書類더미가 휘날리는 議事堂 冊床 위로 올라가 눈물 흘리며 悲壯하게 愛國歌를 부르던 國會議員들은 월드컵 4强 蹴球選手들을 떠올리기에 充分했다. 월드컵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하나둘씩 市廳앞 廣場으로 모이기 始作한다. 붉은 티셔츠 代身 촛불을 들었지만 그 붉은色은 같았다. 그러니까 히딩크는 노무현으로, 월드컵 代表選手들은 與黨 國會議員들로 代替된 것일 뿐, 붉은 惡魔와 노사모의 象徵과 플롯은 같다. 偶然이 아니다. 集團的 재미라는 魔法 때문이다. 재미라는 時代精神의 韓國的 具現은 이런 式으로 어긋나기 始作했다.

    노무현 政府는 自身들을 執權할 수 있게 한 이 ‘재미’라는 價値의 社會, 文化的 具體化에 힘썼어야 했다. 個人의 삶에서 具體的으로 經驗되는 재미의 具現이 具體的 政策이 됐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토록 어렵게 發見한 재미라는 時代精神을 어설픈 社會構成體 論爭이나 階級鬪爭論 程度로 退化시켰다. 여기에 재미를 追求하면 罪意識을 느끼도록 意識化된 386世代의 社會變革을 위한 過度한 自己犧牲이 사람들을 더욱 부담스럽게 했다. 그 結果, 이제는 ‘아침型 人間’을 노래하는 새로운 새마을運動이 始作됐다. 그래서 다 盧武鉉 때문인 것이다.

    獨逸 統一과 社會主義 沒落이라는 글로벌리티(globality)와 붉은 惡魔, 노사모라는 로컬리티는 銅錢의 兩面이다. 재미없으면 亡한다는 警句가 새겨진 銅錢이다. 아주 簡單하게 생각해보자. 先進國의 條件이 뭔가. 좋은 物件을 비싸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나라다. 좋은 物件을 만들어내려면 좋은 게 뭔지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自動車가 獨逸車에 相對가 안 되는 理由는 單純하다. 獨逸車에는 우리茶에서는 느낄 수 없는 ‘좋은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맛을 봐야 맛을 낸다

    名品을 만져보면 뭔가 다르다. 名品을 團地 猝富들의 虛榮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限 先進國이 되기 어렵다. 내게 몽블랑 萬年筆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物件이다. 싸구려 볼펜으로 글을 쓰는 것과 몽블랑 萬年筆로 글을 쓰는 것은 그 느낌부터 다르다. ‘글 쓰는 것이야 다 똑같지, 뭐’ 하는 이에게 나는 속으로 그런다. ‘먹는 거야 위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왜 맛있는 것 먹으려 하는가.’ 내 이야기를 ‘있는 者들의 배부른 이야기’로 우습게 만드는 시니컬한 이들이 꼭 있다. 主로 머리 나쁜 親舊들이 그런다. 모든 問題를 社會構造的인 問題로 還元시키고, 그 責任을 他人에게 轉嫁하는 이들이다.

    아침형 인간들이여 잠 좀 자라,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김정운

    1962年 서울 出生

    고려대 心理學科 卒業, 獨逸 베를린대 博士(心理學)

    베를린대 心理學科 專任講師

    現 명지대 餘暇經營學科 敎授

    著書 : ‘휴테크 成功學’ ‘노는 만큼 成功한다’ ‘日本 熱狂’ 等


    뭔가 다른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先進國이다. 요즘 企業에서 ‘디자인 經營’을 많이 이야기한다. 이탈리아의 디자인이 다른 理由는 그 뭔가 다른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各 個人이 갖고 있어야 한다. 社會構造는 느낌이 없는 抽象的 槪念일 따름이다. 各 個人이 그 좋은 것을 느끼고, 具體的인 商品을 만들어내는 데 反映할 수 있어야 先進國이 된다. 先進國이 돼야 남을 도와주는 그 좋은 느낌도 누릴 수 있다. 좋은 느낌을 具體化할 수 있어야 한다. 그 能力은 삶이 재미있는 사람에게만 있다. 맛있는 것을 먹어본 사람만이 맛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勤勉, 誠實한 産業社會에서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 그러나 재미가 時代精神인 21世紀는 다르다.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正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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