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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芝河 - 나무위키

金芝河

最近 修正 時刻:
문화금관
鳶島
2022年
이름
金芝河
分野
文學

金芝河
金芝河 | Kim Chi-ha
31478 11186 4954
本名
김영일(金英一)
老傔(勞謙)
出生
원적
死亡
2022年 5月 8日 (享年 81歲)
國籍
職業
是認
學歷
配偶者
金榮珠 (1973年 ~ 2019年, 死別) [6] [A]
子女
아들 김원보, 김세희 [A]
宗敎

1 . 槪要 2 . 生涯
2.1 . 反獨裁 鬪爭 時節 2.2 . 生命思想 2.3 . 1991年 죽음의 굿판 칼럼
2.3.1 . 拷問 後遺症설 2.3.2 . 當事者들의 主張
2.4 . 末年 2.5 . 死亡
3 . 代表作

1. 槪要 [編輯]

大韓民國 의 詩人. 本名은 김영일로, 김지하는 地下(地下)에서 따온 筆名 이다. 처음 쓴 筆名은 性 없이 그냥 地下였는데, 하도 周邊人들이 이름 代身 불러대는 통에 姓을 붙이고 漢字까지 갈아버렸다고.

2. 生涯 [編輯]

1941年 2月 4日 全羅南道 木浦部 (現 木浦市 ) 산정동 1044番地에서 아버지 김맹모(金孟模)와 어머니 정금성(鄭琴星) 사이에서 외아들 로 태어났다. 木浦산정國民學校 卒業 後 木浦中學校 에 入學했으나 2學年 때이던 1954年 아버지를 따라 江原道 原州市 로 移住하여 원주중학교 2學年에 編入했다. 1956年 上京하여 배재고등학교 에 受驗을 쳤으나 落榜하여 中東高等學校 에 入學했고, 이때부터 文學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1959年 서울대학교 美術大學 美學과 (59學番)에 入學했다. [9]

2.1. 反獨裁 鬪爭 時節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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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年 4.19 革命 에 參加한 것을 契機로 繼續 學生運動을 했으며, 1961年 5.16 軍事政變 以後에는 警察의 手配를 避해 故鄕 木浦市 等地에서 港灣 勞動者, 鑛夫 等을 轉轉하며 逃避 生活을 이어갔다. 1964年 6月에는 '서울大學校 6.3 韓日屈辱會談反對 學生總聯合會' 所屬으로 6.3 抗爭 에 參與했다가 收監되어 4個月間 服役했고, 1966年 8月, 7年 6個月만에 서울대학교를 卒業했다.

1970年 抵抗詩 〈 오적 (五賊)〉을 發表하여 獨裁 에 抗拒하다가 政權의 눈 밖에 나서 筆禍 를 입었고, 그는 反共法 違反으로 서울拘置所에 收監되었다가 釋放되었다. 이 時期에 소리꾼 임진택이 談論時 '비어'의 첫部分인 '소리來歷'을 판소리化하기도 했다.

1971年 歌手 金敏基 와 함께 夜學 活動을 始作했다. 2年 後 김민기는 김지하의 金冠의 예수 에서 主여, 이제는 여기에 를 作曲했다.

1973年 4月 小說家 박경리 의 딸 金榮珠(金玲珠)와 結婚했다.

1974年 民靑學聯 事件에 連累되어 그해 全南 紅島 映畫撮影場에서 逮捕된 後 獄苦를 겪었으며 最終的으로 死刑 까지 言渡받았다가 1980年에 釋放되었다.

1975年 〈 타는 목마름으로 [10] [11] 가 發表되었다.

積極的으로 獨裁에 抵抗하는 行動하는 知識人 의 모습을 보였으며 金壽煥 樞機卿 亦是 이러한 모습을 대단하게 여기는 同時에 너무 熱血이 지나친 거 아니냐며 많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일로 인하여 노벨平和賞 노벨文學賞 受賞者에 推薦된 經歷도 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作家會議 로터스 特別賞(1975年 受賞), 브루노 크라이스키 人權賞, 정지용 文學賞, 萬海文學賞 까지 受賞했을 程度의 대단한 參與時人 利子 民衆詩人 이었다.

김지하의 詩는 初期 〈오적〉으로 대표되는 才氣 넘치는 諷刺 精神을 보여주는 詩篇과 監獄에서 民主主義와 自由에 對한 熱望을 아름답게 形象化한 中期의 詩들을 통해 우리 文學史에 큰 足跡으로 남아있다.

2.2. 生命思想 [編輯]

김지하는 70年代 後半 5年여 동안 獄中 生活을 하는 동안 수많은 書籍을 耽讀하면서 '生命思想'을 깨우쳤다고 한다. 裁判이 끝나고 冊이 들어오기 始作하자 김지하는 미친 듯이 冊을 읽어댔다고 한다. 禪佛敎, 東學, 生態學 等의 冊을 涉獵했는데, 人間과 삶의 進化의 本質을 理解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生態學에서 始作했으나 더 깊은 內面的 知識과 無意識的 智慧를 渴求하게 되었고 그때 接한 것이 禪佛敎 思想이었다. 元來 그의 宗敎는 天主敎 였는데, 獄中에서 禪佛敎에 크게 傾倒되었다. 아울러 東學 思想에 깊은 影響을 받게 되었다. 김지하는 禪佛敎 關聯 經典들을 읽으며 靈的인 깨달음을 얻어 갔다. 그리고 監獄에서 꽃과 풀을 보며 깨달음을 이어갔다. 저런 微物들도 生命이며 '無所不在(無所不在)'라 못 가는 곳 없고 없는 데가 없으며 봄이 되어서는 자라고 꽃까지 피우는데, 하물며 高等 生命인 人間의 生命은 더할나위 없이 所重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여기에 民族主義 와 反戰主義가 더해졌다.

出監 以後 김지하는 丈母인 박경리 先生의 도움으로 原州 에 居住하게 된다. 以後 80年代에 걸쳐 김지하는 여러 宗敎의 生命 尊重 思想을 混合하여 受容하고 生命思想을 傳播하기 위해 努力했다. 出所 以後 그는 天主敎, 禪佛敎, 圓佛敎 , 道敎 等 生命 尊重과 關聯된 各種 宗敎들을 涉獵해 갔다. 그의 關心은 증산도 환단고기 等에까지 미쳤다. [12] 1990年代 後半에는 事實上 似而非 宗敎 로 여겨지고 있는 段월드 의 創始者 이승헌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 그러나 1999年에 이승헌의 內部非理를 接한 後 脫退하여 越州 前 曹溪宗 總務院長과 環境運動家 최열, 강대인 當時 크리스챤아카데미 副院長, 朴元淳 當時 참여연대 協同事務處長 等과 함께 '民族精神回復市民運動聯合'을 創設해 段월드에 對한 反對運動을 展開하기도 했다.

그는 生命思想과 關聯된 여러 宗敎들을 包括的으로 受容했는데 이것이 個別 宗敎들이 오히려 김지하를 못마땅해하고 그를 排斥하는 要因이 되기도 했다. 90年代 以後 그가 保守的 性向을 보이자 進步 陣營도 그가 拷問 後遺症으로 似而非 宗敎에 心醉하게 되었다고 非難하기 始作한다.

그러다가 1991年 朝鮮日報 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寄稿하면서 큰 波紋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以後 進步 陣營과 敵對 關係를 이루게 된다.

2.3. 1991年 죽음의 굿판 칼럼 [編輯]

1991年 4月 명지대生 강경대 가 示威 中 戰警의 毆打로 死亡한 事件을 契機로 發生한 1991年 連鎖 焚身 波動 은 온 社會에 衝擊을 주고 있었다. 이에 김지하가 朝鮮日報 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寄稿한다. [13] 김지하는 生命主義 思想에서 接近하여, 목숨을 버리면서 하는 民主化 示威를 詛呪의 굿판에 比喩하였다. 이 칼럼에서 김지하는 "自殺은 傳染한다. 當身들은 只今 傳染을 부채질하고 있다. 烈士呼稱과 大規模 葬禮式으로 軟弱한 靈魂에 對해 끊임없이 죽음을 誘惑하는 暗示를 보내고 있다."면서 運動圈 勢力들이 連이은 自殺을 助長하고 있다고 攻擊했다. 甚至於 이 칼럼에는 學生들처럼 自身의 죽음을 강요당했던 自身의 經驗이 스며있다고 主張했다.

이 칼럼은 社會的으로 엄청난 後暴風을 불러왔다. 그동안 김지하를 鬪爭 同志로 여겨왔던 運動圈과 進步 陣營은 엄청난 衝擊을 받았고, 김지하가 그들을 不道德한 勢力으로 罵倒하며 軍部獨裁에 阿附한다고 激烈하게 反撥했다. 進步 性向 文人들의 團體였던 民族文學作家會議는 김지하를 除名했고, 進步陣營에선 김지하를 變節者, 背信者로 規定하고 모든 關係를 끊어버렸다. 大多數 運動圈 人士들, 進步 性向 文人들은 김지하와의 私的인 만남조차 拒否했다.

反面 政權과 保守右翼勢力은 이 칼럼을 大書特筆하면서 運動圈을 人命을 道具로 보는 不道德한 集團으로 罵倒했다. 여기에 西江大 總長 朴弘 루카 新婦 主思派 背後勢力설 을 主張하면서 波紋을 일으킨 狀況에서, 當時 窮地에 몰려있던 노태우 政權은 강기훈 遺書代筆 造作 事件 으로 單숨에 狀況을 反轉시켰다. 公安當局에 依해서 犯人으로 造作된 강기훈은 後날 最終 無罪 判決로 陋名을 벗지만, 그 當時에는 自殺 助長이라는 式의 言論 플레이를 통해 運動圈의 名譽가 失墜됐다. 노태우 政權은 정원식 밀가루 事件 等과 연계시켜 公安政局 을 圖謀했다. 以後 焚身 等 示威는 사그라들고 在野와 學生運動, 勞動運動은 急激하게 萎縮된다. 蘇聯 等 共産圈 崩壞도 여기에 한 몫했다.

한便 김지하는 인터뷰에서 오히려 運動圈 同志·後輩들이 칼럼의 意圖를 제대로 理解하지 않고 一方的으로 罵倒한다면서 精神病院 診療도 여러 次例 받았다고 말했다. #

2.3.1. 拷問 後遺症설 [編輯]

1991年 김지하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굿판 칼럼'으로 運動圈과 進步 陣營은 큰 衝擊을 받게 된다. 進步 陣營에서도 여러 意見이 갈렸다. 그를 變節者라고 극렬히 非難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가 70年代 民主化 鬪爭의 아이콘이었을 뿐만 아니라 保守 政權으로부터 어떠한 金錢的인 利益을 醉한 情況이 없기 때문에 變節者라고까지 罵倒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以後 김지하의 이런 급작스러운 變化에 對해 拷問 後遺症 을 앓고 있으며 精神이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說이 擡頭된다. 及其也는 너무 甚한 拷問으로 外貌까지 確然히 달라졌다는 主張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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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金芝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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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年 出監 後의 金芝河(40歲).

自己 아들이 大學 進學 問題에 對해 다른 말을 한 적이 있어 記憶이 오락가락하며 精神的으로 正常的인 狀態가 아니라는 主張도 나왔다. 이것 外에도 過去 自身이 썼던 自敍傳的 內容과 以後에 主張하는 自身의 經驗談이 一致하지 않는 點이 擧論되기도 했다.

2.3.2. 當事者들의 主張 [編輯]

夫人 김영주氏의 東亞日報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發言을 하였다.
"政權의 朴해야 豫想했지만 '民靑學聯' 事件이 터지면서 요상한 일이 벌어졌다. 金 詩人이 左右 兩便에서 迫害를 받은 것이다. 古代 社會에서 산 人間을 祭物로 바치듯 左派 一角에서 金 詩人을 朴正熙 政權이 죽이도록 誘導해 '民族의 祭物'로 바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츰 그 狀況을 認識한 어머니는 사위를 살리기 위해 政權을 刺戟하지 않으려고 조용하게 百方으로 뛰어다녔다. 男便은 어떤 意味에서는 丈母 德分에 살아남았다."
"左派의 色彩는 여럿이다. 純粹한 사람도 많지만 野心家도, 從北主義者도, 間諜도 있다. 돌아보면 民主化 過程에 惡(惡)도 寄與한 바가 있다. 온갖 勢力이 합쳐야 民主化가 可能했다. 民主化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때론 隱密하게, 때론 公開的으로 男便 속을 들쑤시고 마음에 傷處를 줬다. 釋放된 以後 20年 동안 12次例나 精神病院에 入院했다. 젊은이들의 焚身自殺이 이어진 1991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發表한 뒤엔 무슨 社會的 發言만 하면 못 잡아먹어 組織的으로 亂離를 쳤다. 그 背信感과 원통함이 오죽했겠나.
記事1 記事2

2018年 , 文壇 巨物 고은의 性醜聞 으로 시끄러운 渦中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 이 인터뷰에서 김지하는 고은 이 김지하의 丈母이기도 한 ''' 박경리 作家가 自身의 말을 拒絶했다는 理由로 "寡婦년 主題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이라고 卑下한 것을 獄中 矯導官을 통해 傳해들었다고 證言했다. 인터뷰에서는 고은의 그 말에 같은 술자리에 있었던 當時 運動圈 學生들의 思想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던 리영희 와, 文學界 巨物인 백낙청 두 名도 함께 낄낄댔다는 證言도 追加的으로 덧붙였다.

그러나 該當 主張은 이를 뒷받침할 錄取錄이나 交叉 檢證 證據가 없으며, 오직 證言만 있기 때문에 [14] 眞僞與否에 對한 判斷은 各自의 몫이다.

2.4. 末年 [編輯]

2001年 5月 <실천문학> 여름號에서 '죽음의 굿판' 發言에 對해서 10年만에 遺憾을 表明하였다.

2008年부터 圓光大學校 圓佛敎學科 夕座敎授로 있다가 2013年부터는 東國大學校 大學院 夕座敎授로 在任했다.

2012年 11月 26日 열린 時局講演會에서 새누리黨 朴槿惠 大統領 候補에 對한 支持 意思를 밝혔다. #

2013年 民靑學聯 事件에 對한 再審에서 無罪를 宣告받았다. 인터뷰에서 ' '이 必要하여 再審을 申請했다고 發言했다. # [15]

刑事補償 을 받은 것과는 別途로, 國家를 相對로 損害賠償 請求訴訟을 提起했다 . 2015年 5月, 15億 원의 賠償判決이 確定되었다.

그 밖에 文在寅 이나 安哲秀 , 리영희 , 백낙청 같은 人士들에 對한 原色的 非難 發言이 物議를 빚기도 했으나, 非難받은 人物 側에서 法的으로 問題를 提起하지는 않아 그냥 넘어갔다.

2014年 세월호 慘事 時期 金芝河 名義로 쓰여진 <金芝河 詩人의 歲月號 遺家族에 對한 날카로운 批判> 等 歲月號 特別法 非難글이 인터넷과 SNS에 流布됐으나, 實際로 金芝河 本人이 쓴 글이 아니다. 이에 金芝河 側은 2019年 關聯 揭示글 流布者나 團體에 法的對應을 하겠다고 밝혔다.

2018年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朴槿惠 前 大統領을 支持했던 것을 잘못된 判斷이었다고 하였고, 촛불集會 · 미투 運動 을 肯定的으로 보았다.

2019年 11月 25日 夫人 金榮珠 土地文化財團 理事長이 享年 73歲로 別世했다. [16]

2.5. 死亡 [編輯]

2022年 5月 8日 江原道 원주시에 位置한 自宅에서 別世 했다.

같은 해 10月 21日, 金冠文化勳章 이 追敍되었다.

3. 代表作 [編輯]

[1] 全羅南道 木浦市 산정동 [2] # [3] # [4] " [3報] '타는 목마름으로' 詩人 김지하 別世…享年 81歲 ' [5] 現 木浦산정初等學校 [6] 최보식, "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 金榮珠 土地文化館 館長 ", 「 朝鮮日報 」, 2011.2.28. [A] 7.1 7.2 서원일, " 金芝河 詩人 夫人 金榮珠 土地文化財團 理事長 別世 ", 「푸른韓國닷컴」, 2019.11.25. [9] 入學 當時 美術大學에 屬해있었으나 1年 後 박의현 敎授의 主導로 1960年에 美學科가 文理科大學 文學部로 復歸했다. 이 때문에 美學科에 在學 中인 學生들의 적지 않은 反撥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10] 이 詩는 노래로 만들어졌고, 안치환 이 부르면서 수많은 運動圈 勢力이 부르기도 했다. 特히 盧武鉉 前 大統領 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이 有名하다. [11] 다만 폴 엘뤼아르 의 '自由'와 그 形態가 너무 類似해서 剽竊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12] 이런 面貌는 1984年 刊行되어 1999年 出版된 思想紀行에 매우 仔細히 나와있다. 그리고 丈母 박경리 에게도 影響을 미쳤는지 〈 土地 〉 4部부터 登場한 해도사라는 人物이 강증산 을 言及하는 場面도 登場한다. 좋다 나쁘다에 對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13] 確認할 수는 없지만 後에 回顧하기를 조선일보쪽에서 보다 刺戟的으로 題目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 題目은 '젊은 벗들, 歷史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다고 한다. [14] 김지하가 矯導官을 통해 들었다고 밝혔지만, 該當 矯導官에게 이것이 事實인지에 對한 眞僞 與否 檢證 인터뷰를 試圖한 言論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김지하의 一方的인 主張에 지나지 않는다. [15] '五賊 筆禍 事件'에 對해서도 抗訴하여 再審을 請求했으나 法院이 2013年 5月 9日 棄却하였다. '再審 事由가 없는 反共法 違反 嫌疑의 有無罪를 새로 判斷할 수 없다'는 法理上의 限界가 그 理由이다. [16] 現在 理事長職은 次男이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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