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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解體, 그리고 ‘韓國飮食’의 世界市民化|新東亞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解體, 그리고 ‘韓國飮食’의 世界市民化

  • 주영하 韓國學中央硏究院 敎授·民俗學 duruju@aks.ac.kr

    入力 2008-02-06 1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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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近代를 거치는 동안, 國境을 넘는 集團移住 經驗을 통해 東北亞 세 나라는 서로 飮食文化를 주고받았다. 日本과 中國에 形成된 韓人 移住者 共同體는 固有의 飮食文化를 선보이며 ‘에스닉 푸드(ethnic food)’ 이미지를 심었다. 그러나 2000年代 以後 暴發的으로 늘어난 大衆文化 交流와 觀光 烈風은 ‘民族飮食’의 옛 이미지 代身 ‘오늘날의 韓國人이 먹고 즐기는 飮食文化’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나간다. 바로 그 地點에서, 세 나라의 새로운 飮食文化 共感帶가 誕生하고 있다.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해체, 그리고 ‘한국음식’의 세계시민화
    只今 내가 머무는 곳은 日本의 南쪽 가고시마大學이다. 이곳에서 文化人類學科 東南아시아 地域을 硏究하는 中年의 舊瓦下라 수에오 敎授는 韓國 드라마 中에서 ‘내 이름은 김삼순’을 가장 즐겨 보았다고 했다. 그는 韓國語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의 집에 招待받아 日本式 찌개人 ‘나베모노(鍋物)’를 먹은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떡볶이’가 어떤 飮食이냐고 물었다. 初等學校 敎師인 그의 夫人 亦是 ‘떡볶이’이라는 飮食이름을 알고는 있는데, 먹어보진 못했다는 것이다. 아,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구나. 韓國 드라마가 日本에서 一帶 流行을 하면서 그들은 韓國人의 生活을 敎科書가 아닌 具體的인 事件과 狀況을 통해 理解하기 始作한 것이다.

    이런 일은 1995年 베이징에서도 經驗한 적이 있다. 一名 ‘대발이’로 通하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中國中央放送(CCTV)을 통해서 放映되자, 베이징의 知人들은 내게 韓國 家庭에서 아버지가 대단한 權威를 갖고 있음을 알았다고 異口同聲으로 말했다. 신발을 벗고 房에 들어가거나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매우 神奇했다는 感傷도 들었다. 甚至於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실 때는 正面으로 盞을 들지 않고 머리를 옆으로 돌려서 마시는 모습을 보며 可히 孔子가 다시 誕生한 氣分이 들었다는 所懷를 傳하는 老人들까지 있었다.

    드라마나 映畫를 ‘自國 內에서 消費하는 大衆文化’로 여기던 時節에는 想像할 수 없던 일들이 最近 東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 韓國 社會는 이것을 ‘韓流(韓流)의 成果’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 말에 반드시 同意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多國籍 文化가 消費의 對象이 되기 始作한 21世紀 사람들의 文化的 傾向을 보여주는 한 斷面이라고 생각한다. 歷史的으로 東아시아 사람들이 요즘처럼 자주, 쉽게 相對方의 文化를 알게 된 때는 없었다. 中國 唐나라 때 韓半島와 日本列島의 수많은 僧侶와 政治人, 知識人이 窓안(長安)을 비롯한 南北 실크로드를 통해 만났지만, 決코 只今과 같은 水準이 아니었음은 敷衍할 必要가 없을 것이다.

    19世紀 末, ‘帝國과 植民地’라는 兩 極端의 政治的 狀況에서 始作된 近代的 交流 亦是 決코 ‘互惠的 關係’라고 規定할 수 없는 限界가 있었다. 비록 ‘京城(京城)’이라는 한 空間에서 生活했어도 才操(在朝) 日本人들은 끼리끼리 모여 朝鮮人을 支配했을 뿐이다. 1883年 壬午軍亂을 통해 ‘漢城(漢城)’에 온 中國人들은 오로지 日本人과 朝鮮人 사이에서 自身의 商業的 利益을 챙기는 異邦人일 뿐이었다. 이 過程에서 생겨난 誤解와 嫉視는 서로를 ‘조센진’ 或은 ‘倭놈’ 或은 ‘支那人’이라는 賤한 指稱語로 부르게 만들었다.



    飮食 亦是 誤解를 增幅시키는 媒介物로 作用했다. 조센眞意 마늘 냄새를 操心해야 한다는 1920年代 日本의 朝鮮觀光 팸플릿 警告文은 只今도 도쿄에서 膾炙된다. 밥그릇을 들고 밥을 먹는 日本人의 ‘쪽발이다운’ 輕擧妄動을 只今도 韓國人은 잘 참지 못한다. 땟국이 반질반질한 ‘되놈’이 만드는 淸料理는 맛이 있지만, 그들과 사귀거나 가까이 하는 일은 決코 容認되지 않는 雰圍氣가 1980年代까지 서울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正確하게 말하면 2000年이란 時間軸을 境界로, 韓國人 삶의 ‘實在’를 들여다보는 日本人과 中國人이 늘기 始作했다. 映畫와 드라마로 대표되는 ‘韓流’가 流行한 時點과 이러한 傾向이 맞아떨어졌기에 더욱 韓國 社會를 熱狂시켰다.

    매스미디어가 提供한 韓國 드라마나 映畫를 본 그들이 ‘떡볶이’란 飮食 이름을 알게 된 것은 事實이다. 하지만 그들은 韓國의 白설기나 神仙爐같이 ‘傳統’이라는 修飾語가 붙은 飮食 이름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이 즐겨 보는 韓國 드라마나 映畫에는 이런 飮食이 잘 登場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서로의 속살이 드러나는 時代에 우리는 살고 있다.

    뉴커머, 자이니카, 김근희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해체, 그리고 ‘한국음식’의 세계시민화

    도쿄 신오쿠보의 한 韓國食堂. ‘7月15日 初伏’이라는 한글 案內文이 鮮明하다.

    日本에 사는 韓國人이나 朝鮮人의 視角에서 보면 도쿄는 오사카와 分明 다르다. 오사카 市內에는 이른바 ‘자이니카’(‘在日 코리안’을 줄여서 부르는 말. 在日同胞를 南北韓의 政治的 狀況을 考慮하지 않고 可能한 限 客觀的으로 부르려고 하면서 생겨난 用語)들이 集團으로 居住하는 朝鮮인촌이 있는 데 反해 도쿄 市內에는 그런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年이 되면서 도쿄 市內, 그것도 繁華街인 신주쿠와 가부키쵸를 南北으로 이어주는 ‘쇼큐안도리__301/NN 100餘 個가 넘는 韓國飮食店이 櫛比하게 자리 잡기 始作했다.

    2006年 여름에 만난 도쿄대학의 이토 아비토 敎授는 韓國의 ‘震度’를 40年 가까이 硏究하고 있는 文化人類學者다. 그는 “쇼큐안도리의 이런 現象은 正말로 놀라운 變化”라고 했다. 實際로 그前에는 도쿄 市內에 자이니카의 集團 居住地가 없었다. 者이니카는 勿論 外國人 居住地域도 別途로 形成되지 않았다. 도쿄는 에도時代부터 쇼군(將軍)의 直接 支配 아래에 놓여 있었고, 近代 以後에도 日本的인 特徵을 維持한 都市였기 때문이다.

    特히 이토 아비토 敎授는 ‘韓國 社會는 日本에 비해 地域的 基盤이 强力하게 作用하지 않는다’는 評價를 내린다. 이러한 傾向性은 日本의 자이니카에게서도 共通的으로 나타나는 現象이라고 했다. 이런 狀況에서 왜, 도쿄 市內 中心街의 한 거리가 韓國飮食村으로 바뀐 것일까. 여기에는 오로지 김근희라는 韓國人의 努力이 깔려 있다. 50代 初盤의 김근희는 쇼큐안도리에서 가장 큰 韓國飮食 專門 슈퍼마켓인 ‘韓國廣場(韓國廣場)’을 運營하는 社長이다.

    김근희 社長과 나는 1993年 겨울에 그가 運營하던 民泊에서 첫 因緣을 맺었다. 나는 그때 日本의 김치 붐을 調査하기 위해 도쿄에 갔다. 마침 그가 運營하는 民泊에 며칠 묵게 됐고, 그것이 契機가 되어 김치에 對한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當時 그가 運營하던 民泊은 只今의 도쿄 신오쿠보 驛에서 쇼큐안도리로 통하는 골목 안에 있었다. 그 民泊에서 첫 하루를 묵은 나는 이 집 마당에 가득한 김치 缸아리에 맨 먼저 눈이 갔다. 1993年만 해도 日本에서 김치 붐은 一時的인 現象에 不過했다. 이때 김근희氏는 民泊 앞 큰길, 只今 그의 夫人이 運營하는 ‘韓國學生食堂’ 자리에 조그만 韓國飮食 專門 가게를 運營하고 있었다. 그 程度로 그는 김치 電波에 미쳐 있었다.

    대단한 衝擊이었다. 그는 내게 가게 2層에 ‘韓國飮食文化硏究所’를 建立하겠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日本人들은 ‘文化’라는 말에 매우 큰 意味를 附與하기에, 이곳을 韓國을 알리는 窓口로 利用한다면 韓國김치는 勿論 韓國飮食 全部를 日本 社會에 成功的으로 安着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只今 槪念으로 말하면 이른바 ‘文化 마케팅 戰略’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에 同意하지 않았다. 어떻게 日本人들이 韓國飮食을 좋아하겠는가 하는 疑問 때문이었다.

    김근희氏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가 植民地라는 不幸한 狀況에서 日本에 온 자이니카 1世代에 屬하지 않는 것과 關係가 깊다. 그는 1981年 日本에 留學을 와서 名文 히토쓰바시大學에서 社會學 博士課程을 마친 知識人이다. 1965年에 韓日 修交가 이루어졌지만 韓國 社會에서 植民地 經驗의 그늘은 좀체 걷히지 않았다. 日本 社會 亦是 事情은 마찬가지였다. 勿論 日帝 强占期에 實施되던 朝鮮人에 對한 ‘國民化(國民化)’ 政策은 바뀌었고 者이니카를 外國人으로 認定하긴 했지만, 差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1950年代에 태어난 韓國人 가운데는 植民地 經驗을 直接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前 世代에 비해 좀 더 開放的인 사람도 많다. 特히 1970年代 以後 日本과의 文化的 交流가 增加하면서 遊學이나 事業을 目的으로 日本에 온 後 아예 定着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들을 日本 內 자이니카 社會에서는 뉴커머(New Comer)라고 부른다. 김근희氏 亦是 뉴커머에 屬하는 韓國人이다.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해체, 그리고 ‘한국음식’의 세계시민화

    도쿄 쇼큐안도리의 韓國 食品材料 專門 24時間 슈퍼마켓 ‘韓國廣場’ 內部.

    日本 社會는 에도時代 以來 徹底하게 地域的 基盤을 媒介로 만들어진 人的 關係가 하나의 틀을 形成하는 運營體制에 묶여 있다. 에도時代의 盟主였던 쇼군 도쿠가와(德川) 집안은 佛敎의 査察을 통해 사람들의 出生과 죽음, 한 家族의 財産을 管理하도록 했고, 神도(神道)의 神社(神社)로 하여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地域的 活動을 統制하도록 했다. 各 地域은 ‘韓(藩)’의 영주가 管理하며 稅金을 代身하는 ‘物件’을 만드는 職印(職人) 集團으로 分業化되었다.

    特히 都市의 商家(商家)는 同一 職業集團끼리 商人組織을 構成하도록 해 相互 協力과 牽制가 可能한 構造로 만들었다. 메이지(明治) 政府의 近代化 以後 各種 人的 關係는 ‘組合(組合)’이라는 近代的 組織을 통해서 더욱 强力하게 地域的 基盤과 結合했다. 이로 인해 적어도 ‘紳士’가 存在하는 地域의 商街는 오랜 歷史를 가진 人的 關係 아래에서 徹底히 組織的으로 運營됐다.

    김근희氏가 쇼큐안도리에 가게를 열면서 注目한 것은 이러한 日本의 商人組織이었다. 그는 그들 組織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 境遇 安定된 가게 運營을 하지 못할뿐더러, 地域社會에서 ‘이지메’를 當할 수밖에 없었다. 1世代 자이니카들이 日本 社會에 定着하기 어려웠던 理由 中 하나도 이러한 시스템이었다.

    스스로 日本 專門家를 自處하는 김근희氏는 쇼큐안도리에서 가게를 열고 얼마 되지 않아 現地 商人會를 찾아갔다. 流暢한 日本語로 自身이 商人會에 加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商人會에서는 外國人이 加入한 事例가 없기 때문에 어렵다는 答을 내놓았다. 비록 ‘外國人登錄證名’은 있지만, 그는 日本 社會에서 永遠한 異邦人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隨時로 찾아가 說得했고, 外國人이라는 特別待遇에 걸맞게 會費를 現地人에 비해 더 많이 내겠다는 提案도 했다. 結局 그들을 說得시킨 김근희氏는 單純한 加入에 머물지 않고 商人會의 各種 活動에도 積極的으로 參與했다. 그의 態度에 感動받은 現地人들은 10年이 지나 그를 商人會 副會長 자리에 앉도록 해주었다.

    도쿄 신오쿠보의 韓國飮食村

    2005年 7月 初旬, 도쿄의 우에노 驛에서 電鐵을 타고 신오쿠보 驛에 내린 나는 1993年 봄에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신오쿠보 歷史에 親近感을 느꼈다. 그러나 歷史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나오자 亞鉛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7月15日 初伏’이라는 한글 案內板을 붙인 ‘韓國家庭料理-그린食堂’은 그대로 서울의 어느 뒷골목을 聯想케 했다. 비록 看板 디자인이나 이미지는 日本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곳에 몰려 사는 韓國人들을 위한 案內임이 분명했다. 이 飮食店을 지나자 ‘엘도라도’라는 伽陀가나 相互를 붙인 가게가 있었다. 길거리에 나와 있는 廣告板부터 內部 物件들까지 온통 韓國 俳優들, 그中에서 男子 俳優들 寫眞으로 가득 채운 가게였다.

    아예 ‘韓流館’이라는 이름을 붙인 店鋪에는 韓國語와 韓國歌謠, 韓國飮食 等을 가르치는 講座를 연다는 案內板이 붙어 있었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일부러 이곳을 찾아온 顧客이 제법 많았다. 語學硏修를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한 韓國人 女大生은 “요사이 日本 女性들이 韓國 男子俳優들을 몹시 좋아해서 나도 疑訝할 程度”라고 했다. 週末이면 하루에 數百名의 손님이 오니 韓流 德分에 요사이 도쿄의 韓國人들이 무척 幸福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韓國飮食店과 民泊집으로 가득한 골목을 빠져나오면 쇼큐안도리의 대로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今方 눈에 띄는 곳은 감자湯을 파는 食堂이다. 온통 빨간色으로 裝飾한 看板부터 서울의 감자湯집과 닮았다. 신오쿠보에는 日本人을 對象으로 하는 韓國食堂뿐 아니라 語學硏修를 온 韓國의 젊은이들을 위한 食堂과 民泊집도 많다. 이곳에 갈빗집이나 室內 布帳馬車는 勿論 韓國式 가라오케까지 들어선 理由다.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해체, 그리고 ‘한국음식’의 세계시민화

    오사카의 한 호루몬야키 食堂.

    하지만 이곳의 主人公은 앞서도 밝혔듯 김근희氏가 運營하는 ‘韓國廣場’이다. 1990年代 初盤 그가 韓國食品 專門 슈퍼마켓을 열 때는 자이니카가 運營하는 韓國食堂의 主人들을 主顧客으로 생각했다. 材料만이라도 韓國 本土의 것을 使用한다면 맛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判斷했다. 事實 1世代 자이니카가 運營하는 韓國飮食店의 飮食은 日本式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때문에 뉴커머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이 點에 着眼해 그는 韓國에서 輸入한 食材料를 提供하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出發한 事業이 바로 只今의 ‘韓國廣場’이다.

    10餘 年 만에 엄청나게 變貌한 김근희氏를 그의 事務室에서 대면했다. 그는 만나자마자 自身의 目標는 韓國의 生活文化를 日本에 심는 것이라고 말했다. ‘룩앤필 코리아(look and feel Korea)!’를 슬로건으로 삼았다는 그의 態度에서는 禮儀 知識人 事業家다운 面貌가 묻어났다.

    이 슬로건이 오로지 김근희氏 個人의 感覺的 判斷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美國의 觀光人類學子 롱 루시는, 世界가 地球村化하면서 사람들이 자주 이문화(異文化) 旅行을 할 수 있게 됐고, 그 過程에서 보고 느낀 經驗이나 먹어본 現地 飮食을 歸國 後에도 繼續 消費하려는 意志를 보인다고 했다. 김근희氏의 ‘룩앤필 코리아!’는 2006年 日本의 韓國 마니아들에게 가장 適切한 表現이었던 것이다.

    드라마나 映畫 場面의 實際 場所에 가보고 싶어하는 日本人들의 態度는 이미 1980年代부터 形成된 自國 內 ‘드라마 투어’ 이벤트에서 만들어졌다. ‘겨울연가’가 放映되자마자 그 人氣를 豫感하고 韓流 專門雜誌를 企劃해 日本 最初로 무크지를 펴낸 교도通信社의 ‘BSfan’ 무크시리즈 編輯長 구라모토 요시코氏는 처음 韓國을 訪問했을 當時 ‘드라마 투어’가 全혀 準備돼 있지 않은 데 놀랐다고 했다. 그는 韓國觀光公社를 直接 訪問해 그러한 準備가 必要하다고 强調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970年代 以後 日本人들의 韓國 觀光은 大部分 男性 爲主의 ‘妓生觀光’이었다. 그러나 1997年 홍콩이 中國大陸에 返還되면서 젊은 女性 職場人들이 쇼핑觀光地를 홍콩에서 서울로 바꿨다. 植民地 時代부터 이어져온 妓生觀光 이미지가 탈바꿈하기 始作한 것도 이 무렵부터일 可能性이 크다. 只今이야 事情이 많이 달라졌지만, 적어도 ‘겨울연가’가 대단한 人氣를 누리던 무렵 日本人들이 가장 많이 訪問한 外國은 韓國이다. 그 過程에서 쇼큐안도리의 眞面目은 餘地없이 眞價를 發揮했다. 韓國에 直接 가지 않아도 韓國을 體驗할 수 있는 場所, 韓國 드라마나 映畫와 關聯된 各種 冊과 캐릭터들을 살 수 있는 곳으로 쇼큐안도리가 注目받기 始作했다.

    ‘조센진’의 ‘호루몬야키’

    ‘겨울연가’ 撮影 現場을 直接 보기 위해 韓國으로 觀光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 느낌을 지속시키고 싶을 때마다 쇼큐안도리를 찾았다. 연세대에서 社會學 博士課程을 밟고 있는 日本 韓流 專門家 히라打 유키에氏는 2004年 여름 도쿄에서 50代 日本人 女性 會社員과 인터뷰를 했다. 이 會社員은 韓國飮食度 만들어 먹고, 신오쿠보度 석 달에 한 番은 訪問해 韓流 商品을 사는 한便 韓國料理를 사먹는다고 했다.

    이렇게 신오쿠보에 있는 韓國 關聯 店鋪들을 찾는 주된 顧客은 日本人임에 틀림없다. 24時間 營業하는 김근희氏의 ‘韓國廣場’ 亦是 顧客의 60% 以上이 日本人이라고 한다. LA나 뉴욕, 베이징 等에 形成된 ‘韓人타운’과 신오쿠보가 다른 點은 現地 韓國人을 主顧客으로 하는 게 아니라 도쿄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데 있다.

    事實 韓國, 大陸中國, 日本 세 나라는 地理的으로나 歷史的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다. 마치 西유럽의 여러 나라처럼 知識에서나 日常에서나 宗敎에서나 共通의 歷史的 經驗을 共有한다. 그러나 以前 世代에는 大部分의 共通 經驗이 冊을 통해 이뤄졌다. 漢字를 媒介로 이루어진 共感은 決코 日常生活을 共有하고 理解하는 機會를 提供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20世紀 前半期의 不幸한 經驗이 相互 理解의 具體性을 더욱 멀어지게 했음은 不問可知다. 그 代身 相互 굳건하게 자리 잡은 것은 바로 ‘民族’이란 이름의 ‘이미지’였다.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해체, 그리고 ‘한국음식’의 세계시민화

    日本式 야키니쿠. 그 뿌리는 갈비나 불고기지만, 日本人들이 느끼는 이미지는 全혀 다르다.

    2004年 製作된 日本 映畫 ‘피와 뼈(血と骨)’에는 主人公 김준평으로 扮한 기타노 다케시가 濟州道 飮食인 애豬를 날로 먹는 場面이 登場한다. 只今의 韓國人들도 돼지고기나 그 內臟을 날로 먹는 모습을 보면 그다지 愉快하지 않을 텐데, 日帝 强占期의 日本人들은 어떠했으랴. 筆者도 2004年 제주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參席해 이 飮食을 맛본 적이 있다. 그 맛은 말로 表現하기 어려울 程度였지만, 貴한 材料로 만든 飮食이라는 現地人들의 말을 듣고 나니 不滿을 吐露할 수가 없었다. 日本人들은 動物 內臟을 가리켜 ‘號壘몬(ホルモン)’이라고 한다. 特히 자이니카 1世代들이 잘 먹는다고 해서 ‘號壘몬’이라는 말은 朝鮮人을 卑下하는 意味로도 쓰였다.

    곱창구이집이 櫛比한 서울 賞왕십리 곱창구이 골목은 只今도 韓國人들이 內臟句이를 좋아한다는 事實을 보여주는 證據다. 反面 에도時代 日本人들은 公式的으로 肉食을 할 수 없었다. 佛敎가 人間의 生死與奪權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1871年 메이지 維新 4年째 되는 해 12月에 天皇은 스스로 肉食을 實施하고 禁止令을 解除했다. 當時의 文明開化派들은 西洋人이 튼튼한 肉體와 發達한 知的 能力을 가진 것은 肉食을 한 德分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쌀은 自然親和的인 飮食이고 日本人은 西洋人에 비해 決코 野蠻的이지 않으므로 肉食을 하면 안 된다는 主張도 만만찮았다. 그래서 20世紀 初盤까지 肉食과 밀가루 飮食을 日常的으로 먹는 日本人은 많지 않았다.

    1920年代 以後 强制的으로, 或은 自發的으로 日本에 온 朝鮮人들이 現地人이 먹지 않고 버린 소나 돼지의 內臟을 구워 먹는 場面이 目擊됐다. 肉食이 完全히 普遍化하지 않은 日本人들의 눈에 內臟을 구워 먹는 朝鮮人의 모습은 衝擊的일 수밖에 없었다. 1923年 關東大地震 以後 朝鮮人에 對한 差別이 더욱 심해져 朝鮮人은 ‘號壘몬’이라는 卑下的인 表現으로 불렸다.

    하지만 戰爭이 끝난 後 日本人 勞動者들 사이에서도 호루몬을 구워 먹는 ‘호루몬야키(ホルモン燒き)’가 人氣를 모으기 始作했다. 고된 勞動을 마치고 燒酒로 몸을 추스를 때 內臟은 가장 좋은 按酒였다. 特히 內臟을 꼬치에 꿰어 말아 숯불에 구워 먹는 ‘區市야키(串燒き)’는 斷然 술按酒의 으뜸으로 庶民의 人氣를 누렸다. 只今도 후지산 觀光地나 마쓰里를 하는 神祠 앞, 或은 都市의 뒷골목 군데군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술집이 바로 ‘야키도리집(燒鳥の屋)’이다. 이 야키도리가 알고 보면 號壘몬야키에서 進化한 飮食이다. 자이니카 1世代의 痕跡이 여기에도 남아 있는 셈이다.

    호루몬야키와 함께 1930年代 자이니카 1世代에 얽혀 있는 이미지는 ‘야키니쿠(燒肉)’라는 고기구이를 통해 나타났다. 1930年代 後半 오사카의 朝鮮人 居住地域에는 갈빗집(燒肉屋)李 到處에 있었다. 이들 가게에서는 갈비를 숯불에 구워 主 메뉴로 내놓았다. 在日僑胞 食品學者人 정대성은 “이 무렵 오사카의 朝鮮式 料理집에서는 冷麵과 야키니쿠를 專門的으로 販賣했다”고 2001年 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이들 食堂이 開業한 後 2~3年도 지나지 않아 야키니쿠는 朝鮮人은 勿論이고 日本人들 사이에서도 큰 人氣를 누렸다. 테이블 가운데에 불판을 놓고 손님이 直接 구워 먹도록 하는 調理法이 獨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요즘처럼 ‘가루비(갈비)’나 ‘부루고기(불고기)’가 아니라 日本語 ‘야키니쿠’였다. 1世代 자이니카들은 日帝 强占期 때 日本 國民이 되도록 包攝됐으므로 그들의 飮食 亦是 日本 이름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2007年 7月 初旬 나는 新오사카가 바라다보이는 ‘히로쥬산혼마치(東十三本町)’의 술집 골목에서 호루몬야키를 販賣하는 食堂을 찾았다. 젊은이들이 술집 안팎에 서서 各種 꼬치구이를 按酒로 술을 마시는 場面에서 日帝 强占期 朝鮮人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決코 쉽지 않았다. 只今도 오사카 市內의 朝鮮人 居住地에는 야키니쿠를 販賣하는 가게가 많지만, 그 風靡는 相當히 韓國的으로 變했다.

    ‘ethnic’과 ‘national’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해체, 그리고 ‘한국음식’의 세계시민화

    베이징의 ‘朝鮮韓國’ 飮食店 한나산 入口. 드라마 ‘大長今’으로 익숙한 黨의(唐衣) 차림 從業員이 印象的이다.

    1990年代 以前까지 日本 社會에서 韓國人 或은 朝鮮人을 象徵하는 飮食은 마늘냄새에서 호루몬야키와 야키니쿠, 그리고 機務齒로 이어졌다. 韓國飮食의 이미지는 이 程度에서 固定돼 있었다. 흔히 文化人類學者들이 이야기하는 ‘에스닉 푸드(ethnic food)’는, 近代 以後 國家 사이의 境界를 넘는 集團移住를 背景으로 생겨난 用語다. 多民族 國家인 美國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出身 갱들이 闊步하던 時節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民族的 이미지를 消費하는 센터 機能을 했던 것이 代表的이다.

    그런데 이 ‘에스닉’이라는 用語에는 多樣性이라는 槪念이 깔려 있다. 섞여 있는 여러 民族이 가진 各各의 文化的 特質을 比較할 때 ‘ethnic’이란 表現이 가장 適切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에스닉 푸드’라는 用語를 韓國式으로 飜譯하면 ‘民族飮食’李 된다. 그러나 韓國人들이 느끼기에 ‘民族’이란 單語는 ‘national’의 意味가 剛하다. 北韓 社會에서 ‘民族飮食’이라 하면 에스닉 푸드가 아니라 固有한 自身의 飮食을 가리킨다. 이는 民族主義가 剛하게 자리 잡았던 日本 社會에서도 마찬가지였다.

    觀光이나 直接 接觸의 經驗보다는 오로지 ‘이미지’로만 다른 民族을 評價하던 時節, 韓國人이나 朝鮮人을 卑下하는 媒介物로 ‘民族飮食’이 쓰였다. 하지만 1980年代 日本 社會의 外國觀光 붐을 契機로 多國籍 文化에 對한 關心이 커졌고, 特히 2002年 韓日월드컵 共同 開催는 새로운 世代를 中心으로 相互 理解의 基盤을 提供했다. 그 過程에서 생겨난 韓國 大衆文化의 人氣는 韓國人과 日本人의 直接的인 接觸을 可能하게 만들었다.

    只今 日本에서는 이미지로 자리 잡은 韓國의 ‘民族飮食’이 아니라, 實際 韓國人의 生活에서 消費되는 飮食을 좋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다시 말해 20世紀 初盤 日本에서 形成된 ‘近代的 民族飮食’으로서의 韓國飮食에 對한 이미지가, 只今 日本에서는 急速度로 解體되고 있다.

    베이징의 冷麵집과 카오뤄

    1993年은 韓中 修交가 이루어진 이듬해다. 이 무렵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東南쪽에 있는 류리창(琉璃廠)에는 韓國人 觀光客이 連日 長蛇陣을 이뤘다. 朝鮮 後期 수많은 實學者가 베이징에 오면 류리창의 書店에 들러 西洋의 珍奇한 知識들을 涉獵했듯, 韓國人들의 關心은 骨董品은 勿論 古典的(古典籍)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즐거운 勞動을 하고 나면 大部分의 韓國 觀光客은 류리창 入口에 있는 베이징 ‘카오야(·#53671;鴨·오리고기구이)’로 有名한 ‘醉眼쥐더(全聚德)’라는 食堂에서 食事를 했다. 그 食堂의 길 건너 西쪽에는 造船 ‘카오뤄(·#53671;肉)’ 食堂이 있었음에도, 그리로 발길을 옮기는 韓國 觀光客은 많지 않았다.

    元來 카오뤄는 옌볜(延邊)과 선양(瀋陽)의 朝鮮 食堂村에서 그 調理法이 形成된 以後, 1980年代 改革開放 바람을 타고 베이징에 들어왔다. 옌볜 方式은 양념이 달고 肉質이 질긴 便이고, 선양 方式은 달지 않고 肉質이 부드러운 便이다. 베이징에서 成功한 朝鮮 카오뤄는 當然히 선양 方式이었다. 쇠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베이징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면 고기는 돼지고기처럼 부드러워야 하고 맛은 짜야 했다. 류리창 入口의 朝鮮 카오뤄 食堂을 찾는 顧客은 예전부터 主로 한족들이었다.

    1980年代 初盤 改革開放이 이뤄지기 以前, 베이징 市民들은 위아래 따질 것 없이 國家機關에 勤務하는 사람이 多數였다. 中國의 朝鮮族 가운데 베이징에 살 수 있었던 사람은 極少數의 大學敎授와 少數民族 關聯 政府機關에 勤務하는 公務員뿐이었다. 이들만을 相對로 朝鮮食堂이 運營될 수는 없었다. 톈안먼 西北, 베이징 兒童病院 交叉路에 있는 ‘朝鮮렁(朝鮮冷?)’ 食堂은 1950年代 中盤 以後 줄곧 그 場所에 있었지만, 마오쩌둥의 少數民族 優待 政策 德分에 생겨난 이 食堂의 冷麵은 서울式과는 다르다. 나는 1993年에 이 집을 찾은 적이 있는데, 非衛生的인데다가 冷麵 맛도 좋지 않았다. 當然히 베이징에 오래 산 韓國人들도 이 冷麵집을 잘 알지 못한다.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해체, 그리고 ‘한국음식’의 세계시민화

    한나산에서 돌솥비빔밥을 즐기는 中國人 손님. 이들에게 韓國飮食 食堂은 ‘TV에서 본 飮食을 먹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에 가깝다.

    事情이 이러했으니 1990年代 初盤 베이징에 오는 韓國人 觀光客을 對象으로 하는 韓國食堂이 곳곳에 자리를 잡기 始作한 것은 當然한 일이었다. 韓國 大企業에서 直接 運營하는 大規模 韓國食堂은 勿論이고, 中國에서는 小資本으로도 成功할 수 있다는 希望을 가진 사람들이 베이징 韓國人 集團 居住地 近處에서 韓國食堂을 開業했다. 그러나 그 出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韓國人 廚房長과 管理者를 直接 베이징으로 불러와야 했으므로 物價 差異에 비해 食堂 運營費는 서울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옌볜에서 온 朝鮮族들은 이 部分을 하나의 틈새로 생각하고 파고들었다. 只今은 달라졌지만, 적어도 2000年 以前에 베이징 西北쪽 郊外에 있는 中國言語文化大學 近處의 우다오커우(五道口)라는 洞네는 朝鮮族 商人들이 運營하는 이른바 ‘朝鮮食堂’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몰려 살던 韓國 留學生들을 對象으로 값싼 朝鮮飮食을 提供했다. 그러나 그 맛은 서울과 比較가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베이징의 中心 道路인 創案制(長安街) 周邊의 高級 韓國食堂의 飮食 값은 서울과 거의 비슷했다. 韓國人과 朝鮮人, 中國人의 合作을 통해 法的인 安定性과 서울의 飮食 맛을 維持하면서도 低廉한 人力 運營方式을 採擇하는 韓國飮食店度 생겨났다. 1996年을 전후해 베이징에서 韓國人이 運營하는 韓國飮食店은 어느 程度 安定的인 基盤을 確保하는 듯했다.

    그러나 1997年 韓國의 外換危機는 베이징의 韓國飮食店 가운데 韓國人이 獨自的으로 運營하는 業體들을 祖國으로 돌려보내는 데 決定的인 役割을 했다. 瞬息間에 많은 韓國飮食店이 門을 닫아버렸다. 그前까지 베이징의 大型 韓國飮食店은 韓國人에게만 意味 있는 곳이 아니었다. 中國人 中에서도 1人分 價格이 30달러 안팎인 韓國 갈비料理를 몇 人分씩 시켜 먹고 100위안짜리 인민폐가 가득한 가방을 카운터에 내보이며 計算하기를 즐기는 이가 많았다. 이들에게 當時의 高級 韓國飮食店은 飮食 맛을 즐기기보다는 富를 誇示하는 場所로 愛用됐다.

    이런 過程을 거쳐 韓國飮食에 對한 베이징 사람들의 關心은 以前에 비해 急激히 커졌다. 하지만 韓國飮食이 곧 ‘카오뤄’라는 베이징 사람들의 認識에는 큰 變化가 없었다. 이미 朝鮮族을 통해서 理解한 朝鮮飮食의 延長에서 1990年代 末 베이징의 韓國飮食店을 理解했을 뿐이다.

    中國人 中에서도 한족은 自身들의 文化的 境界를 대단히 넓게 設定한다. 오랜 歲月 한족과 非(非)한족을 區分해왔지만, 同時에 손쉽게 한족으로 包攝해버리는 能力도 뛰어나다. 20世紀 들어서 中國의 少數民族 中 하나가 되어버린 朝鮮族에 對해, 한족은 但只 ‘韓語(漢語)’를 한다는 事實만으로 廣義의 中國人으로 包攝해버렸다. 그러니 韓國飮食을 外國飮食으로 認定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韓國飮食은 朝鮮飮食의 延長이라는 認識이 如前하다.

    ‘朝鮮韓國’ 飮食店, 한나산

    2006年 5月, 나는 中國 中央民族大學 朝鮮文學과에서 專任講師로 있는 朝鮮族 박승권氏와 함께 베이징시의 가장 바깥을 빙둘러 난 제6순환도로의 西쪽 끝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建物 앞에 서 있었다. 外觀이 마치 中世 유럽의 宮殿 같은 이 建物은, 韓國式으로 말하자면 사우나와 各種 게임을 할 수 있는 複合 레저센터다. 이 建物의 主人은 박승권氏와 같은 大學 같은 科 同門인 30代 中盤의 朝鮮族 장문덕氏다. 入口에서는 警察官 비슷한 制服을 입은 젊은 靑年 둘이 擧手敬禮를 하고, 1層에는 예전 景福宮 앞 中央博物館 로비를 凌駕하는 規模와 施設을 갖췄다. 約 20分을 1層 로비에서 기다린 後 艱辛히 장문덕 社長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나려 한 理由는, 그가 2002年부터 베이징 ‘朝鮮韓國’ 飮食店의 으뜸으로 자리 잡은 ‘한나산(漢拿山)’이란 食堂을 運營하는 主人公이기 때문이었다. 讀者는 暫時 내가 使用한 ‘朝鮮韓國’이라는 用語가 매우 生疏할 것이다. 이 食堂의 飮食은 決코 韓國飮食이 아니다. 그렇다고 옌볜의 朝鮮飮食度 아니다. 두 飮食의 特徵을 複合했다고 하는 게 가장 適切할 것이다.

    장문덕氏는 中央民族大學에 入學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中國의 朝鮮族 中 水災에 屬했다. 그러나 그가 入學한 해가 바로 韓中修交가 이루어진 이듬해다. 그는 이내 工夫를 抛棄하고 韓國 觀光客 가이드를 하던 兄과 함께 事業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제법 많은 돈을 벌었지만, 競爭者가 많아지면서 輸入이 줄어들었다. 結局 그는 1995年 베이징 하이뎬取義 中央民族大學 近處 골목에서 ‘시골집’이라는 작은 飮食店을 開業했다. 近處에 있던 韓國人 갈빗집에 비해 값이 折半에도 미치지 않아 많은 韓國 留學生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事業을 크게 擴張하기에는 베이징 사람들의 收入이 많지 않았고, 韓國人이 直接 運營하는 韓國食堂들과 競爭하기에는 서울 맛을 그대로 낼 自信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1997年 經濟危機로 韓國食堂들이 베이징에서 갑자기 사라지기 始作했다. 이에 反해 베이징 사람들의 收入은 想像조차 할 수 없을 程度로 急激히 늘어났다. 이제 한 사람이 食堂에 와서 인민폐 100위안을 쓰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때 그가 着眼한 것이 韓國食堂의 메뉴와 인테리어를 흉내 내면서도 決코 韓國食堂만큼 비싸지 않은 食堂이었다. 于先 ‘카오뤄’는 이미 베이징에서 現地化한 선양의 朝鮮 카오뤄 方式을 擇했지만, 施設은 韓國人들이 가르쳐준 대로 煙氣가 甚하게 나지 않는 숯불 加熱式으로 갖췄다. 인테리어와 서비스는 韓國食堂 水準으로 하되 價格은 싸게, 맛은 朝鮮式으로 하는 한나산은 그렇게 태어났다.

    한나산은 2001年 베이징에 1號店을 낸 後, 2002年에 4곳, 2004年에 10곳, 2005年에 16곳에 分店을 開業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各 部位를 提供하는 ‘카오뤄’와 함께 注文해서 먹을 수 있는 飯饌은 김치, 콩나물, 조림 等 韓國食堂과 마찬가지다. 여기에 돌솥비빔밥이나 지짐이 같은 飮食은 韓國의 드라마나 映畫에 나오는 飮食들이다. 이에 비해 개고기무침은 典型的인 옌볜式 飮食이니, 이 食堂은 分明히 ‘朝鮮韓國’ 飮食店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食堂을 裝飾하는 이미지는 매우 韓國的이다. 女子 從業員들은 드라마 ‘大長今’으로 익숙한 朝鮮時代 宮女의 象徵 唐衣(唐衣)를 입었다. 或是 모든 從業員이 朝鮮族인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大部分은 漢族이라고 한다. 朝鮮族을 從業員으로 쓸 境遇 人件費나 서비스 面에서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는 經驗을 장문덕氏는 갖고 있었다.

    20代 後半의 男女 中國人 손님은 돌솥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집의 印象이 어떠냐고 물었다. 값이 베이징의 普通 食堂과 비슷하지만, 인테리어가 깨끗하고 從業員들의 서비스 態度도 매우 좋고, 맛도 좋단다. 이렇듯 中低價의 韓國食堂에서 텔레비전에서 본 韓國飮食들을 먹을 수 있으므로 자주 온다는 이야기였다.

    2006年 베이징에서 드라마 ‘大長今’의 人氣는 대단했다. 베이징의 最尖端 地域인 중관춘(中關村)의 비빔밥 專門店에서는 日曜日마다 비빔밥 만들기 競演大會를 여는데, 參加者가 끊이지 않았다. ‘커라이더(客來德, together)’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는 멕시코 飮食과 함께 韓國飮食이 메뉴에 올랐다. ‘埠頭怡蕩(部隊湯)’이란 이름으로 部隊고기찌개度 나오니 경이로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傾向은 韓國飮食이 베이징 사람들에게 하나의 ‘에스닉 푸드’로 理解되어 생겨난 結果는 아니다. 그보다는 經濟 成長과 2008年 베이징올림픽 特需가 맞물려, 이른바 ‘新派이베이징差異(新派北京菜·새로운 베이징 飮食)’의 하나로 一部 韓國飮食이 借用된 것이라고 보는 게 正確하다. 그것도 ‘傳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飮食보다는 요사이 韓國의 젊은이들이 즐겨 먹는 飮食에 베이징 젊은이들이 關心을 보이는 式이다.

    이 點은 도쿄의 ‘겨울연가’ 마니아들도 마찬가지다. 김근희氏 夫人이 運營하는 도쿄 쇼큐안도리의 ‘韓國學生食堂’은 室內가 드라마에 나오는 粉食집과 똑같다. 이곳에서 떡볶이나 닭발조림을 按酒로 韓國 燒酒를 마시면서 드라마 主人公과 비슷한 經驗을 한다고 錯覺하는 것이다. 비록 도쿄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베이징의 젊은이들 亦是 ‘傳統’ ‘韓國飮食’보다는 自身들 또래의 韓國 親舊들이 먹는 飮食을 더 즐긴다.

    日本의 大衆文化 硏究者인 이와부치 理事오이치는 1990年代 以後 東아시아 地域社會에서 매스미디어에 依한 文化的 混合이 展開되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卽 20世紀 내내 進行된 美國式 大衆文化의 形式이 東아시아 地域에서도 어느 程度 固着化하면서, 相互間에 文化的 接近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1990年代 以後 政治的 斷絶이 完全히 解消되고 人的 交流가 增加하면서 各 地域의 映畫, 드라마, 大衆歌謠 等이 類似한 次元에서 消費된다. 大衆文化의 混合과 共有 過程에서 사람들은 더 以上 ‘民族’이나 ‘傳統’이나 ‘歷史’의 意味를 大衆文化에 附與하려 하지 않는다.

    ‘民族’ 아닌 ‘市民’의 이름으로

    ‘大長今’은 決코 飮食을 主題로 한 드라마가 아니다. 2005年 7月에 만난 日本 NHK의 ‘大長今’ 擔當 PD는 그들이 이 드라마를 放映하기로 決定한 理由는 오로지 主人公 女性의 成功과 사랑의 스토리 때문이라고 했다. 飮食이라는 素材가 視聽者層을 넓힐 可能性은 充分히 있지만, 그렇다고 韓國의 傳統飮食이 좋아서 드라마 ‘大長今’의 人氣가 높은 것은 決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過程에서 視聽者는 好奇心을 가질 수밖에 없다. 問題는 여기서 생겨난다. 드라마를 보는 外國人들은 現在의 韓國飮食度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호루몬야키’와 ‘카오뤄’의 해체, 그리고 ‘한국음식’의 세계시민화
    주영하

    1962年 慶南 馬山 出生

    서강대 史學科 卒業, 漢陽大 碩士 (文化人類學), 中國 中央民族大學 博士(民族學)

    現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民俗學 專攻 副敎授

    日本 가고시마臺에서 규슈 地域 飮食文化 現地調査 進行 中

    著書 : ‘飮食戰爭 文化戰爭’ ‘中國 中國人 中國飮食’ ‘飮食 속의 그림, 그림 속의 歷史’ 等


    나는 드라마 ‘大長今’李 外國에서 人氣를 얻은 結果 오히려 韓國 內部에서 더 많은 ‘傳統’ 談論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點은 決코 有益한 文化的 現象이 아니다. ‘傳統’은 歷史에 實在한 것이기보다는 最近에 누군가의 必要에 依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可能性이 더 크다. 그런데 韓國 社會에서는 如前히 ‘民族’이란 이름을 내세워 韓國飮食을 ‘傳統畫’하는 데 政府와 知識人들이 앞장선다. 배용준을 좋아하는 日本人 마니아들은 決코 韓國을 消費하러 韓國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但只 俳優 배용준과 그의 드라마나 映畫를 몸으로 느끼고 體驗하기 위해 韓國에 올 뿐이다.

    只今 東아시아에서는 近代的 이미지로 包裝됐던 ‘民族飮食’李 解體되고 있다. 그 代身 各自가 消費하는 飮食은 한 사람의 ‘市民’을 象徵하는 媒介物로 자리 잡아간다. 飮食文化로는 더 以上 民族이나 國家를 表現하기 어렵게 됐다. 映畫나 드라마를 통해 그 實體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只今이 곧 絶好의 機會다. 많은 外國人이 映畫나 드라마를 통해서 接한 普通 韓國 市民의 生活 그 自體와 그들의 飮食에 至大한 關心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點에 注目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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