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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只今 떠도는 블랙리스트는 1次 資料, 眞짜는 따로 있을 것”|新東亞

特輯 | 崔·朴의 그림자

“只今 떠도는 블랙리스트는 1次 資料, 眞짜는 따로 있을 것”

Interview | 朴槿惠 政府 文化界 블랙리스트 1號 이윤택

  • 권재현 記者 | confetti@donga.com

    入力 2017-01-26 09: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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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化 게릴라’가 現場에서 겪은 藝術 檢閱 實態
    • “劉震龍이 물러나고 김종덕이 오면서 雰圍氣가 바뀌었다”
    • “廣場의 촛불은 1987年 以後가 아니라 1960年 以後 大變革”
    • “이제 블랙리스트 以後를 論議해야 할 때”
    ‘文化 게릴라’로 有名한 劇作家이자 演出家 이윤택(65)은 進步일까 保守일까. 이런 一刀兩斷 式의 質問은 無禮하다. 그럼에도 이런 質問을 던지는 것은 그가 겉으론 ‘文化隆盛’을 내세우면서 뒤에선 블랙리스트로 文化界를 統制하고 抑壓하려 했던 朴槿惠 政府 文化政策의 虛構性을 온몸으로 體驗하고 또 警告한 ‘카나리아’였기 때문이다.

    演出家로서 이윤택은 獨逸 社會主義 作家 브레히트와 프랑스의 無政府主義 作家 張 주네의 破格的 飜譯劇을 거침없이 紹介해왔다는 點에서 分明 進步的이다. 劇作家로서 이윤택은 ‘오구’와 ‘어머니’ 같은 創作劇을 통해 保守의 核心 價値로서 ‘家族’에 穿鑿해왔다. 人間 이윤택은 ‘世上이 아무리 亂離법석 용천지랄을 떨어도 變하지 않는 것이 家族이란 關係’(自傳 에세이 ‘結局 삶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韓國 保守의 本고장 慶尙道에서 태어나 자랐고, ‘慶州 양동 李氏 家門’으로 晦齋 李彦迪 後孫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을 마냥 進步라고 낙인찍을 수 있을까.

    自由主義의 出發點이 個人이고, 社會主義의 出發點이 社會라면 保守主義의 出發點은 家族이다. 家族과 그 家族의 擴大된 形態로서 民族과 國家에 對한 責任과 名譽를 重視하는 이야말로 保守主義者라는 이름에 값한다. 그런 意味에서 이윤택은 保守主義者에 가깝다. 다만 驛馬煞 낀 아버지의 不在 속에 억센 홀어머니 아래 자라면서 形成된 反抗期와 그가 宗敎처럼 믿는 演劇의 價値를 抑壓하는 權力과 資本에 對한 不信과 反感이 그를 文化 게릴라로 길러냈을 뿐. 이는 그가 1986年부터 꾸려온 演劇共同體 ‘연희단거리패’에서 휘두르는 家父長的 權威에서도 確認된다.

    이윤택 自身도 이런 分裂的 正體性을 銳敏하게 의식하고 살아왔다. 그가 自身을 痞悶重權 知識人, 灰色分子, 中道派로 끊임없이 規定해온 理由이기도 하다. “灰色도 色이다. 나는 차라리 堂堂한 灰色分子로 남겠다”는 發言이 代表的이다. 이런 態度는 左와 右로부터 모두 攻擊받는 빌미도 提供했지만 險難한 理念葛藤의 激浪을 老獪하게 헤쳐올 수 있는 動力이 된 것도 事實이다.



    政策弄奸 警告한 카나리아

    朴槿惠 政府 들어 그런 正體性에 前例 없는 打擊이 加해진다. 彈劾政局과 맞물려 ‘文化藝術界 블랙리스트’라는 氷山의 一角이 그를 통해 처음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5年 9月 그의 이름은 後輩 劇作家이자 演出家인 박근형과 함께 新聞에 오르내리기 始作한다. 그해 1月 韓國文化藝術委員會의 아르코文學創作基金 戱曲 分野에 提出한 그의 詩劇 ‘꽃을 바치는 時間’李 100點 滿點을 받고 1位에 올랐음에도 文化體育觀光部의 壓力으로 最終 탈락했다는 事實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는 박근형의 ‘모든 軍人은 불쌍하다’가 藝術委의 ‘臺本 共謀 支援’ ‘示範公演 支援’ ‘優秀 作品 製作 支援事業’에 줄줄이 選定됐지만 亦是 文體部의 壓力으로 支援金 抛棄 覺書를 提出해야 했다는 消息과 맞물려 相當한 波長을 몰고 왔다. 이윤택은 2012年 大選에서 高校同窓이던 文在寅 候補의 TV 支持演說을 했다는 빌미로, 박근형은 2013年 9月 國立劇團을 이끌고 公演한 ‘개구리’가 朴正熙·朴槿惠 婦女를 諷刺했다는 戰力으로 ‘된서리’를 맞고 있다는 疑惑이 提起됐다.

    2015年 가을 韓國 演劇界의 脊椎와 같은 이윤택과 박근형에 對한 支援金 排除 消息이 國政監査 도마에 올랐을 때 김종덕 當時 文體部 長官은 맞불作戰에 나섰다. “이윤택 先生에겐 지난 2年間 15億을 支援했다. 藝術家 中에서 最高額의 支援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針小棒大의 ‘물타기 手法’이었음이 드러났다. 도종환 議員室이 文體部로부터 받은 資料에 따르면 15億 원은 명동예술극장·國立劇場·國立國樂院에서 製作한 6個 作品의 銃 製作費를 뭉뚱그린 것이었다. 이윤택 個人에게 돌아간 돈은 그 20分의 1 水準인 7600萬 원(劇作料+演出料)에 不過했다.

    自身을 ‘國民 稅金을 15億이나 받아먹은 背恩忘德한 河馬’쯤으로 몰고 간 ‘물타기’에도 沈默하던 이윤택은 2016年 2月 연희단거리패 30周年 記者懇談會에서 作心한 듯 입을 열었다. “韓國 社會가 이렇게 野蠻的일 수가 있는가. 이윤택만 떨어뜨린 게 아니고 오태석도 떨어뜨리고 이강백도 떨어뜨렸다. 韓國演劇界를 代表하는 사람을 모두 떨어뜨리는 韓國 社會는 얼마나 잘난 社會인가. ‘개판의 時代’에는 ‘깽판’으로 맞서야 한다. 一切의 政府支援金을 抛棄하고 小劇場運動으로 돌아가 演劇精神을 지키겠다.”

    이날의 發言은 政治的 檢閱에 對한 憤怒 表出에만 머문 게 아니었다. 文化藝術 門外漢인 최순실-차은택의 弄奸에 對한 豫言家的 警告까지 담겼다. “많은 支援이 文化 콘텐츠, 融合 쪽으로 다 넘어가버리고 純粹藝術에 對한 支援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人文學的 바탕도 없이 그냥 비빔밥 짬뽕처럼 만들어지는 게 무슨 融合인가. 왜 藝術이 美的 形式도 갖추기 前에 콘텐츠가 돼야 하는가.”



    創團 30周年에 存廢 危機 몰려

    그의 이런 發言은 文化藝術界 뒤에 숨어 있던 ‘검은 그림자’의 淺薄한 實體가 드러나면서 ‘사이다 發言’이라며 다시 人口에 膾炙되고 있다. 하지만 그 代價로 그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는 一切의 政府 支援金 없이 홀로서기를 위해 지난해 힘든 構造調整을 겪어야 했다.

    極端의 서울 아지트인 ‘게릴라劇場’과 水踰洞 團員宿所를 賣物로 내놨다. 2006年 開館한 게릴라劇場은 開幕 公演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공연된 이윤택의 ‘억척어멈과 그의 子息들’과 박근형의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가 그해 末 나란히 東亞演劇賞 作品賞을 受賞하는 氣焰을 吐하며 大學路 創作劇의 産室로 우뚝 떠올랐다. 하지만 노무현, 李明博 政府에서 繼續 支援받던 空間支援금이 끊기면서 月 800萬 원의 運營費를 堪當할 수 없게 된 것.  

    代身 銀行 貸出을 받아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 막다른 골목에 位置한 불탄 考試院 建物을 引受해 團員 宿所와 公演場을 겸한 ‘짐머테아터’(家屋劇場)로서 ‘30스튜디오’의 門을 열었다. 創團 30周年에 막다른 골목에 섰다는 絶體絶命의 自意識이 깃든 劇場名이다.

    1月 4日 午後 昌德宮 담벼락에 位置한 30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블랙리스트와 關聯해 “靑瓦臺에서 내려보냈다”는 劉震龍 前 文體部 長官의 暴露와 그 作成 過程에 介入했다는 疑惑을 받는 조윤선 現 長官의 隱蔽 疑惑이 한창 일고 있을 때였다. 그 만남이 있고 8日 뒤인 12日 劉震龍, 조윤선 長官 사이에서 文體部 長官을 맡았던 김종덕 氏가 拘束됐다.


    블랙리스트는 排除의 政治

    ▼ 朴槿惠 大統領과 親朴勢力은 이를 認定하지 않고 있는데.

    “自身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朴 大統領의 論理는 제가 1980年代 新聞記者 時節 戒嚴司 報道處에서 만난 陸軍 少領의 論理와 똑같습니다. 쿠데타에 나선 軍人들 머릿속에는 民衆이나 市民이 없거든요. 목숨을 걸었기에 自身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게 無條件 定義인 겁니다. 그 結果物이 市民에게 엄청난 損害를 줘도 未安함은 있을지언정 罪意識이 없어요. 내 意圖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 ‘나는 罪가 없다’는 거죠. 그게 바로 파라노이아(paranoia), 自閉症患者 乃至 偏執狂의 論理죠. 5·16 以後 韓國 社會의 한 軸을 이끌어온 게 바로 그런 獨善 乃至 偏執狂이에요. 하지만 4·19 以後 목 놓아 부르짖어왔던 民主化가 日常의 水準으로 고루 퍼져서 이제 더 以上 獨斷的이고 偏執狂的인 政治가 발붙일 곳이 사라진 時代가 된 것입니다.”

    ▼ 程度는 다르지만 過去 政權에서도 블랙리스트 비슷한 것은 있었다는 主張도 나온다.

    “斷言컨대 없었습니다. 1970年代 朴正熙 政權 以後 이番 政權에서 처음 생겼습니다. 전두환·노태우 政府 때도 公演界에서 民族劇이나 마당劇 하는 분들을 除外하면 演劇人들은 比較的 고르게 支援金 惠澤을 받았습니다. YS(김영삼) 政府는 대단히 文化的이지 못했습니다. 文化的 性向이 아니었던 거죠. 제가 YS와 같은 경남고 出身이지만 支援金 한 푼 못 받았으니까요. 反面 DJ(金大中) 政府 時節은 르네상스였어요. 文化에 對한 關心도 많았지만 湖南 사람 아니라 差別했다는 말 듣지 않기 위해 功을 많이 들였습니다. 嶺南 사람에다 非運動圈인 제가 支援을 第一 많이 받았어요. 노무현 政府 時節엔 ‘陣營論理’가 들어왔죠. 그래서 민예총 出身 젊은이들에게 惠澤이 많이 돌아가고 相對的으로 元老나 旣成世代가 忽待를 받은 건 事實입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次元은 아니고 性向의 差異였습니다. 그 渦中에도 제가 國立劇團 藝術監督을 했으니까요. 李明博 政府도 비슷했습니다. 유인촌 長官이 偏向性 있는 文化政策을 밀어붙이는 過程에서 누구는 被害를 보고 누구는 惠澤을 볼 수는 있을지언정 누구를 排除하는 式의 블랙리스트는 없었습니다.”

    ▼ 現在까지 드러난 블랙리스트가 政府가 管理했다고 보기엔 너무 衆口難防에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指摘도 있다.

    “只今 떠도는 블랙리스트가 許接한 것은 事實입니다. 一旦 只今까지 여기저기서 報道된 블랙리스트에 저랑 박근형의 이름이 안 보여요. 그 名單에 오른 사람 大多數는 所謂 反政府 署名에 同參한 사람인데 우리 둘은 署名에는 參與하지 않았거든요. 정작 直接的으로 찍혀서 바로 當한 우리 이름이 빠져 있다는 點에서 信憑性이 不足해요. 게다가 1萬 名 가까이 網羅한 名單에는 이 政府 들어 金冠文化勳章을 받은 林英雄 先生의 이름까지 들어 있더군요. 資料 蒐集 次元에서 만든 1次 名單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이고 眞짜 블랙리스트는 따로 存在할 거예요. 그 眞짜 블랙리스트는 單純 名單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對象을 緻密하게 攻擊할 仔細한 證憑資料까지 具備했을 거라고 봐요.”

    ▼ 政權交替가 이뤄지면 ‘逆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냐는 憂慮도 있다.

    “彈劾이 可決되느냐 否決되느냐, 누가 次期 大統領이 되느냐가 政治人들에겐 重要할지 몰라도 우리 같은 藝術家들에겐 이젠 큰 意味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世上이 本質的인 變化의 힘을 얻었음을 確認했으니까요. 옛날엔 데모가 벌어지면 演劇은 손님이 없어 門을 닫아야 했어요. 하지만 요새는 촛불示威 있는 날에도 觀客이 줄을 서요. 演劇은 演劇대로 보고 또 데모하러 나가는 文化가 생긴 겁니다. 歷史的, 政治的 行爲에 同參하는 게 日常化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例죠.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個人主義에 물들어 따로 놀던 젊은 演劇人들이 檢閱에 抵抗하기 위해 하나로 뭉치면서 共同體 意識이 생긴 點이에요. 政府支援金 바라보지 않고 熾烈한 問題意識으로 小劇場 作品에 注力하다 보니 作品도 좋아졌어요. 지난해 主要 演劇賞을 휩쓴 作品들이 다 그런 作品이에요. 이제는 淺薄한 個人主義와 集團利己主義에 물든 政治가 물러나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셈인 거죠. 따라서 누가 大統領이 되든 不合理하고 淺薄한 前 時代의 論理로 藝術을 抑壓하고 統制할 수 있는 時代는 지나갔다고 봅니다.”

    ▼ 그래도 政府의 藝術家 支援事業에 客觀的 基準이 必要하지 않나.

    “네 가지를 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첫째, 藝術家들에게 思想的 選擇의 自由를 줘라. 思想的 理由로 支援을 排除해선 안 된다. 둘째, 世代 間 差別을 없애야 한다. 나이가 적거나 많다는 理由로 支援에서 排除해선 안 된다. 셋째, 地域 間 差別을 없애야 한다. 中央과 地方의 差別, 慶尙道와 全羅道에 差別을 둬선 안 된다. 넷째, 學派나 流派의 差別을 없애야 한다. 韓藝綜과 非韓藝綜 이런 式의 差別을 둬선 안 된다. 그럼 무슨 基準을 適用할 것인가. 個性과 多樣性을 最大限 保障하는 데 焦點을 맞추자고 말하고 싶어요. 窮極的으로는 作品 支援이 아니라 藝術家에 對한 普遍的 福祉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웨덴처럼 藝術家로 公式 登錄된 사람은 職場 有無를 따져 固定 職場이 없는 사람에게는 最小限의 失職手當에 該當하는 支援金을 支給하는 게 理想的이라고 봐요.”

    ▼ 마지막으로 이番 事態에 對한 個人的 所感은.

    “제 經驗을 곱씹어 보면 政權을 잡고 미리 블랙리스트를 만든 게 아니고 中間에 괘씸罪에 걸린 사람들을 혼내줘야겠다는 稚氣 어린 復讐心에서 누군가가 만든 것 같아요. 그 過程에서 제가 어쩌다 1號로 걸려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붙들려갈지 모른다, 두들겨 맞을지 모른다는 恐怖가 同伴된 檢閱의 時代를 겪은 저 같은 사람에겐 事實 큰 危害가 안 됐어요. 그래서 제가 대단한 犧牲者나 被害者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番 事態를 前後로 人生에서 가장 어려운 時期를 넘겼다는 생각은 듭니다. 文在寅 支持演說 提案을 받았을 때 苦悶 많았습니다. 그래서 團員들과 相議했더니 所信껏 發言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支持演說에 나섰고 只今도 後悔하지 않습니다. 崇禮門 再建築 祝賀 公演 演出 提議가 들어왔을 때도 苦悶 많았어요. 여기저기 기웃거린다는 소리 들을까봐요. 하지만 ‘우리는 左派도 右派도 아닌 演劇播多. 演劇人으로서 우리에게 要求된 것은 하자’는 決心으로 나섰고 亦是 後悔하지 않습니다. 檢閱 問題와 文化政策 弄奸 事態에 對해서도 演劇人으로서, 文人으로서, 知識人으로서 回避하지 않고 發言해야 할 때 發言할 수 있었던 것을 多幸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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