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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小兒科 그만둘 땐 미쳤다고 했지만 가슴 뛰는 삶 擇해”|신동아

“잘나가던 小兒科 그만둘 땐 미쳤다고 했지만 가슴 뛰는 삶 擇해”

醫師, 飜譯家, 出版人 강병철의 反轉 人生

  • 金賢美 記者

    khmzip@donga.com

    入力 2024-05-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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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한 집 長男 ‘元來 꿈이 뭐였더라’

    • 딸의 發病과 交通事故, 人生 ‘톱’ 찍고 那落으로

    • “當身은 쉬어야 해” 아내의 말에 “쉴 수도 있네?”

    • 아프면 圖書館 찾는 캐나다人, 似而非 科學에 내둘리는 韓國人

    • 우리 社會 問題에 答 提示하는 게 出版의 義務

    • ‘어딘지 若干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世上을 꿈꾸며

    “그때가 제 人生의 ‘톱’이었죠. 1999年 開園해 2008年까지 全國에서 第一 잘되는 小兒科 다섯 손가락 축에 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開院 때부터 ‘電子 차트’를 써서 바로 統計가 나오거든요. 8年 半 동안 하루 平均 280名의 患者를 봤더라고요. 믿기 어렵겠지만 하루에 患者 500名을 본 날도 있었으니까요.”





    서울대 醫大를 나와 小兒靑少年科 專門醫가 됐지만 如前히 가슴속에 ‘詩人’의 꿈을 간직하고 있던 그가 濟州島에서 公衆保健醫를 한 뒤 反해 눌러앉았다. 大學 同窓인 아내와 함께 서귀포시에 강병철小兒科醫院을 열었다. 강병철小兒科에는 堪當하기 어려울 程度로 患者가 몰려들었다. 他鄕 出身 醫師가 濟州道 엄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祕訣은 뭘까.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캐나다에서 출판 번역가로 16년째 살고 있는 강병철 씨. [조영철 기자]

    小兒靑少年科 專門醫로서의 삶을 整理하고 캐나다에서 出版 飜譯家로 16年째 살고 있는 강병철 氏. [조영철 記者]

    “說明이죠. 아무리 바빠도 說明을 抛棄하지 않았어요. 患者의 狀態, 藥 服用法 等을 알려주고 或是 빠뜨린 게 있을까 봐 油印物을 만들어 나눠드렸습니다. 當時 알레르기 患者의 코에 뿌리는 藥이 처음 나왔는데 一旦 제가 使用法을 보여주고, 아이가 直接 해보게 하고, 處方箋대로 藥을 받아 오면 다시 제 앞에서 해보라고 했어요. 다음 外來 때 제대로 하는지 다시 確認했죠. 그런 式으로 每日 數百 名의 患者를 보니 제 말이 얼마나 빨랐겠어요.”



    姜 院長은 말로 說明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한밤中에 백신 맞은 아이가 熱이 난다고 하면 遲滯 없이 病院에 오도록 했다. 그가 살던 제주시에서 病院이 있는 西歸浦까지 車로 1時間이 걸렸다.

    “아이가 熱이 나고 많이 힘들어하면 첫째, 解熱劑를 먹이세요. 둘째, 熱이 잘 떨어지지 않으면 다른 種類의 解熱劑로 바꿔봅니다. 셋째, 그래도 안 떨어지면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로 몸을 닦아줍니다. 單 찬물이나 알코올을 써서는 안 됩니다. 넷째, 아이가 많이 힘들어 보이거나 甚한 기침, 嘔吐, 泄瀉 等 다른 症狀이 생긴다면 가까운 小兒靑少年科를 찾으세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요. 新生兒는 熱이 나면 無條件 醫師를 만나야 합니다. 新生兒는 몇 個月까지를 말하나요? 醫學的으로는 2個月까지로 定義합니다만, 그냥 100日이 되기 前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강병철 ‘툭하면 아픈 아이 흔들리지 않고 키우기’에서)

    툭하면 아픈 아이 흔들리지 않고 키우기

    귀에 딱지가 앉도록 反復 說明을 하고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요”를 외치는 姜 院長에게 保護者들은 無限한 信賴를 보냈다. 德分에 平生 가난한 집 長男을 짓눌러온 돈 걱정에서 解放될 수 있었다. 經濟的으로 餘裕가 생기자 문득 ‘元來 내 꿈이 뭐였더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高等學校 2學年 때 人文系를 擇했지. 國文科가 아니면 法大를 가고 싶었지. 아버지는 理科로 바꾸라고 하셨지. 數學과 物理가 싫어서 醫大를 擇했지만 適性에 안 맞았지. 두 番이나 轉科를 하려 했지. 本科 1學年 때는 正말로 그만두려 했는데 當時 本科 2學年이던 아내가 只今까지 工夫한 게 아깝다며 醫師 免許만이라도 따라고 말렸지. 막상 醫師가 되고 보니 小兒靑少年科가 適性에 맞았지. 아니 너무나 잘 맞았지. 그래도 開院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버지가 쓰러지셨지. 長男으로서 父母님 生計와 동생들 學費까지 責任져야 했지. 大學病院 펠로를 抛棄하고 濟州島에서 開院을 했지. 急한 不滿 끄고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患者와 家族들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 돈 버는 재미까지 쏠쏠했지. 그사이 아이가 셋이 됐지.’

    어느 瞬間 自身이 꿈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에 이르자 견딜 수가 없었다. 2002年 유럽 旅行을 다녀온 뒤에는 ‘外國病’에 걸렸다.

    “유럽의 美術館, 博物館을 보고 나니 人文學的 體驗이 너무나 좋더라고요. 돌아오는 飛行機 안에서 ‘우리 外國에서 살아볼까’라고 했는데 아내는 弄談인 줄 알더군요. 하지만 저는 보는 데 滿足하지 못하고 살아봐야 直星이 풀리거든요. 當場 아이 셋을 데리고 유럽에서 살려면 돈이 얼마나 必要할까 따져봤죠. 아무리 計算해도 가진 돈만으론 오래 버티기 어렵고 繼續 일을 해야겠더라고요. 英國 醫師 免許가 그나마 따기 쉬워 보여서 挑戰했죠.”

    2年餘 功을 들인 끝에 英國 王立小兒科學會 ‘Basic Specialist’ 資格證을 取得한 것이 2005年 12月. 먹고살 일은 마련했으니 本格的으로 英國 移住 計劃을 세웠다. 患者가 몰려드는 病院을 그만둔다고 하니 모두 미쳤다고 했지만 그는 이미 決心을 굳혔다. 아내와 세 딸을 英國의 敎育 環境과 類似한 싱가포르로 留學 보냈다. 一種의 轉地訓鍊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不運

    家族을 보낸 뒤 病院은 如前히 잘됐지만 기러기 아빠는 밤마다 외로움에 진저리 쳤다. 그때 英語 工夫 삼아 집어 든 冊이 하버드 醫大 內科 敎授 出身 마르시아 안젤이 쓴 ‘The Truth About the Drug Companies’였다. 韓美 FTA가 推進되는 狀況에서 多國籍 製藥會社들이 利潤을 維持하기 위해 어떻게 大衆과 政府를 속이는지 파헤친 이 冊을 보자마자 醫師로서 義務感이 솟구쳤다.

    “이대로 가면 우리 製藥産業은 다 저들 손에 넘어가고 醫療體系도 完全히 망가지겠구나 싶더라고요. 無酌定 美國 랜덤하우스 出版社에 電話를 걸었죠. 出版 프로세스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韓國 醫師인데 이 冊을 꼭 飜譯해서 내고 싶다’고 하니 相對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어요. 에이전시를 통하라고 節次를 알려주더라고요.”

    結局 그 冊은 ‘製藥會社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라는 題目으로 出刊됐다. 얼떨결에 小兒科 醫師 강병철이 飜譯家로 데뷔했다. 그러나 花樣年華는 오래가지 않았다. 딱 1年 만에 내리막길도 아닌 나락이 찾아왔다.

    “기러기 아빠로 10個月쯤 됐을 때 交通事故를 當했어요. 살아난 것이 奇跡이라고 했는데 外傷後스트레스障礙로 不眠症이 생겼습니다. 睡眠劑를 안 먹으면 잘 수가 없었고 藥을 먹어도 두세 時間 겨우 잘까 말까 했죠. 心身은 疲弊해지고 免疫이 떨어져 肺炎으로 入院하기도 했어요. 雪上加霜으로 싱가포르에 있던 큰애가 精神疾患이 생긴 거예요.”

    아이가 어딘지 異常하다고 느낀 것은 中學校 1學年 때였다. 宿題를 제때 마치지 못하고 모든 것을 不安해했다. 오래前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사람들을 非難하고, 甚至於 直接 親舊에게 電話를 걸어 그쪽에서 記憶도 하지 못하는 일을 謝過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아이의 狀態가 尋常치 않아서 韓國으로 돌아와 治療를 받기로 했다. 或是 思春期의 反抗은 아닐까 期待해 봤지만 狀態는 惡化一路였다.

    藥物 治療와 相談 治療를 竝行하며 딸을 韓國 學校에 편입시켰는데 왕따를 當했다. 틱障礙가 오고 强迫, 恐怖, 不安, 極度의 憂鬱症이 생겼다. 아이는 冊床 밑에 있는 假想의 存在와 對話하며 不安을 달래고 있었다. 칼로 冊床 위에 뭔가 새기는 버릇도 생겼다. 어느 날 아이가 冊床에 “나는 敗北者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存在다”라고 새겨놓은 글을 보고 億丈이 무너졌다. 24時間 살얼음板 같은 現實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갑자기 山꼭대기에서 絶壁 밑으로 墜落한 느낌이었어요. 잘나간다더니 저 꼴이 됐구나. 醫師란 놈이 애를 어떻게 키웠기에 저 地境으로 만들었나. 사람들이 저를 비웃는 것 같았어요.”

    하루라도 빨리 韓國을 떠나야겠다고 조바심을 낼 때 英國 뉴캐슬에서 面接을 보러 오라는 連絡이 왔다. 이番엔 아내가 挽留했다. “當身도 患者야. 새로운 일을 求할 때가 아니라 쉬어야 할 때야.” 비로소 精神을 차렸다.

    “앞만 보고 달리는 스타일이라 쉰다는 생각 自體를 못 한 거죠. 쉴 수도 있네? 쉬면 되겠네? 家族 모두 캐나다 밴쿠버로 가서 2~3年 再整備하기로 했죠.”

    사랑하는 사람이 精神疾患을 앓고 있을 때

    2008年 3月 病院을 접고 캐나다로 떠났다. 洞네 公共圖書館은 그의 作業室 兼 놀이터였다. 書架를 둘러보면 冊이라는 媒體를 통해 流通되는 情報의 質과 量이 부러울 程度로 豐富했다. 아무리 稀貴한 病이라도 醫師가 쓴 指針書와 患者가 쓴 鬪病記가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캐나다 사람들은 아프면 圖書館에 가요. 例를 들어 ‘내가 얼마 前 前立腺癌 診斷을 받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冊을 좀 勸해 주면 좋겠다’라고 要請하면 司書들이 檢索해서 關聯 冊을 찾아주고 다른 圖書館에 있는 冊까지 求해주는 모습이 印象的이었어요. 韓國에선 아프면 一旦 知人과 相議하거나 인터넷 檢索부터 하잖아요. 醫師로 일할 때 患者들에게 제대로 情報를 傳達해 주지 못한 것이 後悔되더군요.”

    精神疾患者 家族에게 必要한 것은 良質의 情報였다. 내 子息이 어떤 狀態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父母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當場 하루하루의 生活에 지치지 않고 아이에게 傷處를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精神과 敎科書를 찾아 다시 읽어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 家族治療 專門家 리베카 蔚리스가 쓴 冊 ‘사랑하는 사람이 精神疾患을 앓고 있을 때’를 읽고 엄청난 慰安을 받았다. 이 冊을 빨리 飜譯해서 韓國에 紹介하고 싶었다.

    世界的으로 調絃病 有病率은 1%이고, 兩極性障礙를 合치면 2.2% 程度 된다. 우리나라 人口가 5000萬 名이라면 調絃病 患者가 50萬 名이 넘는다는 뜻이다. 이들 가운데 1%만 冊을 사도 初版 5000部는 今方 나간다는 論理로 出版社를 說得했다. 版權을 確保하고 飜譯에 들어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精神疾患을 앓고 있을 때’를 飜譯하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그 모습을 본 司書가 아예 休紙 한 桶을 통째로 가져다준 것이 고마워서 또 울었다.

    “韓國에서 治療를 받을 때 ‘아이에게 過한 期待를 하지 마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줘라’ ‘子息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라’ 같은 말을 자주 들었어요. 慇懃히 아이에게 精神疾患이 생긴 것이 父母 탓인 것처럼 들리죠. 하루는 하도 답답해서 ‘先生님 말씀은 알겠는데 아이에게 뭘 더 어떻게 잘해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아이가 캐나다 市民權을 取得한 뒤 洞네에 있는 精神保健센터에 다니며 治療를 받았는데 캐나다 醫師는 그냥 ‘腦의 病’이라고 말하더군요. 위에 病이 생기면 胃腸藥을 먹듯 腦에 病이 생기면 그 藥을 먹으면 된다는 거죠. 看護師들이 하는 患者 父母敎育에서도 第一 자주 하는 말이 ‘父母는 罪가 없다. 罪責感을 갖지 마라’예요. 저도 醫療人인데 그 말을 들으니까 또 눈물이 나더라고요. 只今도 묻고 싶어요. 韓國의 精神과 醫師와 心理學者 들은 왜 父母가 잘못해서 子息에게 精神疾患이 생긴 것이 아니란 말을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지. 精神疾患에서 當事者와 家族에게 가장 重要한 게 스스로 解放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나쁜 일을 해서 이런 病에 걸리는 게 아니고 그냥 不運했을 뿐이다. 不運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必要는 없잖아요.”

    코로나19 팬데믹이 살린 冊 ‘引受共通 모든 傳染病의 열쇠’

    하지만 飜譯하면서 쏟아낸 눈물만큼 補償이 돌아오진 않았다. 몇 年이 지나도 初版조차 消盡되지 않아 出版社에 損害만 끼쳤다. 飜譯家가 돈을 번 것도 아니다. 3個月씩 걸려 冊 한 卷 飜譯해도 손에 쥐는 돈은 잘해야 500萬~600萬 원이다. 家族을 扶養해야 할 家長이 全的으로 매달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캐나다 生活 16年째. 사람들은 그가 벌어놓은 돈으로 音樂 듣고 冊 읽으며 여유롭게 사는 줄 안다. 그런 삶을 꿈꾸며 캐나다行을 試圖했는지는 모르지만 始作부터 現實은 期待에 크게 어긋났다. 2008年 美國發 金融危機 事態는 애初 그의 計劃에 없던 일이었다. 換率이 치솟고 資産價値는 下落하고 아내 모르게 投資한 돈을 回收하지 못해서 빈털터리가 됐다. 캐나다 生活 6個月 만에 生活費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다시 韓國으로 돌아가 醫師를 해야 하나 苦悶할 때 매뉴얼 等을 飜譯하는 ‘商業 飜譯’ 市場을 알게 됐다.

    “專門 飜譯家들이 모이는 온라인 마켓 플레이스가 있어요. 거기에 프로필을 올려놓고 入札도 하면서 일을 따내는데 저는 1年 만에 영-한 飜譯家 中 톱이 됐어요. 한 달에 2000萬 원을 벌기도 했으니까요. 飜譯으로 그 돈을 벌려면 얼마나 많은 量을 타이핑했을지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미친 듯이 일을 하다 문득 ‘이러려고 異域萬里 캐나다까지 왔나’ 하는 懷疑가 들었죠. ‘나는 醫師고, 飜譯家고, 精神疾患을 앓고 있는 딸의 아빠다. 그렇다면 올바른 醫學 知識을 꼭 必要한 사람에게 傳達하는 것이야말로 보람 있는 일이 아닐까.’ 저는 冊에 對한 믿음이 있어요. 出版이 우리 社會의 問題에 어떤 式으로든 答을 提示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冊의 長點은 ‘총체성’이죠. 포털이나 유튜브 같은 데서 얻을 수 있는 知識은 斷片的이어서 全體 줄거리를 理解하기 어려워요. 脈絡을 모르면서 斷片的 知識을 아는 것은 아무 意味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直接 出版을 해보자 하게 된 거죠.”

    2013年 11月 ‘누군가에게 빛이 될 冊을 만듭니다’라는 모토로 出版社 ‘꿈꿀自由’ ‘서울醫學書籍’을 始作했다. ‘꿈꿀自由’는 그가 PC通信 時節 ‘유니텔’ 재즈 同好會에 ‘재즈 日記’(無慮 465回나 連載했다)를 쓸 때 使用한 닉네임이었다. 재즈에 푹 빠진 文學徒의 꿈이 이런 式으로 實現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表現대로라면 ‘꼬막 껍질만 한’ 出版社를 始作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딱 1億 원을 까먹을 때까지만 버텨볼 心算이었다. 아내에게도 그렇게 約束했다.

    2015年 메르스가 韓國을 强打했을 때 感染病과 關聯해 도움이 될 만한 冊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다가 發見한 것이 世界的 科學 著述家 데이비드 콰먼이 쓴 ‘引受共通 모든 傳染病의 열쇠’였다. 팬데믹과 오늘날 人類가 處한 狀況을 알려주는 600쪽 分量의 力作이었지만 정작 國內 反應은 미지근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와 닭을 沒殺시키고 사람의 健康까지 威脅하는 鳥類毒感, 全 世界를 恐怖에 떨게 했던 사스, 아프리카 사람들을 끔찍한 苦痛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에볼라, 말레이시아와 방글라데시를 휩쓴 니파, 2900萬 名의 死亡者와 3000萬 名이 넘는 患者를 낳은 世紀末的 疫病 에이즈, 2015年 우리나라 全體를 마비시켰던 메르스, 그리고 所謂 ‘햄버거病’으로 알려진 用刑尿毒症候群의 共通點은 무엇일까. 모두 動物의 病原體가 人間에게 건너와 생기는 病, 卽 引受共通感染病이다.”(‘인수공통 모든 傳染病의 열쇠’ 옮긴이의 글에서)

    무시무시한 警告를 보냈지만 사람들은 메르스 暴風이 지나가자 쉽게 잊었다. 코로나19라는 帶域病이 돌기 前까지는. 그러다 2020年 全 世界가 코로나 팬데믹에 휩싸이자 ‘引受共通 모든 傳染病의 열쇠’의 注文이 쏟아졌다. 지난 7年間의 賣出보다 그해 賣出이 더 많았다. 門 닫을 窮理만 하던 出版社 살림이 확 피었다. 2021年 롯데出版文化賞 飜譯 部門에 選定돼 賞金 2000萬 원까지 받았다.

    自閉는 어떻게 人類의 進步를 이끌었나

    2018年 스티븐 실버만의 ‘뉴로트라이브’의 飜譯에 들어갔다. 自閉라고 하면 平生 自己 속에 갇혀 지내는 不治病이고, 자폐 어린이는 말도 못 하고 大小便도 못 가리는 低能兒라는 認識이 剛했다. 自閉症의 原因을 環境 毒性 탓, 백신 탓을 하며 잘못된 治療法에 매달리는 사람도 數없이 봤다.

    “그 冊을 읽으면서 두 가지 點에서 衝擊을 받았어요. 첫째, 名色이 小兒科 專門醫인데 自閉에 對해 正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醫大 時節 배운 內容이 하나도 맞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또 하나는 神經多樣性이라는 觀點에서 障礙人에 對한 새로운 視角이 열렸다는 거예요.”

    무릎을 치고 눈시울을 적시며 飜譯을 마친 뒤 사람들에게 이 冊의 內容을 알리기 위해 韓國에 와서 大衆 講演을 다녔다. 그때마다 어떻게 字廢人의 處地를 그리 正確히 알고 共感하느냐는 質問을 많이 받았다. 어디 남의 일인가. 障礙를 겪는 子息을 둔 父母의 罪責感과 後悔의 나날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自身이 大衆 講演에 素質이 있다는 것도 發見했다. 올바른 醫學 知識을 傳達하고 似而非 科學과 싸우는 데 冊과 講演이라는 두 가지 武器가 생긴 것이다.

    ‘뉴로트라이브’가 大衆的으로 成功을 거두진 못했지만 自閉에 對한 認識 變化에 조금은 寄與했다고 치고 이제는 사람들에게 自廢의 全體 줄거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때 퓰리처賞을 受賞한 ‘自廢의 거의 모든 歷史’(존 돈半과 캐런 저커 共著)를 發見했다. ‘뉴로트라이브’가 自廢의 槪念이 科學的으로 定立된 歷史를 다룬다면, ‘自廢의 거의 모든 歷史’는 自廢의 民衆史라고 할 수 있었다. 暴力과 虐待, 搾取와 疏外, 犧牲과 悲劇과 施行錯誤로 얼룩진 自廢의 波瀾萬丈한 歷史이자 疾病이자 詛呪였던 ‘어떤 狀態’가 祝福의 對象으로 變해온 人間 解放의 歷史이기도 했다. 自閉에 對한 大衆 認識을 바꾸는 데 이만한 冊도 없다는 確信이 섰다. 860쪽이 넘는 大作에 挑戰했다. 이番엔 꿈꿀자유에서 直接 出刊할 計劃이었는데 問題는 돈이 없었다. 그때 북펀딩을 통해 製作費를 마련하는 方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딱 製作費만큼 1400萬 원이 모였다. 이 冊으로 그는 2021年 韓國出版文化賞(飜譯 部門)을 受賞했다.

    初版도 消盡하지 못하고 사라졌던 ‘사랑하는 사람이 精神疾患을 앓고 있을 때’도 讀者의 後援으로 復活했다. ‘免疫抗癌劑가 온다’를 飜譯한 뒤 末期癌 患者에게 도움이 될 講演을 하러 韓國에 왔다가 임찬수 軍의 父母를 만났다. 齒科醫師인 夫婦의 아들은 精神疾患을 앓다 아파트에서 投身해 스스로 生을 마감했다. 그들 夫婦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캐나다로 돌아온 後로도 그 父母의 苦痛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精神疾患으로 苦痛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를 復刊하고 싶었지만 亦是 돈이 없었다. 그때 찬수 軍의 父母가 아무런 條件 없이 費用을 支援했다. 2020年 復刊된 ‘사랑하는 사람이 精神疾患을 앓고 있을 때’ 첫 章은 ‘임찬수(1996~2019) 이제는 별이 된 젊은 靈魂에게’라는 獻辭로 始作한다.

    “옛날에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

    강병철 氏가 最近 飜譯한 冊은 사이먼 배런코언의 ‘패턴 詩커’다. 心理學者이자 케임브리지大學 自閉硏究所 所長인 배런코언은 現存하는 最高의 自閉 硏究者로 꼽힌다. ‘패턴 詩커’에서 배런코언이 꺼내 든 話頭는 ‘自閉는 어떻게 人類의 進步를 이끌었는가’다. 실리콘밸리처럼 尖端技術 分野에서 큰 成功을 거둔 사람들이 모여 사는 地域에 自閉 有病率이 높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뉴스도 아니지만, 그들의 特性을 ‘體系化 메커니즘’으로 說明한 것이 異彩롭다. 이 冊은 出刊된 지 한 달도 안 돼 3刷를 찍으며 조용한 話題를 일으키고 있다.

    “얼마 前까지만 해도 ‘自閉 敍事’ 같은 걸 누가 읽겠어라고 했죠. 저는 ‘어딘지 若干 다른 사람들, 主流와는 若干 다른 사람들’이라는 表現을 좋아하는데요, 이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데 많은 이들이 共感하는 게 아닐까요. 나와 다른 사람을 認定하는 것이 곧 나를 認定하는 것이거든요. 왜냐면 우리는 누구나 다 남하고 全혀 다른 存在잖아요.”

    이제 딸의 近況을 물을 次例다. 中學校 1學年 때 發病한 딸이 올해 서른 살이 됐다.

    “큰애는 妄想을 이겨냈어요.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아빠 事實은 내가 믿고 있던 프로젝트(妄想)라는 건 없는지도 모르겠어. 그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너무 나는 거예요. 1~2年 지난 뒤엔 ‘옛날에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더라고요.”

    큰애가 妄想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굿도 아니고 奇跡도 아니고 藥物 治療였다. 강병철 氏는 斷乎하게 “現在로서는 그 方法밖에 없다”고 말한다.

    “10年이면 3600日쯤 되잖아요. 藥을 服用하면 每日 3600分의 1씩 좋아지는 거예요. 效果가 눈에 안 보이죠. 하지만 좋아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해요. 醫師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하는데 저 亦是도 아이가 아플 때 親戚의 勸誘로 ‘굿’을 할까도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겐 科學을 믿어야 한다, 科學的으로 思考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내 子息 일에는 그럴 수 없는 心情을 理解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죠. 正말 그럴수록 더욱 더 科學의 힘을 믿어야 해요. 精神疾患 藥을 먹는 것은 두꺼운 털外套를 세 벌 껴입고 물에 푹 적신 뒤 꽁꽁 얼린 채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힘든 거예요. 그러니 精神疾患者에게 ‘藥을 잘 먹으면 된다’는 말도 쉽게 할 것은 아닙니다. 그 苦痛을 理解해야 해요. 그렇다고 藥을 끊으라고 勸하는 것은 危險千萬한 일입니다. 어려워도 藥 속에 길이 있어요. 患者들은 힘드니까 藥을 꺼리죠. 그 心理에 便乘해서 現代醫學을 攻擊하고 藥을 끊으라고 꼬드기는 似而非 科學, 商業 育兒가 사람을 잡습니다.”

    每日 3600分의 1씩 好轉된 큰딸은 ‘自身의 腦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서’ 認知科學을 專攻했다. 스물아홉 살이 된 둘째는 心理學을, 스물세 살인 막내는 컴퓨터工學을 專攻했다. 캐나다 生活 16年째. 훌쩍 커버린 세 딸이 아빠가 飜譯한 글을 보며 뉘앙스를 고쳐준다. 英語 實力도 아빠를 훌쩍 넘어버렸다. 聽診器를 놓은 걸 後悔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강병철 氏는 이렇게 對答한다.

    “마흔 살이 될 때까지는 그냥 定해진 길을 熱心히 갔다면 마흔 살 以後 캐나다로 가면서부터 비로소 내가 그린 삶의 地圖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젊은 醫師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거예요. 國內에 紹介하고 싶은 冊이 50卷쯤 되는데 그 目錄을 보면 저는 只今도 가슴이 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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