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김경율의 마리 앙투아네트 發言을 생각한다|신동아

김경율의 마리 앙투아네트 發言을 생각한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非凡한 時代, 높은 자리에선 ‘平凡함’도 잘못

  • 노정태 經濟社會硏究院 專門委員·哲學

    jeongtaeroh@ries.or.kr

    入力 2024-01-28 09: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尹?韓 葛藤 招來한 김경율 ‘마리 앙투아네트 發言’

    • ‘김건희 죽이기’ 옳지 않지만…

    • 平凡하지 않은 平凡함이 ‘有罪’인 자리

    • 大衆과 멀어진 權力은 代價 치른다

    프랑스 화가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이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동아DB]

    프랑스 畫家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이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肖像畫. [東亞DB]

    “이른바 최순실 國政壟斷 촛불集會 나갔을 때, 촛불集會 가면 뒷풀이를 하잖아요? 그때 參與連帶 歷史學 敎授님 한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프랑스 革命이 왜 일어났을 것 같으냐’라고요. 우린 當然히 自由?平等 같은 理念을 聯想했는데, ‘아니다, 外的으로 標榜한 것은 그럴 수 있겠지만 當時 마리 앙투아네트의 奢侈, 亂雜한 私生活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建物을 털 때마다 드러나니까 感性이 暴發된 거야’라고 하시더라고요.”

    17日 김경율 國民의힘 非常對策委원이 JTBC 유튜브 채널 ‘장르만 汝矣島’와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유튜브라는 特性을 利用해서 조금은 어그레시브하게 해도 되나”라고 躊躇하며 꺼낸 이 發言은 매우 큰 波長을 불러왔다. 더불어民主黨뿐 아니라 汎(凡)野圈이 한몸이 돼 ‘김건희 特檢’을 외치고 있는 판에 ‘內部銃질’을 했다는 批判이 國民의힘 內에서 提起됐고, 及其也 尹錫悅 大統領과 한동훈 非對委員長의 全面 葛藤으로 飛火되고 말았던 것이다.

    23日 忠南 舒川 特化市場 火災 現場에서 尹 大統領과 한 委員長이 만나는 場面이 演出되면서 黨政 葛藤은 一旦 봉합된 듯하지만 分明한 事實이 確認됐다. 이番 事件은 이른바 ‘김건희 리스크’를 前面에 浮刻시켰다는 것이다. 勿論 그 餘波를 現在 時點에서 豫測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事實上 不可能하다. 大韓民國 選擧의 한 달은 朝鮮王朝 500年에 맞먹는 激變의 時期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果然 ‘抑鬱한 犧牲者’일까

    지난해 12월 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물보호재단에서 김건희 여사가 보호 받고 있는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2月 12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動物保護財團에서 김건희 女史가 保護 받고 있는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다. [뉴스1]

    그러니 우리는 暫時 現實 政治에서 한 발 물러나 이 事案을 人文學的으로 짚어보는 時間을 갖도록 하자. 김경율 委員의 發言에서 言及된 바로 그 사람, 루이 16世의 王妃,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으니 말이다. 斷頭臺에 올라 목숨을 잃은 앙투아네트를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할까. 奢侈와 亂雜한 私生活로 프랑스 革命에 불을 붙인 惡女? 아니면 革命을 正當化하기 위해 不當하게 罵倒당한 女性嫌惡의 被害者?

    유창선 時事評論家는 後者의 觀點을 擇하고 있는 듯하다. 23日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所聞들은 大部分 事實無根이거나 誇張된 것들이었다”며 김경율의 發言을 批判했다. 앙투아네트는 그저 ‘平凡한 女性’이며 王妃였는데, 革命의 必要에 依해 惡女가 ‘돼야 했다’는 것.



    有 評論家의 發言엔 脈絡이 있다. 18世紀 프랑스人들이 政治的 必要에 依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奢侈와 淫亂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렸듯 21世紀 韓國에서는 김건희 女史를 向한 卑劣한 攻擊이 판을 치고 있다고 指摘한 것이다. 그의 冊 ‘김건희 죽이기’ 64쪽의 한 文段을 引用해 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얘기는 團地 18世紀 프랑스에서만 存在했던 敍事는 아니다. 革命의 過程에서 民衆들의 憤怒를 助長하기 위해 王妃에 關한 온갖 怪所聞들을 퍼뜨렸듯이, 2020年代 韓國 政治에서도 國民들의 敵愾心을 鼓吹시키기 위한 ‘惡女 만들기’가 버젓이 反復됐다.”

    프랑스 革命 當時 아홉 살 아들과 近親相姦을 한다는 等 마리 앙투아네트를 겨냥한 惡所聞은 실로 凶測하기 짝이 없었다. 勿論 裁判 過程에서 드러났듯 그 모든 所聞에는 아무런 根據가 없었지만 ‘民衆의 뜻’을 받드는 陪審員은 아랑곳하지 않고 死刑을 宣告했다. 이와 같이 20代 大選 過程에서 김건희를 對象으로 한 女性嫌惡, 人身攻擊, 마타도어는 常識의 水準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열린共感TV를 비롯한 親(親)민주당 系列 유튜브와 支持者들은 金 女史가 술집에 나갔던 ‘쥴리’라며 根據 없는 所聞을 퍼뜨렸다.

    이는 分明히 옳지 않은 일이다. 特히 相對的으로 女性 人權 親和的이라고 認識되는 民主黨에서 露骨的 女性嫌惡 政治 運動을 하는 矛盾은 納得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몇 番을 强調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건희 죽이기’는 잘못된 일이다. 女性主義的 觀點 以前에 普遍的 人權의 次元에서 보더라도 納得하기 어려운 魔女사냥이자 人間사냥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對象으로 쏟아졌던, 오늘날뿐 아니라 當時 基準으로 보더라도 深刻했던 人身攻擊이 道德的 正當性을 지니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普遍的 人權 槪念이 成立하지도 않았던 18世紀의 野蠻이 21世紀의 大韓民國에서 되풀이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 點을 分明히 前提하고 狀況을 좀 더 人文學的 觀點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果然 ‘抑鬱한 犧牲者’였을까. 그에게 쏟아진 온갖 非難과 嫌惡와 詛呪가 極端的이었던 것은 分明한 事實이지만 앙투아네트를 ‘만들어진 惡女’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을 妥當하다고 볼 수 있을까.

    平民이라면 겪지 않았을 悲劇

    參考할 수 있는 가장 좋은 資料는 獨逸의 電氣 作家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薔薇’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年 태어나 1942年 世上을 떠난 獨逸語圈 最高의 傳記 作家 가운데 한 사람이다. 厖大한 資料를 涉獵한 後 人物의 內面으로 들어가 全知的 觀點에서 敍述해내는 筆力을 지닌 作家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薔薇’는 그런 그가 오스트리아의 文書 保管書에서 잠자고 있던 便紙들을 涉獵한 後 써낸 마리 앙투아네트에 關한 傳記小說이다. 國內에도 널리 알려진 이케다 리요코 作(作) 純情漫畫 ‘베르사이유의 薔薇’의 原作이기도 하다.

    유창선 評論家는 著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薔薇’의 한 대목을 引用해 다음과 같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만들어진 惡女’라는 解釋을 展開하고 있다.

    “眞實과 政治가 한 지붕 밑에 사는 일은 드문 法이고, 煽動을 目的으로 어떤 人物을 그릴 때에는 正義란 別로 期待할 수 없는 法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요틴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어떤 手段, 어떤 誹謗도 不辭했다. 모든 惡德, 모든 道德的 墮落, 온갖 種類의 諷刺가 各種 新聞, 팸플릿, 書籍을 통해서 마구 이 오스트리아의 倡夫에게로 轉嫁됐다.”(슈테판 츠바이크, ‘김건희 죽이기’ 63쪽에서 再引用)

    이러한 解釋論은 人間的이다. 非但 有 評論家뿐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에 對한 溫情的 視角을 품고 있는 많은 이들이 共有하는 觀點이기도 하다. 論議의 便宜를 위해 ‘犧牲羊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問題는 著書의 다른 部分을 보면 위와 같이 著述한 슈테판 츠바이크마저도 犧牲羊論을 全的으로 옳은 見解라고 보진 않았다는 것이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나라를 망친 墮落한 淫女가 아니었다. 하지만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革命에 對해 아무 責任을 질 수 없고 그럴 必要도 없는, 純粹한 歷史 속 被害者 또한 아니었음을 分明히 했다.

    루이 16世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왜 斷頭臺의 祭物이 돼야 했을까. 왜 그들은 부르봉 王家의 絶對的 權力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束手無策으로 革命의 물결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던 것일까. 츠바이크의 解釋에 따르면 그들의 問題는 單 하나다. ‘非凡한 時代’에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平凡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平民처럼 그저 平凡한 時代를 만났다면 結婚 生活도 잘 維持해갔을 것이고 그럭저럭 괜찮은 印象을 남겼으리라. 그러나 劇的으로 激昂된 時期에 맞서 自身도 內的 變化를 겪고 똑같이 高揚된 狀態가 돼 對處할 줄을 마리 앙투아네트도 루이도 몰랐다. 그들은 剛하고 英雄的인 삶을 살기보다는 品位 있게 죽을 줄밖에 몰랐다. 運命이 다가왔으나 그들은 主人이 돼 그 運命을 支配할 줄 몰랐다.”(‘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薔薇’, 116쪽)

    여기서 츠바이크가 말하는 ‘平凡함’이란 오늘날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薔薇’를 읽는 讀者들의 그것처럼 日常的이고 無害한 무언가가 아니다. 平民 위에 君臨하고 그들의 膏血을 빨아 사치스러운 生活을 하면서도 그에 對해 아무런 問題意識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앙시앙 레짐(프랑스革命 以前 옛 制度)의 一員인 特權層의 觀點에서 보는 平凡함일 뿐이다.

    이렇다보니 階級的 自意識과 正體性을 갖게 된 平民들의 아우聲이 빗발치고 있던 渦中에도 루이 16世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平凡한 王族’처럼 行動할 뿐이었다.

    “한 世紀의 거의 5分의 1에 該當하는 歲月 동안 프랑스 國王의 아내는 自身의 王國을 헤아려달라는 國民의 輿望에 單 한 番도 應한 적이 없었다.”(같은 冊, 119쪽)

    이들의 ‘平凡한 삶’李 國民의 膏血 위에 세워진 奢侈의 塔이었음은 勿論이다. 츠바이크는 그 點을 決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로코코의 女王’으로서 ‘근심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근심 없고, 浪費家들 中에서도 가장 浪費가 甚하고, 멋지고 愛嬌 있는 女子들 사이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멋쟁이이며 愛嬌 덩어리였다.”(같은 冊, 122쪽)

    “어린 女王이 하루 終日 걱정하는 것은 그저 무슨 옷을 입을지, 어떤 머리 模樣을 할지, 裝身具를 벗지 않고 옷을 갈아입을 수는 없을지 뿐이었다. 그것은 單純한 財政 浪費만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었다. 이른바 ‘門고리 權力’을 낳았다. 이처럼 옷이 重要했기 때문에 衣裳가 마드무아젤 베르탱이 王妃에게 宰相보다도 더 큰 威力을 行使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같은 冊, 123쪽)

    그들의 平凡한 삶은 平凡한 게 아니었다

    筆者는 이番 原稿를 쓰기 위해 오래 前 읽었던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薔薇’를 다시 보며 感歎했다. 이 冊이 犧牲羊論을 담고 있다고 漠然하게 記憶하고 있었긴 했지만 슈테판 츠바이크의 視角은 그보다 훨씬 더 冷徹하면서도 따스했기 때문이다.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世에게 無條件 溫情的 視角을 取하지 않는다. 앞서 잘 살펴보았듯 그들이 누렸던 平凡한 삶은 事實 全혀 平凡한 게 아니었으며, 그 莫大한 豐饒와 奢侈를 누리기 위해 百姓들이 苦生하는 舊體制的 秩序가 있었음을 決코 否定하지 않는다. 루이 16世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王冠의 무게를 더 빨리 認知하고 賢明한 統治者가 됐어야 한다는 歎息이 冊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츠바이크의 視角은 이러한 皮相的 次元에서 멈추지 않는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人間的 成熟이 冊이 傳達하는 眞짜 主題인 것이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英敏한 頭腦와 아름다운 몸가짐을 지닌, 좋은 統治者가 될 材木이었지만 그 어떤 것도 深刻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眞摯하게 배우려 들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本人에게 주어진 奢侈와 享樂의 거품 속에서 살았다. 歷史가 激變하면서 그 거품이 꺼지고 男便과 自身의 權力이 위태로워지자 그제야 精神을 차리고 女王 노릇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미 거세진 革命의 暴風 앞에서 그 努力은 부질없이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앙투아네트는) 革命이 그女를 이 좁디좁은 로코코의 舞臺에서 腕力으로 거세게 끌어내려 世界史라는 偉大한 悲劇의 舞臺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運命이 自己에게 英雄的 役割을 맡을 힘과 剛한 靈魂을 주었는데도, 지난 20年 동안 너무나 보잘것없는 侍女의 驛과 살롱 貴婦人의 役만을 해왔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이런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後였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王妃의 役을 맡는 바로 그 瞬間, 그女는 眞正한 모습을 보였다. 演劇이 眞摯한 現實로 바뀌어 사람들이 自己에게서 王冠을 빼앗을 때 비로소 마리 앙투아네트는 眞짜 王妃가 된 것이다.”(같은 冊, 118쪽)

    舊體制의 支配階級을 向한 批判的 視線을 거두지 않거니와,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歲의 悲劇은 結局 스스로 불러온 것임을 分明히 하고 있다는 點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薔薇’는 冷徹하다.

    그러면서도 슈테판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지닌 人間的 面貌를 오직 人間的 觀點에서 바라보고, 人格的으로 解釋하며, 다른 可能性도 있었음을 眞心으로 哀惜해 한다. 그의 視角이 冷徹하면서도 따스하다고, 矛盾된 말을 할 수 있는 理由가 바로 여기 있다. 두 가지 側面 가운데 하나만을 浮刻하는 것은 冊을 잘못 읽는 일일 수밖에 없다.

    絶對王政조차 大衆과 乖離되면 무너졌건만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홍익표 원내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김건희 특검’ 수용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4日 서울 龍山 大統領室 앞에서 洪翼杓 院內代表를 비롯한 더불어民主黨 議員들이 ‘김건희 特檢’ 受容 促求 記者會見을 하고 있다. [뉴스1]

    우리의 現實로 돌아와 보자. 김경율 委員의 ‘마리 앙투아네트 發言’을 어떻게 評價할 것인가. 23日 업로드 後 削除한 페이스북 揭示物에서 그는 自身의 發言 亦是 犧牲羊論的 觀點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는 心情을 吐露했다. 大衆의 感情이 얼마나 무섭고 뜨거운지 알아야 한다는 趣旨에서 擧論했을 뿐, 마리 앙투아네트를 向한 18世紀의 中傷謀略이나 김건희 女史를 向한 21世紀의 人格冒瀆 모두에 反對한다는 內容이었다.

    善意가 있더라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政治人으로서 좋은 評價를 받기 어렵다. 一介 會計士 或은 市民運動家가 아닌 政治人으로서 아무리 좋은 趣旨라 해도 誤解받기 쉬운 語彙를 쓰는 것은 避해야 할 일이다. 그에 따른 批判 或은 非難도 스스로 堪耐해야 마땅하다.

    評論家 觀點에서 보면 다르다.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키워드를 누군가의 政治的 失言으로 置簿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對해 더 깊게 苦悶하는 時間을 가져야 한다. 金 女史를 向한 女性嫌惡的 攻擊의 殘忍함을 批判하면서, 同時에 大衆으로부터 乖離된 權力이 스스로를 危機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에 對해서도 論議해야 할 必要가 있다는 소리다.

    宮闕에 틀어박힌 마리 앙투와네트와 루이 16世는 自身들이 危機에 빠진 줄도 몰랐다. 國王의 絶對權力을 威脅할 수 있는 市民社會의 成長을 看過하고 있던 것이다. 不過 數十 年 前만 해도 大衆의 意見이란 意味 없는 웅성거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王을 끌어내고 목을 치자는 성난 喊聲이 넘실거리게 됐다.

    우리의 現在 狀況도 크게 다르지 않다. 實物景氣는 北極 寒波처럼 얼어붙었고, 大統領 國政支持率은 30%臺에서 踏步하고 있다. 美國과 中國의 힘겨루기가 繼續되고 있고, 우크라이나 戰爭은 끝나지 않았으며, 예멘 叛軍 基地 砲擊을 始作으로 中東에서도 또 다른 戰爭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萬若 올해 11月 美國 大選에서 도널드 트럼프 前 美國 大統領이 再執權한다면 尹錫悅 大統領이 任期 初盤 功을 들였던 韓美關係는 처음부터 다시 論議해야 할 地境에 이를지도 모른다.

    國內 狀況을 놓고 보더라도 暗鬱하긴 마찬가지다. 法과 原則에 對한 國民의 信賴는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政治는 漸漸 더 極限 對立으로 向하고 있으며, 그 結果 低出生과 高齡化에 對한 對應 等 中長期的 觀點에서 推進돼야 할 改革이 全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要컨대 우리는 否定的 意味에서 ‘非凡한 時代’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狀況에 權力이 ‘平凡’하거나, 甚至於 國民으로부터 ‘平凡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否定的 評價를 받는다면 나라의 未來가 어찌 될까.

    “歷史를 잊은 民族에게 未來는 없다”는 말은 너무 자주 듣다 못해 食傷하게 느껴진다. 그 속에 담긴 反日 煽動의 脈絡을 생각하면 더욱 꺼림칙하다. 그러나 韓國史에 陷沒되지 않고, 全 世界로 눈을 넓히며, 人間을 立體的으로 바라보고 理解하는 휴머니즘的 觀點을 갖는다면, 歷史를 통해 現在의 敎訓을 얻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王朝 時代에서조차 大衆의 視角으로부터 徹底히 멀어진 權力은 그 代價를 悽絶하게 치러야 했건만 只今 우리는 絶對王政 時期가 아닌 民主主義, 大衆政治 時代를 살고 있다. 1932年, 只今으로부터 90年도 더 된 冊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薔薇’에서 슈테판 츠바이크가 목놓아 외친 警告에 한番쯤 귀를 기울여 봐야 하지 않을까.

    노정태
    ● 1983年 出生
    ● 高麗大 法學科 卒業, 서강대 大學院 哲學科 碩士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韓國語版 編輯長
    ● 著書 : ‘不良 政治’ ‘論客時代’ ‘탄탈로스의 神話’
    ● 曆書 : ‘칩 워’ ‘人間의 本質’ ‘地球를 위한다는 錯覺’ 外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