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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孤獨에 中毒되지 않았다|신동아

쇼펜하우어는 孤獨에 中毒되지 않았다

[에세이]

  • 강용수 고려대 哲學硏究所 硏究員

    入力 2024-02-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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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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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出刊했을 때 큰 期待를 하지 않았지만 漸次 大衆의 人氣를 끌면서 그 理由가 궁금해졌다. 많은 사람이 왜 200年 前 獨逸 哲學者의 이야기가 오늘날 韓國에서 크게 注目받느냐고 내게 물었을 때 對答하지 못했다. 나 自身도 알고 싶어서 되묻기도 했다. 요즘 “사는 것이 苦痛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直言에 共感하는 사람이 많다. 單純히 慰勞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眞實을 直視하라’는 그의 助言이 큰 共感을 얻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孤獨을 통해 人間이 自身을 省察할 수 있다는 洞察은 慰勞와 힐링의 메시지로 들린다.

    人間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 他人과 어울리는 것도 즐긴다. 孤獨과 社交性은 銅錢의 兩面이다. 쇼펜하우어는 幸福의 條件인 ‘마음의 平穩’을 얻기 위한 充分條件으로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强調한다. 自足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他人으로부터 獨立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人間은 여러 理由로 他人에게 依存하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欲望을 渴求하는 懦弱한 存在이기도 하다. 人間은 孤獨의 끝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하려는 欲望을 갖는데 ‘홀로서기’와 ‘함께하기’ 사이에 일어나는 葛藤을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 寓話’를 통해 풀어낸다.

    고슴도치가 찾은 適當한 距離

    추운 날씨에 얼어 죽지 않으려고 고슴도치들이 달라붙어 하나가 되지만, 그들의 가시가 서로 찌르는 것을 느껴 떨어진다. 그러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한 덩어리가 됐다가 흩어지기를 反復하다가 結局 相對方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適當한 距離를 찾는다는 內容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자주 만나고 親해질수록 마음에 傷處를 주는 일이 생겨난다. 사이가 가까울수록 分別力이나 判斷力을 더 크게 잃게 되기 때문이다. 社會를 이루는 사람은 어떤 理由에서든 다른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가시’로 다른 사람을 찌르게 된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虛榮心이나 誇示欲은 남의 自尊心을 깎아내리고 猜忌心을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과 親密한 關係를 맺다 보면 結局 相對에게 自身이 바라는 어떤 모습을 要求하게 된다. 相對方을 自身의 所有物로 여기다 보면 아픔을 주는 行爲를 自身도 모르게 하게 된다.

    고슴도치 寓話가 傳하는 智慧는 他人과 너무 가까이하지 말고 일정한 距離를 두며 늘 ‘禮儀’와 ‘鄭重함’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뜨거운 사이는 쉽게 식을 수 있고 오히려 冷冷한 關係가 오래 이어질 可能性이 높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距離두기의 必要性을 불에 比喩하기도 한다. 늘 距離를 두는 賢明한 사람과 달리 어리석은 者는 불에 손을 집어넣고 火傷을 입은 다음에야 人間關係의 不必要함을 느껴서 ‘고독’으로 逃亡간다.



    孤獨이야말로 幸福의 참된 條件이다. “人間은 혼자 있을 때만 穩全히 그 自身일 수 있다. 그러므로 孤獨을 사랑하지 않는 者는 自由도 사랑하지 않는 者”라면서 “우리의 모든 不幸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고 쇼펜하우어는 홀로서기의 必要性을 强調한다. 孤獨은 自身을 發見하고 自身을 사랑할 수 있는 高貴한 經驗을 준다. “幸福이란 自己 自身에게 滿足하는 사람의 것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볼 때 幸福의 길은 自身에게로 되돌아가는 法을 찾는 데 있다. 孤獨을 避해 사람들을 자꾸 만나고 싶은 것은 內面의 無意味를 바깥에서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바깥의 他人을 통해 幸福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自身의 內面의 空虛, 意識의 貧弱, 精神의 貧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接觸하는 時間을 줄이면 他人의 視線에 맞춰서 살아가는 일이 必要 없어진다. 또한 他人의 마음에 들기 위해 自身을 誇張하거나 他人에게 阿附하는 일도 없어진다.

    쇼펜하우어는 남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特徵을 偉大한 能力으로 評價한다. 혼자서도 幸福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知的 能力이나 想像力이 豐富하다는 뜻이다. 이 世上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存在는 愛人이나 親舊, 家族이 아니라 나 自身뿐이다. 友情, 사랑, 結婚으로 맺어진 關係라도 自身만의 祕密을 털어놓을 수는 없다. 孤獨 속에서 가장 크고 豐饒로운 가장 幸福한 狀態를 누릴 수 있는 理由는 自己 洞察이 可能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幸福의 條件으로 꼽는 세 가지는 첫째 他人이 나를 바라보는 ‘評判’, 둘째 내가 所有한 ‘財産’(돈), 셋째 내 自身이 어떤 사람(人格, 性格)인지 아는 것이다.

    自發的 孤獨은 幸福과 平靜心 源泉

    누구나 孤獨이 주는 寂寞함 속에서 危險이나 災殃이 모두 바깥에서 온다는 點을 洞察할 眼目을 갖게 되면서 이 世上에서 自身만이 全部라는 事實을 깨닫는다. 幸福의 中心錘를 밖에서 안으로 옮기게 된다. 다른 사람의 評價에 휘둘리거나 돈을 버는 데만 時間을 虛費하는 사람에게는 孤獨 속에서만 可能한 自己 洞察, 自己 認識이 不可能해진다. 더는 바깥에 依支하지 않고 自身 안의 힘을 믿고 自身에게 무엇이든 거는 사람이 眞正 幸福하다. 여기서 생겨나는 믿음이 自身에 對한 自矜心(Stolz, Pride)이다. 自尊感이 他人의 關係에서 깨어지는 일이 있지만 自身에 對한 確信인 自矜心은 흔들리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孤獨이 幸福과 마음의 平定의 源泉이기 때문에 젊은이는 孤獨을 견디는 法을 배우는 것을 주된 硏究課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忠告한다.

    여기서 ‘關係 中毒’과 ‘고독 中毒’을 區別할 必要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關係 中毒’의 原因을 혼자 있는 것이 단조롭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어울려 모여살기를 좋아하고, 但只 심심하기 때문에 함께 어울려서 時間을 虛費하는 데서 찾는다. 自身의 窮乏함에서 벗어나 심심풀이와 社交를 追求하면서 自身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心理에 呼應하고자 바깥에서 强力한 刺戟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가 ‘마음의 眞正하고 深遠한 平和이자 完全한 內面의 平定’을 ‘孤獨 속에서만 發見’하려는 試圖에는 問題가 없을까? 或是 쇼펜하우어의 孤獨 禮讚論이 筆者가 새로 만들어낸 ‘고독 中毒’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疑懼心이 든다.

    우리 社會는 요즘 非婚, 未婚 等이 늘어나면서 家族 構造가 크게 바뀌고 있다. 最近 中壯年層에는 孤獨死가 큰 社會問題가 되고 젊은이들 사이에는 隱遁型 외톨이가 늘어나고 있다. 韓國에서는 孤獨을 避할 수 없는 運命처럼 여기게 됐다. 早期 退職, 失職, 獨身, 非婚, 結婚과 出産 忌避 等 社會 現象과 맞물려 그 波長이 擴散됐다. 그러나 이러한 狀況은 自發的 孤獨이라기보다는 非自發的 孤立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非自發的 孤立은 쇼펜하우어가 禮讚한 孤獨과 距離가 멀다. 쇼펜하우어가 모든 種類의 孤獨을 肯定한 것이 아니다. “모든 人間關係를 끊고 혼자 살아라” “애써 어울리려고 하지 마라” “혼자가 幸福하다” 等 誇張된 解釋은 利己的 孤立을 助長할 뿐이다. 요즘 쇼펜하우어 冊의 烈風과 함께 孤獨의 力量이 지나치게 過大評價되는 傾向이 있는데 이를 警戒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冊과 現實이 달랐다는 點을 알 수 있다. 實際로 많은 사람을 사귀었고 인정받으려고 努力했지만 失敗했다. 結婚도 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기 때문에 伴侶犬 한 마리와 散策하는 것을 즐겼다. 孤獨을 人間에게 必要한 德目으로 强調한 쇼펜하우어가 老年에 많은 親舊들에 둘러싸여 幸福한 삶을 마무리했다는 點은 逆說的이다. 쇼펜하우어조차 人生이라는 추운 겨울을 혼자 지낼 수 있는 ‘精神的 溫氣’를 充分히 지니지 못했다. 더구나 우리 같은 平凡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憐憫과 鄭, 따뜻한 關心 없이 冷酷한 世上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고슴도치에게 배워야 할 點은 相對方에게 傷處가 되는 가시를 눕히는 ‘禮節’과, 다른 이와 함께 살기 위해 溫氣를 나눌 수 있는 ‘智慧’를 갖추는 일이다. 孤獨은 즐길 수 있는 사람에게는 自由를 주지만, 避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拘束이 된다. 늘 他人에 對한 配慮, 共感, 憐憫의 따뜻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쇼펜하우어가 孤獨과 社交性 사이에서 均衡을 잘 잡고 살았듯이 우리도 ‘關係 中毒’뿐만 아니라 ‘고독 中毒’에서도 벗어나려고 努力해야 한다.

    강용수
    ● 1968年生
    ● 高麗大와 同 大學院 西洋哲學 專攻, 獨逸 뷔르츠부르크臺 博士
    ● 現 고려대 哲學硏究所 硏究員, 同 大學校에서 講義 中
    ● 著書 ‘니체 作品의 再構成’ ‘니체의 『道德의 系譜』 읽기’ ‘쇼펜하우어가 들려주는 意志 이야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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