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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신동아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人間의 얼굴을 한 經濟

  • 하종강 한울勞動問題硏究所長, 仁川大 講師 haclass@hanmail.net

    入力 2008-02-04 17: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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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느린걸음, 223쪽, 1萬2000원

    大學 授業時間에 한 經濟學者를 招請해 韓美FTA에 關한 特講을 하도록 한 적이 있다. 世界와의 競爭을 통해 先進 社會로 進入하기 위한 韓美FTA가 競爭에 살아남은 大企業에만 有益할 뿐, 農業의 疲弊와 非正規職 梁山 및 社會 兩極化 現象을 招來할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接近해야 한다는 內容으로 두 時間에 걸쳐 講義한 經濟學者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했다.

    “휴머니즘보다 더 위에 있는 經濟學은 없습니다.”

    이러한 主張에는 다음과 같은 問題提起가 뒤따른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經濟學이 社會的 弱者뿐 아니라 社會的 强者를 包含한 社會 全體 構成員 모두에게 有益할 것인가 하는 疑問이다.

    이러한 疑問에 對한 完璧한 正答일 수는 없지만, 2003年 ‘Nature’에 紹介된 美國 조지아 州立大學의 브로스넌(Sarah F. Brosnan)과 에모리 大學의 曰(Frans B. M. de Waal)李 進行한 實驗 하나가 눈길을 끈다. 硏究팀은 한 무리의 흰목꼬리感氣원숭이(Capuchina)가 태어나자마자 一切의 學習 經驗을 遮斷한 채, 우리에 가둬 飼育했다. 원숭이들을 두 集團으로 나눠 일정한 量의 조약돌을 준 다음, 원숭이들이 사람에게 이 돌멩이를 건넬 때마다 그에 對한 補償을 提供하는 方式으로 實驗을 進行했다.

    兩쪽 원숭이 集團에 모두 오이를 補償으로 提供했을 때는 아무 問題가 없었다. 하지만 한쪽 集團에는 오이를, 다른 쪽 集團에는 잘 익은 葡萄를 提供하자 오이를 받은 원숭이 무리 中에서 제 먹이를 땅바닥에 패대기치거나 우리 밖으로 내동댕이치면서 抵抗하는 個體가 나타났다. 狀況을 바꿔 여러 方式의 實驗을 해본 結果, 欲心이나 挫折 等 다른 要因이 아닌 ‘差別的 處遇’에 對한 不滿이 이 같은 行動을 惹起한다는 것을 最終的으로 檢證했다. 硏究팀은 平等意識이나 正義感이 ‘學習’ 以前에 人類 進化 過程에서 發達한 ‘本能’일 수 있다고 說明했다.



    愛情에 立脚한 經濟原理

    먹이를 共有하는 等 協同的인 種(種)들은 不平等을 嫌惡하도록 鎭火했을 可能性이 있다는 얘긴데, 이는 그런 正義로운 個體들의 平等을 具現하는 行爲가 共同體 全體 構成員에게 有益한 結果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른바 ‘最後通牒 게임(Ultimatum Game)’ 等을 통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人間에게 不平等을 拒否하고 서로 協同하는 利他的 本性의 遺傳因子가 있을 可能性이 있고, 經濟的 人間型(Homo Economicus)에 對比되는 互惠的 人間型(Homo Reciprocan)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主流 經濟學 敎科書의 ‘自由 競爭’ 原則이 恒常 맞는 것은 아니다.

    經濟學 分野의 이러한 苦悶을 누구보다 앞장서 開陳한 사람이 바로 ‘존 러스킨’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資本論’ 第 1卷이 世上에 나오기 7年 前, 일찍이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冊에 실린 네 篇의 論文을 통해 ‘愛情’에 立脚한 經濟 原理를 主張했다. 애덤 스미스 以後 맬서스와 리카도를 거쳐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는 正統 資本主義 經濟學에 對한 峻烈한 挑戰이라는 點에서 마르크스와 러스킨은 共通點을 갖는다. 그러나 러스킨은 始終一貫 人間의 靈性과 社會的 愛情에 立脚해 있다는 點에서 마르크스와 區別된다.

    러스킨이 보기에 近代 經濟學은 “人間이 뼈대만으로 構成돼 있다 假定하고” 그 土臺 위에 進步의 骨格을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頭蓋骨과 上膊骨로 幾何學的 形態를 數없이 組立하고 뼈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最大限 보여준 뒤, 微粒子로 이루어진 이들 構造物 사이에 靈魂이 다시 나타나면 얼마나 不便한지를 成功的으로 立證해 보이는 것”에 不過하다.

    “집 안에 빵이 한 조각밖에 없다고 해서 家族들 間에 ‘敵對關係’가 形成되거나, 힘이 第一 센 어머니가 빵을 차지하는 結果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人間의 社會的 關係에 對해 눈앞에서 벌어지는 “得失의 均衡에서 行動의 法則을 演繹하려는 努力”들은 한낱 헛수고가 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必然的 不平等?

    러스킨이 이 冊에서 始終一貫 貫徹하려는 것은 일하는 勞動者들에 對한 끊임없는 愛情이다. 이 冊의 題目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新約聖經의 天國을 比喩하는 說明에서 따온 것으로 現在 우리 社會 非正規職 勞動者의 또 다른 이름이다. 人力市場에서 일거리를 求하다가 가장 마지막에 葡萄밭에 일하러 온 일꾼에게도 다른 일꾼과 같은 품삯을 支給하는 것이 바로 天國의 經濟 秩序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正規職과 非正規職의 差別이 있을 수 없다. ‘나중에 온 사람’도 同等하게 待遇받는 ‘조화로운 不平等’의 社會가 훨씬 더 큰 社會的 富를 生産하게 된다는 것이 러스킨의 主張이다.

    “貧者는 富者의 財産을 侵害할 權利가 없다는 것은 오래前부터 周知되고 공언되어왔지만, 同時에 富者 亦是 貧者의 財産을 侵害할 權利가 없다는 事實도 周知되고 공언되기를 懇切히 바란다”는 것이나 “北쪽이라는 말이 반드시 南쪽이라는 反對말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浮遊’라는 말도 반드시 그 反對말인 ‘貧困’을 聯想시키는 相對語라는 事實”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警告 亦是 ‘人間的인 얼굴을 한 經濟學’의 한 斷面이다.

    自身의 그러한 생각이 極端的인 平等主義라는 非難에 對해서 러스킨은 “大領도 兵卒과 같은 俸給을 받아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일을 적게 하는 사람과 같은 報酬를 받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雇用하여 부리는 以上 일이 서툴러도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적은 報酬를 주면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反駁한다.

    “經濟學에 널리 퍼져 있는 誤謬의 大部分은 이런 不平等이 必然的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輕率하고도 不合理한 臆測에 根據를 두고 있다”는, 러스킨이 150年 前에 한 主張이 非正規職을 量産하고 있는 現在 우리 社會의 現實에 놀랍도록 똑같이 適用될 수 있다는 것이 감탄스럽다.

    따지고 보면,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을 편드는 知識人들의 主張은 어느 時代에나 있어왔다. 古代 그리스·로마 時代에도 “道具에는 말하는 道具와 말 못하는 道具가 있다. 奴隸는 말하는 道具이다. 따라서 병든 奴隸를 버리는 것은 故障 난 호미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哲學者들의 明快한 三段論法이 貴族들로 하여금 병든 奴隸를 硫黃鑛山 밖에 내다버리면서도 罪責感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寄與했다.

    “奴隸도 같은 人間이다”라는 主張을 편 哲學者들은 監獄에 갇히는 受侮를 겪었다. 하지만 結局 奴隸制度는 撤廢될 수밖에 없었으니 人類 社會의 變化를 긴 呼吸으로 바라보면 人間의 얼굴을 한 主張의 妥當性을 認定하지 않을 道理가 없다. 러스킨의 말을 敢히 흉내 내자면 ‘人間의 얼굴을 한 經濟學’李 妥當한 것은 ‘正直’이 언제나 옳은 德目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互惠的 勞使關係

    19世紀 後半 英國 社會에서 러스킨의 冊을 읽는다는 것은 靈魂을 가진 證據로 받아들여졌다. 勞動黨 國會議員들은 그들의 生涯에 決定的인 影響을 준 冊이 무엇이냐는 質問에 對해 거의 모든 議員이 ‘러스킨의 冊’이라고 答했다. 辯護士로 일하던 마하트마 간디는 列車 안에서 이 冊을 읽고 人生의 方向을 바꾸었다.

    오래前, 백남준의 作品 ‘첼로’가 實際로 한구석에 展示돼 있는 汝矣島의 茶집 ‘첼로’를 찾은 사람들은 主人의 높은 眼目 德分에 르 코르뷔지에의 소파에 앉아 茶를 마시는 豪奢를 누릴 수 있었다. 自身의 어린 時節을 “物質主義 속에서 溺死하는 時代”라고 慘酷하게 表現한 르 코르뷔지에 亦是 “우리의 어린 時節은 러스킨에 依해 訓育되었다”고 告白한 바 있다.

    더욱이 筆者에게 이 冊이 특별한 것은, 富裕한 家庭에서 태어나 人道主義的 傾向의 藝術評論에 一家를 이룬 러스킨이 勞動敎育을 통해 勞動者들을 만나면서 經濟的 構造와 그 運用의 病弊에 痛感하기 始作했다는 點 때문이다. 勞動者들에게 리카도의 글을 읽어주다가 한 女性 勞動者가 그에게 質問을 던지는 場面을 說明하는 대목에서 筆者는 27年쯤 全義 筆者 自身의 모습이 생각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人間이 自身의 最大 有益을 위해서만 行動한다면, 企業은 勞動者에게 最小限의 賃金을 주고 最大限 勞動을 시키려고 할 것이고, 勞動者는 最小限의 勞動만 提供하면서 最大限 賃金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實際로는 企業이 勞動者에게 높은 賃金을 保障하고, 勞動者는 더 많이 努力해 答하는 膳物交換(Gift Exchange) 方式, 곧 ‘人間의 얼굴을 한’ 互惠的 勞使關係가 모두에게 有益하다는 現代 經營學의 貴重한 깨달음 亦是 그 뿌리를 러스킨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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