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施行錯誤 거치며 航空 强國 浮上|新東亞

施行錯誤 거치며 航空 强國 浮上

日本의 航空産業

  • 凉燠 / 인텔엣지(週) 代表·naval@nate.com

    入力 2012-08-28 13: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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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2次 世界大戰 때 美 海軍旗를 恐怖로 몰아넣었던 ‘제로센’. 그 神話의 裏面엔 不足한 技術力으로 世界 最高에 덤벼든 無謀함이 숨어 있다. 模倣으로 始作한 日本의 航空産業은 誇張돼 알려진 側面이 있다. 그 虛點을 메우기 위해 戰後 日本은 尖端 技術 確保에 全力을 기울였다. 그러나 世界가 戰鬪機에 傍點을 찍고 있을 때 民航機 開發에 注力하고, 民航機로 무게重心을 옮겼을 때 戰鬪機 開發에 눈을 돌리는 判斷 錯誤를 함으로써 日本은 肥效率性을 露出했다.
    • 日本의 事例를 보면서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이고 避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시행착오 거치며 항공 강국 부상

    F-2 戰鬪機.

    日本은 1910年 12月 처음으로 動力飛行에 成功했다. 1903年 12月 7日 美國의 라이트 兄弟가 12秒間 動力飛行에 成功하고 나서 10年도 안 지난 때에 飛行機를 날린 것이다. 自國産 飛行機가 아니라 프랑스와 獨逸製 氣體로 飛行에 成功했다. 當時 日本의 機械工業은 西歐에 비해 크게 落後돼 있었기에 機體를 製造·生産하는 段階에는 못 미쳤다.

    模倣에서 創造로

    航空機 關聯 事業의 計劃을 세우고 實行하는 主體는 ‘臨時軍用氣球硏究會’였는데, 이 組織은 陸軍省, 海軍省, 문부성의 3性이 共同으로 設立한 것이었다. 初期 日本의 航空産業은 軍이 推進해 産業化가 더딘 側面이 있었다.

    그러나 1914年 第1次 世界大戰이 勃發하자 狀況은 바뀌었다. 世界大戰으로 機體와 엔진의 輸入이 어려워지자, 日本 自體的으로 模倣生産을 始作할 수밖에 없었다. 初期인 만큼 模倣生産한 엔진은 性能이 不安定하다는 等의 技術的 限界를 드러냈지만, 日本은 獨自的으로 航空機를 生産할 수 있는 貴重한 經驗을 蓄積했다. 航空機 開發의 實行 主體였던 臨時軍用氣球硏究會가 陸軍의 直屬團體로 바뀌자, 海軍은 1916年 陷穽本部에 海軍航空技術硏究委員會를 設置했다. 文部省도 航空學調査委員會를 設立함으로써 3性은 別途로 航空機 開發을 追求했다. 獨自 路線을 걸으면서 陸軍과 海軍은 對立 角을 세우기 始作했다.

    模倣生産을 本格化한 時期 民間에서 航空機를 生産하기 始作했다. 陸軍과 海軍이 海外에서 航空機를 輸入하면서 一部 所要를 民間企業에 맡기기로 한 것이 契機였다. 1919年 나카지마 飛行機, 1920年 미쓰비시의 고베 內燃機製作所가 設立되고, 이어 가와사키, 가와니시 等 後날 日本 航空機産業의 核心이 될 企業들이 誕生했다.



    그러나 新生 製作社들은 設計能力이 없었다. 軍이 氣體나 엔진 製造權을 海外企業에서 購入해주면, 海外企業이 보내준 技術者가 日本에 와서 指導生産을 하는 式이었다. 유럽은 第1次 世界大戰에 使用한 航空機의 在庫가 쌓여 航空市場이 飽和 狀態였기에 優秀한 西歐 技術者들이 日本 航空機産業에 投入되었다. 日本은 1922年 締結된 워싱턴 條約으로 英·美에 비해 主力艦 乾燥比率 面에서 不利해졌다. 日本 海軍은 戰力 劣勢를 航空力 强化로 克服하고자 했다. 陸軍은 海軍에 뒤질세라 1924年 陸軍航空本部를 設置했다. 陸·海軍이 同時에 航空力 强化에 나선 것이다.

    德分에 航空機 製作 國産化에 速度가 붙었다. 生産能力도 日就月將해 軍의 조병창을 凌駕하는 航空機 製作社들이 登場했다. 그로 인해 1930年 民間에서 開發한 航空機가 海軍의 練習機와 艦上戰鬪機로 採擇되었다.

    日帝의 帝國主義的 擴張政策은 航空機産業 發展에 크게 寄與했다. 1931年의 滿洲事變과 1932年의 上海事變을 겪은 日本軍 首腦部는 廣闊한 中國大陸에서 效率的인 作戰을 위해 더 많은 軍用機를 要求했다. 君의 要求에 맞는 最新銳機種을 開發·量産하라고 日本 航空産業界에 要求한 것이다.

    시행착오 거치며 항공 강국 부상

    日本 航空産業界는 國産 戰鬪機로 F-2를 開發 生産했으나 커다란 成果를 올리지 못했다. 2011年 3月 東日本 大地震과 쓰나미로 破壞된 F-2 戰鬪機들의 모습이다.

    1935年 미쓰비시가 A5M 96式 艦上戰鬪機를 開發하자 日本의 自信感은 더욱 커졌다. ‘레이센(零戰)’ 艦上戰鬪機(一名 제로 戰鬪機·제로센)의 開發院型이 된 96式 戰鬪機의 優秀한 性能을 確認한 日本 海軍은 더 以上 海外機種을 購入하지 않기로 했다. 最新銳 航空機를 獨自的으로 生産하는 段階로 進入한 것이다.

    1937年 勃發한 中日戰爭은 日本 航空機産業에 또 한 番 跳躍의 機會를 주었다. 擴戰으로 戰鬪機와 爆擊機 騷擾가 急增해, 1936年 한 해 동안 民間企業은 557代의 軍用機를 生産했다. 이듬해에는 두 倍인 1144臺를 生産했다. 아시아 占領 野慾이 具體化되면서 軍用機 所要는 더 增加했다. 1938年 陸軍은 2262臺를 要求했고, 1939年에는 3064臺를 要求했다.

    恐怖의 제로센 虛像 드러나

    中日戰爭이 始作됐을 때 日本軍은 月 航空機 100臺 生産을 要求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量産 要求에 應할 수 있을 만큼 日本 企業들의 技術과 資本은 成熟하지 못했다. 第2次 世界大戰을 전후해 航空機 性能이 急速히 發展함에 따라 高度의 技術이 要求되었다. 그러나 日本은 最新 航空機에 裝着되는 高度의 技術을 요하는 精密部品을 大量 生産할 수 없었다. 日本의 技術에는 限界가 있었다.

    第2次 世界大戰 동안 많은 民間 航空機 製作社가 다양한 航空機를 만들어 日本軍에 納品했다. 미쓰비시는 無慮 1萬500餘 臺의 제로戰鬪機를 納品했고, 나카지마(現 후지重工業)는 2萬6000餘 臺의 航空機를 納品했다. 戰爭이 最高潮에 達했을 때 日本에서는 60餘萬 名의 勞動者가 年間 2萬5000餘 臺의 航空機, 4萬餘 個의 엔진을 生産했다. 1944年頃에는 12個의 航空機 製作社와 7個의 엔진 製作社가 있었다.

    日本 海軍이 採用한 레이센, 卽 제로센은 뛰어난 機動性과 上昇速度, 긴 航速距離 等으로 뛰어난 戰果를 올렸다. 眞珠灣 奇襲으로 初戰에 勝機를 잡은 日本 海軍의 베테랑 操縱士들이 제로센에 搭乘해 美軍을 攻掠했다. 實戰 經驗은커녕 飛行經歷度 짧았던 美軍 操縱士들은 性能이 落後된 戰鬪機로 제로센을 막아섰다가 戰鬪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떨어졌다. 美軍은 ‘제로센 쇼크’에 빠졌다.

    美軍이 墜落한 제로센 機體를 獲得한 後 狀況은 바뀌었다. 分析 結果 제로센은 所聞만큼 優秀한 戰鬪機가 아니었다. 엔진 出力이 不足한데 强力한 機動性을 確保하려다 보니 掌匣을 除去해 氣體가 弱해져버렸다. 美國은 제로센이 공중분해될 것이 두려워 急降下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機關砲 몇 발만 맞아도 散散조각 날 만큼 軟弱하다는 것도 看破했다. 美軍은 ‘태치위브(Thach Weave·美 海軍 操縱士인 태値가 開發한 空中戰 戰法)’ 戰法을 活用해 제로센을 次例로 擊破해나갔다.

    美軍 戰鬪機들은 强力한 掌匣과 優秀한 戰術로 優位를 占해나갔다. 日本은 그에 對應해야 했으나 能力이 달렸다. 제로센의 假面은 벗겨졌다. 日本은 優秀한 技術力으로 제로센을 設計·製造했다고 자랑했으나, 제로센은 英國에서 開發된 글로스터 F.5/34 戰鬪機의 複製品이었다. 日本의 技術力은 模倣設計와 生産까지는 可能했으나 엔진 出力을 强化하거나 掌匣의 追加裝着 같은 큰 改造는 全혀 하지 못했다. 實戰에서 要求되는 事項을 제로센에 反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日本은 戰爭에서 勝利하기 위해 꼭 必要한 航空機의 大量生産에도 失敗했다. 開戰 初期 日本은 國力 差異를 考慮해 航空機 生産目標를 美國의 3分의 1 程度로 策定했다. 1944年 日本은 一時的으로 이 目標를 達成했다. 그러나 問題는 生産量이 아니었다.

    航空機 生産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均一한 品質 維持다. 均一한 品質이 維持되어야 航空機는 實際稼動率을 維持한다. 日本 航空機들은 戰爭이 長期化되자 稼動率을 維持하지 못했다. 部品의 精密性이 떨어진 것이 큰 原因이었다. 제로센 戰鬪機에 使用된 볼베어링의 精密度가 오늘날 파친코에 쓰이는 구슬보다 떨어진다고 하니, 斟酌이 갈 것이다.

    熟鍊工들이 最終工程을 擔當했던 戰爭 初盤 陸·海軍 航空機의 稼動率은 80%에 達했다. 戰爭이 繼續돼 熟鍊工들이 大擧 徵集되자 그 자리를 主婦와 學生들이 代身하게 되었다. 熟鍊工이 사라졌으니 1944年 軍 航空機의 稼動率은 50%臺로 떨어졌다. 1945年에는 航空油 不足까지 더해져 20%臺로 곤두박질했다.

    勿論 美國에 對抗할 程度로 成長했던 日本의 航空産業을 無視할 수는 없다. 日本은 第2次 世界大戰 中 제트機까지 生産했다. 나카지마가 ‘黃菊 2號 倂記’라는 名稱으로 新武器를 開發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트戰鬪機人 ‘基카(橘花)’였다.

    日本 海軍은 美軍의 戰略爆擊機에 對應할 決戰 兵器가 必要했다. 日本 海軍은 護衛機의 도움 없이 爆擊機를 攻擊할 수 있는 單座式 雙發 제트邀擊機 開發을 要求했다. 이 邀擊機의 原形은 同盟國인 獨逸의 Me 262 제트機였다. 제트機의 生産에서 큰 問題가 된 것은 엔진이었다. Me 262는 BMW 003 軸流터보 엔진을 裝着했다.

    6·25戰爭 契機로 航空産業 復活

    日本은 獨逸로부터 設計圖와 함께 見本으로 使用할 엔진을 제공받기로 했다. 그러나 이를 運搬해오던 潛水艦이 擊沈되면서 設計圖를 받지 못해 BMW 003 엔진의 實物을 보며 複製해야 하는 處地가 됐다. 施行錯誤를 거듭한 끝에 1945年 여름 이시카와지마 하리마에서 BMW 003을 카피한 Ne-20 엔진 開發에 成功했다. 8月 7日에는 이 엔진을 裝着한 基카 試製機가 草島飛行을 했다. 그때 美國이 日本에 原爆을 投下했다.

    期카는 實戰에 投入되지 못했다. 終戰 뒤 敗戰國 日本은 航空産業이 禁止됐으므로 期카는 完成될 수 없었다. 그러나 期카는 量産했다면 오히려 더 큰 問題를 일으켰을 것이다. Ne-20 엔진의 出力이 너무 낮아 基카를 離陸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點에서 日本의 過去 航空産業은 誇大 包裝돼 알려진 것이 分明하다. 하지만 2003年에야 T-50 訓鍊機로 제트機 生産 時代를 연 우리보다 60年 앞서 제트機 時代를 열었다는 底力은 平價切下할 수 없다.

    日本을 占領한 美軍은 聯合軍最高司令部(GHQ)가 主體가 돼 軍政을 始作했다. 美國은 日本이 어떤 軍事武器度 生産할 수 없도록 措置했다. 生産禁止에 項目에 航空機가 包含돼 있었다. 世界가 프로펠러 推進 航空機에서 제트 航空機로 發展해가는 時期, 航空機 生産을 금지당했으니 日本의 航空機 産業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0年도 지나지 않아 美軍政 終了와 6·25戰爭 勃發로 日本 航空業界는 機會를 잡았다.

    1952年 最高司令部의 軍政이 끝나면서 日本은 主權을 回復했다. 最高司令部가 내린 航空機 生産禁止 政策도 終末을 맞게 될 터였다. 6·25戰爭에 參戰한 美國은 日本에서 航空機를 整備했다. 復活하기 始作한 日本 航空産業은 日本에 背馳되거나 6·25戰爭에 參加하는 美軍 航空機를 維持 補修하는 能力을 갖추는 데 焦點이 맞춰졌다. 그리고 航空機를 自體 生産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獨立한 日本은 美國과 協力해 航空産業 再建에 나섰다. 美國은 日本을 蘇聯과 中共의 威脅에 對處할 前進基地로 봤다. 美國은 技術과 軍需支援能力을 强化해 日本의 戰爭抑制力을 强化시켰다. 聯合 作戰能力을 向上시키기 위해 美軍과 同一한 郡守와 軍 裝備 體制를 갖추게 했다. 美軍 式으로 自衛隊 裝備를 標準化해 美 空軍의 補助戰力으로 養成하고자 한 것이다. 兩國의 共助는 1954年 美日 相互防衛條約으로 具體化되었다.

    이에 따라 美國 노스아메리카의 F-86 세이버 戰鬪機가 日本에서 처음으로 免許生産됐다. 日本 政府가 美國 政府와 諒解覺書(MOU)를 맺으면, 日本의 製作業體가 美國의 원 製作社로부터 技術指導를 받아 生産하는 形態였다. 第1次 世界大戰 以後의 模倣生産體制를 踏襲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點은 있었다. 前後 빠르게 發展한 工業基盤을 土臺로 日本은 先進國 水準의 品質을 갖춘 製品을 生産할 能力 培養을 目標로 했다. 日本의 通商産業省(現 經濟産業省)은 航空業界의 빅4(미쓰비스重工業, 가와사키重工業, 이시카와지마 하리마重工業, 후지重工業)를 重點 育成했다.

    失敗로 끝난 YS-11 生産

    美國은 日本에 經濟的인 도움도 주었다. 軍事援助事業의 一環으로 技術移轉과 함께 美國 航空機의 日本 內 生産 費用 一部를 支援했다. 1954年 日本은 航空自衛隊를 發足하자 戰鬪機를 導入해야 했다. F-86 戰鬪機의 臺當 價格은 1億5000萬 엔에 達했는데, 防衛廳에 割當된 航空機 購入豫算은 7億 엔에 不過했다. 美國은 美日 相互防衛條約에 따라 航空機 購買에 必要한 豫算을 相互防衛 援助事業 形式으로 支援했다. 이러한 援助는 1964年까지 繼續되었다.

    戰後 日本이 生産한 航空機들은 제1세대 戰鬪機나 헬기, 海上哨戒機 等이었다. 自信感을 回復한 日本은 最新 機種들을 生産하고자 했다. 1960年代 F-104J를 免許生産했다. 그러나 眞正한 跳躍은 民間航空機 分野에서 準備되고 있었다. 日本 通産省은 진작부터 航空機 生産規制가 풀릴 것에 對備해 航空機 開發者를 管理해왔다. 規制가 풀린 1957年 通産省은 財團法人 ‘輸送機設計硏究協會(以下 수연)’를 발족시켰다. 運輸省으로부터 日本 內에 必要한 航空機 需要를 確定받은 通産省은 수연으로 하여금 雙發 터보프롭 中型航空機人 YS-11乙開發하게 했다.

    민용기 開發에 나선 것은 軍用機를 開發하면 美國으로부터 制裁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는 민용기를 量産해 輸出을 摸索하자는 實利的인 意圖도 깔려 있었다. YS-11의 開發에는 第2次 世界大戰 때 最高의 軍用機 設計者들이 大擧 投入되었다. 제로센과 라이덴(雷電·第2次 世界大戰 때 日本 海軍이 使用한 局地戰龍 戰鬪機)을 開發한 미쓰비시의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郎)를 筆頭로, 하야부사 戰鬪機를 設計한 후지重工業의 誤打 미노루(太田稔), 詩덴카이 2式 局地戰鬪機를 設計한 神메이와공업의 기쿠하라 시즈오(菊原靜男), 히엔 3式 戰鬪機를 設計한 도이 다케오(土井武夫), 그리고 長距離 飛行記錄을 세운 港延期를 만든 도쿄帝國大學의 기무라 히데마사(木村秀政)까지 日本 最高의 專門家 5名이 모여 作業을 始作했다.

    이들은 1年餘 만에 設計를 完了하고 YS-11 模型을 公開했다. 수연과 航空機 製作社들은 YS-11의 本格的인 開發과 生産을 始作했다. 수연은 解體되고 民官 共同의 特殊 法人인 ‘日本 航空機 製造(NAMC·Nihon Aircraft Manufacturing Corporation)’가 1959年 6月 1日 設立되었다. YS-11 時祭 1號基는 1962年 8月 30日 草島飛行을 했는데, 言論은 이 모습을 日本 全域으로 實況 中繼했다. 日本 國民은 뜨거운 關心과 支持를 보냈다.

    過度한 投資

    그러나 YS-11은 長點보다도 限界點이 많은 氣體였다. 軍用機를 念頭에 두고 開發한 탓에 民間 旅客機에 必要한 快適함과 安全性, 그리고 經濟性을 確保하지 못했다. 이러한 航空機는 민수市場에 進出할 수가 없다. NAMC는 150臺를 生産해 開發費를 回收할 豫定이었지만, 그 程度의 生産으로는 費用回收가 어렵다고 判斷해 180臺로 生産 目標를 높였다. 日本은 182代의 YS-11을 生産했다. 生産臺數를 늘리자 赤字幅도 따라서 거켜만 갔다.

    처음으로 해보는 民間 旅客機 事業인데다 높은 生産原價와 販賣代金 回收의 遲延, 過多한 開發 및 生産費用 等이 原因이었다. 엄청난 課外費를 낸 日本은 1974年 2月 YS-11 生産을 終了했다.

    日本은 最尖端 戰鬪機에 對한 熱望도 維持해갔다. 航空自衛隊는 F-86F 세이버에 이어 F-104J를 選定했다가 1966年 次期 主力戰鬪機事業을 펼쳐 F-4EJ를 對象 機種으로 選定했다. 當時 F-4EJ의 臺當 價格은 無慮 20億 엔에 肉薄했지만, 日本은 1981年까지 154臺를 導入했다. F-4EJ 亦是 免許生産을 했는데 이 機種의 生産 免許를 獲得한 나라는 日本이 唯一했다.

    1974年 F-104J 後繼機種 選定에 들어가 當代 最高의 戰鬪機인 F-15를 選定했다. 日本은 高價의 F-15度 國內에서 生産한다는 原則을 固守해 1999年까지 F-15J/DJ를 213代 免許生産했다. 相當한 投資를 한 것이다.

    日本은 免許生産에 滿足할 나라가 아니었다. 꾸준한 免許生産을 통해 相當한 技術을 蓄積했지만 不足한 것이 많았다. 시스템 次元의 R·D 設計와 시스템 統合, 그리고 國際的인 販賣와 支援活動 等이 그것이었다. 日本은 免許生産으로 ‘노하우(know-how)’는 傳受받았지만, ‘盧와이(know-why)’를 깨닫지 못했다. YS-11 開發·生産으로 技術的인 成功은 거두었지만, 事業的으론 成功하지 못하는 過程을 反復한 것이다.

    YS-11 失敗 後 日本은 航空産業의 勝負를 軍用機 開發에 걸어야 한다고 判斷했다. 이런 判斷의 根據로 첫째 航空産業이 發展한 나라들은 民需用이 아니라 軍用機 事業으로 市場을 支撐하고 있다는 點을 꼽았다. 當時 西歐에서 製作된 29個 機種의 제트旅客機 가운데 보잉에서 만든 4機種만 損益分岐點을 넘기고 있었다. 日本은 보잉이 30年이 넘는 投資와 軍의 支援을 받았기에 겨우 閔粹市場에서 利益을 낼 수 있었다고 分析했다.

    軍用機 開發로 航空技術 蓄積

    두 番째로는 軍用機를 開發해야 國內와 海外에 市場이 形成돼, 各種 部品과 서브시스템에 對한 需要가 發生한다고 判斷했다. 軍用機를 開發해야 마이크로 電子産業과 컴퓨터·通信産業 等 最尖端 産業 分野가 發展하는데, 이 分野 技術은 民間基로 轉用할 수 있다. 軍用機 事業을 통해 最尖端 技術을 繼續的으로 開發하고 育成하는 ‘技術 生態系’를 만들겠다는 것이 日本 政府의 속내였다.

    當時 世界 最大의 민수 航空市場을 保有한 美國조차 航空機의 60% 以上을 國防部가 購買했다. 나머지도 美國 內 政府機關이나 다른 나라의 軍이 購買했다. 日本에서는 自體 生産하는 航空機의 80%를 防衛廳이 購買했다. 제트엔진을 生産하는 가와사키중공업은 민수 販賣는 거의 하지 못했다. 따라서 軍用機 事業을 繼續 일으켜 軍이 購買하게 해야 航空産業이 發展할 수 있다고 通産省은 判斷했다.

    日本은 戰鬪機를 讀者 開發하고자 했다. 그에 이르는 길은 平坦치 않았다. 日本은 航空産業이 解放을 맞은 1956年 中等訓鍊機 T-1의 自體 開發을 推進해 1958年 草島飛行을 성공시켰다. T-1은 ‘基카’ 以後 最初의 제트機였다. 그러나 美軍이 無償으로 訓鍊氣를 供與해준 데다 日本에서 免許生産한 航空機들이 優秀했기에 T-1은 66臺만 生産하고 終了됐다.

    그리고 超音速 訓鍊機 必要性이 浮刻되자 TX(次期 訓鍊氣)事業을 始作했다. TX事業에는 超音速 訓鍊機만 開發하는 것이 아니라 超音速 戰鬪機도 同時에 開發한다는 意圖를 包含시켰다. 當時 하나의 플랫폼을 開發해 訓鍊機와 戰鬪機 兩쪽으로 使用한 例로는 美國 노스롭 辭意 T-38訓鍊機/F-5戰鬪機가 代表的이었다.

    TX事業 主管企業으로는 미쓰비시가 選定되었다. 原型으로 삼은 機體는 英國과 프랑스의 合資會社인 SEPECAT에서 開發한 ‘재규어’였다. TX事業으로 開發된 T-2는 1971年 草島飛行에 成功해, 모두 96臺가 生産되었다. T-2는 徹底하게 國産化에 集中했다. 全體 部品 가운데 自體 開發한 것이 56.5%, 免許生産한 것은 41.8%였고, 直輸入한 것은 1.7%에 지나지 않았다.

    T-2라는 超音速 氣體가 確保되자 日本은 이를 近接支援임무용 戰鬪機(卽 攻擊機)로 個數하기 始作했다. SF-X事業에 들어간 것이다. T-2의 構造를 變更해 最小 費用으로 超音速 支援戰鬪機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T-2의 後方席을 除去하고 電子裝備를 追加했으며 하드포인트를 增設해, 戰後 日本 最初의 國産 戰鬪機인 F-1 支援戰鬪機가 誕生했다. 1978年 4月부터 實戰 配置된 F-1은 160臺를 生産할 豫定이었다. 그러나 F-4EJ의 數量 確保와 改良을 위해 豫算이 縮小돼, 77臺만 生産되었고 終了됐다.

    F-1은 前後 開發된 戰鬪機 가운데 類例를 찾을 수 없을 程度로 性能이 좋았다. 1970年代의 攻擊機치고는 航速距離가 멀고 地上攻擊 能力도 갖추었다. 整備도 簡便해 매우 優秀하다는 評價를 받았다. 部品 國産化率은 대단히 높아서 日本 航空技術力을 15年 앞서게 했다는 것이 日本 航空專門家들의 意見이었다.

    野心作 F-2事業도 墜落

    戰鬪機 國産化에 對한 日本 政府의 認識은 宗敎와도 같았다. 1970年代와 1980年代를 거치면서 防衛廳을 中心으로 한 政府와 航空企業들 사이에는 向後 開發할 戰鬪機는 完全 國産化한 것이어야 한다는 共感帶가 形成됐다. 1970年代 主力 戰鬪機인 F-4EJ의 國産化率은 無慮 99%에 達했지만, 1980年代 主力機種인 F-15J에서는 75%까지 下落하고, 事業 損失도 增加했다.

    日本은 1982年 F-1의 後繼 機種을 開發하는 FS-X(次世代 支援戰鬪機) 計劃을 立案했다. 防衛廳은 次世代 戰鬪機를 念頭에 두고 運動能力向上機(CCV)를 硏究했다. 컴퓨터 支援에 依한 航空機 設計시스템을 構築하고 次世代 射擊統制裝置, 戰鬪機 搭載用 컴퓨터, 推力 5t級의 戰鬪機用 엔진 開發 等에 豫算을 投入했다. 日本은 엔진을 除外하고는 모두 國內 開發이 可能하다고 判斷했다. 미쓰비시重工業과 가와사키중공업은 戰鬪機 開發에 關한 硏究報告書를 提出하고 各各 讀者 모델을 提案했다. 그러나 엔진을 國産化하지 못하고 尖端을 追求해 開發費가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라는 憂慮의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그때 ‘日本의 航空 獨立’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美國이 國際共同開發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日本은 日本隊로 CCV와 미션 컴퓨터 開發에서 成果를 올리지 못해 完全한 自國産 戰鬪機 開發이 어렵다는 評價를 내리고 있었으므로, 1987年 FS-X는 國內 開發이 아니라 美國과 共同開發한다는 쪽으로 旋回하게 되었다. 이러한 決定에는 兩國의 利害關係가 맞아떨어진 側面이 있다. 深刻한 美日 貿易 不均衡을 바로잡겠다는 美國의 政治的 壓力이 큰 힘을 發揮했다.

    日本은 F-15, F-16, F/A-18 세 機種 中 어느 것을 FS-X의 改造 母體로 삼을지 苦悶했다. 그때 가장 有力한 機種인 F-16의 製作社인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期數 再設計와 複合材料의 使用, 日本産 抗戰裝備 搭載 等 日本 側의 主要 要求事項을 受容하겠다는 回信을 보내왔기에, FS-X는 F-16을 基礎로 共同開發하는 것으로 落着되었다.

    共同開發에 들어가자 여러 가지 問題가 導出됐다. 業務分擔은 日本이 60%, 美國이 40%로 決定되었지만, 開發 段階에서는 美國이 60%가 됐다. 가장 큰 問題는 技術移轉이었다. 1989年 아버지 부시 大統領이 이끄는 美國 政府는 日本의 對美貿易 不均衡 等을 問題 삼으며 F-16 技術移轉을 막고자 했다. F-16의 소스코드 移轉을 制限하고 美國의 事業分擔率은 最大로 保障받는 反面, 日本이 保有한 技術은 반드시 제공받도록 保證한다는 不平等協約을 適用한 것이다. 日本이 美國에 協力한 核心的인 理由는 엔진技術을 移轉받는 것이었는데, 美 議會의 激烈한 抵抗에 부딪혀 技術移轉만 이루어졌다.

    이런 過程을 거쳐 誕生한 F-2 戰鬪機가 1995年 草島飛行을 했다. 그런데 試驗飛行에서 日本 側이 製作한 炭素系 複合素材로 만든 主翼(主翼)에서 微細龜裂이 發生했다. 이 問題點을 解決해 日本은 2000年부터 F-2를 實戰 配置했다.

    시행착오 거치며 항공 강국 부상
    그러나 F-2는 國産 戰鬪機 開發을 갈망하던 日本 航空産業界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對美 貿易不均衡 解消라는 政治的 利害關係가 追加돼 日本은 實利 側面에서도 얻은 것이 別로 없었다.

    FS-X의 실망스러운 開發過程으로 日本은 軍用機 開發에 對한 幻想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冷戰 終熄으로 軍縮 붐이 일었고 防衛需要度 줄어들었으니, 軍用機 開發은 航空産業을 이끄는 機關車가 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經濟産業省은 中小型 民間航空機 市場으로 눈을 돌렸다. 最初에는 30~50人乘 小型 제트旅客機 開發을 擧論하다가, 나중에는 事業性이 높은 70~90人乘 中型제트機 開發로 轉換했다.

    民間航空機 市場 눈떠

    그에 따라 미쓰비시가 推進한 것이 MRJ(Mitsubishi Regional Jet)라는 中型 旅客機 開發 事業이다. 미쓰비시는 MRJ 試製機를 2013年 草島飛行시킨다는 目標를 세우고 開發에 拍車를 加하고 있다. MRJ는 YS-11 以後 日本이 開發한 最初의 民航機로, ANA(前日本航空)가 25代, 美國의 트랜스 스텝 홀딩스(Trans Step Holdings)社가 100代, 홍콩의 ANI 그룹 홀딩스가 5臺 等을 事前 契約해 注目을 받았다.

    日本의 航空業體들은 美國 보잉의 B-767, 777, 787이나 유럽 에어버스社의 旅客機 開發에 下請業體로 參與해왔다. 보잉 787 드림라이너에서는 前方胴體와 윙박스 等 主要部分 製作을 擔當함으로써 全體 事業 分擔量의 35%를 차지하는 記錄을 세웠다.

    軍用機에서도 눈에 띄는 開發이 있었다. 1970年 開發된 C-1 輸送機를 代替하기 위해 C-X(次期輸送機)事業과 P-3 海上哨戒機를 代替하기 위한 P-X(次次期 哨戒機)事業을 2007年부터 同時에 推進했다. 日本은 開發費用과 時間을 短縮하기 위해 共通 플랫폼을 開發해 두 機種을 開發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開發된 P-1 海上哨戒機가 2007年 草島飛行을 했다. C-X事業에서 誕生한 C-2 輸送機는 2010年 草島飛行을 마치고 試驗飛行 中이다.

    以外에도 注目할 만한 움직임이 하나 있으니 바로 日本 防衛性 技術硏究本部가 開發하는 ATD-X(先進技術實證機) ‘신신(心神)’ 이다. 신신은 未來의 日本 戰鬪機에 適用할 尖端技術을 모두 實證해보기 위해 開發하는 스텔스 硏究氣體다. 신신에는 3D 推力偏向 엔진이 裝着된다. 스마트 스킨 센서 等 다양한 新技術이 椄木될 豫定이다.

    스텔스 戰鬪機 硏究

    신신은 이미 模型 製作 段階를 넘어서 2009年부터 미쓰비시가 實證機體를 開發하고 있다. 2014年에 草島飛行, 2015年에 航空自衛隊의 試驗飛行이 豫定돼 있고, 2016年 體系開發이 完了될 豫定이다. 신신은 量産이 計劃된 機體는 아니다. 하지만 지난 102年間 그리고 前後 55年間 日本이 追求해온 尖端 航空技術이 모두 具現될 航空機이기에 關心을 갖지 않을 수 없다.

    日本은 1910年 以後 無慮 1世紀가 넘도록 航空産業을 育成해왔다. 그러나 美國이나 英國, 프랑스 等 西歐 先進國에 비하면 뒤처진 狀況이다. 中國이나 韓國 等 航空 後發國家들로부터는 猛烈한 追擊을 받고 있다. 美國에 對抗해 太平洋戰爭을 일으키고 10萬餘 臺의 軍用機를 生産했던 國家치고는 초라한 現實이 아닐 수 없다.

    日本은 愚直하리만큼 軍用機에 執着해 航空産業을 이끌어왔지만, 冷戰 終熄 後 對테러 戰爭까지 終了됨으로써 防産需要가 줄어들어 힘들어하고 있다. 經濟不況이 長期化되고 東日本 大地震의 餘波로 軍用機 開發 및 免許生産에 豫算을 無條件的으로 投入하기도 어려워졌다. 따라서 MRJ와 같은 民間旅客機 開發이 日本 航空産業이 躍進할 수 있는 土臺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행착오 거치며 항공 강국 부상
    凉燠

    1975年 서울 出生. 서울大 法大 卒業. 밀리터리 칼럼니스트, 防産 컨설턴트, 映畫 ‘쉬리’의 軍事諮問으로 活動. 著書로 ‘그림자戰士, 世界의 特殊部隊’ ‘KODEF 軍用機年鑑 2012~2013’等.


    그럼에도 日本에는 보잉이나 에어버스 같은 大型 民航機 製作業體가 없다. 하지만 日本의 航空産業을 얕잡아 볼 수는 없다. 數十餘 年 동안 꾸준히 硏究開發을 하고 시스템 統合에 集中해서 쌓아온 日本의 노하우와 盧와이를 無視할 수 없는 것이다. 日本은 韓國의 反面敎師다. 韓國은 日本을 잘 硏究해 實質的인 成功을 거두는 쪽으로 硏究와 投資를 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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