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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藝術 黃金기와 프랑스 印象派를 만나다|신동아

富者와 美術館

덴마크 藝術 黃金기와 프랑스 印象派를 만나다

오드럽가드 美術館

  • 入力 2017-02-03 10: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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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男便은 藝術品을 蒐集하고 아내는 庭園을 가꿨다.
    • 덴마크 코펜하겐 北쪽 外郭에 있는 오드럽가드 美術館은 財閥이자 컬렉터였던 빌헬름 한센이 邸宅을 짓고 所藏한 美術品을 展示하면서 始作됐다.
    • 한센은 1918年 開館 演說에서 自身의 컬렉션을 國家에 寄贈하겠다고 宣言했고 그 約束을 지켰다.
    美術館을 찾아다니는 일은 즐거움이면서 苦行이기도 하다. 都市에 있는 美術館은 쉽게 찾아갈 수 있지만 시골 奧地의 美術館은 찾아가는 日부터 決코 만만치 않다. 英語圈이 아닌 나라에다 날씨라도 궂으면 수고로움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오드럽가드 美術館(Ordrupgaard Museum of Art)에 가는 날은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汽車를 탔는데 20餘 分 만에 조그마한 시골 都市에 到着했다. 그런데 驛務員도 없고 英語 案內板도 없었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야 하는데 물어볼 데도 없었다. 비를 맞고 이리저리 허둥대는 우리 모습이 惻隱했던지 지켜보고 있던 隣近 雜貨 가게 할아버지가 親切하게 길을 案內해주었다.

    빗속을 뚫고 길을 건너 버스 停留所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388番 버스가 왔다. 덴마크는 시골버스度 참 세련되고 藝術的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技士 아저씨도 親切했다. 시골길을 달려 푸른 숲 以外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 停留所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조그맣게 쓰인 美術館 標識板이 눈에 들어왔다. 화살標를 따라 걸어가니 美術館 入口가 나타났다. 建物은 보이지 않고 入口 안쪽도 온통 아름드리나무만 가득했다. 그 속을 뚫고 한참 걸어들어가면 大邸宅이 눈앞에 우뚝 서 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高聲 같은 집이다.

    이 邸宅이 바로 오드럽가드 美術館이다. 너무 이른 時間이라 아직 門을 열지 않아 먼저 邸宅 周圍 庭園을 둘러보았다. 規模로 보나 그 아름다움으로 보나 大富豪의 집이 틀림없었다. 작은 王宮 規模의 邸宅과 庭園이었다. 庭園에는 다양한 彫刻이 配置돼 있었다.



    컬렉터의 꿈, 邸宅 美術館 

    오드럽가드 美術館은 財閥이면서 有名한 컬렉터였던 빌헬름 한센(Wilhelm Hansen·1868~1936)李 邸宅을 짓고 美術品을 展示하면서 始作됐다. 돈을 많이 벌면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 그中 代表的인 것이 집 짓는 것과 藝術品 蒐集이다. 한센度 그런 誘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먼저 藝術品을 蒐集하고, 이를 展示하기 위해 큰 邸宅을 지었다.

    한센은 否認(Henny Hansen)과 함께 코펜하겐에서 北쪽으로 20餘km 떨어진 이곳에 敷地를 마련하고 建築家 트베데(Gotfred Tvede·1863~1947)에게 依賴해 1916年부터 2年에 걸쳐 邸宅을 完工했다. 그리고 그 地域 名稱을 따서 오드럽가드라고 명명했다.

    또 한센은 專門 庭園師(Valdemar Fabricius Hansen·1866~1953)를 雇用해 집 周圍에 크고 아름다운 庭園을 造成했다. 1918年 開館 演說에서 한센은 自己가 蒐集한 藝術品은 모두 國家에 寄贈하겠다고 宣言했다. 오드럽가드는 한센 夫婦가 함께 만들고 다듬어온 個人 美術館이지만 只今은 國家 美術館이다. 이 美術館은 19世紀에서 20世紀 初까지의 덴마크 作品과 프랑스 作品을 主要 所藏品으로 하고 있다.



    戰爭 中 프랑스 作品 集中的으로 蒐集

    어느 나라나 새로운 産業이 일어나면 큰 財閥이 생겨난다. 美國은 石油가 나오면서 록펠러 財閥이, 自動車가 나오면서 포드 財閥이 만들어졌다. 한센은 덴마크에 保險業이 들어오면서 財閥이 됐다. 保險會社 두 個를 일구어 덴마크의 代表的 保險會社로 키워낸 한센의 足跡은 매우 두드러진다.  

    保險業은 現金 流動性이 가장 높은 事業이다. 保險料는 繼續 들어오는데 保險金은 未來에 支拂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이 繼續 쌓인다. 그래서인지 保險業으로 成功하면 財閥로 登極하고, 다른 事業으로 財閥이 돼도 保險業을 始作한다. 우리나라도 三星 財閥은 ‘삼성생명보험’과 ‘삼성화재保險’을 가지고 있다.

    한센은 매우 부지런하고 獨立的이며 未來를 내다보는 眼目을 가진 事業家였다. 이런 性格은 事業뿐만 아니라 美術品 蒐集에도 安城맞춤이다. 그는 事業家로도 成功했고 컬렉터로도 成功해 훌륭한 컬렉션을 後世에 남기고 있다.

    나중에 畫家가 된 어릴 적 親舊로 因해 한센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親舊의 紹介로 많은 畫家와 親하게 지내면서 그들의 作品을 蒐集했다. 처음에는 덴마크 作品에만 關心을 가졌지만 나중에는 프랑스 作品에도 魅了됐다. 덴마크 作品은 1892~1916年 사이에 主로 사 모았는데 19世紀 初 덴마크 藝術의 黃金期(Golden Age of Denmark) 作品과 한센 時代 컨템퍼러리 作品들이 主 對象이었다. 夫婦가 함께 平生 그림을 蒐集했다.

    한센은 파리 出張을 契機로 印象派 그림을 接하고 魅了됐다. 프랑스 作品은 第1次 世界大戰 中인 1916年에서 18年 사이에 集中的으로 蒐集했다. 덴마크人들에게 프랑스 아방가르드 作品을 紹介하는 것이 主目的이었다. 거기에다 戰爭 渦中에 좋은 그림들이 歇값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먼저 시슬리,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等 印象派 畫家의 作品을 사 모았다. 北유럽에서는 프랑스 美術의 첫 컬렉션이었고 最高의 컬렉션이었다.


    女性의 視線으로 女性을 그린 모리조

    오드럽가드가 所藏한 19世紀 프랑스 作品 가운데 特히 印象派 作家들의 그림은 한센이 心血을 기울여 蒐集한 것들이다. 女性化가 모리조(Berthe Morisot·1841~1895)의 ‘The Red Jacket, Portrait of Mlle Isabelle Lambert’라는 題目이 달린 어린 少女의 肖像畫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作品이다. 이 그림은 1886年 여덟 番째이자 마지막으로 開催된 印象派展에 出品됐다. 이 무렵은 모리조가 스승 마네의 그늘에서 벗어나 自身의 畫風을 構築한 時期였다. 모리조가 男性 主導的 畫壇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充滿한 自信感을 誇示하는 作品이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 르누아르 스타일 같지만 仔細히 보면 確然히 區分되는 畫風이다.

    모리조는 프랑스의 裕福한 家庭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림 敎育을 받았고 畫家로서도 大成했다. 1864年 처음 파리 살롱에 作品이 展示된 後 1874年까지 6番이나 살롱에 作品이 展示됐다. 살롱은 國家가 主管하는 가장 權威 있는 展示會다. 하지만 印象派에 參與하면서부터는 살롱과 멀어졌다.

    肖像畫의 모델은 이사벨라 람버트라는 17歲 少女다. 이 時期에 모리조는 이 少女를 모델로 여러 點의 그림을 그렸다. 모리조는 自身이 女性이기에 男性과는 다른 觀點에서 女性을 그린다는 確信이 있었다. 卽 性的 魅力을 가진 女性이 아니라 한 人間으로서의 女性, 卽 女性도 個性이 뚜렷한 人間이라는 點을 浮刻했다. 이 肖像畫에서 모리조의 意圖는 매우 强烈하게 表現되고 있다. 女子는 새欌에 갇힌 새가 아니라 새欌 밖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意志의 人間임을 表現하기 위해 새欌도 그려 넣었다.

    모리조는 마네의 弟子 兼 同僚였으며 나중에 마네의 동생과 結婚했다.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은 엄마는 勿論 르누아르, 마네 等 印象派 畫家들의 모델이 됐다. 오늘날 모리조는 印象派 女流畫家 가운데 最高의 待接을 받고 있다. 2013年 크리스티 競賣에서는 모리조의 作品이 120億 원에 팔렸다. 그때까지 女流 畫家로서는 最高의 作品 價格이었다.



    아름다운 숲 속 定員과 超現代式 神官

    男便이 아무리 美術 愛好家라 해도 夫人이 同調하지 않으면 컬렉션은 쉽지 않다. 컬렉션에는 莫大한 돈이 들어가는데 夫人 몰래 하는 데에는 限界가 있기 마련이다. 財閥이 아닌 아마추어 컬렉터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림을 좋아하는 親舊가 夫人이 무서워 購買한 그림을 집에 가져가지 못하고 내게 맡겨 놓을 때 나는 오랫동안 못 가져가기를 바란다. 그 그림을 내 것처럼 걸어놓고 鑑賞할 수 있기 때문이다.

    多幸히 한센 夫人은 그림을 아주 좋아했다. 그 德分에 오드럽가드가 存在할 수 있었다. 한센은 열아홉 살 때 두 살 아래인 否認 헤니를 劇場에서 만나 곧 約婚했다. 두 사람은 4年 後(1891) 結婚해 오드럽가드를 짓고 헤니는 庭園 가꾸는 일에 沒頭했다. 그 庭園이 只今은 鬱蒼한 숲이지만 처음에는 薔薇定員, 菜蔬밭, 果樹園, 逍風 場所 等으로 使用됐다. 풀밭과 蓮못도 造成됐다. 헤니의 손길이 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1936年 한센이 죽자 헤니는 오드럽가드에 혼자 남아 오드럽가드를 가꾸는 일에 더욱 더 精誠을 쏟았다. 1951年 夫人까지 죽자 所藏品, 邸宅, 庭園 等은 한센의 遺言대로 모두 덴마크 政府에 寄贈됐다. 1953年부터 오드럽가드는 國家美術館으로 새 出發했다.

    2005年 오드럽가드는 邸宅 옆에 새 建物을 竣工했다. 世界的 名聲을 가진 이란 出身의 英國 建築家 자하 하디드(Zaha Hadid·1950~2016)의 作品이다. 韓國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設計한 바로 그 建築家다. 새 建物은 超現代式 建物로 통琉璃와 검은 콘크리트를 많이 使用했다. 담쟁이로 둘러싸인 本館 建物과는 全혀 다른 스타일이다. 比喩하자면 洋服에 갓 쓴 格인데, 意外로 두 建物은 絶妙하게 調和를 이루고 있다. 이런 데서 建築家의 實力이 드러나는 模樣이다.

    새 建物은 美術館의 空間 問題와 安全 問題를 한꺼번에 解決했을 뿐만 아니라 美術館 雰圍氣도 現代式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제 國際 水準의 企劃展도 마음 놓고 開催할 수 있게 됐다. 새 建物에는 로비, 展示室, 카페, 記念品 가게 等이 있고 通路로 旣存 邸宅의 展示室과 連結돼 있다.



    崔 情 票
    ● 1953年 慶南 河東 出生
    ● 美國 뉴욕주립대 博士(經濟學)
    ● 公正去來委員會 非常任委員, 建國大 상경大學長
    ● 著書 : ‘經濟民主化, 政治人에게 맡길 수 있을까’ ‘財閥들의 特別한 外道’ ‘韓國 財閥社 硏究’ ‘公正去來政策 虛와 실’ ‘韓國의 그림價格指數’ 等
    ● 現 건국대 經濟學科 敎授, 經實聯 共同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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