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旦 太祖 李成桂의 아버지
이자춘
(推尊 桓祖)의 옛 집으로 알려져 있는데 永興의 太祖
潛邸
[3]
, 卽 太祖가 태어났고 丸彫가 살았던 집은 濬源殿(濬源殿)이라고 따로 있었으며, 濬源殿 外에도 太祖가 태어났다고 傳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다 한 洞네(흑석리)에 있다 보니
그냥 뭉뚱그려서
永興本宮으로 統一한 것이라고 한다.
《永興本宮登錄》에는
英祖
1年(
1725年
) 4月 永興本宮 典祀廳을 重建하면서 옛 廳舍를 撤去할 때 大들보에서 該當 建物을 太祖 5年(
1396年
) 創建했으며 仁祖 10年(
1632年
) 重建했다는 묵署名이 나왔다고 한다.
광해군
以前부터 現地 住民들이 ‘申請(神廳)’이라고 부르면서 이곳에 와서 祭祀를 지내기도 했고, 尙宮
金介屎
가 해마다 와서
무당
을 불러다 굿을 했다고 한다(당연히
仁祖反正
以後 무당 祭祀는 廢止).
儒敎
를 國是로 했던 朝鮮 王朝의 創業主를 모신 祠堂에서 굿판이라고 하니 儒生들이 뒷목 잡을 일이기는 한데 이는 本宮이 가지고 있었던 特殊性과도 聯關이 있다.
本宮은 王을 祭祀하는 空間이기는 했지만 애初에 國家에서 規定한 祭祀 空間이었던
宗廟
와는 格이 달랐다. 本宮은 王의 個人 財産으로 置簿되어
禮曹
가 아닌
內需司
에서 王室로부터 土地와 奴婢를 받아 本宮을 管理했고, 本宮이 어떤 것이고 어떤 形式으로 祭祀를 지내야 한다에 對한 무슨 法的, 制度的 基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祭祀 形式에서도 儒敎儀禮에서 벗어난 形式이 많았던 것. 正祖 때에 本宮의 祭祀 儀禮를 整備한 記錄에 보면 咸興과 永興의 本宮에서는 別隊制나 別掃除, 朔望祭, 野黑帝 같은 旣存의 中國式 예제나 世宗 時代에 國俗에 맞게 整備된 예제에도 없는 特異한 祭祀가 많았는데, 元來부터 咸鏡道 現地에 傳해져 오던 土着 祭祀가 本宮 祭祀로 受容된 것으로 보인다.
또 永興의 '申請'에는 太祖와
신의왕후
의 委販이 奉安되었는데 이는 內需司와
咸興本宮
別車들이 議論해 決定한 것으로, 每달 初하루와 보름, 名節마다 지내는 定期 祭祀 外에도 다양한 土着祭祀를 지냈으며,
顯宗
6年(
1665年
) 重建한 뒤에 처음으로 ‘本宮’이라 불렀다.
肅宗
21年(
1695年
)에는
신덕왕후
까지 本宮에 추부(追附), 卽 追加로 祭祀를 지내게 되었는데,
甲戌換局
이듬해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點에서 '
廢位된 王妃
의 復權'이라는 象徵性을 노린 政治的 이벤트였다는 解釋이 있다.
[4]
正祖
16年(
1792年
)과 19年(
1795年
)에 咸興本宮과 永興本宮의 意識을 整備하고, 아울러 桓祖 이자춘을 永興本宮에 趨附했는데
[5]
공교롭게도 正祖 19年은 桓祖 이자춘의 8周甲이자
思悼世子
의 回甲, 그리고
혜경궁
의 주갑이 서로 겹치는
트리플
해였다. 正祖가 永興本宮에 李成桂의 아버지 丸彫를 모신 것도 太祖의 아버지 丸彫를 太祖의 祠堂에 함께 모신다는 儀禮를 통해 思悼世子의 名譽回復도 함께 노린 것이라는 解釋이 있다.
덤으로 丸彫의 자리에 思悼世子를 두고 그 아들인 正祖 自身은 太祖와 같은 位置가 된다
[6]
日帝强占期
에도 存在했고
8.15 光復
以後에도 남아있었지만
6.25 戰爭
當時 爆擊으로 불타서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