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는 70年代 後半 5年여 동안 獄中 生活을 하는 동안 수많은 書籍을 耽讀하면서 '生命思想'을 깨우쳤다고 한다. 裁判이 끝나고 冊이 들어오기 始作하자 김지하는 미친 듯이 冊을 읽어댔다고 한다. 禪佛敎, 東學, 生態學 等의 冊을 涉獵했는데, 人間과 삶의 進化의 本質을 理解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生態學에서 始作했으나 더 깊은 內面的 知識과 無意識的 智慧를 渴求하게 되었고 그때 接한 것이 禪佛敎 思想이었다. 元來 그의 宗敎는
天主敎
였는데, 獄中에서 禪佛敎에 크게 傾倒되었다. 아울러
東學
思想에 깊은 影響을 받게 되었다. 김지하는 禪佛敎 關聯 經典들을 읽으며 靈的인 깨달음을 얻어 갔다. 그리고 監獄에서 꽃과 풀을 보며 깨달음을 이어갔다. 저런 微物들도 生命이며 '無所不在(無所不在)'라 못 가는 곳 없고 없는 데가 없으며 봄이 되어서는 자라고 꽃까지 피우는데, 하물며 高等 生命인 人間의 生命은 더할나위 없이 所重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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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民族主義
와 反戰主義가 더해졌다.
出監 以後 김지하는 丈母인
박경리
先生의 도움으로
原州
에 居住하게 된다. 以後 80年代에 걸쳐 김지하는 여러 宗敎의 生命 尊重 思想을 混合하여 受容하고 生命思想을 傳播하기 위해 努力했다. 出所 以後 그는 天主敎, 禪佛敎,
圓佛敎
,
道敎
等 生命 尊重과 關聯된 各種 宗敎들을 涉獵해 갔다. 그의 關心은
증산도
와
환단고기
等에까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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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年代 後半에는 事實上
似而非 宗敎
로 여겨지고 있는
段월드
의 創始者 이승헌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 그러나 1999年에 이승헌의 內部非理를 接한 後 脫退하여 越州 前 曹溪宗 總務院長과 環境運動家 최열, 강대인 當時 크리스챤아카데미 副院長,
朴元淳
當時 참여연대 協同事務處長 等과 함께 '民族精神回復市民運動聯合'을 創設해 段월드에 對한 反對運動을 展開하기도 했다.
그는 生命思想과 關聯된 여러 宗敎들을 包括的으로 受容했는데 이것이 個別 宗敎들이 오히려 김지하를 못마땅해하고 그를 排斥하는 要因이 되기도 했다. 90年代 以後 그가 保守的 性向을 보이자 進步 陣營도 그가 拷問 後遺症으로 似而非 宗敎에 心醉하게 되었다고 非難하기 始作한다.
그러다가 1991年
朝鮮日報
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寄稿하면서 큰 波紋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以後 進步 陣營과 敵對 關係를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